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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18)] 전국적으로 확대된 위정척사파의 반발 

고종, 충성과 반역 논리로만 대응하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양반은 물론 백성들도 정(正) 대 사(邪)라는 논리에 호응…당혹스러운 황제, 청나라 권위에 기대 ‘권위’ 회복하려 해

▎구한말 호위대에 둘러싸인 고종 황제의 모습이 실린 프랑스 일간지 [프티 파리지앵]의 1894년 8월 12일자. 이 신문은 고종 황제가 국토의 면적과 길이가 이탈리아와 비슷한 조선을 통치하고 있으며, 수도 서울의 인구는 25만 명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동인은 밀사 임무를 마치고 1880년(고종 17) 10월 30일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정확히 언제 한양에 도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일본에 갈 때 열흘 걸렸던 사실을 고려하면 올 때도 그 정도 걸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이동인은 11월 10일 전후로 한양에 도착했을 듯하다.

귀국 보고에서 이동인은 밀사 임무가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했을 것이다. ‘연미국(聯美國)’을 추진하겠다는 이동인의 밀보(密報)에 하여장이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미국’은 하여장이 권고한 것이므로 그가 공개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동인은 사토를 만나 영국과의 수호통상은 물론 그 외 서구열강과의 수호통상 가능성도 암시해 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동인은 미국은 물론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의 수호조약도 문제없다고 장담했을 듯하다.

서구열강과의 수호조약 및 외교통상은 근대 외교이므로 그것을 담당할 정부조직이 필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친중국’과 ‘결일본’을 담당할 정부조직도 필요했다. 이홍장이 권고한 ‘친중국’은 조선이 기왕의 사대외교를 넘어 청나라의 무기체계와 군사제도를 수용하고 나아가 군사 유학생도 파견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이홍장은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원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적극 돕겠다고 제안했다.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는 청나라의 국익을 위해서였다. 조선이 청나라의 무기체계와 군사제도를 수용하게 되면 청나라는 사실상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무기 시장도 독점하게 됨으로써 막대한 이익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1879년 7월부터 고종과 이홍장은 밀서를 이용해 군사유학생 파견 및 조선군 개혁 문제를 본격적으로 협상했다. 당시 이홍장은 우선 조선의 중앙군을 3만 명으로 확장하고 그 3만 명을 근대화하고자 했다. 즉 중앙군 3만 명을 기마병 3000명, 포병 3000명, 보병 2만4000명으로 편제하고 중국 근대무기로 무장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홍장은 그렇게 근대화된 조선군을 이용해 러시아와 일본을 막고자 했다. 그렇게 하려면 조선군 내부에도 중국 근대무기를 다룰 줄 아는 군사기술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홍장은 군사 유학생을 보내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의 군사 유학생을 받겠다고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건국 이후 500년 가까이 조선은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지 못 했다. 명나라는 물론 청나라에서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정 이후 조선군 근대화를 고심하던 고종은 군사 유학생을 보내라는 이홍장의 권고에 적극 화답했다.

1880년 5월 25일, 고종은 군사 유학생 선발을 명령하고 그 사실을 이홍장에게 알렸다. 이홍장은 필요한 조치를 취한 후 즉시 회답했다. 고종이 그 회답을 받은 때는 1880년 11월 1일이었다. 그때부터 군사 유학생 선발 및 군 개혁문제가 본격 논의됐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조직 개편문제가 대두했다.

그런데 조선의 유학생 파견과 군 개혁에 관해서는 일본 역시 큰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일본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는 물론 군 근대화도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그런 제안들을 고종은 [조선책략]의 ‘결일본’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결일본’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정부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통리아문 실무 주도한 이동인 실종사건


▎강화도조약 당시 한·일 양국의 협상 테이블을 그린 그림.
이동인이 귀국한 1880년 11월 10일 이후 정부조직 개편은 급물살을 탔다. 아마도 이동인은 근대화 추진에 필요한 정부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적극 개진했을 것이다. 그 의견에 개화파 인사들과 고종이 호응함으로써 정부조직 개편이 급물살을 타게 됐을 듯하다. 1880년 12월 5일, 고종은 유학생 파견, 군 개혁, 외교 문제 등을 전담할 아문(衙門) 설립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조정 중신들에게 그 아문의 명칭과 조직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에 따라 1880년 12월 20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립됐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 기구는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모델로 했다. 총리각국사무아문의 이름이 길어서 총리아문으로 약칭됐듯 통리기무아문 역시 통리아문으로 약칭됐다. 또한 총리아문에 외교와 통상 그리고 해방을 담당하는 부서가 설치된 것처럼 통리아문에도 외교와 통상 그리고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가 설치됐다.

