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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취재] 국민 분노케 한 한진 총수 일가의 갑질 百態 

초콜릿부터 명품 가구까지 몰래 들여온 못 말리는 회장님 가족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물컵’으로 시작한 갑질 행태 가족 전체 탈·불법 폭로로 확산…‘갑질 적폐’ 본보기 초고강도 압박에 조 회장 일가 사면초가

작은 돌부리가 거대 항공 재벌을 자빠뜨렸다. 불과 3개월 전 ‘물컵 갑질’이 폭로됐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 했던 일이다. 대한항공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가족의 이야기다. 조씨 일가는 ‘갑질 적폐’의 표본이 됐다. 강도 높은 사정(査正)이 진행될수록 감춰져 있던 부조리가 넝쿨처럼 딸려 나온다. 조씨 일가에게 직원은 머슴이었고, 공공재(公共財)인 항공운수체계는 사적 소유물이었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5월 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조양호 일가 퇴진과 갑질 근절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한항공 사태의 발단은 ‘물컵’에서 비롯됐다. 지난 4월 중순이었다. 조현민(35) 대한항공 여객마케팅부 전무가 광고대행사와 회의 도중 물컵을 던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 전무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다. 2014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식기도 전에 나온 동생의 ‘갑질’은 꺼져가던 민심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평소 쉽게 흥분하고 막말을 쏟아내는 조 전무의 부적절한 태도들에 대한 증언이 쏟아졌다. 대한항공 익명 앱(app) 블라인드에는 “조 전무가 소속 부서 팀장들에게 심한 욕설을 일삼았고, 최근 1년여간 3~4번 팀장을 갈아치우는 인사 전횡을 저질렀다”는 글이 올라왔다.

SNS에는 ‘대한항공 갑질 비리 익명 제보방’이 만들어졌다. 직원들의 증언과 구체적인 물증이 쏟아져 나왔다. 폭로된 조 전무의 욕설 음성은 말 그대로 안하무인(眼下無人)이었다. 그의 폭언은 상대의 직급과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조 전무의 폭언과 욕설은 일상적이었다. 그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폭언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공개된 여러 음성 파일을 들어보면 조 전무는 자기 뜻과 다르거나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면 막말과 고성을 쏟아냈다. 스스로 분노를 삭이지 못 하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했다. 4월 20일에 공개된 음성 녹취 파일의 일부다.

“XX 시끄러워! 참, 또 뒤에 가서 내 욕 진탕 하겠지? 억울해 죽겠죠?… 사람이 정말 아우, 씨… 당신 월급에서 까요. 징계해! 나 이거 가만히 못 놔둬. 어딜! 징계하세요!”

‘물컵’이 일으킨 나비효과… 갑질 적폐 본보기로

그런데 폭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 전무의 어머니이자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갑질과 폭언을 일삼았던 게 드러났다. 과거 이씨의 운전기사 겸 수행비서였던 A씨(47)는 “언젠가는 갑질 문제가 터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언론에 이씨의 갑질을 폭로했다. 2011년 초에 수행 기사로 일했던 그는 3개월간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씨의 자택으로 출근해 직접 본 광경을 이렇게 전했다.

“첫날부터 깜짝 놀란 게, 집사로 일하던 B씨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뛰어다녔다. 집사가 조금만 늦어도 바로 ‘죽을래 XXX야’, ‘XX놈아, 빨리 안 뛰어 와’ 등의 욕설이 날아갔다. 당시 가정부로 필리핀 여자가 있었는데 아마 한국사람이었으면 버티지 못 했을 거다.” 결국 A씨는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

대한항공 전직 임원 B씨는 “오너가의 이런 행태가 일상화돼 있다”고 했다. B씨는 이 전 이사장을 ‘미세스 와이(Mrs. Y)’라고 불렀다. 대한항공 등 한진그룹 임직원이 이 전 이사장을 일컫는 일종의 ‘코드명’이다. 조 회장의 코드명 ‘DDY’에서 Y를 따왔다고 한다. 전직 임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전 이사장은 수시로 임직원들을 불러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폭언과 막말은 다반사였고, 이를 견디지 못 해 회사를 그만둔 이들도 여럿이었다고 한다.

