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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 특집 | 김영희 대기자의 한반도 워치] ‘비핵화’라는 역사적 기적의 원동력 

불가항력의 힘이 평화의 수레바퀴를 돌리다 

김영희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대기자)
한국의 정권교체, 김정은의 대변신, 트럼프의 파격의 절묘한 결합...트럼프 임기 내 비핵화·평화협정·북미수교 등 평화 프로세스 완결해야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손을 잡기까지는 숱한 곡절이 있었다.
대통령 외교안보 특보 문정인 교수(연세대)가 워싱턴과 뉴욕 강연에서 한반도 전문가들을 상대로 즉석 여론 조사를 한 결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지만 실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80~85%로 나타났다. 미국 동부의 지식인들이 트럼프의 성공을 축복하기 싫은 비꼬인 심리의 반영으로 보인다. 2차 남북 정상회담 이틀 뒤 서울의 한 토론에 참가한 12명의 한국인 전문가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데 12명 중 10명이 찬성하고 회담의 성공 전망에 대해서는 과반수가 엉거주춤한 찬성을 했다.

그러나 북한 통일전선부장 김영철로부터 김정은의 친서를 받은 트럼프는 종전선언과 남·북·미를 포함한 몇 번의 추가 회담까지 거론했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포괄적으로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의 프로세스가 합의대로 이행된다면 남·북·미·중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전쟁의 연장인 70년 한반도 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은 동북아 정치의 거대한 체스판에서 신분이 ‘졸(卒, pawn)’에서 ‘메인 플레이어(main player)’로 격상된다.

정치학자 엘리자베스 스탠리의 연구 [평화로 가는 길(Paths to Peace)]에 따르면 주요 교전국의 지배연합 교체(ruling coalition shift)가 전쟁 종결의 주요 조건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지배 연합의 교체가 동시에 일어났다.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박근혜 두 정부를 건너뛰어 김대중·노무현의 평화 지향적인 대북정책을 계승한다.

트럼프 정부가 평화 지향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트럼프가 클린턴-부시-오바마와 다른 것이 정권교체, 지배연합의 교체 효과를 낸다. 북한에서는 정권교체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김정은의 세계관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열전의 종식 조건이 냉전에도 해당된다면 한반도의 70년 냉전에 종지부를 찍을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한국전쟁 2년차를 맞은 김일성은 1952년 1월부터 스탈린에게 전쟁을 끝내자고 몇 차례 간청했다. 초토화된 국토에 40년래의 대홍수를 만나 북한에는 전쟁을 더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미국을 한국에 묶어두고 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스탈린은 ‘졸’의 청을 거부했다. 한국전쟁을 하이잭 한 중국에서도 1952년 지배연합의 교체가 일어났다. 국공내전 때부터 지방 당과 군을 맡아 오던 국공내전의 지도자들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저우언라이와 그 동지들은 출혈이 과도한 한국전쟁을 끝내고 경제 건설에 집중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저우언라이는 1952년 모스크바에 장기 체류하면서 스탈린에게 세 번이나 종전을 졸랐다. 스탈린의 답은 “노”였다.

남북한과 미국에서 일어난 변화의 공시성


▎4월 27일 남북 두 정상이 앉은 판문점 의자 등받이에 새겨진 한반도 지도 문양.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으로 사태가 반전된다. 스탈린의 권력을 계승한 말렌코프-몰로토프-베리아 트로이카는 한국전쟁의 종식을 서둘렀다. 하늘의 계시처럼 같은 시기 미국에서도 한국전쟁의 조기 종식을 공약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돼 두 개의 난류가 합류했다. 종전이 급한 아이젠하워는 포로송환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진 휴전협상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북한과 중국의 전략적 요충지를 원자탄으로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선제공격 카드로 북한을 압박한 트럼프는 아이젠하워의 아바타다.

한국전쟁은 3년의 열전이었다. 지금 남북한과 미국이 끝내려고 하는 것은 70년의 냉전이다. 열전이든 냉전이든 전쟁 종결 모델은 동일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북 같은 동맹의 주니어 파트너 지위가 졸에서 플레어로 격상되는 사태의 전개다. 한국서는 북한 붕괴론과 통일 대박론이 평화노선에 매장됐다. 미국서는 도덕적 메시아주의로 칼춤을 추는 반동 세력과 핵문제 해결에 무기력한 무위론자들이 물러나고 그들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겠다는 열정에 넘치는 트럼프가 집권했다. 남북한과 미국에서 일어난 변화의 공시성(synchronization)이 놀랍다.

