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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17)] ‘버드나무’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중국 한시에서도 가장 많이 활용됐던 친근한 소재… 돈 들이지 않고도 정성 전할 수 있었던 마음의 선물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버드나무는 매우 흔한 나무 중 하나다. 유(柳)·양류(楊柳)·수양(垂楊)·양(楊) 등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물기가 있는 땅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봄이 되면 창 밖 들판 쪽으로 푸른빛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버드나무다. 집 뒤쪽은 제법 넓은 밭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야산이 나지막이 연이어 있다.

산의 초목들이 겨울을 나느라 황량한 모습으로 서 있을 때 들판 한가운데 버드나무는 일찌감치 물을 뽑아 올려 푸른빛 잎사귀를 피워내기 위해 애를 쓴다. 버드나무에 눈길이 가는 것은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그 자태 때문만은 아니다. 혹독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온 겨울을 견디기에도 가녀린 가지들이 힘에 부쳤을 터인데 어떤 것보다 먼저 봄빛을 띠는 품새는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수양버들이 아니라 물버들이라서 바람에 살랑거리는 멋은 좀 떨어진다. 그렇지만 아무 가지나 뚝 꺾어서 땅에 꽂으면 원래 그 자리에 자라고 있었던 것처럼 땅 속의 물을 끌어올려 잎을 피우고 가지를 뽑아낸다. 그 생명력이 참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라서 그런지 옛 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버드나무다. 판푸준(潘富俊)의 [당시식물도감(唐詩植物圖鑑)]에 의하면 중국 한시에서 소재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나무가 버드나무라고 했다. 유(柳)·양류(楊柳)·수양(垂楊)·양(楊) 등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물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수양제(隋煬帝)가 엄청난 국고를 투입해 운하를 파고, 운하 주변 제방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는 제방의 수류(垂柳)에 양(楊)이라는 성을 하사했는데 이후로 ‘수양(垂楊)’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설화가 전하는 걸 보면, 명칭이나 어원은 아마 설명하기 힘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묏버들에 담은 기생 홍낭의 사랑


▎단원 김홍도 작 ‘마상청앵(馬上聽鶯)’.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는 뜻으로 무르익은 봄기운을 이기지 못 해 문득 말에 올라탔다가 버드나무 위 꾀꼬리 한 쌍이 화답하며 노니는 장면에 넋을 빼앗긴 선비의 모습을 정밀한 사생(寫生)으로 담았다.
조선 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 중의 한 사람인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과 기생 홍낭(洪娘) 사이의 애틋한 사연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최경창은 1568년(선조1) 문과에 급제한 뒤 선조의 신임에 힘입어 순조롭게 승진을 하면서 관직 생활을 한다.

그는 예조와 병조의 원외랑을 지내다가 1575년(선조8) 사간원 정언으로 발령이 났다가 이듬해 영광군수로 좌천되자 사직했다. 1년쯤 뒤에 복직했는데 1582년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아 조정에서 비판이 이어졌고, 결국 그의 벼슬을 성균관직강으로 바꾼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데다 한양으로 가는 도중 결국 객관에서 세상을 떠난다.

남학명(南鶴鳴)의 문집인 [회은집(晦隱集)]에는 최경창이 홍낭에게 주는 시의 서문(崔孤竹贈洪娘詩序)을 인용해 두 사람의 내력을 기록해 놓았다. 지금 전하는 최경창의 [고죽유고]에는 없는 글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남학명은 다른 책에서 이 글을 보고 기록해 둔 것으로 보인다.

1573년 최경창은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했는데 홍낭은 그를 따라서 함께 군막(軍幕)에 거처했다. 이듬해인 1574년 봄 최경창은 한양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홍낭은 쌍성(雙城)까지 따라와서 이별했다. 그녀가 혼자 몸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렀는데 마침 날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래를 지어서 최경창에게 보낸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홍낭의 시조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이 작품은 현재 ‘번방곡(飜方曲)’이라는 제목의 한시로 번역돼 [고죽유고]에 수록돼 있다. 따라갈 수 없는 처지라 버드나무 가지를 대신 전해주면서 밤비에 새 잎이 나면 나라고 생각해 달라고 했다.

이별의 정표로 널리 사용되는 버드나무 가지를 소재로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잘 담은 작품이다. 시조를 한 편 지어서 쓰고 그 안에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곱게 넣어서 보내는 그날 밤, 홍낭의 심사를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날은 저물고비는 내리는 함관령 객관에서 혼자 최경창을 그리는 마음이 시와 버드나무 가지에 담뿍 담겨 있는 듯하다.

