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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5)] 새 시대의 사상적 뿌리 성리학 

제갈량 흠모한 신진학자 조준 국가 개혁의 신호탄을 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개혁과 변화의 정신 담은 성리학 바탕으로 혁명적 변혁 꾀한 신진 세력 등장…칩거하던 조준, 이성계에 발탁돼 전제와 민생 개혁안을 제시

사회 변혁에 대한 열망이 컸던 신진 학자들에게 성리학은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사상적 무기였다. 조선 건국의 제도적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을 쓴 정도전을 필두로 전제와 민생 개혁을 내세운 조준 등 신진 세력들은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 세력과 결합해 새 왕조 개창의 비전을 만들어 나갔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유동근 분), 정도전(조재현 분), 조준(전현 분)이 만나 개혁과 변화의 시대를 열기 위한 밀담을 나누고 있다. 조준은 최영의 요청을 거절하고 훗날 이성계를 선택했다./ 사진제공·KBS
이인임 노선의 부활이 저지되고 1388년 7월 조민수가 유배되자 혁명적 개혁안들이 제기됐다. 조선 건국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신진 성리학자들이었다. 성리학은 통상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공리공담이라고 알려져 있다. 경제·안보·행정·복지·토목공사 등 구체적인 국정 현안이나 제도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끝내 망국의 변을 당했다고 본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이 사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리학이 본래 사변적인 것만은 아니다. 공리공담은 더욱 아니다.

성리학이 탄생한 11세기 이래 송대(宋代)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혁신적 시대 중 하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 사상, 제도의 개혁도 송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일종의 문명 모델이었던 셈이다. “10세기, 당 말기에서 송 초기로 이행하는 시기는 중화 제국사에서 가장 뚜렷한 단절을 나타냈다. 유교 이념의 교육을 받고 치열한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사대부 계층이 중국의 전통을 다시 만들 계층으로 새로이 부상했다. 이들이 정치·이념·철학·문화·문학·예술·기술·과학 분야에서 이룬 성취와 더불어 일상 생활을 변화시킨 당시의 강한 경제력은 송 왕조가 얼마나 혁신적인 왕조였는지를 보여준다. 중국 역사상 사회 전체를 바꾸고 개혁하겠다는 중국 사람들의 의지가 이때만큼 성공적이고 강력하게 발휘된 때도 별로 없었다. 송의 혁신과 근대성의 여명을 예고한 ‘중국의 르네상스’였다고까지 평가하는 역사가들도 있다.”(디터 쿤, [하버드 중국사 송: 유교 원칙의 시대], 17쪽)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인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성리학을 한국사회를 장기적으로 변화시킨 혁명적 이념으로 이해했다.
송대의 혁신은 이후 동아시아 국가의 인간과 사회, 국가 전체에 대한 표준으로서 혁신을 위한 이론적 기초가 됐다. 조선 건국도 그에 바탕해 있다. 도이힐러(Martinar Deutchler) 교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 성리학이 도래함에 따라 사회 문제에 대해 포괄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대답하려는 하나의 이념이 부상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유례없는 정치적 논쟁을 자극했다. 성리학은 사회정치적 변혁에 명확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것이 제대로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고대 중국 성왕들의 사례로부터 찾았다. 더구나 성리학의 변혁에 대한 욕구는 그 실천자들을 행동으로 이끌었으며 사회적 변혁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요구했다.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 사회를 유학화하려는 변혁 프로그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11세기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후 그들의 프로그램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야심적이고 창조적인 개혁실험이었다.”(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도이힐러 교수의 저서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 1392년 조선건국 이후 약 250년에 걸쳐 한국이 점진적으로 유교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뤘다.
송대 성리학자들은 매우 사변적이었지만 동시에 실천적이었다. 토지와 조세개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호, 정이, 장재, 주자가 그랬다. 주자는, 정전제가 실제 존재했다고 믿었고 당의 균전제가 정전제에 가깝다고 보았다. 주자는 농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권농문(勸農文)]은 남송 시대 남강군(南康軍)과 장주(漳州)의 지사 때 수전 농법을 연구하고, 지주와 전호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검토해 바람직한 향촌사회를 이루려 한 것이다.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 역시 당대에 가장 개혁적이고 실천적이었다. 정도전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고려 말의 전제개혁에도 깊이 관여했고 조선 건국의 제도적 설계도로 [조선경국전]을 저술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경영하는 책’이란 뜻이다. 고려 말 이전에는 국가의 운영을 이렇게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검토한 저술이 없었다. 이색은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고 삼한을 통일한 뒤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관제도 답습하고 개혁하는 등 거듭 변해 왔지만, 관제를 하나의 책으로 정리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周官六翼序])고 했다. [조선경국전]은 정부의 제도와 직제, 운영 원리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저술이었다. 이 책은 원나라의 [경세대전]을 모방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급진파 개혁안의 집대성 '주관육익'


