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27)] 조선에 뿌리내린 명나라 장수 모명(慕明) 두사충 

오랑캐가 다스릴 조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임진왜란 끝날 즈음 명나라 국운 기울자 조선에 귀화...전시에는 주둔지 선정, 평시에는 조선 풍수지리서 [감여요람] 저술

▎두사충의 11대손 두진국씨가 모명재 앞뜰에 세워진 신도비의 비문을 가리키고 있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판문점선언이 발표되면서 이산가족은 재회를 기다리게 됐다. 이산은 가족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 문중은 남북의 종친이 하나가 돼 후손을 확인하고 100년 공백이 생긴 족보를 채우고 싶어 한다.

한반도를 휩쓴 두 번의 전쟁이 이들을 갈라놓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358년 뒤 발발한 한국전쟁이다. 대구에 뿌리를 둔 두릉(杜陵) 두씨(杜氏) 모명재(慕明齋) 후손 이야기다.

4월 17일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모명재를 찾았다. 형제봉 아래 제2작전사령부 인근이다. 모명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원군(援軍)으로 참전한 명(明)나라 이여송(李如松) 부대의 참모 모명(慕明) 두사충(杜師忠)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다. 모명의 생몰 연도는 전하지 않는다. 본관은 중국 두릉이다. 섬서성 시안(西安)에서 50㎞쯤 떨어진 곳이다.


▎모명재 뒷산 자락에 자리한 두사충의 묘. 가운데 보이는 게 배롱나무다.
두릉 두씨는 중국의 이름난 가문이다. 위(魏)나라 정치가 두예(杜預)가 시조이고 시성(詩聖) 두보(杜甫)는 두예의 13대손이다. 두사충의 아버지는 도지사 격인 기주자사(冀州刺史)를 지낸 두교림(杜喬林)이다.

재실에서 두릉 두씨 모명재 종중 회장을 지낸 두진국(77) 고문을 만났다. 모명의 11대손이다. 이야기는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592년(선조 25) 12월 두사충은 조선으로 출병한다. 그는 이여송 휘하에서 병영과 진지를 잡는 수륙지획주사(水陸指劃主事)를 맡았다.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전쟁 중 주둔지와 진지를 어디에 둘지 정하는 일이다.

모명재의 주련(柱聯)에 새겨진 충무공의 화답 시(詩)


▎모명재 앞뜰 한쪽에 서 있는 중국풍의 문인석.
시작은 좋았다. 1593년 1월 이여송은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점령한 평양성을 탈환한다. 두사충의 공이 컸다. 명나라 군대는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진격한다. 이여송은 서둘렀다. 예상과 달리 명나라 군대는 임진강 벽제관 전투에서 왜군 복병에게 크게 패한다. 책임이 두사충에게 돌아갔다. 진지를 잘못 잡았다는 것이다. 군령으로 참수형이 떨어졌다.

좌찬성 약포 정탁(1526∼1605)이 구명에 나선다. 패전의 원인은 진지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임을 역설했다. 지세도 명과 조선이 다르다는 걸 주지시켰다. 그러면서 약포는 “죽이려면 차라리 내게 넘기라”고 설득해 마침내 두사충의 목숨을 구해낸다. 전쟁은 진정됐고, 두사충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두사충은 다시 원군의 일원이 된다. 이번에는 산(山)과 일건(逸建)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 족보와 책도 챙겼다. 직책은 매부인 진린(陳璘) 수군 제독의 비장(裨將)이었다. 복야(僕射) 벼슬이다. 그는 진린을 도와 기습과 정공을 거듭했다.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朝明) 연합군은 마침내 노량(露梁)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다.

두사충은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만난다. 두 사람은 초면이었지만 옛 친구를 만난 듯 시를 지으며 친분을 다졌다. 이순신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로 화답한다.


▎두릉 두씨 문중은 재실 공간을 지역민의 한문 공부반에 제공하고 있다.
北去同甘苦(북거동감고) 북으로 가기까지는 고락을 같이 했고
東來共死生(동래공사생) 동으로 와서는 사생을 함께하네
城南他夜月(성남타야월)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今日一盃情(금일일배정) 오늘 한잔 술로 정을 나누네


두진국 고문이 모명재의 기둥을 가리켰다. 이순신의 화답시는 제목과 함께 나무판에 새겨져 다섯 기둥에 주련(柱聯)으로 걸려 있었다.