1575년 최경창은 병으로 아주 고생을 한다. 그 소식을 들은 홍낭은 즉시 한양으로 출발한다. 7일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서 한양에 도착했는데 마침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겨서 관청 소속 기생이었던 홍낭은 함경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홍낭에게 지어준 최경창의 한시 작품이 ‘증별(贈別)’이라는 제목으로 2수가 문집에 수록돼 있다.

이 내력을 기록으로 남긴 남학명이 최경창의 후손에게 들었다는 말에 의하면 최경창이 세상을 떠난 후 홍낭은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를 스스로 훼손한 뒤 경기도 파주에 있는 묘소로 와서 시묘(侍墓)살이를 했다고 한다.

또한 임진란이 발발했을 때도 최경창의 문집 원고를 잘 챙겨 전쟁통에 불타는 화를 면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홍낭은 죽어서 최경창의 묘소 아래에 묻히게 됐다는 것이다. 홍낭의 애절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삼 버드나무의 푸른빛이 눈에 삼삼해졌다.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이별의 증표로 삼는 것은 중세 동아시아 문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비유다. 당나라 때는 장안을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기 위해 성 밖까지 나가는 일이 많았다. 술을 가지고 가서 헤어지기 전에 한잔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도 했다.

이런 행사를 가장 많이 했던 곳은 바로 장안성의 동쪽에 있던 파교( 橋)다. 이곳은 겨울이 완전히 가기도 전에 매화가 많이 피어서 봄을 찾는 지식인들이 한겨울에도 찾는 곳이기도 했지만, 전송하는 장소로도 애용됐다. 파교에서 사람들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삼보황도(三輔黃圖)]의 기록에 의하면 이런 풍습은 이미 한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절류(折柳)’ 혹은 ‘절양류(折楊柳)’로 표현되는 이 말은 악부(樂府)의 중요한 계열을 이룰 정도로 보편적인 표현이다.

우리 고전문학에서는 이 작품과 관련해 많이 인용되는 것은 왕유(王維)의 명편(名便)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다. 전별을 하는 술자리에서 노래로 널리 불렸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앞부분의 구절 “위성 아침비 가벼운 먼지 적시니, 객사의 푸르고 푸른 버드나무 빛이 새로워라(渭城朝雨輕塵, 客舍靑靑柳色新)” 하는 부분은 버드나무의 푸른빛 안에 이별의 슬픔이 가득한 느낌을 준다. 춘향이가 이도령을 이별할 때도 이 작품이 인용됐고, 조선 후기 풍류방에서 기생들이 이 작품을 시조로 번안(飜案)해 무수히 노래한 바 있다.

이별을 하는 자리에서 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줬을까. 이것은 선물의 일종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관습적으로 주었을까. 선물도 시대적 의미가 착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공간적 상징을 가지는 것도 납득할 만한 일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시대에 따라 혹은 지역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더러 목격한다. 그런 점에서 버드나무 가지는 선물의 역할을 했을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관습적 행위처럼 행해지기도 했다.

이별의 현장에도 ‘단골손님’으로 등장


▎평양 옥류관(玉流館)에서 내려다본 대동강. 관광선(船)이 줄지어 서 있는 건너편의 버드나무군(群)이 한가로워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 후기 문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흥미로운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것에 대해 ‘절류증행(折柳贈行)’([성호사설] 권9)이라는 글로 생각을 남겼다.

버드나무를 꺾어서 길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예절이지만 그 의미를 알지는 못 한다고 전제한 뒤 자신의 생각을 진술한다. 길을 떠나는 사람을 전송할 때는 누구나 선물을 증정한다. 그렇지만 가난한 선비 입장에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고 형편상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선물을 하지 않으면 이는 예에 어긋나니 고민이 된다. 이 상황에서 시냇가 다리 옆에 피어나는 버드나무 가지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므로, 나뭇가지를 꺾어서 증여함으로써 자신의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 선물의 내용은 정말 보잘것없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만은 어느 선물 못지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버드나무 가지야말로 돈을 들이지 않고도 정성을 전달할 수 있는 일이니 그 뜻이 참으로 간절하다고 했다.