▎김지의 [주관육익]에 대한 이색의 서문. [주관육익]은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의 전범으로 여겨진다. / 사진제공·김영수
당시 신진 성리학자의 선두 격인 정몽주의 [신정률(新定律)] 편찬도 한 사례다. 고려 법전의 표준은 1346년 반포된 원의 [지정조격(至正條格)]이었다. 하지만 양국의 법률 현실이 달랐다. 또 고려의 법률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몽주는 고려율과 명의 [대명률(大明律)]을 비교, 참작해 1392년(공양왕 4년) 2월 새 법전을 완성했다.([포은선생문집] ‘本傳’) 이는 국가개조를 위한 정몽주의 청사진 중 일부였을 것이다.

이처럼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은 현실 개혁책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현실에 대한 여말선초 지식인들의 고민은 깊었다. 개혁론의 백화제방 시대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조선경국전]도 정도전 개인의 천재적 창작품이기 보다 시대의 산물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사실 김지의 [주관육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주관육익]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내용이 여러 도서에 산견돼 있다. 그런데 이색이 붙인 책 제목과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례(周禮)]의 육전 체제에 의거해 고려의 국가 제도를 깊이 고찰한 것이다. 그 내용은 “육방(六房)으로 대강을 삼고 각 직무를 세목으로 나누어 설명해 줌으로써 관직에 몸담고 있는 자들 모두가 자신의 직책을 준수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진력할 것을 생각하도록 하고, 만약 자신의 힘이 부족하면 힘껏 노력해서 보완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周官六翼序]) 이 책은 단순히 제도만이 아니라 고사·법령·예제·지리·물산 등 당시 고려의 국가 현실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국가개혁을 위한 기본 자료집 성격도 가진 것이다. 1388년 이후 조준의 개혁안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결국 [주관육익]은 단순한 종합 자료서라기 보다는 고려 말 조준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의 문제 의식을 반영하여 개혁 방향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 수록한 책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일종의 법전적 성격을 지향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육전 체제에 맞춰 국가 운영에 필요한 여러 자료를 수합하고 정리했던 것이다.”(김인호, [김지의 주관육익 편찬과 그 성격], 158쪽)

1388년 위화도회군 후 혁명적 개혁의 주역은 조준과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전면에 나서 개혁을 주도한 것은 대사헌 조준(1346~1405)이었다. 조준은 정도전보다 네 살 아래다. 소시에 두 사람은 별 교류가 없었고 뒤에 이성계의 휘하에서 하나가 됐다. 정도전은 이색, 정몽주 그룹에 속해 있었고 조준은 윤소종, 조인옥, 허금, 유원정, 정지, 백군녕과 어울렸다. 하지만 훗날 조준은 “신은 정도전·남은과 더불어 동공일체(同功一體)여서 처음에는 털끝만한 간격도 없었다”고 회상했다.([정종실록] 정종 1년 8월 3일) 윤소종, 조인옥, 유원정은 조선 개국공신이다. 윤소종의 조부는 충숙왕의 측신이자 공민왕대의 명신 윤택이다. 조인옥의 부친은 조돈이며 형은 조인벽이다. 조돈은 1356년(공민왕 5년) 반원정책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 회복에 큰 공을 세웠다. 조인벽은 이성계의 서모 소생 누이와 결혼했다. 윤소종과 조인옥이 위화도회군 직후 이성계를 만나 수습책을 진언한 것은 앞서 살펴봤다. 정지는 1383년(우왕 9년) 남해대첩의 명장이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안주도도원수로서 이성계의 우군 휘하에 속했다. 회군파였으나 뒤에 이색파에 동조해 제거됐다.