왜는 패전이 짙어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마저 사망하자 본국으로 철군한다. 긴 전쟁이 끝났다. 두사충은 귀국하는 명나라 군사들과 함께 발병 난 다리를 끌고 압록강까지 갔다. 그는 거기서 동행 대신 이별을 선택한다. 모명이 지은 ‘자서(自序)’에는 매부인 진린과 울면서 헤어지는 대목이 나온다.

“그대는 황제에게 복명(復命)해야 할 터이니 부득이 가야겠지만 나는 생각한 바 있으나 말할 수는 없구려. 한 잔의 압록강 물을 뿌려 천 줄기 눈물 삼아 고향 가까운 위수(渭水)에 흘려 보내려 하나 물도 목메어 흐르지 않노라. 옛 시에 말하기를 하늘 끝 노인은 돌아가지 못해 저문 날 동녘 땅 강가에서 우노라 했으니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두사충은 그날 다하지 못한 말을 ‘자서’에 남겨 놓았다.

“아! 내 다시 돌아간들 누가 알아주겠는가. 차라리 남아서 소중화(小中華,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머지않아 오랑캐가 될 수는 없다.” 그는 명나라의 국운이 다한 것을 예견했다. 조선으로 귀화한다. 이후 대륙에는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가 들어선다.

홍문관 학사 신기선은 이를 두고 [모명선생실기(慕明先生實紀)] 서문에서 “(두사충이) 중국으로 돌아가 펼 수 있는 재주를 마다하고 조선의 미천한 백성에 만족한 것은 차마 머리 깎고 오랑캐 되기를 싫어함”이라며 “이게 속된 선비가 해낼 수 있는 일이겠느냐”고 높이 평가했다. 조(趙)나라 노중연(魯仲連)이 예의 모르는 진(秦)나라를 황제로 받들 수 없다며 동해에 몸을 던지겠다고 한 것과 같은 의리(義理)라는 것이다.

두사충은 대구에 터전을 잡는다. 조정은 그에게 대구 지역 가운데인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식읍으로 내린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이전하자 거처를 계산동으로 옮기고, 그 뒤 최정산(最頂山, 대구 앞산으로 추정) 아래로 한 번 더 이사한다.

두사충은 그때부터 자신의 호(號)를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의 ‘모명(慕明)’으로 짓고 백성 속에 섞여 살았다. 동네 이름도 ‘대명(大明)’이라 불렀다. 지금 대구 대명동의 유래이기도 하다. 그는 동네 입구에 단을 쌓아 초하루와 보름에 관복(官服)으로 갈아입고 북녘을 향해 절했다. 충(忠)이다.

충무공의 묏자리를 잡아주다


모명은 두 아들을 조선에서 흩어 놓는다. 그게 뿌리를 내리는 데 안전하다고 본 것일까. 두 아들 중 맏이인 두산은 아버지와 함께 대구에 두지만 둘째 두일건은 함경도 함흥으로 보낸다. 두진국 고문은 “모명 선조가 조선에서 후손이 끊길지 몰라 둘째 아들을 북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말했다.

모명은 조선의 지도층과 교유했다. [모명선생실기]의 ‘동국동유록(東國同遊錄)’에는 정철·정탁·윤두수·이원익·이항복·류성룡·이덕형·이순신·정경세·김상헌·권율 등 25명의 이름이 직책과 함께 나온다.


▎청색 바탕에 새겨진 모명재 편액. 모명은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모명이 귀화한 뒤의 행적은 사료에 거의 전하지 않는다. 그의 매부 진린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日省錄)] 등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금 전하는 모명 이야기는 대부분 1907년 발간된 [모명선생실기]에서 비롯된다. 두사충 시대에서 300년이 지나서다. 그 내력이 신기선이 쓴 서문에 실려 있다. “한스러운 일은 공의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고 문헌이 상고할 게 없이 자서 한 폭과 시 몇 편이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더욱 사라질 것을 두려워해 후손이 실기를 만들어 내게 서문을 청했다.” 10대손 두병하가 모명이 남긴 편린으로 실기를 엮은 것이다.

두사충은 풍수로도 이름을 얻었다.

모명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의 아산 금성산 묏자리를 잡는다. 처형 위기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정탁의 집과 묘 터도 점지했다. 그 밖에도 묫자리를 부탁한 사대부 이름이 전한다.

충무공의 후손들은 두사충이 조상의 묏자리를 잡은 것에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모명재 앞마당에는 신도비(神道碑) 하나가 서 있다. 비문은 충무공의 7대손으로 삼도통제사를 지낸 이인수가 썼다. 경위가 새겨져 있다. 1800년(정조 24) 이인수는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모명의 6대손 두경보를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는 모명이 조선에서 삶을 마치고 조선 땅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된다. 돌아와 비문을 쓴다.