이익은 몇 사람의 예를 들기도 한다. 오나라 계찰(季札)이 정나라 자산(子産)을 만난 뒤 호대(縞帶)를 선물하자 자산은 저의(紵衣)로 답례를 했다. ‘호’와 ‘저’는 서로 다른 비단의 종류를 뜻하는 글자다. 오나라에서는 호를 귀하게 여기고 정나라에서는 저를 귀하게 여긴다. 자기 나라에서 귀하게 여기는 물건으로 상대방에게 선물을 했으니, 이것은 경제적인 이득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에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선물은 경제적 이익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익은 굳게 믿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보면 선비란 모름지기 재물만을 폐백으로 삼지 않는다. 마음을 담을 수만 있다면 그 물건이 무엇이든 선물로 선택하는 것에 특별히 문제는 없다. 버드나무 가지가 비록 강가에 흔히 자라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거기에 담긴 마음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선물로서 충분하다.

버드나무가 많은 곳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평양이다. 근대 이전까지 대동강은 풍류재사들의 유람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평양은 금강산 유람과 함께 풍류남아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기를 소망했던 곳이다. 술과 음악과 기생들의 노랫소리와 호탕한 뱃놀이와 명승 탐방 등 놀이의 모든 것이 모여 있던 곳이니 얼마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었겠는가.

대동강은 풍류가 넘쳐나는 곳이라 인생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소리가 드높기도 했지만, 늘 이별의 눈물이 넘치는 곳이기도 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인생이라지만 흥진비래(興盡悲來)도 역시 인생의 한 모습이다. 바로 이 순간 대동강변에 일렁이는 버드나무 가지는 훌륭한 이별의 징표가 된다.

지금도 평양의 모습을 전하는 사진을 보면 대동강변으로 줄지어 있는 버드나무들이 보인다. 그만큼 이곳의 버드나무는 천년이 넘도록 수많은 재자가인(才子佳人)들의 이별과 눈물을 보면서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평양의 다른 이름을 ‘유경(柳京)’이라고도 했다. 북한이 평양에서 운영하고 있는 유경호텔도 바로 거기서 온 이름일 것이다.

버드나무가 많은 평양의 이미지는 이미 고려시대의 글에서도 보이는 것을 보면 정말 오래된 유래를 가지고 있다. 고려 후기 문인인 최자(崔滋)가 지은 ‘삼도부(三都賦)’에서도 대동강을 노래하면서 “대동강 양쪽 언덕의 수양버들은 온종일 바람에 춤을 춘다”(兩岸垂楊 終日舞風, 양안수양 종일무풍)라고 했다.

무사귀환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조선시대 명기(名妓) 홍랑의 묘. 그녀는 고죽 최경창을 사모해 버드나무 가지를 소재로 한 애틋한 시를 남겼다.
중국 한문학의 전통이라고는 하지만, 왜 이렇게 버드나무를 이별의 증표로 삼았을까. 기록으로 보면 한(漢)나라 시기에는 절류 풍습이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길 떠나는 사람을 성 밖에서 전송하면서 길가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선물하는 것은, 앞서 이익이 말한 의도처럼 ‘예경정의중(禮輕情意重)’, 즉 예의는 가볍지만 마음은 정중하고 무겁게 한다는 점을 뜻한다고 한다. 이러한 풍속은 지식인들의 격조 높은 행동으로 자리 잡았다.

버드나무를 선택한 까닭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버드나무를 뜻하는 ‘류(柳)’가 ‘머무른다’는 뜻의 ‘류(留)’와 발음이 같아서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전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버드나무는 굉장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땅에 꽂으면 즉시 뿌리를 내리고 왕성하게 자란다. 이 때문에 길을 떠나는 사람이 어느 곳에 가든지 잘 적응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여행을 할 뿐 아니라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게다가 버드나무 가지는 악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혔던 책 중에 북위(北魏) 때의 가사협(賈思)이 지은 [제민요술(齊民要術)]이 있다. 이 책의 ‘종류(種柳)’ 대목에는 정월 초하루 아침에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방문 위에 걸어놓으면 한 해 동안 온갖 귀신이 침입하지 못한다고 썼다. 이렇게 보면 버드나무를 통해서 길 떠나는 사람의 건강과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셈이 된다.

또 하나의 풍속이 전하고 있다. 이별하는 사람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그냥 건네주기도 하지만, 그것을 둥글게 말아서 마치 반지나 팔찌처럼 만들어서 주기도 한다. 이것은 ‘둥글다, 반지’ 등을 뜻하는 한자어 ‘환(環)’이 ‘돌아오다’는 뜻의 한자어 ‘환(還)’과 발음이 같아서, 가는 즉시 돌아오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어느 쪽을 의미하든 세월이 흐르면서 이 풍속은 하나의 관습적 행위로 굳어지면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증표가 됐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많은 시문에 소재로 등장해서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806호 (20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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