조준은 평양 조씨로 증조부는 그 유명한 조인규(趙仁規, 1237~1308)다. 조인규의 부친 조영(趙塋)은 금오위 별장이었다. 금오위는 개경의 경찰 부대로써 별장은 7품의 하급 무관이다. 가문이 한미했던 것이다. 당시는 원나라 지배 초기였다. 조인규는 3년간 두문불출 어학 공부에 매진한 끝에 몽고어와 중국어에 통달해 통역관으로 입신했다. 얼마나 잘했던지 원 세조 쿠빌라이가 말을 시켜보고는 “잘 대답했다. 고려 사람이 이처럼 몽고어를 잘하는데 어찌 꼭 강수형(康守衡)을 시켜 통역하게 하겠는가?”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강수형은 여몽 전쟁 중 포로였다가 원 조정에서 대고려 외교를 담당한 인물이다. 조인규는 또한 풍모가 아름답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위인전 격의 전기(傳記)를 섭렵했다고 한다. 심오한 교양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근엄한 언행과 수려한 풍의, 진세를 사는 지혜를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호방하고 걸출했던 조준의 풍모


▎조준의 증조부 조인규 시. 그는 몽골어 통역관에서 시작해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충선왕의 장인이 되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충렬왕의 평가를 보면 그는 단순한 통역관이 아니라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조인규는 일본 정벌 때 우리가 처한 형편을 천자께 잘 보고했다. 천자께서 과인을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으로 임명하고 또한 여러 신하에게 도원수·만호·천호의 금은 패를 내려준 것은 모두 그의 공이다.”([고려사] ‘조인규전’) 조인규는 원이 몽고식 의복과 변발을 강제하려고 하자(改土風事) 홀로 원에 들어가 고려의 입장을 잘 변호함으로써 이를 막았다. 또한 원의 직할지가 된 자비령 이북 동녕군을 고려 영토로 반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런 일은 이제현이나 이색, 정몽주 같은 국사(國士)라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인규는 단순한 외교관을 넘어 선 경국지재였다.

그의 딸이 충선왕 후비가 되자 조인규도 국구가 됐다. 충선왕은 그에게 인신으로서 최고 예우를 베풀도록 부왕 충렬왕에게 요청했다. “조인규는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국가의 원로니 조회 때 옥대를 띠고 일산을 쓴 채로 임금을 시종하도록 하며, 찬배(贊拜) 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칼을 찬 채로 전각에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하십시오. 그리고 대사가 있으면 첨의밀직(僉議密直) 한 명이 그의 집으로 가 자문을 받게 하되 만약 조인규 및 중찬(中贊) 최유엄(崔有渰)이 정한 사항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법을 위반한 것과 같이 논죄하소서.” 조인규의 네 아들도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죽음에 임해 그는 “내가 졸병으로 시작해 최고 관직에 이르렀고 이미 나이 일흔을 넘겼다”고 자신의 삶을 술회했다.

조준의 가문은 원 지배 초기의 대표적인 친원파 신흥가문이었다. 충선왕 즉위년에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인정됐으니 평양 조씨는 조인규 일대에 최고 가문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조준의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덕유(趙德裕)다. 그는 “청백을 스스로 지키고 호강(豪强)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영리를 도모하지 않았다고 한다.”([輿地圖書] 上) 조준의 형제는 여섯인데, 셋째 형이 조린(趙璘, ?~1368)이다. 그는 1363년(공민왕 12년) 제 2차 홍건적의 난 때 전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고, 응양군(鷹揚軍) 상호군에 올랐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로 응양군은 최상위 부대다. 왕을 호위하는 친위군이기 때문이다. 그 지휘관인 상호군은 군부전서(軍簿典書)를 겸해 반주(班主)로 불렸다. 최고위 군 지휘관인 셈이다. 그런데 조린은 두 차례나 신돈을 제거하려다 살해됐다.

