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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29)] ‘수련하는 인간’ 호모 프락티쿠스(Homo Practicus) 

인도가 인류에게 선사한 위대한 선물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
자신의 생각을 장악하고 그 생각으로 정신과 영혼을 절제하는 운동…요가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존재하는 거룩한 경내로 진입하려는 훈련

▎인간 세계에 요가의 사상과 자세를 알렸다고 전해지는 인도의 신 시바. 인간의 모든 최선을 한데 모아 집중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수련이 바로 요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존재한다. 한 부류는 ‘훈련(수련) 중’인 인간이며 다른 부류는 ‘훈련을 하지 않는 인간’이다. 훈련 중인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은 더 나은 자신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조금씩 전진한다. 원하는 자신이 되는 과정이 훈련이며, 훈련을 통해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단점은 과감히 버린다. 훈련은 원대한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자신의 나쁜 습관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훈련은 그만큼 중요하다.

인생이라는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마라톤을 훈련 없이 참가한다는 것은 마라톤을 완주할 의지가 없거나, 아니면 자신이 완주할 수 있다는 허황된 꿈을 꾸는 것일 뿐이다.

서양문명은 오랫동안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둘로 나눠 분석했다. 신과 인간, 천국과 지옥, 남자와 여자, 정신과 육체, 겉과 속, 생각과 행동이라는 개념들이 모두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불완전한 것이다. “판타 레이” 이 고전 그리스어 문장의 의미는 “모든 것이 흘러간다”이다. 기원전 6세기 인물인 에베소 철학자 헤라클리투스가 주장했다. 플라톤은 [크라틸루스] 402a에서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헤라클리투스는 어디에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은 움직이고, 어느 것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것은 강물의 흐름과 같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은 같은 강을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

훈련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은 변하기 마련이다. 어제의 모습을 오늘도 그대로 간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세계를 서로 대립되는 항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인류의 성현들이 남긴 경전이나 신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립되는 항들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놀랍게도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생각과 행동을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정신의 표현이 육체이며, 생각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행동이다. 만일 정신과 육체가 괴리돼 있고, 생각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고대 그리스 단어 ‘로고스(Logos)’는 인간의 이성이자,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적인 에너지다. 고대 히브리 단어 ‘다바르(dabar)’는 말이면서 동시에 ‘행동(사건)’이란 의미를 지닌다. 말이 곧 사건이고 사건은 말을 통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훈련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생각을 장악하고, 그 생각으로 정신과 영혼을 절제하는 운동이다. 자신의 정제된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침묵이 만들어낸 말을 사건으로 실현시키는 과정이다. 인간은 훈련을 통해, 독립적이고 존재론적인 인간에서 연관적이며 상대적인 인간으로 변한다. 훈련을 통해 자신이 지닌 동물적인 본능을 승화해 신적인 속성을 발현시킨다. 훈련을 통해 매일매일 변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자신에 자신을 감금시켜 놓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훈련(수련)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수련하는 인간은, 자신이 흠모하는 원대한 자신을 자신이 존재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만들어내고, 그런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필자는 1990년대 초에 힌두교와 산스크리트어에 매료됐다. 박사학위 연구주제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완성자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세기)이 남긴 삼중 쐐기문자 ‘베히스툰 비문’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비문은 고대 이란에서 기원전 3100년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사용되던 문자인 엘람어, 바빌로니아 제국의 언어인 아카드어, 그리고 베히스툰 비문에 새기기 위해 다리우스 대왕이 창제한 고대 페르시아어 등 세 가지 쐐기문자로 기록됐다. 고대 이란과 인도는 언어분류상 ‘인도-이란어’라고 부른다. 인도-이란인들은 원래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었다가 기원전 2000년경에 한 갈래는 인도로, 다른 한 갈래는 이란으로 들어가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원전 12세기경에 각각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 [리그베다(Rig Veda)]와 이란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아베스타(Avesta)]를 구전(口傳)으로 남겼고, 기원전 6세기엔 이 경전들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들 인도-이란인은 스스로를 아리아인(aryan)이라고 불렀다. 20세기 히틀러가 이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개념을 인종적인 개념으로 오용해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이 벌어지긴 했지만 원래 ‘아리야(airya)’는 인도와 이란을 하나로 묶는 어근이자 개념이다. 아리야가 낳은 문명이 인도문명과 이란문명이다. 아베스타 단어 ‘아이르야’와 고대 페르시아어 ‘아리야’는 모두 ‘숭고한(존경받을 만한)’이라는 의미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완성한 다리우스 대왕은 자신의 치적을 새긴 비시툰 비문에서 자신을 아리아인이라고 선포한다.