김정은은 북한을 정상국가로 전환해 핵 없는 체제의 안전보장, 핵 없는 경제 번영으로 국정 방향을 틀었다. 그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핵·경제병진에서 핵을 내리는 선제조치를 취함으로써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고 싱가포르로 가서 트럼프를 만났다. 핵·미사일 폐기는 김정은의 자진 무장해제다. 담대한 결단이다. 김정은은 안보의 보검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이유를 군부와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필요한 것이 시기에 맞춘 미국에 의한 체제 안전의 보장과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경제협력이다. 핵 폐기와 체제 안전의 구체적인 보장 사이의 시차가 너무 길면 김정은의 국내적 입장이 어려워진다. 그에게도 국내정치가 있다.

선(先) 핵 폐기, 후(後) 보상의 일괄타결을 주장하던 트럼프가 김정은의 단계적·동시적 핵 폐기로 다가선 것이 비핵화의 전망을 더욱 밝게 한다. 네오콘의 잔존세력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비켜서고 김영철-폼페이오 라인이 풀가동되면 종전선언→핵물질 신고→반출→검증→평화협정→북·미 수교는 트럼프의 정치적 이해에 맞게 2020년 말까지 완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평화협정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참가 없는 종전선언은 한반도 문제의 해법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을 이 프로세스의 어느 단계에서 참가시킬 것인가는 민감한 문제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위에서 설명한 조건 아래 실현되었다. 트럼프는 귀국 후 김정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비난공세에 시달린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포인트별로 점검해 보자.

◇ CVID 빠져 실패한 회담인가

김정은-트럼프 회담 후 발표된 공동합의문에 미국이 그것만은 양보하지 않겠다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다. 회담 전날까지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CVID 이하는 수용할 수 없다는 미국의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그러나 합의문에는 북한이 “남과 북이 한반도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자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는 판문점선언을 확인하고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돼 있다.

핵단추 대신 전화기 버튼 눌러


▎한미 연합훈련인 키리졸브훈련에 참가한 한미 해병대원들이 포항 해병대 유격훈련장에서 산악행군을 하고 있다.
합의문만 가지고 보면 트럼프는 비판받을 만하다. 트럼프는 회담이 끝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추궁받았다. 합의문에 구체성이 없다, 알맹이가 빠졌다, CVID가 빠진 것은 김정은에게 너무 많이 양보한 것 아닌가 …. 트럼프는 공동합의문의 포괄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북한이 분명히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고, 그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고 버텼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김정은이 CVID라는 표현을 거부하면서도 트럼프가 충분히 납득할 만하게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김정은과 트럼프는 합의문에는 담지 않은 많은 약속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트럼프 쪽에서는 김정은이 납득할 만한 체제의 안전보장을 약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한다. 트럼프는 김정은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러 차례 반복하고 “그의 연배로는 몇 만 명에 한 사람 나올 정도로 재능 있는 협상가”라고 칭찬했다. 회담 내내 70대의 트럼프는 30대의 김정은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김정은은 트럼프를 어른으로 공손하게 대접했다. 신뢰는 상호적이다. A가 B를 신뢰하지 않는데 B가 A를 신뢰할 수는 없다. 싱가포르로 떠나기 전 트럼프는 자신이 상대의 진정성을 1분이면 간파할 직관력을 가졌다고 자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15일 백악관 잔디밭에서 가진 [폭스뉴스]의 모닝쇼 ‘폭스와 친구들(Fox and Friends)’과의 즉흥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게 연락할 수 있게 직통전화번호(a very direct number)를 줬다”고 공개했다. [로이터통신]은 6월 17일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전화할 것이라고까지 보도했다. 트럼프가 자신의 직통전화번호를 과연 세계 몇 명의 지도자에게 줬을까를 생각하면 ①김정은에 대한 그의 신뢰의 깊이 ②임기 내에 비핵화를 해내고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가 있지 않은가. 각자 자기 책상 위의 핵단추를 누르겠다고 으르렁거리던 김정은과 트럼프가 핵단추 대신 전화기를 누르기로 한 것은 싱가포르의 역사적인 악수와 함께 세계 외교사의 천지개벽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측이 상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CVID를 과잉 세일한 것이다. 북한은 약자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CVID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굴복(surrender)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CVID라는 용어 자체가 주요 협상가의 오랜 숙고의 산물이 아니다. 그 용어는 조지 W 부시 정부 때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이던 존 볼턴의 보좌관이 만들어 낸 말이다. 엄격히 따지면 CVID와 CD(완전한 비핵화)는 동어반복이다. V(검증)와 I(불가역적)가 빠진 비핵화는 이미 완전한 비핵화일 수 없다. 완전한 비핵화에는 V와 I가 포함된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오와 그의 협상팀은 이 말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민감성(sensitivity)을 과소평가하고 CVID를 과도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미국이 그렇게까지 CVID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오히려 북한이 수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 성과는 무엇인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공동합의문에는 반영되지 않은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개인적 친분을 쌓고 서로를 신뢰하게 된 것은 북·미 정상회담 최대의 성과다. 어떤 좋은 문서상의 합의라도 상호 신뢰가 없으면 이행이 보장되지 않는다. 반대로 좀 미흡해 보이는 문서상의 합의라도 합의 주체들 간에 두터운 신뢰가 있으면 이행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갈 수가 있다.

