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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 특집 | 심층분석] 개혁·개방은 ‘양날의 검’… 김정은 권력의 내구력은? 

평양 비웠지만 이상징후는 없었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수령독재, 정치적 억압, 파탄에 이른 경제, 주민의 변화 욕구가 변수…노동당 · 군부 핵심 인사들 김정은 체제와 끈끈한 공동운명체 의식 가져

▎지난 5월 27일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현장을 시찰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 사진:연합뉴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는 6월 12일은 양국 관계뿐 아니라 한반도와 주변 정세의 중대한 변화를 불러오는 날일 것이다. 13일 아침은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게 분명하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한 국제포럼에서 만난 미국 헤리티지재단의 앤서니 킴 연구원은 이렇게 예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간의 만남이 향후 북·미 관계는 물론 국제 정세의 중대한 변화를 불러올 분수령이 될 것이란 얘기였다.

그의 말대로 ‘역사적인’ 정상회담의 후폭풍은 거세다. 김정은과 트럼프는 70년 적대관계를 넘어서는 상징적인 악수와 함께 국제사회를 향한 육중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것은 앞으로 양측의 행보가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것이란 약속이었다. 이는 140분간의 회담과 오찬 등 만남을 가진 후 조인된 공동성명의 제1항에 담긴 ‘새로운 북·미 관계의 수립’이란 키워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공언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가 성명에 담기지 못한 대목을 들어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북·미 정상 간 사전교감과 물밑 조율을 맡아온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회담 하루 전까지도 공언한 CVID가 빠진 대목은 미스터리다. 뭔가 막판 전력투구 과정에서 뒷심이 부족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두 정상 간의 만남 자체가 갖는 상징성에다 향후 비핵화 관련 구체적인 협의가 진행될 것이고 김정은과 트럼프가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정상회담과 공동성명이 지니는 의미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핵 폐기를 핵심으로 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등 북·미 공동성명 합의는 앞으로 양측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일본 등이 각기 혹은 보폭을 맞춰가며 걸어가야 할 로드맵이라 할 수 있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언급한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중단 사안은 북·미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중대한 숙제를 던졌다. 그렇지만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위력과 파고로 다가오는 평양과 워싱턴의 의기투합은 이 같은 개별 현안을 뛰어넘는 충격파를 앞으로 쉴 틈 없이 만들어낼 것으로 예상된다.

변화의 쓰나미는 비단 비핵화와 한반도 정전체제의 변동 등 안보·외교 이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김정은 권력과 북한 체제가 이런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생존을 모색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세기의 담판’이라 불린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귀환한 김정은 위원장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는 앞으로 북한이 얼마나 북·미 간 합의와 비핵화 이행에 나설 것인지를 가늠할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김정은이 입이 아닌 발걸음으로 자신과 북한 체제가 진정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다. 김정은 위원장도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과거를 걷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서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며 김정은 체제의 북한이 변혁의 길을 갈 것임을 공언했다. 여기에는 비핵화 약속 이행만이 아니라 개혁·개방과 인권 증진, 민생 문제 등 북한 체제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의 조치들이 포함된다고 하겠다.

변화는 통상적으로 3단계의 과정을 거쳐 진화하고 구체화된다. 우선 상징적인 변화의 모습을 통해 개인이나 체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단계가 있다. 다음으로는 상징적 변화를 넘어서는 의미 있는 단계의 진입이 필요하다. 여기선 시범적인 수준에서라도 가시적인 성과나 결과물이 도출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실질적인 변화의 단계로 도달하게 하는 게 전형적인 변화 시스템이다.

주택임대업 등장과 소(小) 토지 거래 현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을 마친 후 전용차량을 타고 싱가포르 창이 공항으로 이동하고 있다.
북한은 과거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상징적 변화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대남비방 중단과 함께 당국대화에 응하고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차원의 교류·협력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의 연결과 통행, 개성공단 가동 등이 대표적인 조치다.

하지만 우리의 권력교체와 대북정책 노선의 변동에 불만을 품고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같은 호전적인 행태로 돌변했다. 핵무기 개발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등 도발적인 행보로 돌아서면서 남북관계 경색은 물론 한반도와 주변 정세가 소용돌이치는 긴장 국면을 초래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결국 북한의 변화는 상징적 수준에서 의미 있는 단계의 초입에 진입하려다 원점으로 회귀한 셈”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집권 후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대해 날 선 발언을 쏟아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통한 ‘괌 타격’ 같은 극단적인 태도까지 보였다. 대남 관련 언급도 거칠기는 마찬가지였다. 김 위원장은 이와 함께 내부적으로는 경제 분야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실험적 조치를 취했다. 2012년 6월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걸 골자로 한 6·28 개혁 조치를 시작했고, 2014년에는 기업의 자율권 부여를 핵심으로 하는 5·30조치를 단행했다.