이인수는 신도비의 비문에 “공(公)이 풍수에 정통해 진중에 있을 때 진지를 잘 잡은 공로가 있고 우리 선조의 묏자리도 길지(吉地)를 잡았다”며 “무덤이 내 관할구역인데 무심할 수 있겠느냐”고 적었다.

대구시와 수성구는 두사충과 충무공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모명재와 주변을 역사공원(718㎡)으로 조성 중이다. 뮤지컬 [달빛에 잠들다]를 만들고 ‘모명재길’도 개발했다. 한·중 우호를 역사 속에서 확인하고 교류를 넓히자는 뜻에서다. 관련 조형물과 한국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두사충 공원’은 개장이 임박했다.

두사충의 생애를 연구한 대구가톨릭대 진병용 교수는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간 관계개선과 협력체제 구축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지금 두사충과 모명재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며 “대구를 찾는 중국인들에게 먼저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한에 거주하는 후손 500명에 그쳐


▎명정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알리는 조정이 내린 정려다.
모명은 생전에 자신이 묻힐 곳도 정해 뒀다. 어느 날 묘 터를 일러 주기 위해 아들과 함께 길을 나선다. 그러나 몸이 쇠약해져 잡아 둔 자리까지 가지 못하고 가까운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 산 아래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 자리가 지금의 유택(幽宅)이 됐다. 모명재에서 100m쯤 떨어진 뒷동산이다.

두진국 고문이 앞장을 섰다. 모명의 묘소까지 산책로가 만들어져 유치원 아이들까지 가끔 소풍 오는 편한 곳이 됐다.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르는 코스이기도 하다. 묘소 앞에 좌우로 배롱나무가 어른 키를 훌쩍 넘게 자랐다. 또 갑옷을 입고 칼을 잡은 늠름한 무인석과 작은 문인석이 함께 서 있다. 모명이 문무를 겸한 선비였음을 상징한다.


▎이순신 장군의 7대손 이인수가 쓴 글이 새겨진 신도비.
중국에 두고 온 모명의 부인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행방이 궁금했다. 두 고문은 “모명 선조가 정유재란 당시 두 아들만 데리고 온 것은 남자만 군에 편제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선조는 전란이 끝나고도 조선에서 새로 부인을 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중은 최근 중국을 드나드는 후손들이 모명 할머니의 흔적을 수소문했지만 여태 찾지 못했다고 한다.

두사충은 만년에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남겼다. 조선의 산천을 직접 밟아본 뒤 정리한 책이다. 목숨을 구해 준 정탁의 은혜를 갚기 위해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책은 지금도 풍수지리의 필독서로 통한다. [감여요람]을 보고 싶었다. 모명재 종중 두정택(62) 총무는 “원본을 베낀 필사본만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원본이 우리 쪽에 내려오다 언제인가 약포 선생 집안이 빌려갔고 거기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모명의 유택 아래 맏아들 두산이 누워 있다. 아버지와 함께 대구에 정착했던 아들이다. 두산은 아들 하나만을 두었다. 거기서 왼쪽으로 이동하니 한데 모여 있는 묘 4기가 보였다. 두산의 아들(두중립)과 그의 세 부인이 묻힌 곳이다. 부인이 셋이었지만 그도 아들(두유갑) 하나만을 낳았다. 손(孫)이 귀했다.

두 고문이 묘역 등 일대 1만 평 문중 공간을 안내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구에 정착한 초기 양 대에 걸쳐 아들이 외동으로 이어지고 북쪽 함흥으로 간 둘째 집은 소식을 알 길이 없어 모명재 후손은 남쪽에 살고 있는 반쪽으로 겨우 명맥만 잇는다”고 말했다. 모명 후손은 전국에 걸쳐 현재 500명 정도가 전부라고 한다. 북한을 제외하고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우리나라 성씨별 인구 현황에 따르면 두릉 두씨는 총 4514명으로 조사됐다. 이 중 모명 후손인 교림계(두사충의 아버지 이름을 붙인 것)는 10%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려 목종 시기 중국에서 들어 온 경령계라는 게 문중의 설명이다. 500명이 전부라면 임진왜란 당시 귀화한 일본인 장수 김충선 가문이 전국에 걸쳐 7500명 가까운 것과 비교하면 적어도 너무 적다.

