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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28)] 서대문형무소 1호 순국의사 왕산(旺山) 허위 

대한제국의 의병총대장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경기 의병 총수로 이인영과 함께 서울진격작전 펼치다 일제에 체포돼…동양평화론 계승한 안중근 의사, 왕산 순국 1년 뒤에 이토 히로부미 처단

▎경북 구미시 임은동 생가 터에 있는 왕산선생기념공원. 왕산의 종손자 허벽씨가 공원조성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존경하는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낭독한 광복절 경축사의 한 대목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석주 선생과 가족의 사연은 비장하기만 하다. 잊혔던 임청각은 안동의 새로운 답사 장소로 떠올랐다.

석주 가족 속에는 또 다른 독립지사 가문이 들어 있다. 망명지에서 이루어진 자녀의 혼인을 통해서다. 석주의 손녀 이후석 여사는 서간도로 이주한 뒤 그곳에 도피해 있던 의병장의 아들 허국과 결혼했다. 독립운동 집안의 운명적 만남이다. 사돈이 된 의병장 역시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 선생이다.

6월 보훈의 달을 앞두고 왕산 선생의 발자취가 궁금해졌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구미다. 5월 18일 고향에 세워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을 찾았다. 경부고속도로 남구미IC로 진입해 2㎞를 진행하자 공단교 다리 앞에 ‘왕산로’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왕산로의 남쪽 끝이다. 왕산로를 따라 금오산 줄기인 나월봉 자락으로 들어서자 기념관이 나타났다.

취재 소식을 듣고 문중을 대표해 서울에서 선생의 종손자 허벽(84)씨가 내려왔다. 구미시의 박종수 문화관광담당관도 찾아왔다. 일행은 기념관의 안내로 먼저 왼쪽에 자리한 왕산의 묘소에 들렀다. 비석에는 ‘13도 의병총대장 순국의사 왕산허위지묘’라 새겨져 있었다.

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안동대 김희곤(63) 교수는 “왕산은 항일운동의 첫 장인 의병(義兵, 백성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전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며 “관직에 있으면서 유림 등의 항전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냈다”고 정리했다. 일제는 한동안 왕산을 김천의 골짜기에 강제 유폐시킨다. 그러나 끝내 의병을 일으키고 동대문으로 진격하는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한다. 묘소에 참배한 뒤 선생이 순국한 마지막 한 해를 돌아봤다. 1908년이다. 을사조약 체결로 나라는 백척간두에 있었다.

종2품 의정부 참찬에서 의병 총대장으로


왕산은 종2품 의정부 참찬을 지내고 당시 경기 의병의 총수로 떠오르고 있었다. 허위는 마전·적성 등지에 머물며 가평 일대에 활약하던 이인영과 연락한다. 의병은 들불처럼 확산됐다.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이 조직된다. 창의(倡義)는 의병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허위와 이인영 두 부대가 주축이었다. 여기서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일제 통감부가 설치된 서울로 진군하자는 격문을 발송한다. 전국 의병이 양주로 속속 집결했다. 허위 의병부대 2000여 명 등 48진 1만여 명이 모였다. 이인영이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허위는 군사장을 맡았다.

1908년 1월말 서울진공작전이 개시된다. 허위는 부대별로 동대문 밖에 집결시킨 뒤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직접 진격했다. 동대문이 30리 남았다. 그때 유고(有故)가 생긴다. 후발 본대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했다.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의 지휘권을 허위에게 넘기고 급거 귀향한다. 의병은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지만 정보는 사전 누설되고 화력과 병력은 절대 열세였다. 서울 진공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항일 의병사의 유일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서울진공작전 길 3.3㎞는 지금 왕산로(청량리∼동대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허위는 이후 임진강·한탄강 유역으로 물러나 항전을 계속한다. 전투는 5월까지 이어졌다. 왕산은 부하를 서울로 잠입시켜 ‘통감부를 철거하라’ ‘태황제(고종)를 복위시키라’ 등 30여 가지 조건을 통감부에 제시하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싸울 것을 천명했다. 일제가 빼앗아간 국권을 회복하고 한국에서 물러날 것을 압박한 것이다.