통리아문에서 외교 담당 부서는 사대사(事大司)와 교린사(交司)였다. 사대사는 청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했고 교린사는 일본을 비롯해 장차 수교할 서구열강과의 외교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통상담당 부서로는 통상사(通商司)와 어학사(語學司)가 있었다. 그 외 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군물사(軍物司)·선함사(船艦司) 등 8개 부서에서 국방을 분담했다.

통리아문의 최고책임자인 총리는 대신 중에서 선발됐다. 또한 원로대신들은 도상(都相)으로 겸임 발령됐다. 이로써 통리아문에는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참여하게 됐다. 또한 이동인처럼 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을 참모관에 발탁하는 등 젊은 개화파 인재들을 흡수하기도 했다. 1881년부터 본격화된 고종의 개화정책은 바로 이 통리아문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영선사 파견, 신사유람단 파견, 별기군 설치, 미국 등 서구열강과의 수호조약 체결 등이 통리아문의 주도로 추진된 개화정책이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은 총리아문을 주도한 공친왕과 서태후의 신임을 받는 이홍장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통리아문이 설치된 후 조선의 개화정책 역시 비슷하게 추진됐다. 통리아문의 개화파 인물들 그리고 왕비 민씨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민영익이 당시의 개화정책을 주도했다. 물론 민영익의 핵심 참모는 이동인이었다. 따라서 통리아문에서 제시된 각종 개화정책은 사실상 이동인이 기획하고 민영익 등 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1년 2월 26일, 통리아문에서는 청나라에 군사유학생을 보내기 위해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자고 요청했다. 군사유학생을 천진에 보내 무기제조법을 배우게 하자는 취지였다. 곧바로 고종의 승인이 떨어졌다. 그날로 조용호가 영선사로 결정됐고, 수행인원과 경비도 확정됐다. 영선사는 모든 준비가 끝나는 4월 11일에 출발하기로 결정됐다.

영선사에 앞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할 신사유람단 즉 조사시찰단을 선발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성취한 발전상을 직접 시찰하고 조선 개화정책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사시찰단은 공식적으로 파견되지 못 했다. 위정척사파의 반발을 우려한 고종은 시찰단원들을 동래 암행어사로 발령해 비밀리에 일본으로 가게 했다.

1881년 1월 11일에 박정양·조영준·엄세영·강문형·심상학·홍영식·어윤중 등 7명이 동래 암행어사로 발탁됐다. 이어서 2월 2일에는 이헌영·민종묵·조병직·이원회 등 4명이 동래 암행어사로 선발됐다. 고종은 이들 중에서 이원회를 통리아문의 참획관(參劃官)에 임명하고 통리아문의 참모관 이동인으로 하여금 수행하게 했다. 이들에게는 군함과 총포 구입을 비밀리에 협상해 보라는 밀명이 주어졌다. 하지만 2월 15일에 참모관 이동인이 갑자기 실종됐다. 왜 실종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화를 반대하는 측의 공작일 듯하다. 당시 이동인은 통리아문의 실무를 주도하고 있었다. 조사시찰단 파견은 물론 영선사 파견도 이동인이 주도했다.

위정척사파, 만인소 중심으로 결집 꾀해


▎고종 황제의 친부인 흥선대원군.
그런데 조사시찰단원 중 홍영식과 어윤중은 민영익과 자주 어울리던 8학사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사시찰단의 핵심은 이동인·홍영식·어윤중 3명이었다. 이들 3명은 시찰 이외에 특별임무를 맡았다. 어윤중과 홍영식은 미국과의 수호조약에 관련된 문제들을 조사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또한 어윤중은 유길준·윤치호 등 자신의 수행원들을 유학시키라는 밀명도 받았다. 이동인은 군함과 총포 구입을 협상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이 같은 특별임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군함과 총포 구입 협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동인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이동인의 실종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에게 크나큰 타격이었다.