성공한 김정은의 ‘인정투쟁’


▎2002년 9월 방북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왼쪽)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오른쪽). 일본도 납치자 문제가 해결되면 북한 진출을 서두를 태세다.
김정은과 트럼프 간의 신뢰 못지않게 중요한 성과는 김정은의 성공적인 국제무대 데뷔다. 싱가포르에는 전 세계에서 2500명 이상의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은둔의 나라, 불량국가, 악의 축으로 매도된 북한의 젊은 지도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지도자와 대등하게 만나 회담하고, 식사하고, 산책했다. 김정은의 북한은 이제 정상국가를 지향한다. 김정은의 성공적인 국제무대 데뷔는 북한이 정상국가로 가는 길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

김정일 시대부터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정상적인 국가, 유엔 회원국인 주권국가로서의 대등한 지위를 획득하기를 갈망했다.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의 용어를 빌리면 북한은 치열한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을 벌여 왔다. 김정은은 트럼프와 한 번의 회담으로 인정투쟁의 목적을 이뤘다. 김정은은 트럼프를 평양으로 초청하고 트럼프는 김정은을 워싱턴 아니면 플로리다 별장 마라라고로 초청했다. 두 사람의 교류는 계속된다는 의미고, 그것은 다시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확실히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 북한은 비핵화의 어떤 조기 조치를 취할까

북한은 지난 5월 23·24일 한국을 포함한 외국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했다. 그때 존 볼턴은 핵실험장 폐쇄를 선전용이라고 주장했다. 싱가포르 기자 회견에서 트럼프는 북한이 조만간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폐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북한은 넓은 의미의 비핵화의 조기 조치들을 하나씩 취해 나가고 있다. 김정은에게는 트럼프의 신뢰와 배신할 여유가 없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4월 12일 핵·경제 병진정책에서 핵을 내리고 경제에 집중한다는 새로운 노선을 공식화했다. 북한 정권 정통성의 한 축을 담당하던 핵을 포기하면 경제가 정통성의 나머지 부분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김정은에게는 달러(돈)가 급하다. 북한으로의 투자 러시가 일어나야 한다. 외국 자본들의 북한 진출에는 가시적인 북·미 관계의 개선이 대전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을 말이나 문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6월 14일 서울서 비핵화의 프로세스가 끝나는 시점을 2020년 말로 못박았다. 트럼프가 재선에 출마하는 해다.