그해 6월 변고가 생긴다. 포천에 머물던 허위는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 헌병에 포로로 잡혔다. 서울로 압송된다. 일제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게 누구며 대장은 누구냐”고 묻자 허위는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伊藤博文)요 대장은 바로 나”라고 답했다. 재판관이 이유를 묻자 왕산은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병을 일으킨 게 이토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고 되물었다. 허위는 9월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서대문형무소 1호 순국이었다. 허위는 54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유서(遺書)에 “우리나라 주권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토록 한다면 후생이 두렵다는 옛말과 같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적었다. 동양평화를 주창한 것이다. 왜승(倭僧)이 형 집행에 앞서 독경을 준비했다. 그는 일갈했다. “충의의 귀신은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 도움을 받아 복을 얻으랴.”

허위는 사형된 뒤 야산에 버려졌다. 박상진이 스승 허위의 시신을 간신히 수습해 장례를 치른다. 박상진은 광복회를 결성하고 청산리전투를 이끈 독립지사다. 허위의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로 계승됐다. 왕산이 순국한 1년 뒤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기어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다. 안중근은 거사 후 5차 공판에서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 같은 국욕(國辱)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라 평했다.

맏형 허운 3000두락 토지 팔아 의병 군량으로


▎장손자 허경성씨가 왕산의 유서를 펼쳐 보이고 있다.
제자 박상진은 스승을 김천 지경리 금오산 8부 능선에 묻었다. 금오산 땅 선산이 고향이란 말을 떠올리고서다. 왕산선생기념사업회는 2012년 묘소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당시 이장작업에 참여했던 기념관 연규만(57)씨는 “신장이 180㎝ 가까운 기골이 장대한 선생은 순국 당시 모습이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묘소 오른쪽으로 선생의 위패를 모실 사당 경인사(敬仁祠)가 조성 중이다, 구미시의회가 관련 예산 승인을 미루면서 공사가 미완이 돼 왕산을 기리는 향사는 올해도 올리지 못했다. 시의회는 다른 문중 출신 독립지사의 현창을 언급하며 예산 처리를 미뤄 구미시와 기념사업회는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기념관 언덕을 내려와 임은동 가운데 위치한 왕산선생기념공원에 들렀다. 왕산의 생가가 있던 자리다. 공원 대나무 벽 앞에 왕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갓을 쓴 선비 왕산이 두루마리를 거머쥔 모습이다. 동상의 벽면에는 소년 허위가 지은 시와 유서가 새겨져 있다.


▎1904년 허위를 ‘서리 평리원재판장’에 임명한 칙명.
허위는 부유한 집안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7세에 글을 짓기 시작했다. ‘月爲大將軍(달은 대장군이 되고) 星爲萬兵隨(별들은 군사가 되어 따르네).’ 소년 시절 대장의 뜻을 키운 시다.

허위는 15세에 [시경] [서경] [역경] 등을 독파하고 [손무자] [육도삼략] 등 병서와 병법을 연구했다. 전술도 익혔다. 그래서 형 허훈은 “학문에선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게 없지만 포부와 경륜은 아우에 미치지 못 한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였을까. 허훈은 1905년 물려받은 토지 3000두락을 팔아 허위가 이끌던 의병의 군량으로 충당한다. 그 아우에 그 형이다. 허위는 10대 후반 후배를 가르치는 등 학문에 심취했으나 시국이 어려워지자 의병운동을 구상한다.