인도-이란인의 정신세계 ‘아리아’

베다 산스크리트어에서도 아르야(arya)란 단어는 ‘신앙심이 좋은(충성스러운)’이란 의미다. 특히 베다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일컫는다. 아리아라는 단어를 인도인들과 이란인들이 이 단어를 사용하기 전 단계인 원-인도유럽어(Proto-Indo-European)로 재구성하면 하르(*h2ar-)다. 하르는 역사상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란어 아리야와 산스크리트어 아르야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이전 언어의 모습이다. 서양인들의 조상인 인도-유럽인들은 아마도 기원전 4000년경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런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말할 때 단어 앞에 별 표시를 한다.

때문에 *h2ar의 기본적인 의미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정렬하다(하나로 조합하다)’란 의미다. 하르에서 파생된 개념이 각각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사상이 되었다. 산스크리트어 ‘르타( ta)’라는 단어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조화롭게 조절하는 원칙이다. 르타는 인도유럽어 어근 하르의 과거분사형으로 ‘우주의 원칙에 맞게 조합된 것’이란 의미다. 르타는 진리, 법, 질서, 운명 등으로 번역된다. 르타가 사회에 적용되면 ‘다르마(dharma)’가 되고 개인에게 적용되면 ‘카르마(karma)’가 된다. 다르마와 카르마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각각 법(法)과 업(業)으로 번역됐다. 하르는 이란에서 ‘우주의 원칙’을 의미하는 ‘아샤(aša)’가 되었다. *h2ar의 과거분사형인 *h2art-는 고대 이탈리아로 넘어가 중요한 문화 개념어인 라틴어 ‘아르스(ars)’가 되었다. 아르스는 흔히 ‘예술’이라고 번역하는데, 그 원래 의미는 ‘우주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최선’이란 의미다. 예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아트(art)가 바로 산스크리트어인르타, 아베스타어인 아샤와 같은 어근에서 출발한 단어다. 이 단어는 아주 오래된 인도-유럽어 어근으로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정렬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아트’라는 이 단어에서 파생된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아르야의 과거분사형으로 ‘우주의 질서에 맞게 정렬된 어떤 것’이란 단어인 산스크리트어 르타와 아베스타어 아샤이다. 이 단어는 진리, 원칙이라는 의미다.