조준의 바로 아래 동생은 조견(趙狷, 1351~1425)이다. 하지만 정몽주를 지지하고 형의 정치노선에 반대했다. 조준은 동생을 사랑했다. “성긴 비 오동잎에 떨어지고, 찬 서재는 밤 되어 적요한데, 서편 창 촛불 심지 누가 자르리(翦燭), 문득 형과 아우 멀어짐이 한스럽네.”([夜雨憶弟]) 비 오는 밤 고요한 서재에 홀로 앉아 동생과 밤새 정담을 나누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한 것이다. 촛불 심지를 자른다는 것은 촛불을 갈아가며 무릎을 맞대고 밤새워 정담을 나눈다는 뜻이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夜雨寄北])에서 온 말이다. 조견은 조선 개국공신에 책록됐다. 아우를 살리려는 조준의 독단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조견은 두류산, 청계산에 은거했다. 이성계가 호조전서에 명하고 부르자 “송산(松山)에서 고사리를 캐먹는 것이 소원이요 성인(聖人)의 백성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이름을 견(狷)으로, 자(字)를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나라가 망했는데 살아 있으니 개와 같고 또한 개조차 주인을 연모하는 의리가 있다는 뜻이었다.([국조인물고]) 형을 비난한 것이다.

조준의 형제는 모두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 강한 원칙주의자였다. 조준은 1371년(공민왕 20년) 27세 때 음보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세태로나 그의 문벌로나 매우 늦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준이 책을 끼고 덕수궁을 지나는데 공민왕이 보고 불러서 집안 내력을 물어본 다음 바로 보마배지유(寶馬陪指諭)에 소속시켰다.([태종실록]에는 步馬陪行首로 나온다.) 왕의 말을 관리하는 하급 장교로 보인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식 중 과거 합격자가 없다고 탄식하자 학문에 매진해 1374년(공민왕 23년) 30세 때 급제했다. 공민왕이 자제위를 시켜 후비들을 능욕케 하자 인도(人道)가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또한 왕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들과만 어울린다고 비판했다.

조준은 “어려서부터 기개가 빼어났으며(倜儻) 큰 뜻이 있었다(有大志)”고 한다. 글만 읽은 백면서생은 아니었던 것이다. 권근은 조준의 시에 대해 “기운이 웅혼하고 글은 빼어났으며 기교에 힘써 다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호방하고 걸출한 모습은 문인재사(文人才士)와 다른 점이 있었다.”([양촌집] ‘松堂趙政丞詩藁序’)고 평가했다. 그의 졸기에도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이 호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고 한다. 또한 “국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가 늠름하였으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에서 나왔다.” 임협(任俠)의 풍모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준이 가장 숭모한 인물은 제갈량이었다.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불같이 찌는 혹서에 연기 날 듯한데, 왕명 받들고 남방 2천리 떠났네. 왜적 멸하고 임금께 고할 날 있으리니, 닭소리에 일어나 출사표를 읽는다.”([송당집] ‘次尙州客舍東軒韻’) 그는 1382년 왜구와 싸우는 군대를 감찰하러 떠난 경상도 상주의 객사에서 새벽에 일어나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었다. 제갈량처럼 태평 세상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었다. “말 몰아 멀리 와서 홀로 누각 오르니, 풍진 세상 10년 시름했네. 제갈량의 태평세상 계책(開平策) 없음 한스러워, 푸른 풀 무성한 모래톱서 창 비껴 잡고(橫槊) 높이 읊조리네.”([송당집] ‘次陜州涵碧樓詩韻’) 같은 시기에 황강이 흐르는 합천 함벽루에서 지었다. ‘횡삭’은 횡삭부시(橫槊賦詩)로, 마상에서 창을 비껴들고 시를 짓는 것이다. 태평세상을 꿈꾸는 문무겸전의 호걸, 경세제민의 국사(國士), 그것이 조준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전제개혁 추진한 윤택의 영향을 받은 조준