김정은식 경제개발과 개혁·개방 움직임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현장은 평양이다. 북한은 김정은 집권 초부터 평양에 고층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선 뉴타운 형태의 개발사업을 시작했고, 노동당원과 특권층이 주축인 평양 시민을 위한 위락시설과 편의 설비를 집중적으로 갖추는 데 주력해 왔다. 평양 중심구역의 대동강변 등에는 이미 김정은 지시에 따라 53층 주상복합 건물과 46층 아파트 단지 등이 들어선 상태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대규모 주택 건설은 체제 선전용이나 당국 주도에서 벗어나 최근에는 개인 자본이 투입된 아파트 건설과 쇼핑센터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는 게 대북 정보 당국과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신규 주택 건설사업에 개인 사업자가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서구식 아파트 분양 모습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주택 임대업이 출현하고 소(小) 토지와 시장 매대를 사고파는 현상도 점차 번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 ‘평해튼(Pyonghattan)’에 들어설 뉴타운


▎북한 [노동신문]은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악수하는 모습을 보도했다.
평양엔 북한 전체 인구의 10%가량인 250만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최근 개발 대상지에 올라 눈길을 끌고 있는 곳이 강남 지역이다. 평양 중심부에서 서남쪽 강변에 자리한 강남군 일대는 아직 미개발 지구로, 논밭과 과수원이 대부분이라 평양 시민들에게 과일·채소를 공급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마치 1970년대 서울 압구정이나 개포 지구와 같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정은이 지난해 12월 말 이곳을 ‘경제개발구’로 지정했다. 2013년 5월 경제개발구법을 만든 이래 22번째의 구역 지정이지만, 지방이 아닌 평양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북한은 경제개발구를 ‘다른 나라의 투자를 끌어들여 경제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특구’라고 설명한다. 향후 외자 유치를 통한 평양판 강남 신도시 개발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경제개발구는 김정은의 경제 부문 작품 중 하나다. 지난해 말까지 경제특구 5개, 지방급 경제개발구 19개 등 모두 27개가 지정됐다. 신의주와 혜산·만포 등 중국과의 변경 지역이나 청진·나선(나진과 선봉)·흥남 같은 규모 있는 항만을 중심으로 짜였다. 그렇지만 한국과 서방의 북한 경제 전문가들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곳을 개발구로 지정한 것으로 볼 때 실행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 온 게 사실이다.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졌던 강남경제개발구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건 북·미 관계의 진전이 급물살을 타면서다. 회계·컨설팅 전문기관인 삼정KPMG 대북비지니스지원센터는 최근 펴낸 [북한 비즈니스 진출전략]에서 “건설붐이 일고 있는 평양은 뉴욕 맨해튼과의 합성어인 ‘평해튼(Pyonghattan)’이 낯설지 않은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그 가운데서도 대동강변 강남경제개발구에 조성될 뉴타운이 각광을 받게 될 것이란 진단이다. 김 위원장이 강남경제개발구를 지정한 걸 두고 미국과의 유화모드 선회를 결심하면서 대북투자 유치를 겨냥했기 때문이란 관측도 나온다. 평양 주민들이 받게 될 충격을 완화하고 미국 기업이나 인력의 대북진출 초기 적정 수준의 통제를 위해서도 평양 중심가보다는 특구 성격의 강남개발구에 유치하려 할 것이란 해석이다. 북·미 간 협상 내용에 밝은 정부 관계자는 “미국 측이 북한 당국자에게 ‘평양에 성조기를 단 캐딜락 차량과 미국인이 줄지어 다녀도 문제 없겠느냐’고 타진했다는 건 그만큼 북한이 이런 상황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낙후된 경제 현실과 개혁·개방에 대한 김정은의 인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하나를 꼽으라는 질문을 던지면 북한 경제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는 사건이 있다. 바로 집권 첫해인 2012년 5월 놀이공원인 만경대유희장을 방문해 직접 잡초를 뽑은 일이다. 김정은은 당시 유희장의 ‘배 그네(바이킹선)’ 앞 구내 도로가 심하게 깨진 걸 보고는 “한심하다”고 질책했다. 이어 보도블록 사이 곳곳에 잡초가 자라난 것을 보면서 허리를 굽혀 직접 풀을 뽑았다. 그러면서 그는 “유희장이 이렇게 한심할 줄 생각도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소리”라고 관계자들을 질책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선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따라 후계수업을 하던 김정은이 집권 초 직접 민생 현장을 살펴본 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라며 “만경대유희장 사태는 김정은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싱가포르에서 보여준 경제 관련 관심과 행보도 눈길을 끌었다. 정상회담을 몇 시간 앞둔 긴장된 상황 속에서 6월 11일 밤 싱가포르 사업시설과 야경을 돌아본 것이다. 당시 경호·의전 등의 문제로 여건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등 정상회담 수행단까지 이끌고 참관에 나섰다. 워낙 전격적이고 비밀리에 일정이 진행되다 보니 해프닝도 벌어졌다. 당시 북한 경호원 가운데 4명이 김정은 일행을 놓쳐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노동당 핵심 간부들의 중국 개혁·개방 현장 학습