‘아리아’는 인간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생각이며 사건이며, 육체이며 정신인, 아니 우리가 보기에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초월하고 생산하는 모체다. 인도인들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신적인 거인이 거주한다고 믿었다. 바로 ‘푸루샤(purusha)’다. 푸루샤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우주의 원칙이나 추상적인 자아가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내면의 빛이다. 고대인도인들은 자신 안에 숨겨진 푸루샤를 발견하고 발동시키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내면의 빛을 발견하기 위한 영적인 운동을 ‘요가’라고 불렀다. 원래 요가(Yoga)는 고대 인도에서는 말을 훈련하는 과정을 뜻한다.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려는 야생말을 훈련하여 전투에 투입 가능한 말로 만들기 위해서는 말의 목에 멍에를 채워야 했다. 요크(yoke)라는 영어 단어가 요가와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리아 정신을 정신과 육체를 통해 완성하기 위한 수련이 요가다. 고대 인도에서는 세상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수련자들이 단순히 공부나 묵상을 통해서만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적인 고양은 육체적인 훈련을 통해 강화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고대 인도의 수련자들은 지금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훈련법을 발전시켰는데, 요가는 인도의 가장 위대한 업적들 중에 하나다. 요가는 인도에서 기원전 5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독특한 사상과 깊이 연관돼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기 위한 정신적인 훈련이었다. 호전적인 아리아인들의 요가훈련과는 달리 요가는 비폭력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우주를 관장하는 영혼인 푸루샤와 개인의 영혼인 아트만이 하나다. 이것이 상키야(Samkhya)사상이다. 요가는 원래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걱정을 덜어주고 스스로 건강을 찾도록 도와주는 건강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 안에 숨겨진 위대한 자신이며 진정한 자아를 일깨우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에 쌓인 적폐들인 편견, 이기심, 무식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다.

이 요가를 체계화한 사람이 기원전 1세기에 등장한 파탄잘리(기원전 48년~기원후 49년)다. 파탄잘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해탈’을 위한 다양한 훈련을 모아 정리했다. 요가는 기원전 12세기경, 아리아인들의 전쟁에 나갈 동물들을 훈련하기 위한 ‘밧줄’이나 ‘고삐’를 의미한다. 초기 아리안들이 야생마를 훈련시켜 준마(駿馬)로 만들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생각·말·행동을 제어하고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위해 몰입하는 것이다. 이 몰입을 상징하는 것이 말의 고삐이며 소의 멍에다. 말은 전차 앞에서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최선을 한데 모아 집중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수련이 바로 요가다. 고대 아리안들은 말을 제어하는 훈련이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요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해하여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파탄잘리는 바로 이 요가에 관한 글을 정리했고, 3세기경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네 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요가 수트라]라는 책을 저술했다. [요가수트라]는 196개의 경구로 구성된 네 권의 책이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의 첫 번째 책은 ‘사마디 파다’라고 불린다. 사마디(samadhi)는 한글로는 삼매경(三昧境)으로 음역돼 번역된 단어로, 자신 안에 있는 우주의 원칙인 푸루샤와 자신을 어떻게 일치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요가 궁극의 목적은 ‘사마디’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마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디(dhi)’다. ‘디’는 아주 오래된 인도-유럽어 어근 ‘데흐’에서 파생했다. 데흐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유래됐을까? 우주의 천체는 있어야 할 장소에 있다. 태양과 달, 지구는 인간이 기억할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그 장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자전하고 공전한다. 지구 안에 존재하는 무생물과 생물들도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 안에서 생존할 뿐이다. 사시사철, 조석간만, 인간의 희로애락이 거대한 배열 안에서 한치 어김없이 반복한다. 인도-유럽인들은 이것을 데흐라고 말했다. 데흐라는 어근이 고대 그리스로 들어가 신(神)을 의미하는 ‘쎄오스(theos)’가 되었다. 신은 천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존재며,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을 위해 정해진 시간을 배열한 자다. 쎄오스는 이런 배치와 배열을 ‘결정적인 시간’과 ‘결정적인 장소’를 통해 완수한다. 이 결정적인 시간과 결정적인 장소를 고대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른다.

‘디’는 요가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인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져 하나가 되고, 주체가 스스로에게 동일하면서도 다른 객체를 만들어, 그 주체와 자신 안의 객체가 신비한 합일을 이루는 경지를 의미한다. 사마디는 내가 너와 하나가 되고 내가 내 앞에 보이지 않는 그것과 일치하는 경지다. 사마디라는 단어가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음가를 빌려 삼매(三昧)가 되었고, 삼매라는 한자가 한국에 들어와, 우리도 이 단어를 삼매 혹은 삼매경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삼매경은, 요가 수행자가 발견해야 할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경내로 진입하는 훈련이다.