두씨 가문은 한·중·일 3국이 융합된 혈통


▎모명재 오른쪽 방에 보관된 두사충 위패.
두 고문은 그쯤에서 흥미로운 개인사를 소개했다. 자신의 할머니가 김충선 종가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김충선의 후손이 사는 대구 달성 우록리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에서 비롯된 한·중·일의 융합 혈통이라고나 할까.

두릉 두씨 교림계는 1907년(고종 44) 처음으로 족보를 간행했다. 교림계는 두 계파가 큰 줄기다. 대구에 정착한 두사충의 맏아들 두산과 북쪽 함흥으로 옮긴 차남 두일건 계파다. 족보를 편찬할 당시 두 계파의 후손은 대구와 함흥 간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오가며 서로 협력했다. 당시 남쪽은 두사충의 9대손이 대표를 맡았고 북쪽은 12대손이 발문을 썼다. 북쪽의 후손이 더 번성했던 것이다.


▎두사충이 조선의 산천을 밟아본 뒤 정리한 풍수지리서 [감여요람]. / 사진제공·한국국학진흥원
1963년 족보는 두 번째로 발간된다. 남북한이 분단된 이후다. 두 계파는 교류가 단절됐다. 하는 수없이 두 번째 족보에는 남쪽에 있는 두산의 후손들만 담았다.

당시 족보의 서문은 이렇다. “남북이 갈리어 같이 일할 수 없었다. 이남은 각파의 단자(單子, 이름 등을 적은 종이)를 거두어 새로 넣게 했다. 이북은 옛 족보에 실린 것을 그대로 붙일 수밖에 없었다. 한스럽다. 이제 세상이 평화로워지고 남북이 통일될 뒷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아! (종친이) 반수 이상 빠졌구나. 가문이 다시 융성하는 길이 열리도록 모두 힘쓰지 않겠는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이방인은 임진왜란의 트라우마로 두 아들을 조선의 남북에 떼 놓았다. 350년 뒤 한국전쟁은 남북으로 갈라진 후손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길을 막아 버렸다. 그래서 두릉 두씨 모명재 종중은 북쪽의 후손과 남북이 하나 될 날을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린다. 문중이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박스기사] 조선으로 귀화한 명나라 장수와 고관들 - 절강 편씨, 소주 가씨, 광동 진씨 등… 정변에 희생된 사례도

임진왜란은 16세기 말 조선은 물론 중국과 일본 사회를 확 바꿔 놓는다. 조선 반도는 전역이 초토화되고 인명과 재산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중국 명(明)나라는 종전 46년 뒤 나라가 망하고 청(淸) 왕조가 들어섰다. 일본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도쿠가와(德川) 막부로 정권이 바뀐다.

전란이 끝나면서 이런 정치적 격변 속에 조선을 귀화나 망명지로 선택하는 중국인이 이어졌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 출신에 우호적인 풍조가 있었다. 두릉 두씨 같은 중국이 본관인 성씨가 생겨났다. 대부분 명나라 장수와 고관 출신이다.

대표적으로 절강(浙江) 편씨(片氏) 편갈송(片喝頌)은 경주에 자리잡았다. 소주(蘇州) 가씨(賈氏) 가유약(賈維)은 울산에 정착했다. 또 절강(浙江) 유씨(劉氏) 유향정의 아들 유억수(劉億壽)는 경남 거창에, 절강(浙江) 시씨(施氏) 시문용(施文用)은 경북 성주에 각각 뿌리 내렸다. 이밖에 절강(浙江) 서씨(徐氏) 서해룡의 증손 서학(徐鶴)은 경북 성주로 왔고, 진린 제독의 손자 광동(廣東) 진씨(陳氏) 진영소(陳泳)는 할아버지가 공을 세운 전남 해남에 정착했다.

이 무렵 조정은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와 후손을 요직에 등용했다. 품계가 3품 이상인 사람이 많이 나왔을 정도다. 우경섭은 ‘조선 후기 귀화 한인(漢人)과 황조유민(皇朝遺民) 의식’을 연구했다.

그러나 인조반정과 같은 정변을 거치면서 명과 청을 사이에 두고 당파간 갈등 속에 희생된 귀화인도 있었다. 절강 시씨 시문용이 대표적인 사례다.

시문용은 임진왜란에 7년 간 종군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쟁이 끝난 뒤 병을 얻어 돌아가지 못하고 성주에 정착했다. 선조 임금은 그에게 첨지중추부사 벼슬을 내렸으며, 광해군은 영의정 정인홍의 천거로 그를 발탁해 궁궐과 왕릉 축조사업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시문용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몰락하자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착취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됐다. 다른 나라에 정착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06호 (2018.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