▎김정은 위원장 집권 후 평양 대동강 주변에 아파트들이 빠른 속도로 들어섰다.
당시 김 위원장은 숙소인 세인트레지스 호텔을 출발해 마리나베이에 있는 초대형 식물원 가든바이더베이를 시작으로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전망대(스카이 파크)→주빌리 다리→싱가포르 항구 등을 참관했다. 사태는 김정은 위원장이 마리나베이샌즈 호텔의 스카이 파크 관광을 마친 뒤 호텔 밖으로 나온 밤 10시20분쯤 벌어졌다. 사복 차림으로 외곽 경호를 지원하던 싱가포르 경찰과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단 북측 경호원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듯한 상황이 일부 한국 언론사 취재기자에게 포착됐다. 싱가포르 경찰은 마침 나타난 한국 기자에게 북한 경호원들의 이야기를 통 알아들을 수 없으니 통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북한 측 경호원은 다급한 듯 “빨리 가야 한다고 싱가포르 경찰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통역을 도운 한국 기자들이 “숙소인 호텔로 가면 되느냐”고 묻자 북한 경호원들은 “호텔은 아닙니다”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북측 경호원들은 “원수님(김정은을 지칭) 계신 곳으로 당장 빨리 가야 한다”고 다급하게 여러 번 말했지만 정작 어디로 가느냐고 행선지를 묻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 했다. 땀범벅이 된 북측 경호원들은 결국 “원수님 계신 곳을 모릅니다”고 실토했다. 이들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이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 경호 부담까지 안고서 싱가포르 시찰에 나선 걸 두고 개혁·개방 모델로서의 싱가포르가 지닌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중국 관영매체인 [글로벌 타임스]는 6월 13일자 보도에서 “싱가포르는 경제개발 초기에 주요 경제 전략으로 외국 자본의 투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현대화를 실현했다”면서 “많은 개도국에 경제개발을 위한 역할 모델로 간주된다”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도 당시 “오늘 참관을 통해 싱가포르의 경제적 잠재력과 발전상을 잘 알게 됐다”며 “싱가포르에 대해 훌륭한 인상을 갖게 됐다”는 소감을 싱가포르 당국자들에게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김정은은 “싱가포르가 듣던 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건물마다 특색이 있다”며 “앞으로도 여러 분야에서 귀국(싱가포르)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을 많이 배우려한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 준비에 막바지 공을 들이고 있을 시점에 이뤄진 북한 노동 핵심 간부들의 중국 개혁·개방 현장 학습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북한의 시·도 당 위원장으로 구성된 참관단은 5월 14일부터 11일간에 걸쳐 베이징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고향인 산시성, 상하이와 저장성 등을 방문해 경제 현장을 중심으로 중국의 경제 실태를 살펴봤다. 여기에는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 과학원 문화정보중심과 중국 농업과학원, 철도 관련 시설 관리기관인 베이징시 기초시설투자유한공사 등이 포함됐다. 참관단을 이끈 박태성 당 부위위원장은 같은 달 16일 시진핑 주석을 예방한 자리에서 “중국의 경제건설과 개혁·개방 경험을 학습하기 위해 중국에 왔다”고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박태성은 김정은의 경제 현장과 군부대 방문 등에 단골로 수행하는 핵심 측근 중 하나다. 이들의 참관이 김정은의 지시에 따른 것이란 얘기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근거로 향후 북한이 개혁·개방이나 경제개발 노선에 힘을 기울일 것이란 관측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남북관계 복원과 2차례의 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성사된 분위기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6월 1일 홍콩에서 가진 한 강연에서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대결 국면을 해소할 절호의 기회이며,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체제보장 후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발전을 열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은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권위주의 정권 하의 경제발전을 추구할 것”이라며 “개혁·개방 후 북한이 민주화 요구 분출로 붕괴할 것이란 전망도 있지만 수십 년간의 권위주의 정권에서 경제발전을 이뤄낸 중국의 사례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김 위원장이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을 목표로 제시한 만큼 반드시 이를 이루려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의 북한은 베트남 도이머이 정책 5년 전과 유사