이 전 이사장의 갑질 사례들이 쏟아지자 한진그룹은 서둘러 사과문을 냈다. 그러나 18가지 논란에 대한 해명이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반감만 키웠다. 한진그룹이 5월 9일 배포한 보도자료는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피해자를 비롯한 모든 분들께 사죄드린다’는 한 문장 외에 나머지는 모두 해명이었다. 폭언을 ‘고객으로서 당연한 문제제기’라거나, 업무 개선을 위한 ‘조언’으로 포장하는 식이다. 이를 본 시민들과 그룹 직원들은 “동영상 등 증거가 명백한 것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교묘하게 부정하고 있다”며 “진심어린 반성은커녕 오히려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반발했다.

벗길수록 드러나는 불법행위… 갖은 심부름에 밀수까지


▎한진그룹 총수일가는 직원에 대한 갑질과 위법 행위가 속속 드러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압박을 받고 있다. 왼쪽부터 조현민 전 전무, 조양호 회장, 조현아 전 부사장,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 조원태 사장.
도덕적 비판에서 시작된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갑질 행태는 불법행위로 이어졌다. 오너 일가가 대한항공과 임직원을 이용해 사치품 등을 밀수해 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5월 초 대한항공 외국지점에 근무했던 전 직원 C씨는 ‘온라인 대한항공 직원제보방’에 조현아·조현민 자매의 상습 밀수입을 증언한 음성 파일과 구체적인 정황 증거를 공개했다. C씨는 이 자료를 수사기관에도 제출했다.

녹취록은 대한항공 전·현 직원 3명의 대화로 구성돼 있다. 녹취록에 따르면 두 자매는 지난 9년간 외국에서 물건을 몰래 들여왔다고 한다. 수법은 이렇다. 조씨 자매가 외국의 특정 도시에 있는 면세점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품을 구매한다. 물건은 해당 지역의 대한항공 여객 지점을 거쳐 공항지점으로 이송되고, 한국행 비행기에 실린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대한항공 공항지점 직원이 이를 수령해 조씨 자매에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국내외 세관 당국의 검사도 없었다. 녹취록에 등장하는 한 직원은 “아무런 검사 없이, 허가도 없이 엄청난 불법이죠. 밀수죠. 그걸 9년 동안 제가 했어요. 일주일에 평균 2번 러기지(luggage·여행용 짐가방) 큰 거 하나, 중간 사이즈 하나”라고 증언했다.

취업비자 외국인 가사도우미로 불법 고용 의혹

밀수품 종류는 초콜릿이나 외국 과자 등 간단한 식품류부터 값비싼 명품 가방과 의류, 인테리어 소품, 가구 등 다양했다. 이 물품들은 특수화물로 분류됐다. 대한항공 총수 일가를 의미하는 ‘KIP(Koreanair VIP)’ 코드로 특별 관리됐다. 물품을 담아 국내로 들여올 빈 가방을 아예 해당 도시 지점으로 정기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한 직원이 촬영한 빈 가방 이송 목록을 보면 주 2~3회 빈 가방을 비행기에 실어 보낸 정황이 엿보인다.

직원들은 조씨 자매가 증거 인멸을 지시했다고도 주장했다. 증거 인멸을 시도한 시기는 2014년 언니인 조현아 전 부사장이 땅콩회항으로 물의를 빚었던 때다. 조씨 일가에 비판 여론이 집중되자 행여 꼬투리를 잡힐까 봐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녹취록에 나타난 증거인멸 정황에 대한 증언을 보면 이렇다.

A: 형은 지점장한테 받은 거야, 지시를? 증거인멸하라고?

B: 우리가 kti에 O차장님이라고 다 지워 버렸어.

A: 증거인멸 함부로 해도 돼?

B: 증거인멸은 우리가 보내고 이렇게 문답받은 거.

A: OOO? 부장이 시킨 게 아니고, kti가 시킨 거야?

B: 응.

A: 조현아, 이런 내용이죠? 조현민 물건 내역.