2세기 로마 지리학자 클라디우스 프톨레미는 당시 로마와 지중해 전역을 지도에 담는다. 그는 이 지도에 ‘알려지지 않는 땅’이란 의미를 지닌 ‘테라 이코니타(terra incognita)’라는 용어를 사용해 그 누구도 가 본 적이 없고 가 보았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지만,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지역을 표시했다. 그곳은 마치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우주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고백과 연결된다. 우주가 무한하다면, 우리가 확인한 우주의 행성들은 우주의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요가 수련자는 우주와 같이 광활한 자신의 마음에서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 들어간다.

때문에 삼매경은 특별한 마음의 장소다. 불교 사찰이나 이슬람 사원은 외부 공간과는 구별된 장소에 있다. 이것이 경내(境內)다. 경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몸을 정결하게 씻고 경내에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은 경외(境外)의 상징이며 요가를 수련한 적이 없는 자연 상태의 오래된 자아다. 경내와 경외를 구별하는 문지방은 오랫동안 자신을 수련한 자들만이 건너갈 수 없는 표식이다. 삼매경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흠모하는 자신으로 만들어주고,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다. 요가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 깊이 존재하는 거룩한 경내로 진입하기 위한 훈련이다.

삼매경은 오랫동안 수련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것은 마치 궁수의 수련과 같다. 궁술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커다란 과녁을 조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궁수의 실력이 쌓이면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궁수와 과녁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과녁이 점점 더 작아진다. 오랜 수련을 거쳐 올림픽 대회에 나갈 정도의 실력을 얻은 궁수는 25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과녁을 세밀하게 볼 수 있는 시력을 지니게 된다. 궁술 훈련 전에는 볼 수 없는 과녁의 가운데를 훈련을 통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요가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볼 수 없었던 장소로 진입하는 훈련이다.

인도문명의 기원 풀어 줄 열쇠 ‘파슈파티’


▎요한 크리스토프 루드비 뤼케 (1703~1780)의 작품 ‘우는 헤라클리투스’. 하얀 유약을 바른 자기에 그린 작품으로 로스엔젤레스 예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사진:배철현
자신이 열망하는 ‘또 다른 위대한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단어가 푸루샤다. 고대 인도에서 사용하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진정한 자신’이라는 의미다. 기원전 6세기에 서양에서는 두 가지 다른 인간에 관한 심오한 관찰이 있었다. 소아시아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칙을 찾기 위해 눈을 외부로 돌려 ‘자연’을 관찰했다. 이와는 달리 고대 인도에 새롭게 등장한 상키아라는 사상을 만든 수련자들은 자신의 눈을 인간의 내부로 돌렸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빛을 찾아 나섰다. 그 빛을 감추거나 어둡게 만드는 자신의 욕망이나 허상을 직시한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단절’해야 한다. 상키아는 산스크리트어로 단절이라는 의미다. 상키아 철학자들은 최초의 무신론자였다.

푸루샤는 이전 인도철학에서 ‘우주의 원칙’(리그베다)이나 ‘추상적인 자아’(우파니샤드)였다. 그러나 샹키아 수련자들에게 푸루샤는 ‘인간 각자의 본연의 자신’이다. 모든 인간에게 자신만의 고유하며 영원한 자아인 푸루샤가 있다. 푸루샤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우주의 원칙이나 추상적인 자아가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내면의 빛이다. 상키아 철학자들은 자신 안에 숨겨진 푸루샤를 발견하고 발동시키기 위해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내면의 빛을 발견하기 위한 영적인 운동을 요가라고 불렀다. 요가는 인도가 인류에게 선사한 위대한 선물이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욕심이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얽혀있어서 푸르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산다.