일본, 유라시아 대륙행 열차에 가장 먼저 오를 것


▎북한은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기 위해 폭파작업을 단행했다.
트럼프는 트럼프대로 자신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북한에 비핵화 조치를 빨리, 많이 취하도록 계속 촉구할 것이다. 묘하게도 비핵화에서 종전선언, 평화협정 체결,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 김정은과 트럼프의 이해가 일치한다. 그래서 북한은 트럼프가 말한 미사일 엔진 시험장의 폐쇄뿐 아니라 미국이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라고 믿을 만한 비핵화에 관련된 일련의 조치를 연내에 취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미국에도 상응하는 북한의 안전보장과 경제적 보상조치를 취하라는 촉구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은 일본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서둘 것을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노골적으로 비핵화의 비용은 한국과 일본이 지불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단거리 미사일의 사정권에 드는 한국과 일본이 북한 비핵화의 최대 수혜자라는 논리에서다. 한국은 남북관계 개선의 틀 안에서 경제협력의 형태로 대북 투자에 앞장설 것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납치자 문제를 해결해 각종 스캔들로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려고 한다. 그런데 납치자 문제는 전면적인 북·일 관계의 개선, 더 구체적으로는 북·일 수교 교섭과 함께가 아니라면 풀리지 못할 문제다. 북·일 수교가 성사되면 북한의 기대로는 200억~300억 달러, 일본의 계산으로는 100억 달러 정도의 식민지 지배 배상금이 북한에 지불된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서 일본 소외(재팬 패싱)를 걱정하는 일본은 비핵화 과정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 협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행 버스에 가장 먼저 오르려고 할 나라다.

북·미 회담이 열린 싱가포르는 대북 투자에 일찍부터 착안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특히 원산 일대의 관광사업에 관심이 크다. 북·미 정상회담 전날 밤 김정은이 싱가포르의 주요 관광지로 나들이를 한 것도 동해안 관광 개발에 대한 북한과 싱가포르 두 나라의 공동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경제적인 기회 모두가 비핵화의 진전에 달려 있기 때문에 북한도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

◇ 한·미 군사연습 중단에 한국 안보는 불안한가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한·미 합동군사연습이라는 전쟁 게임(war game)을 중단하겠다고 사실상 선언했다. 북한은 을지프리덤가디언, 키리졸브, 새끼 독수리연습을 북침 군사연습이라고 경계하고 비난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합동군사연습의 중단을 검토하겠다고 말해 군사연습 중단은 기정사실화돼 가고 있다. 가공할 전략자산이 괌과 미 본토에서 한반도로 전개되는 군사연습을 중단한다는 것은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조기 조치에 대한 보증금 선불의 성격이다. 그러나 북한도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라는 보증금을 선불하고 북·미 정상회담에 나왔다.

트럼프, 한·미 군사훈련에 상응하는 대가 약속받았을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 앞마당에서 남북공동선언인 ‘판문점선언’을 발표했다.
문제는 군사연습 중단이 한국의 안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인가, 한미동맹에 이상징후를 보이는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 군 당국은 통상적인 훈련을 계속한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준비태세는 항상 확고하게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판문점 남북 장성급회담에서는 동해와 서해 군 통신선을 복구한다는 데 합의했다. 가을부터는 남북한 군 간의 소통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현재 중무장된 비무장지대의 진정한 비무장화의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조치와 협의를 포괄적으로 생각하면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중단 자체가 대북 억지력의 약화로 직결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상대에게 진정성을 보이고 상대의 상응한 조치를 유인할 목적으로 선행 조치를 취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도 상대의 행동과 큰 틀의 보조는 맞출 필요가 있다.

군사연습의 중단은 북한과의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지렛대의 하나다. 흥정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가 김정은으로부터 상응하는 또는 그 이상의 조치를 약속받지 않고 그 중요한 지렛대를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행동 대 행동의 레이스가 숨가쁘게 전개되지 않을까 싶다.

◇ 종전선언은 언제, 어디서 할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 정상이 만나는 싱가포르로 가서 남·북·미 3자 공동선언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김정은과 트럼프를 설득했다. 회담 2~3일 전까지도 싱가포르 전용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의 3자 종전선언은 불발로 끝났다. 가장 큰 원인은 트럼프가 오로지 북한 비핵화에 올인하고 싶어 한 것이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3월 31일과 5월 9일 평양을 방문해 CVID와 비핵화의 시간표에 대한 북한의 동의를 받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폼페이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성 김 주필리핀 대사가 북한 외무성 부상 최선희와 판문점 통일각에서 6번, 싱가포르에서 회담 전날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입장을 조율했지만 미국이 원하는 북한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했다.