▎조준의 벗 조인옥의 묘. 조인옥은 이성계의 자부 조인벽의 동생으로 위화도회군을 적극 도모했고 이후 윤소종과 더불어 수습책을 건의한 인물이다. 조준이 이성계에게 발탁돼 개혁을 총지휘하는 지위에 선 것도 조인옥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조준의 학문적 연원은 윤택(尹澤, 1289~1370)으로 어린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옛날 문정공(文貞公) 뵈었을 때는 어리디 어렸는데(小少時) 친히 가르침 받들고서는 옷깃을 단정히 여몄지.”([송당집] ‘尹待制紹宗慈氏挽詞’) 문정공 윤택은 조준이 평생의 벗(平生友)으로 부른 윤소종의 친조부다. 윤택의 본관은 무송(茂松, 전북 고창)으로 그의 가문은 무송의 호장이었다. 조부 윤해(1231~1307)가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과 문한사학(文翰司學)을 역임함으로써 비로소 중앙에 진출했다. 그는 충선왕대의 전제개혁을 추진한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를 역임했다. 성품이 강직해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어서 사람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윤택은 아버지를 세 살 때 여의고 고모부 윤선좌(尹宣佐)에게 학문을 배웠다. 윤선좌는 파평 윤씨 윤관의 7대손으로 충렬왕 대 장원급제했다. 1322년(충숙왕 9년), 그가 감찰집의였을 때 충선왕의 심복 권한공, 채홍철 등이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고려왕으로 삼고자 원 중서성에 올리는 상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4000여 명이 서명했다.([동국통감] 충숙왕 11년 동11월) 그러나 윤선좌는 “나는 우리 임금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신하로 임금을 참소하는 것은 개나 돼지도 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는 평생 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농담이나 가무를 하지 않았다. 노장형명(老莊刑名)의 서(書)도 깊이 연구했고 문장이 간결하고 명료해 표전(表箋)을 많이 작성했다. 소시에 윤택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윤해와 윤선좌는 모두 박학하고 청렴결백하며 근엄한 원칙주의자들이었다.

윤택은 이제현의 문생으로 1320년(충숙왕 7년) 수재과 1등으로 급제했다. 백문보, 이곡, 안보(安輔)가 동문이다. 32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했고 45세에도 겨우 9품직에 머물렀다. 1321~1325년 충숙왕은 심왕의 무고로 강제로 5년간 연경에 머물렀다. 왕인(王印)도 뺏기고 생사를 알 수 없던 때였다. 그때 윤택은 단신으로 연경에 찾아가 왕을 알현했다. 윤선좌와 같은 길을 따른 것이다. 이후 윤택은 충숙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훗날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을 자신의 후사로 부탁하기까지 했다. 뒤에 죽음에 임해서도 재차 당부하자, 윤택은 무릎을 꿇고 너무 심려하지 말라고 아뢰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공민왕은 즉위 후 윤택을 정중하게 예우하면서도 중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택은 충숙왕의 당부를 생각해 자기가 아는 바를 왕에게 일러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조준의 동생 조견의 묘. 조견은 형 조준의 정치노선에 반대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켰다. / 사진제공·김영수
윤택은 “글을 읽어 널리 통하였으며 특히 [좌씨춘추]에 뛰어났다.”([윤택전]) 조준이 사학에 능한 것도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윤택은 순정한 유학자였다. 정치에 지친 공민왕이 불교에 심취하자, “저는 오로지 공자의 도만 말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공민왕이 “한양에 도읍하면 36국이 조공한다”는 당대의 명승 보우(普愚)의 도참설에 따라 한양에 천도하고자 했다. 윤택은 반대했다. “과거 승려 묘청이 인종을 미혹시켜 나라가 거의 엎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교훈이 멀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사방에 변란이 일어나 병사를 훈련하고 기르는 데도 힘이 미치지 못하는데,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면 나라의 근본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도참이 아니라 병사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최승로의 [시무28조],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풍수지리, 비기도참설을 비판한 요점도 이것이다. 윤택은 그 사상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공민왕에게 [시무28조](上成宗書)를 강론하기도 했다.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장수를 참하다