요가는 사실 힌두교라는 종교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행해져 온 인류의 오래된 수련방법이다. 1922년대 영국 고고학자 존 마셜이 기원전 2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인더스 문명을 파키스탄의 신드에서 발굴했다. 모헨조다로 문명은 동시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능가하는 문명이다. 이곳에서 발견한 한 인장(印章)은 요가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 주는 유물이다. 이 인장은 모헨조다로 발굴에서 표면에서 지하로 3.9m 깊이에서 발굴됐다. 모헨조다로 발굴을 주도한 고고학자 멕케이(E.J.H.Mackay)는 이 인장에 420번 번호를 매기고 기원전 2350년에서 2000년 사이로 연대를 추정했다. 겉이 미끌미끌한 암녹색 동석(凍石)위에 새겨진 이 인장은 크기 (3.56㎝ X 3.53㎝)도 작고, 두께(0.76㎝)도 얇아서 몸에 지니거나 목에 걸 수 있는 유물이다.

이 인장의 중앙에는 신비한 인물이 단(壇)에 좌정해 있다. 마셜은 이 인장을 산스크리트어로 ‘파슈파티(pashupati)’라고 불렀다. ‘동물들의 주인’이라는 의미다. 마셜은 이 인물을 힌두교 시바(Shiva)신의 원형으로 해석한다. 사바는 악을 파괴하는 신으로 우주를 창조하고 보호하고 변화시키는 최고의 신이자 ‘모든 동물을 관장하는 주인’이다. 그는 카일라쉬(Kailash)산에 거주하는 요가 수련자의 상징이기도 하다. 파슈파티와 이 인장은 인도문명의 기원을 푸는 열쇠다. 파슈파티는 시바 신의 화신인 모헨조다로를 치리하는 왕이다. 파슈파티 인장은 그가 인도에 만들 문명과 그 문명의 정신적인 근간인 요가 사상을 그대로 담았다.

절체절명 순간에도 평온한 수련자


▎기원전 6세기의 다리우스대왕의 비시툰 비문. 이란 케르만자 비시툰 산에 새겨진 삼중 쐐기문자 비문으로 이 비문에서 다리우스는 자신이 창제한 문자를 ‘아리아 문자’라고 말했다.
이 인장을 만든 예술가는 둘레를 톱으로 자른 후 칼이나 정으로 다듬은 후, 연마재로 정교하게 갈았다. 이 부조는 섬세한 정으로 조각됐다. 파슈파티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응시한 채 앉아 있다. 그는 이 동물들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삼매경으로 이미 들어갔는지 눈이 팔자(八字)로 평온하게 쳐져 있다. 자신이 있어야 할 본연의 장소에 안주하면서, 그의 귀는 아래로 쳐져 있고 코도 길게 늘어져 있다. 파슈파티의 귀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도 있다. 마셜은 이 모양은 귀가 아니라 왼쪽과 오른쪽도 살피는 얼굴들의 모습이라고 해석했다. 파슈파티는 세 가지 얼굴을 지녔다. 그의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른쪽과 왼쪽 모두를 경계한다. 그는 눈을 감고 있지만, 마음은 첨예하게 깨어 있고,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고 있다.

모헨조다로 문명과 동시대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앗다 인장(Adda Cylinder)’에서도 신과 인간의 경계에서 신의 명령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존재로 나오는 ‘이시무(Isimu)’도 이중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신의 소리를 잡으려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귀는 얼굴의 축소판으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지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의 입은 여전히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굳게 다물고 침묵을 수련한다.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되새기기 위해 침묵하는 것이다. 그가 한 번 입을 열어 말하면, 침묵의 수련이 전달되는 포용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이지는 않지만 달관한 표정이다.

그는 자신의 팔을 느슨한 큰 팔찌를 두 개씩 양팔에 감았다. 정중동을 수련하는 자신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서다. 어깨에서 팔목까지 타투로 장식돼 있다. 그는 부동자세가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임을 깨달았다. 그의 가슴과 목은 ‘V’ 장식 옷을 입었다. 극도의 절제된 모습을 작은 선 조각으로 표시한 것 같다.