▎일명 장마당으로 불리는 북한 함흥 시내의 농민시장. 북한은 빈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평양 주재 베트남 대사관에서 10년간 근무한 팜 띠엔 번 대사는 지난 5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현재 상황은 베트남이 1986년 ‘도이머이(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기 전 5년가량 경험한 시범단계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번 대사는 “베트남이 1989년 캄보디아에서 철수해 미국 등에 의한 경제봉쇄를 풀었던 것처럼 북한도 핵문제를 해결해야 국제사회와의 경제협력과 개방정책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이 본격적인 개혁·개방 행보로 나설 경우 체제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핵과 ICBM 개발 등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부터 공들여 온 군사 노선 포기에 대한 군부 등 강경파의 불만과 노동당과 군부 기득권 세력의 이권다툼으로 인해 체제에 균열이 생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북·중 접경 지역과 평양 및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번진 한류문화 등을 접한 주민 변화도 김정은 체제의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다. 외부 세계와의 접점이 커질수록 군부 쿠데타나 김정은 위해 시도, 주민들의 민주화 요구 등이 표출될 여지도 넓어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김정은이 싱가포르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항공편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전용기 등 3대의 항공기를 띄워 교란작전을 펴고, 안전성이 확보된 중국 에어차이나 전용기를 렌털한 것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한·미 정보당국의 평가는 “김정은이 예상보다 안정적으로 북한 체제를 통치하고 있다”는 지난 수년간의 입장에서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서방 언론 등에서 김정은이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비울 경우 군부의 움직임이 주목된다는 식의 관측을 내놓았지만 이상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앞서 2차례의 중국 방문 등에서도 김정은의 평양 권력 장악엔 문제가 없었다”며 “최용해 당 부위원장, 김수길 군 총정치국장 등 노동당과 군부의 핵심 인사들이 김정은 체제와 끈끈한 공동운명체 인식을 갖고 있는 게 가장 큰 요인”이라고 귀띔했다. 70년 노동당 집권과 3대 세습 통치를 거치며 구축된 철저한 감시체제와 공포정치를 생생히 목도한 고위 간부들의 경우 경거망동의 후과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21세기 국제정치의 최대 아이러니


▎평양 시내 트롤리에 탑승한 주민들의 모습. 김정은 위원장의 개혁·개방 정책은 북한 엘리트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물론 산발적인 체제이반의 요소가 돌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핵 도발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자초한 위기국면에서 북·미 정상회담 개최 등으로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파워엘리트들의 불만과 체제이반은 여전히 복병으로 자리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흐름과 대북 인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의 경우 여전히 억압받고 있는 유일영도 체계의 숨막히는 국면에서 벗어나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자녀교육 등 현실적인 출구를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에서다.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외교전선에 투입돼 국제사회의 대북 공세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탈북·망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북·미 정상의 의기투합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사흘 만인 6월 1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에게 나와 곧바로 연결될 수 있는 직통전화 번호를 줬다”고 말했다. 워싱턴과 평양 사이의 정상 간 핫라인이 사실상 열려 있음을 알린 것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은 어떤 어려움이 생길 경우 나에게 전화할 수 있다. 나도 그에게 전화할 수 있다. 우리가 의사소통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서로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핵단추가 크다며 기세를 부풀리던 두 정상의 모습은 잊혀진 과거가 된 듯하다.

북한에 ‘불구대천의 원쑤(원수의 북한식 표기)’이거나 ‘소멸해야 할 투쟁 대상’으로 여겨졌던 미국은 이제 김정은 체제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자리했다. 70년 적대관계를 유지해 온 상대방에게 ‘체제안전보장’을 갈구하는 북한의 모습은 21세기 국제정치의 최대 아이러니다. 트럼프로부터 “26세에 집권한 그는 재능 있는 사람”이란 찬사까지 들은 김정은으로서는 우쭐해 할 수 있다. 해외 언론은 물론 미국 유력 매체들까지 ‘김정은의 승리’라고 평가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미 보잉 747 에어차이나 전용기 안에서 그는 “이런 맛에 핵 개발을 하는 거구만”하며 파안대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에게 게임은 이제부터다. 체제의 명운을 건 싸움은 레드카펫이 깔린 회담장이나 공동성명 서명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등지고 걸어 나와 맞닥뜨리게 될 척박한 현실과의 투쟁이다. 특히 체제를 개혁·개방으로 이끌어 국제사회로 나아가는 문제는 김정은에게 있어 절대 권력은 물론 혈족과 추종세력의 명줄을 좌우할 수 있는 도박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6월 11일자 보도에서 “김정은에게 개혁·개방은 양날의 검”이라고 지적했다. 거기에는 파격적 보상과 화려한 번영이란 당근이 담겨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파워엘리트들의 이해충돌과 갈등, 수령 독재 체제의 폐해와 정치적 억압, 파탄에 이른 경제의 재건, 2400여 만 명 주민의 생존과 변화 욕구 등 김정은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요소가 꿈틀거리고 있다. 34세 청년 지도자에겐 해법 마련이 버거운 복합방정식이다. 적어도 30~40년 절대왕국 집권플랜을 꿈꾸고 있을 김정은에게 있어 진짜 적(敵)은 내부에 있을지 모른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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