당시 고종의 개화정책은 통리아문에 참여한 개화파와 일부 중앙관료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의 양반·관료는 개화정책에 반대였다. 처음에 양반·관료들은 상소문으로써 개화정책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것은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의 상소문부터 시작됐다. 유원식은 상소문에서 김홍집 처벌과 더불어 서원 복설(復設)을 요구했다. 사학(邪學) 천주교를 옹호하는 [조선책략]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와 왕에게 올린 김홍집은 처벌받아 마땅하며, 조선의 국시(國是)이자 정학(正學)인 주자성리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서원 복설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원식처럼 천주교를 사학으로 배척하고, 주자성리학을 정학으로 보위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위정척사라고 했다. 위정척사파는 고종의 개화 정책을 조선 유교 문명의 파탄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위정척사파는 ‘친중국’ ‘연미국’ ‘결일본’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책략]을 가져온 김홍집 처벌 및 주자성리학의 부흥을 위한 서원 복설을 요구했다. 위정척사파는 고종의 개화정책을 사(邪)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반대활동을 정(正)으로 규정함으로써 당시 상황을 정학과 사학의 대립구조로 논리화했다.

그 같은 위정척사파의 공격을 고종은 충성과 반역의 논리로 극복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개화정책에 찬성하는 것이 충성이고 반대하는 것은 반역이라고 논리화했던 것이다. 그 같은 논리에서 고종은 유원식을 반역으로 단정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왕의 위력으로 위정척사파의 반대를 제압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충성과 반역이라는 고종의 논리는 위정척사파를 위시한 조선양반들에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왕권보다는 주자성리학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원식 처벌 이후에도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의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고종은 그들을 엄벌에 처함으로써 개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고종이 개화 반대 상소를 올리는 양반·관료들을 엄벌하자 위정척사파는 만인소(萬人疏)로 대응했다. ‘만인소’란 ‘1만 명이 서명한 상소문’이란 뜻이었다. 1만 명이 서명한 만인소가 등장하려면 하나의 도에 거주하는 유생 전체가 가담해야 가능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만인소가 갖는 정치적 파급력은 아주 컸다. 만인소가 성립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 양반들의 여론이 만인소로 결집됐음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위정척사파의 만인소는 영남에서 시작됐다. 1880년 11월 1일 안동 도산서원에서 있던 유생 모임이 영남만인소의 도화선이었다. 그날 안동 유생들은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척사통문(斥邪通文)을 각 고을의 서원·향교 등에 발송하면서 11월 25일 영남유림의 회합을 개최하겠다고 알렸다. 그 척사통문에 따라 유생 800여 명이 안동향교에 모였다.

황제 비난한 홍재학 처형… 타협점 찾기 더 어려워져


▎고종 황제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셋째 아들 영친왕, 고종 황제, 순종 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그들은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소두(疏頭)로 추대하는 등 만인소 작성에 필요한 업무를 분담했다. 아울러 1881년 1월 20일 상주 산양에서 모이기로 하고, 상소문 초안을 작성해 올리도록 각 고을에 알렸다. 1881년 1월 20일, 상주에 모인 유생들은 강진규가 작성한 초안을 만인소 원본으로 결정하고 2월 4일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2월 18일 소두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300여 명의 영남 유생은 한양에 도착했고, 다음 날부터 복합(伏閤)해 만인소 접수를 요구했다. 소문을 듣고 온 유생들이 참가함으로써 복합 유생은 400여 명으로 늘었다. 2월 26일, 고종은 영남만인소를 봉입하라고 명령했다.

개화정책 취소와 주자성리학 보위(保衛)를 요구하는 만인소를 받아보고, 고종은 조정 일에 관심을 갖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영남만인소를 올린 유생들을 어린애 취급함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남 유생들은 계속 복합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라 주장했다. 그 같은 영남 유생들의 행동에 대해 고종은 회유책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소두 이만손 등을 유배형에 처했다. 충성과 반역의 논리를 영남 유생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1881년 4월, 영남만인소에 자극받은 전라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 유생들까지 복합해 만인소를 올리게 됐다. 고종의 충성과 반역 논리는 유생들에게도 별로 호소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 팔도의 유생들이 연이어 만인소를 올리자 고종도 위력으로만 누를 수 없게 되었다. 1881년 5월 15일, 고종은 사학(邪學) 천주교를 배척하고 정학 주자 성리학을 보위하겠다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고종의 충성과 반역 논리가 위정척사파의 정학과 사학 논리에 굴복한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정척사파는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1881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팔도의 유생 수백 명이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집단으로 대궐 앞에 몰려가 한 달이 넘도록 복합하며 개화정책 취소 및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양상은 과격해졌고 논조도 격렬해졌다. 위정척사를 요구하는 유생들은 개화파뿐만 아니라 고종까지도 거세게 비난했다.