▎제갈량의 초상화. 조준은 평소 태평한 세상을 위해 헌신한 제갈량의 이상을 흠모했다고 한다.
윤택과 조준을 이어주는 책이 있다.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대학연의(大學衍義)]다. 이 책도 공민왕에게 강론했다. 이 책은 당시 고려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중요성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리학의 제왕학을 대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진덕수는 주자와 같은 복건성 출신으로, 주자의 제자 첨체인(詹体仁)에게 배웠다. 주자의 재전 제자이자 성리학의 정통 계승자로서 성리학을 크게 확산시킨 학자로 평가된다. [대학연의]는 원·명·청 세 왕조 황가의 필독서였다. 조선왕조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연의] 이전에는 당 태종의 정치를 담은 [정관정요(貞觀政要)]가 제왕학을 대표했다. 그러나 주자는 당 태종을 맹렬히 비판했다. 왕도를 가장한 패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의 마음은 한 생각도 인욕(人欲)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곧 인을 가장하고 의를 빌려(假仁借義) 그 사사로움을 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연의]는 당 태종의 정치에 대한 성리학의 대안인 셈이다.

이 책은 고려 말에 유입되었다. 이성계도 군중에서 이 책을 읽었다. “태조는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비록 군중에 있더라도 매양 창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儒士) 유경(劉敬) 등을 인접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였으며, 더욱이 진덕수의 [대학연의] 보기를 좋아해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히 세상의 도의를 만회할 뜻을 가졌었다.”([태조실록] ‘총서’)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바꿀 꿈을 꿨다는 것이다. 유경은 이색의 문인이다. 그런데 말 위에서 크고 말 위에서 입신한 이성계가 과연 이 책을 읽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기사는 조선의 건국 이념이 어디에 뿌리를 두었는지 정확히 알려 준다. 조준도 같은 이유로 이 책을 태종 이방원에게 권했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조준의 집을 지났는데 조준이 중당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대학연의]를 드리고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알고 받았다.”([태종실록] 5년 6월 27일)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최승로, 김부식의 사상적 계보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윤택은 고려 유학사상의 견실한 계승자다. [대학연의]의 가치를 그처럼 이른 시기에 안 것을 보면,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을 법하다. 더욱이 이제현보다 두 살 아래로 동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윤택은 한국 성리학의 계보에 자리가 없다. 조준도 이색 문하의 정몽주나 정도전 같은 정통 성리학자가 아니었다. 이색의 문인들은 1367년(공민왕 16년)부터 성균관에 결집해 각별한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다. 그런데 동년배인 조준은 그들과 전혀 교유가 없었다. 조준과 성리학을 잇는 유일한 끈은 벗 윤소종이다. 윤소종은 이색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에 정통했고 이단을 배척하는 데 매우 힘을 기울였다.” ([태조실록] 2년 9월 17일, 윤소종 졸기) 하지만 조준과 성리학을 공유하지는 않은 듯하다.


▎남송의 명장 악비가 쓴 제갈량의 출사표.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하면서 촉한 2대 황제 유선에게 올린 글. 충신의 우국충정을 담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조준은 윤선좌, 윤택의 학문과 사상, 기개를 이었다. 윤택도 고명한 학자이기에 앞서 경세의 정치가였다. 그는 북송 인종대의 명상이자 개혁가인 범중엄(989~1052)을 숭모했다. 윤택은 범문정공(范文正公)이 말한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는 글귀를 늘 외우면서 ‘대장부가 어찌 용렬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라고 다짐했다. 조준도 늘 천하를 근심하고 백성의 삶을 연민했다. “공관은 황량하여 촌가와 같고, 잎 지는 관산의 길 정녕 아득하네. 누가 민생을 이 지경에 닿게 했나. 술잔 쥐고 나도 몰래 눈물 줄줄 흘리누나.”([송당집] ‘題若木縣客舍’) 38세 때 경상도체복사로 갔을 때의 시다. 약목현은 현재 경북 칠곡군 약목면이다. 권근은 조준의 시에 “우국애민과 어려움에서 구하고 물에서 건져주려는 뜻(亨屯濟溺之意)이 사이사이 거듭 나타나니, 그 평생에 가진 뜻과 기른 기운을 이 시만 읽어도 알 수 있다”([양촌집] ‘松堂趙政丞詩藁序’)고 평가했다.