1894년 40세 허위는 붓을 던지고 구국 대열에 나선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1896년 왕산은 김천·상주·선산 유생이 창의한 김산의진의 기치를 들었다. 1차 의병 활동이다. 이기찬이 대장으로 추대되고 허위는 참모를 맡았다. 김산의진은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한다. 허위는 형 허훈이 은거하던 청송 진보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왕산의 내공이 알려진다. 1899년 갑신정변 내각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신기선(申箕善)은 왕산을 벼슬에 천거한다. 원구단 참봉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는 두 달이 못돼 성균관 박사가 되고 5년 만에 당상관에 올라 평리원 수석판사와 재판장(대법원장 격), 나아가 의정부 참찬과 비서 원승 등 요직을 지낸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허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고담준론을 좋아하고 천하를 경륜할 역량을 지녔다. 10여 년 서울에 있었으나 권문세가를 상대하지 않고 항상 한적한 여관에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영남의 관로에 오른 사람들이 그를 지모 있는 선비로 임금님에게 알렸다.(…)”

허위는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나라만 생각했다. 그는 당시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친(親)러 정객 이용익을 탄핵했다. 또 평리원 판사 시절에는 ‘한일의정서’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전 국민이 의병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또 친일단체 일진회에 분연히 맞섰다.

곤궁한 처지에서도 생가 터 구미시에 기부


▎1. 금오산 나월봉 자락에 들어선 왕산허위선생기념관. / 2. 기념관 왼쪽 언덕에는 이장된 왕산 선생의 묘소가 있다. / 3. 갓을 쓴 선비 모습을 형상화한 왕산 선생의 동상.
임은동 기념공원은 왕산가의 나라 사랑이 지금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왕산의 장손 허경성(92) 옹은 전세를 살면서도 조상이 살던 터 1990㎡(602평)를 2005년 구미시에 기부했다. 왕산이 체포된 뒤 가족이 일제의 핍박을 견딜 수 없어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 뒤 은행 대출로 다시 사들인 땅이다. 허 옹은 구미시의 기념관 구상을 듣고 큰 재산을 기꺼이 내 놓았다. 구미시 박종수 문화관광담당관은 “생가는 폐허가 돼 있었다”며 “복원을 검토했지만 근거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구미시가 2007년 공원으로 꾸민 이유다. 박 담당관은 “기부 받은 땅이 시가 20억원 가량”이라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공원을 둘러본 뒤 기념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도중에 왕산초등학교가 보였다. 구미시는 도로 이름으로 학교 이름으로 독립유공 최고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허위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인근에는 선산이 낳은 기라성 같은 인물의 흔적이 함께 한다. 남쪽으로 4분 거리에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가 있고 서쪽으로 7분 거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자리한다.

왕산기념관을 관람했다. 입구에 ‘100년 만에 만난 사촌들’ 사진이 있었다. 허벽씨는 “2009년 기념관 개관에 맞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키르기스스탄·우크라이나 등지에 흩어진 후손을 찾아내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고 말했다. 20여 명은 당시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왕산이 쓴 유서가 전시돼 있었다. 아쉽게도 복사본이다. 짧은 생애도 정리돼 있었다. 김교홍 기념관장 겸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왕산 선생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나 독립운동의 길을 연 의로운 선비였다”고 회고했다. 기념관에 덧붙여 한국수자원공사는 구미시 해평면 제5공단에 왕산 집안 독립운동가 13인을 조명하는 ‘왕산광장’을 만들고 있다.

구미를 떠나 대구로 이동했다. 왕산의 장손 허경성 옹과 용케 연락이 닿았다. 대구 산격동 주택으로 찾아갔다. 1층은 세를 준 중국음식점이고 2층이 살림집이다. 인사를 나눈 뒤 먼저 대구에 정착한 사연을 들었다. 할아버지의 거사 이후 가족은 서간도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돌아다녔다. 아버지는 한의사였다. 허 옹은 1927년 만주 산시(山市)에서 태어나 목단강 부근에서 살았다. 1945년 러시아가 만주를 침공하자 공산화를 피해 이듬해 어머니·동생들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 왔다. 호구지책을 위해 대구시의 임시직원으로 부동산중개업을 하다 마지막엔 중국음식점을 하며 자장면을 배달했다.