B: 그렇지… 에도 누군가가 담당자가 있을 거라고 인천에서 인천 담당자한테 간 메일이 있어요. 그거 다 지워 버리라고.

증거인멸 이후에도 조씨 자매의 밀수는 계속됐다고 한다. 다만 수입자 명의를 다른 사람으로 위장했다. 이를 증언한 한 직원은 “최근에는 세관에서 뭐라고 해서 변경된 내용이다. 그 전에는 정확하게 조현아 명의로 갔어요”라고 밝혔다.

또 조씨 자매가 지시한 반입 물품에 대한항공 회사 물품을 의미하는 ‘INR(Internal Non Revenue)’ 코드를 부여해 내역을 위장했다. INR 물품은 회사 안에서 지점·부서간에 주고받는 물건으로 보기 때문에 따로 운송료를 매기지 않고, 세관 통과도 비교적 자유롭다. 때로는 물품을 항공기 부품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총수 일가가 들여온 물건이 수입 화물 취급정보 상 품목은 ‘수입 일반화물’로, 품명에는 항공기 부품을 뜻하는 ‘Aircraft part’로 표기하는 식이었다. 항공기 부품은 관세나 부가가치세 등이 면제된다.

까다로운 공항 보안검색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직원 통로를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직원 통로도 세관의 통제 아래 있지만 실질적인 관리는 보안검색 요원에 의해 이뤄진다. 밀수입에 관여했던 한 직원은 이렇게 강조했다. “자꾸 이상한 짓을 해서 저랑 담당직원이랑 같이 (엑스레이 검사기로)찍어 본 적이 있어요. 몰래 가져 나와가지고. 폭탄을 넣었는지 알 수가 있나, 한두 번 궁금해서. 그땐 명품백이었어요. 밀수 맞아요, 밀수. 명품백에서부터 과자부터 필수품 이런 것도 다.”

최근에는 필리핀 출신 가사도우미를 불법으로 고용한 혐의도 받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이 전 이사장은 필리핀 가사도우미 10여 명을 대한항공 연수생 신분으로 위장 입국시킨 뒤 자택에서 가사도우미로 일을 시켜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국내에서 외국인이 가사도우미로 일하려면 출입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재외동포(F-4)나 결혼이민자(F-6) 외에는 가사도우미로 일할 수 있는 체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를 어겨 고용하면 3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전 이사장이 고용한 가사도우미는 일반연수생 비자(D-4)로 입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전 이사장은 6월 11일 서울 양천구 목동 서울출입국외국인청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그는 “불법 고용을 비서실에 직접 지시했느냐”는 취재진 물음에 “안 했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출입국당국은 필리핀 현지에서 가사도우미를 모집해 연수생으로 입국시키는 데 대한항공 마닐라지점과 인사전략실 등 한진그룹이 개입한 정황을 파악하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당근·채찍 냉온전략으로 수십 년간 직원들 입막음


▎이명희 이사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안전모를 쓴 하청업체 직원으로부터 서류를 뺏어 바닥에 던지는 모습. 해당 영상에는 직원들에게 삿대질하며 밀치는 등의 모습도 담겨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토록 오랫동안 계속돼 온 총수 일가의 횡포에 직원들은 왜 일찍이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당근과 채찍’ 전략 때문이다.

지난 4월 말 이 전 이사장 측이 갑질 피해자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침묵을 요구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피해자 D씨는 한 방송사와 인터뷰에서 4월 23일 인천의 한 카페에서 ‘김 소장’이라고 불리는 이 전 이사장의 집사에게서 거액을 제시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모님이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와서 합의금 일부를 줬다.”며 5000만원을 현금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 전 이사장 측이 피해자에게 입막음의 대가로 거액을 제시한 적이 이번만이 아니라고도 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전 운전기사도 돈을 받아서 나갔고, 운전 중 뒤에서 휴대전화로 맞은 기사는 억대로 받아서 나갔다”고 전했다. 대한항공 측은 “회사와 무관한 일이며, ‘김 소장’이란 인물도 알지 못 한다”고 밝혔다.