이와 같이 비핵화 협상 자체가 고위 실무급에서 타결되지 못하고 두 정상의 최종 결단의 과제로 남겨지는 애매한 상황에서 트럼프로서는 종전선언의 무거운 짐까지 질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급한 문제도 아니다. 김정은이 연내에 미국을 방문하는 기회, 트럼프가 평양을 방문하는 기회, 가을 유엔총회에서 3자가 만나는 기회에 종전선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 간에는 4·27 판문점 회담에서 사실상 종전선언이 이뤄진 셈이다. 종전이 중요한 이유는 종전이 말 그대로 전쟁을 종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종료하면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 지금의 휴전협정은 전쟁을 멈춘다는 합의에 불과하다. 그래서 종전선언은 휴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으로 이어진다. 평화협정이 체결돼야 북·미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 평화협정이 먼저냐, 북·미 수교가 먼저냐를 놓고 논란이 많다. 그러나 북한은 북·미 수교가 미국의 중요한 대북 체제 안전보장 조치로 간주하기 때문에 수교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 같다.

평화협정은 의회 비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베트남전쟁을 끝내는 파리평화협정도 의회 비준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평화협정이 구속력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트럼프 정부는 평화협정에 대한 의회 비준을 받을 예정이다. 북·미 수교도 의회 비준을 받을 필요가 없지만 관련된 예산 집행권이 의회에 있기 때문에 쿠바와의 수교 때처럼 의회의 동의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김정은·트럼프 생각이 평화로 수렴된 건 국운


▎6월 1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 오찬에 참석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왼쪽). 폼페이오 장관은 최근 대화파로 변신했다. / 사진:연합뉴스
비핵화의 진전이 의회가 보기에도 납득할 만한 수준에 이르면 평화협정이든 수교든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은 비핵화가 완결되는 시점이다.

◇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트럼프가 자랑 삼아 하는 말이 있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오바마 전 대통령들이 왜 비핵화를 성사시키지 못 한 줄 아는가?” 이렇게 물어놓고 스스로 대답한다. “그건 그들이 참모진의 말을 너무 많이 경청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트럼프다운 말이다. 트럼프는 결정은 내가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트럼프 정부 출범 초기 백악관 주요 참모진의 교체가 그렇게 잦았던 것도 그들의 틀에 박힌 사고,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래서는 안 됩니다라는 관료적, 기계적인 반대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관료들은 전통적인 외교 관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상유지 정책으로 기득권에 매달린다. 대북 강경파였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한을 두 번 방문한 뒤 대화파로 변신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관료들은 외교 관례를 따지지만 부동산 개발업자 트럼프는 결과를 중시한다. 서론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와 김정은의 대변신의 결과라고 말했다. 미국의 새 대통령이 트럼프같이 파격적인 스타일의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남·북·미 3각 관계의 두 변이 아무리 평화 지향적이라도 평창과 판문점과 싱가포르의 기적, 역사적 변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일 때 비핵화와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를 포함한 모든 평화의 프로세스가 완결돼야 한다는 의미다. 남·북·미 지도자의 이해가 지금같이 일치하는 일이 흔하게 있는 일이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통일대박론자 박근혜가 탄핵되지 않고 아직도 한국의 대통령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김정은이 김씨 세습왕조의 정통성은 핵무기에서 나온다는 신화에 매달려 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계속한다면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문재인·김정은·트럼프의 생각이 한반도 평화로 수렴된 것은 국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단군 이래의 기회라고 말한다. 평화는 시대정신이다. 지금 한반도 평화의 수레바퀴는 저거노트(juggernaut), 힌두교 신앙에서 유래한 불가항력의 힘으로 굴러간다. 거기 맞서는 자의 운명은 자유한국당의 그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 김영희 - 1958년 22세 나이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필자는 82세가 된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는 영원한 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임원 등을 거치고 최근까지도 중앙일보 대기자 및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올해로 기자 활동 60주년을 맞는 그는 외교·안보·국제 뉴스의 한 우물을 판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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