자장면 배달해야 했던 대한민국장 독립유공자 후손


▎왕산 선생의 위패를 모시게 될 사당인 경인사.
“어렸을 적엔 할아버지를 잘 몰랐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할아버지를 만난 노인들 얘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인정이 많아 걸인이 있으면 같이 식사하셨답니다.”

아버지는 여태 소식을 모른다. “할아버지의 유서와 교지 등 유품은 큰아버지 처가에서 다락방에 숨겨 보관해 왔답니다. 한국에 들어온 뒤 넘겨받았지요.”

유품을 보고 싶었다. 허 옹은 보자기에 고이 싼 ‘왕산선생 수묵’을 펼쳐 보였다. 유서 등이 단정하게 첩(帖)으로 정리돼 있다. ‘父奠未成(부전미성)…’ 먹글씨로 유서는 시작된다. “아버지의 장례를 아직 지내지 못하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도 못하고 효도 못해 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순국 직전에 써내려 간 선생이 한스러워한 충과 효가 뭉클 다가왔다. 또 다른 한 보자기에는 1904년 ‘서리 평리원재판장’으로 임명받은 칙명(勅命, 황제가 발급한 명령서) 등이 있었다. 허 옹은 귀가 어두워 부인 이창숙(86) 여사가 중간에서 말을 옮겨 주었다. 집 안 살림은 조촐했다. 대한민국장 독립지사 후손은 가난해 보였다.

이날 이묵 구미시장 권한대행은 왕산의 방계 후손인 허벽 씨를 구미에서 만났다. 이묵 대행은 공교롭게도 석주의 방계 후손이다. 독립운동으로 맺어진 윗대 양가의 인연을 되짚었다.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그대로 석주와 함께 왕산의 삶은 이 시대를 사는 국민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박스기사] 독립운동의 명가 ‘임은 허씨’ - 국권 상실 후 일가가 만주·연해주 등지서 항일투쟁

왕산 허위는 ‘임은 허씨’로 불린다. 왕산의 증조부 허돈이 1807년(순조7) 김해에서 선산 임은리로 입향한 이래 후손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임은 허씨는 한말 의병 항쟁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의 명가를 이룬다.

4형제 중 막내 허위를 비롯해 맏형 방산 허훈은 진보의진의 의병장이었고 셋째형 성산 허겸은 형과 아우를 도왔다. 허훈은 1894년 허위와 함께 동학농민전쟁을 피해 청송군 진보로 옮겼다. 동학농민군이 선산읍성을 점령하고 양반 지주를 대대적으로 보복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됐다. 허훈은 진보에서, 허위는 김산에서 각각 의병 활동을 도모한다. 허훈은 1905년 아우 허겸과 허위에게 전답 3000두락을 군자금으로 내 놓는다. 허겸은 의병 활동에 이어 1905년 을사조약 반대에 나섰다. 그 뒤 허위가 순국하자 허겸은 1912년 일가와 함께 만주로 망명해 부민단 단장을 맡는 등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허위는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장남 허학은 1907년 아버지가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할 때 21세 나이로 참여했다. 전국 의병장에게 연락하고 무기를 조달했다. 1913년에는 임병찬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1914년 동지 54명과 함께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허위의 사촌인 범산 허형, 시산 허필 등은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떠나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허형과 허필은 북만주에 뼈를 묻었으며 그들의 아들은 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후손은 지금도 이역에서 살고 있다. 한편 퇴계 이황의 14대손인 저항시인 이육사는 의병장 허형의 외손자가 된다.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은 허형의 딸이었다.

이 집안의 독립운동 계보에는 허형의 아들 등이 더 있다. 많아서 여기에다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다. 선산의 임은 허씨는 명문가의 전통을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으로 지켜 간 것이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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