불법고용 의혹이 불거진 필리핀인 가사도우미들에게도 입막음을 한 정황이 나오고 있다. 12년간 조 회장 자택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했다는 한 필리핀 여성은 한 방송사와 인터뷰에서 “대한항공에서 나를 찾아오기 전에 먼저 왔더라면 모든 걸 말해 줬을 수도 있는데, 이미 지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버렸다”고 했다. 대한항공 측에서 이 여성을 찾아온 시기는 물컵 갑질 스캔들이 터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이 여성은 “지난달(4월)에 이미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면서도 ‘각서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대가를 받았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민주적인 사내 조직문화와 총수 일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직원들에게는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지난 5월 4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집회에는 참석자 대부분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거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신분이 노출될까 봐 지하철 역부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집회 장소로 이동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대한항공 조종사 정복을 입고 얼굴엔 가면을 쓴 한 집회 참가자는 “사측에서 현장 체증을 통해 참석자 신원을 파악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얼굴을 가렸다”며 “사내에서도 직원들을 감시하고 눈밖에 나면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 직원은 1만9000명 정도다. 그중 1만1000명이 소속된 노동조합이 있다. 하지만 노조는 직원들 편이기보다 어용에 가깝다는 게 직원들의 평가다. 직원들의 저항이 없었던 건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10년 가까이 ‘민주노조’ 건설 운동이 대한항공에 불었던 적이 있다.

1999년 조종사들이 노조를 결성하면서부터다. 자극을 받은 승무원들도 기존 노조 산하에 ‘민주객실승무지부’를 만들어 내부 개혁을 시도했다. 2000년에는 소위 ‘민주파’가 대의원 과반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사측은 집요하게 노조 와해 공작을 벌였다. 노조 후원금 모금을 문제 삼아 지도부를 형사 고소하고 사규 위반을 이유로 해고했다. 지리한 소송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민주노조는 이미 공중분해된 뒤였다. 집회에 참석한 한 전직 승무원은 “사측은 소송에서 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고나 중징계를 강행했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복직시키더라도 당장 노조를 무너뜨리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2014년 땅콩회항 사건을 폭로했던 박창진 전 사무장도 이후 사측의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며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박 전 사무장은 땅콩회항 사건으로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아 휴직했다가 2016년 5월 복직했다. 사측은 영어 능력이 부족하다며 그를 팀장에서 일반 승무원으로 강등했다. 박 전 사무장은 부당징계 무효확인 소송과 함께 조 전 부사장의 강요행위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손해배상 소송도 냈다. 박 전 사무장은 이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후두부에 양성종양이 발병해 수술을 받는 등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11개 기관 경쟁적으로 전방위 수사 압박


▎4월 21일 관세청 관계자들이 한진그룹 총수일가의 자택에서 압수수색 물품을 들고 나서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조씨 일가의 집요한 회유와 압박,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쉽사리 덮이지 않을 것이란 게 재계와 법조계 등의 중론이다. 정부가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한진그룹을 포위하고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어서다. 수사권과 감독권 등을 이용해 이번 사태에 개입하고 있는 정부 기관은 11개에 이른다. 조양호 일가 5명이 받고 있는 범죄 혐의와 의혹은 21개나 된다.

우선 검찰, 경찰, 관세청, 국세청, 법무부(출입국당국), 고용노동부 등이 경쟁적으로 조사와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경찰은 조 전 전무와 이 전 이사장의 폭행 혐의를 조사하고, 검찰은 한진그룹의 일감 몰아주기와 통행세 편취 등 횡령·배임 의혹을 들여다보고 있다. 국세청은 범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상속세 탈루 의혹을 집중적으로 캐고 있다.

이번 사정 작업은 전례 없이 강도가 높다. 두 달여 간 압수 수색만 11차례 실시됐다. 한진그룹과 대한항공 본사, 조 회장과 3남매의 자택 등에 각 기관마다 몇 차례씩 압수수색을 벌였다. 검찰이 3회, 경찰 2회, 관세청 5회,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이 1회 등이다.