예컨대 1881년 윤7월 6일에 강원도 유생 홍재학 등이 올린 상소문에서는 고종을 무식한 왕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고종이 무식해서 개화정책을 주장하는 무리들에게 놀아난다는 비난이었다. 아무리 고종의 개화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군신간의 윤리가 중요시되던 조선시대에 군주에 대해 신하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재학은 공개 상소문에서 감히 그렇게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홍재학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고종이나 개화파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셈이었다. 신하가 왕을 인정하지 못 하겠다면 그것은 곧 역모나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윤7월 8일에 홍재학을 체포해 조사한 후 범상부도(犯上不道)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재산도 몰수했다.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는 역적이라 공포한 셈이었다. 고종과 위정척사파는 타협점을 찾기 어렵게 됐다.

위정척사파는 고종을 폐위함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흥선대원군과 손잡았다. 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이복형 이재선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재선은 고종보다 10세 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재선은 본성이 용렬해 숙맥도 분간하지 못 할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는 이재면의 그런 어리석음을 이용해 쿠데타를 감행하려 했다. 최초 주모자는 충청도 출신의 유생 강달선으로서 그는 홍재학과 함께 복합상소운동을 주도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27세이던 강달선은 유생들의 힘으로 고종을 축출하고 개화정책을 끝장내려 했다. 그리고 이재선을 포섭해 흥선대원군의 협조를 받으려 했다.

복합상소운동이 절정이던 7월에 강달선은 이재선을 여러차례 방문해 안면을 익혔다. 그렇게 서로 간에 익숙해진 어느 날 강달선은 ‘벌왜(伐倭)’에 관해 이재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타진했다. 벌왜는 위정척사파가 고종에게 개화정책을 취소하라 상소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위정척사파가 직접 나서서 일본 사람들을 쫓아내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조선과 수교한 일본의 공사관이 서대문 밖 천연정에 있었는데, 천연정을 습격해 그곳의 일본인들을 모조리 쫓아내자는 주장이 벌왜였다. 벌왜는 위정척사를 명분으로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주장이었지만 실제는 그 기회에 궁궐을 습격하고 고종을 붙잡아 폐위하려는 쿠데타 명분이었다.

이재선은 강달선의 ‘벌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벌왜를 명분으로 하는 쿠데타가 성공해 고종이 폐위된다면 다음 왕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리석고 또 권력에 눈이 먼 이재선은 그 자리에서 강달선에게 포섭됐다. 이후 강달선은 안기영·권정호 등 흥선대원군 측근들을 차례로 포섭했다. 이재선 역시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쿠데타 모의는 이재선·안기영·권정호·강달선을 중심으로 구체화됐다.

그런데 이재선은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할 때 ‘큰사랑의 뜻도 이와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큰사랑이란 바로 흥선대원군을 지칭했다. 이런 사실로 미뤄볼 때 이재선은 강달선으로부터 ‘벌왜’ 계획을 듣고 곧바로 흥선대원군에게 알렸으며, 흥선대원군은 ‘벌왜’를 이용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네가 벌왜를 주장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크게 쓰일 것’이라는 말로 이재선을 부추겼다. 흥선대원군 역시 어리석은 이재선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심산이었다.

‘벌왜(伐倭)’ 앞장섰던 이복형의 허욕(虛慾)


▎구한말 카메라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 유생들과 서양 선교사들.
흥선대원군의 세 아들 중 셋째인 고종이 왕이 된 것은 철종 사후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미성년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881년 복합상소운동 당시 위정척사파가 쿠데타를 모의할 때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할 수 있는 인물은 처지로 보거나 자질로 볼 때 이재선보다는 이재면이 적격이었다. 이재면은 적자였고 또 자질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것과 같은 이유로 이재면은 왕으로 추대될 수 없었다. 당시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위시킨 후 허수아비 왕을 내세우고 정치와 외교를 주도하려 했다. 그렇게 되려면 이재면보다는 이재선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윤용은 매국노로 유명한 이완용의 서형(庶兄)인데 흥선대원군의 사위이기도 했다. 이윤용의 부인이 이재선의 동복 여동생이었으므로 이윤용은 이재선의 처지나 흥선대원군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이윤용이 보기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재선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는 흥선대원군의 잔혹함에 이윤용은 치를 떨었다. 이윤용의 생각대로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쿠데타가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모두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웠다. 성공한다면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다. 반면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이재선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올 계획이었다.