제갈량이 읍참마속으로 유명한 것처럼 조준 역시 원칙에 엄했다. 1382년(우왕 8년), 병마도통사 최영이 그 점을 높이 사 전법판서 조준을 추천해 체복사로 삼았다. 38세 때였다. 체복사는 감군(監軍)으로 왕명을 띠고 지방의 장군과 수령의 군무(軍務)를 감찰한다. 6월 12일, 왕명을 받은 그는 역마를 타고 급히 달려 적등도(赤等渡)에 도착해 잠시 쉬면서 시 한수를 지었다. “찌는 유월 다급한데 길은 삼천리, 들 나루 사람 없어 홀로 배에 오르네. 채궐(採蕨)과 출사(出師)에 누가 계책 얻었나. 적등루 밑으로 하늘 같은 물 흐르네.”([송당집]) 적등도는 금강 본류의 적등진(赤等津)이다. 옥천과 영동 중간의 나루로서 영남과 호서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다. 그 나루 옆 적등루에 올라 필승의 계책을 생각한 것이다. ‘채궐’은 [시경] ‘채미(採薇)’편이고 ‘출사’는 제갈량의 [출사표]로 모두 군사에 관한 내용이다. 경상도에 내려간 그는 왜구와의 전투를 회피한 도순문사 이거인을 문죄하고, 병마사 유익환(兪益桓)을 참수했다. 패전을 해도 크게 문책하지 않는 게 당시 고려 정부의 습속이었다. 하지만 조준은 법대로 한 것이다. 이거인과 장군들이 벌벌 떨면서 “차라리 적에게 죽을지언정 조공(趙公)의 위세를 거슬려서는 안 된다” 하고는 모두 힘껏 싸워 승전보를 올렸다. 그러나 조준은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 우왕이 또 체복사에 임명하자 조준은 80세의 노모를 들어 사양했다. 거듭 명하자 처벌의 전권을 요구했다. 이를 두려워한 장군의 족당들이 반대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운 것을 안 것이다.

개혁 상소 올려 특권층에 선전포고


▎황강이 내려다보이는 합천 함벽루. 1382년 조준은 경상도체복사로서 왜구와 전투를 감찰하기 위해 경상도에 내려왔을 때 이 누각에 올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시를 지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그 뒤 4년간 두문불출하면서 경전과 사서(史書)만 읽었다. 조준은 시국에 실망해 정치를 떠나 자족적 삶을 살려고 했던 듯하다. 칩거기에 그의 마음은 편안했다. “마음 동요 없으니까 몸 또한 편안하니 이 모든 것 영리에는 상관하지 않아서 지.”([송당집] ‘次宮詞夜直韻’) 1387년(우왕 13년), 42세 때였다. 하지만 또 다른 시를 보면 속마음은 미칠 듯했다. “세상에 포숙(鮑叔) 없으니 나를 알아줄 이 있나, 미친 듯한 작태(狂態)로 항상 술로 지내네.”([송당집] ‘次野堂韻’) 흉중에 품은 뜻이 큰 만큼 좌절감도 컸다. 1387년 7월 어느 날 밤, 그는 홀로 앉아 삶의 방향을 놓고 고뇌했다. “칠월이라 봉산(蓬山)에 비가 내리고, 높은 오동 한 잎 지는 가을인데, 나설지 숨을 지(行藏) 정말 결단하지 못한 채 홀로 앉아 있자니 뜻은 아득하기만.”([송당집] ‘丁卯七月夜坐’) 같은 해 8월 18일 깊어가는 가을, 술을 들고 봉산에 오른 조준은 멀리 해와 하늘을 우러르고 지는 낙엽을 보며 노래를 부르고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뜻을 이룰 주군을 평생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해와 달은 새가 날듯 저 멀리 가고, 변방에선 낙엽 지는 바람이 부네. 높이 노래하며 옷깃 가득 눈물지으니, 아름다운 사람을 내 평생 만나지 못 하겠구나.”([송당집] ‘丁卯八月十八日登蓬山’)