눈여겨볼 점은 관세청의 태도 변화다. 관세청이 재벌 일가를 직접 압수수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한두 번도 아닌 5차례에 걸쳐 수시로 압수수색을 벌인 점을 두고 법조계에선 또 다른 포석을 염두에 둔 것이란 시각도 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관세청의 조사를 청장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문(53) 관세청장은 문재인 정부의 첫 관세청장이고, 검사 출신으로는 역대 세 번째다. 검찰에 근무할 때에는 마약조직수사부, 첨단범죄수사부 등 수사 경력이 풍부하다. 현 정부의 적폐 청산 기조와 발 맞춰 관세청 개혁이 그의 1차 과제다. 관세청은 대한항공과 유착해 조 회장 일가의 탈·불법 행위를 도왔거나 방조·묵인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례적인 5차례의 압수수색이 이런 외부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내부 적폐 발굴 시도라는 게 한 가지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은 전문수사기관을 적극 육성해 검찰의 수사권을 분산하려는 현 정부의 중장기 구상과 맞물려 있다. 관세청은 사법권을 가진 ‘특별사법경찰(특사경)’으로 지정돼 있어 검찰·경찰과 마찬가지로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권을 발동할 수 있다. 밀수를 수사하는 ‘경제 검찰’인 셈이다. 하지만 그 동안 관세청의 수사권은 제한적인 범위에서 이뤄졌을 뿐 이번처럼 자체적으로 대대적인 수사 역량을 발휘해 본 적이 없었다. 수사에 관한 자체 노하우가 부족했던 것도 큰 이유다.

그러나 범죄 수사 경험이 풍부한 검찰 출신 청장이 오면서 조직이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청장이 직접 수사 노하우와 전략 수립에 참여하고 지휘하면서 직원들도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관세청이 이번 수사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을 경우 향후 전문 수사 기관으로서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관세청의 선전은 특사경 권한을 가진 다른 기관에도 적지 않은 자극제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대한항공 조사에 참여하고 있는 농림축산검역본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출입국당국, 고용노동부 등이 이 같은 ‘선의의 경쟁자’들이다.

정부는 대한항공에 대한 특혜 정책 폐지카드를 내놨다. 38년간 유지해 온 정부항공운송의뢰제도(GTR)를 폐지하기로 한 것이다. GTR은 공직자가 공무상 해외 여행을 할 때 국적기를 우선 이용토록 하는 제도다. 대한항공은 1980년, 아시아나항공은 1990년에 각각 정부와 GTR 계약을 맺었다.

GTR 폐지로 절약되는 정부 예산은 연간 80억원 정도. 연 12조원에 이르는 대한항공의 매출 규모(2017년 기준 11조8028억원)에 비하면 전혀 타격을 주지 못 할 수준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 항공사’라는 대내외 인지도에 힘입어 성장해 온 점을 고려하면 상징적 의미가 크다. 마치 국영기업의 이미지를 풍기는 ‘대한항공’ 상호를 박탈해야 한다는 비판 여론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최대 ‘응징’인 셈이다.

깊어지는 조 회장의 고민… 피할 곳이 없다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태도도 심상치 않다. 국민연금기금 운용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5월말 기금운용위 차원에서 대한항공에 경영진 면담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국민연금은 한진칼 지분 11.81%와 대한항공 지분 11.67%를 보유하고 있다. 기업의 경영 자율성을 해칠 수 있어서 그동안 국민연금은 기업 경영활동에 가급적 개입을 꺼려 왔다. 그러나 이번 경영진 면담 요구에 대해 재계에선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통해 조 회장 일가의 경영권 견제에 나선 신호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당장 국민연금이 경영에 개입할 가능성은 일단 낮게 보고 있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 경우 경영진 교체 등 고강도 경영 쇄신도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민연금이 이처럼 행동주의로 기울 경우 엘리엇 등과 같은 헤지펀드처럼 기업을 휘두르는 또 다른 행동주의 펀드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신중할 수밖에 없겠지만, 국민적 비난 여론이 높은 만큼 국민연금이 경영활동 전반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그 시기와 강도는 침묵 속에 장고(長考)에 들어간 조 회장이 내놓을 자체 쇄신안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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