어리석은 이재선은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이 왜 자신을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하려는지 깨닫지 못 했다. 단지 ‘벌왜’라는 대의명분과 ‘왕이 될 수 있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열심히 뛸 뿐이었다. 이재선은 자신이 이용되는지도 모른 채 ‘왜놈들을 몰아내고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떠벌리며 사람들을 포섭하느라 분주했다.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이 구상한 쿠데타 계획은 거창했다. 그들은 8월 21일로 예정된 과거시험을 이용해 거사하기로 했다. 그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수천 명의 유생을 선동해서 일부는 서대문 밖의 일본공사관을 공격해 일본인을 몰아내고 또 일부는 창덕궁을 공격해 고종을 폐위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수천 냥의 거사자금과 1000여 명의 쿠데타군을 모집하기로 했다. 1000여 명의 쿠데타군이 반으로 나뉘어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서대문 밖의 일본공사관을 공격하고, 나머지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창덕궁을 공격해 고종을 폐위시킨다는 계획은 그 자체만으로는 훌륭했다. 게다가 창덕궁을 공격하는 쿠데타군의 선봉에 이재선을 앞장세움으로써 궁궐 경비병들이 순순히 문을 열고 항복하게 만들자는 계획은 치밀하기까지 했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쿠데타 주모자들을 만나 진행과정을 보고받으며 성패를 주시했다.

거사를 하루 앞둔 8월 20일 한밤중에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은 한자리에 모여 거사 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정했던 거사 자금과 쿠데타군이 거의 모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막상 목숨을 내놓고 쿠데타에 나서겠다는 사람은 적었다. 그럼에도 쿠데타 주도자들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유생들을 선동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거사시간은 해시(亥時, 오후 9~11시)로 잡았다. 이런 내용이 21일 아침 7시께 흥선대원군에게 전달됐다.

보고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는 쿠데타라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확인 결과 강달선 등은 정말로 쿠데타군을 거의 모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강달선 등을 ‘금품을 갈취하려 사람들을 선동한 사기꾼’으로 몰아 체포했다. 이들을 체포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은 만약의 경우 쿠데타 모의가 누설되더라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든 셈이었다. 그간 자신이 이들과 접촉한 이유는 역모를 정탐하기 위해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해서 8월 21일로 예정됐던 쿠데타 모의는 흐지부지됐다.

수포로 돌아간 쿠데타, 사사(賜死) 면치 못 한 이재선

그렇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재선·안기영·권정달 등이 중심이 돼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쿠데타 모의를 추진했다. 그들은 쿠데타의 성패는 군사력에 있다고 보고 군사를 모으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먼저 300명 정도의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점령한 후 강화도의 군사들과 함께 한양을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8월 29일로 잡았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300명 정도의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공격하려면 수만 냥의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모금되지 않았다. 자금 모금이 지지부진하고 군사들도 모집되지 않자 내부에서 변절자가 나타났다. 8월 28일 이선풍의 고변에 의해 쿠데타 전모가 드러나게 됐다. 이선풍의 고변서에는 물론 이재선도 들어 있었다. 이재선은 8월 29일 포도청으로 자진 출두했다. 앞뒤 정황으로 볼 때 흥선대원군이 자진 출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처음 이재선은 쿠데타에 관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고 잡아뗐다. 자신은 생긴 것도 변변치 못하고 정신도 변변치 못해 쿠데타를 도모할 만한 인물이 아닐뿐더러 집 밖을 나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관련자들과의 대질신문을 통해 하나 둘 진상이 밝혀졌다.

조사 결과 쿠데타 주모자는 이재선으로 귀결됐고, 흥선대원군은 빠져나갔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고종은 처음에 이재선을 제주도로 유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사형을 요청하는 신료들의 요청에 결국에는 사사(賜死)에 처했다. 사사의 논리는 물론 충성과 반역이었다.

이처럼 고종은 위정척사파의 공격에 충성과 반역 논리로만 대응했다. 하지만 그런 논리만으로는 정학과 사학이라는 위정척사파의 논리를 극복하지 못 했다. 조선 양반 나아가 조선 백성들은 충성과 반역보다는 정학과 사학이라는 논리에 더 호응했다. 정학이라는 논리에는 조선의 자존심과 주체성이 내재됐지만, 충성이라는 논리에는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화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충성과 반역 논리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고종은 그것을 청나라의 권위에서 찾으려 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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