그런데 1388년 무진정변이 발생했다. 최영은 모친의 상중이던 조준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불렀다. 뜻밖에도 조준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가 그를 불렀다. “무진년 여름에 최영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칠 때에, 우리 태상왕이 대의를 들어 회군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쌓인 폐단을 크게 개혁하여 모든 정치를 일신하려고 하였다. 조준이 중망(重望)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으시고, 불러서 더불어 일을 의논하고는 크게 기뻐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발탁하시고, 크고 작은 일 없이 모두 물어서 하니, 조준이 감격해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다.”([태종실록] 5년 6월 27일) 이를 보면 조준이 최영이 아니라 이성계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조인옥의 강력한 권유도 있었을 것이다.

최영은 진정한 충신이자 애국자였다. 하지만 그는 시대정신에 어두웠다. 우왕대에 이인임을 지지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1374년 공민왕 사후 대외정책 변동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쟁에서 최영은 이인임에 반대한 박상충과 전녹생을 혹심하게 고문했다. 이 훌륭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모두 유배 길에 죽었다. 고려 말의 유일한 역사적 대안은 이들이었다. 그 비전에 무지했기 때문에 최영의 충성심과 애국심은 오히려 역사의 반동에 기여했다. 그 반면 이성계는 정몽주, 정도전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이성계 역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최영은 전중에서도 시를 지었지만 이성계가 시를 지은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성계는 시대와 인물에 대한 센스가 예민했다. 조준을 단 한 번 보고 즉시 그 기량을 알았을 뿐 아니라 중책에 발탁해 대소사를 전임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382년 경상도체복사의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던 조준은 이곳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충북 옥천과 영동의 중간에 위치한 적등진 지도. / 사진제공·김영수
조준의 선택은 옳았다. 자신의 꿈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말년에 그는 이성계와의 인연을 회고했다. “신은 중간에 비운(否運)을 당해 장차 목숨을 기약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태상께서 한 번 보시고 구면같이 여겨 격의 없이 대접하였습니다. 신을 모친 상중에 발탁해 대사헌에 명하시니, 신이 이에 감격하여 알면 말하지 않는 바가 없었고, 태상께서 널리 포용하여 말하면 좇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감연히 분발하여 정성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해서, 공도를 밝게 펴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였습니다. (…) 태상께서 저를 살리시고 귀하게 하시어, 난익지덕(卵翼之德, 품어주는 덕)이 하늘에 닿고 땅에 서립니다. 말을 하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정종실록] 1년 8월 3일) 태종 이방원은 “이씨가 개국한 공은 오로지 조준과 남은에게 있다”고 까지 말했다.([태종실록] 3년 6월 5일) 세상과 백성을 구하는 게 조준의 대망이었다. 조준의 삶을 최종 평가한 ‘졸기(卒記)’를 보자. 위화도회군 뒤 “나라의 법을 세우고 기강을 바로잡고(立經陳紀)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興利除害), 이 백성으로 하여금 끓는 물과 뜨거운 불(湯火) 가운데서 나와 즐겁게 사는 마음(樂生之心)을 품게 한 것은 조준의 힘이 퍽 많았다.”([태종실록] 5년 6월l 27일) 정치가로서 이보다 위대한 공업은 없을 것이다.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1388년 7월, 창왕의 즉위 직후 조준은 장문의 개혁 상소문을 올렸다. 초미의 문제는 전제와 지방정치의 개혁으로 민생과 직결된 문제들이었다. 개혁파들은 그 두 문제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생각했다. 그것은 혁명적 개혁의 시작이자 특권 계급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06호 (20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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