▎‘파슈파티 인장’은 그가 인도에 만들 문명과 그 문명의 정신적인 근간인 ‘요가’ 사상을 그대로 담았다.
파슈파티의 두 팔은 자신이 좌정한 땅을 향해 무한하게 펼쳐 있다. 두 팔은 힘없이 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허공에 자리를 잡고 가지런히 양 무릎 위에 올렸다. 그는 수련을 통해 극도로 단순하고 절제된 인위적인 자세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승화시켰다. 양손의 엄지는 약간 벌렸다. 그의 배를 가로로 가르는 굵은 선이 있고 정가운데 선이 가부좌를 수련하고 있는 두 발 사이를 향하고 있다. 굵은 선은 아마도 자신의 몸을 동여맨 움직이지 않도록 만드는 동아줄이다. 발 모습이 초현실적이다. 양 발의 발바닥과 발뒤꿈치가 수직으로 만난다. 발가락은 곧게 뻗은 채, 자신이 좌정한 제단 위에 서있다. 그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발가락으로 서 있다.

그의 요가 수련을 방해하는 동물들이 있다. 이 동물들은 인간의 눈과 귀를 자극하고 겁을 주고, 스스로에게 집중하지 못 하게 하는 소리와 이미지의 상징들이다. 오른편에는 뱅갈호랑이와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호랑이는 앞발을 치켜들고 무시무시한 발톱으로 위협하며 입을 벌려 큰 소리로 포효한다. 날카로운 이빨로 파슈파티를 금방이라고 덥석 물 자세다. 호랑이의 얼굴은 거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 긴박한 순간에도 파슈파티는 움직임이 없다. 그의 팔찌도 우주가 멈춘 듯, 가만히 서있다. 그런 정도의 포효는 파슈파티에게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명상음악일 뿐이다. 호랑이 위엔 코끼리가 정반대 방향을 향해 크게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호랑이와 코끼리 사이에 파슈파티의 몸종이 이 광경을 관찰한다. 파슈파티 왼편에 코뿔소와 물소가 달려오고 있다. 아래 있는 물소도 뱅골 호랑이처럼 머리를 쳐들고 포효한다. 코뿔소와 물소 위에도 오른 편에 등장한 인물과 비슷한 파슈파티의 몸종이 맨 위에 새겨져 있다.

온전히 자신 안에 존재하는 ‘푸루샤’에 몰입

단은 직사각형 사방탁자로 양쪽은 그 상하가 뾰족하게 처리된 ‘I’ 자 모양의 다리가 있다. 이 인물은 이곳을 특별한 공간인 제단(祭壇)을 만들어 수련한다. 자신의 몸을 그 위에 올려놓아, 자신을 훈련시키고 고양한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를 바로 희생제물로 스스로에게 바친다. 그 제단 밑에는 중앙에는 두 마리 야생 사슴 혹은 야생 염소가 큰 뿔을 휘저으며 뒤를 바라다본다. 파슈파티는 혼돈의 상징인 야생을 정복하여, 온전히 자신 안에 존재하는 푸루샤에 몰입한다.

퍄슈파티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다. 왕관은 마치 왼편에 있는 물소의 거대한 뿔과 유사하다. 둥글게 휜 뿔이 퍄슈파티의 머리 위에서 만나 마치 연꽃처럼 모아졌다. 뿔은 신성의 상징이며 동시에 왕권의 상징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성의 상징인 메(ME)처럼, 파슈파티의 왕관도 뿔의 힘을 빌려왔다. 파슈파티는 모헨조다로를 치리하는 통치자로 신성의 상징인 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신이 되었다.

이 인장의 맨 위에 아직도 판독되지 않는 원-인디아어 문자(Proto-Indic Script) 5개가 있다. 헬싱키 대학의 아스코 파르폴라(Asko Parpola)는 이 문자 판독을 시도하면서 기원전 3100년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란의 엘람문자와 원-인디아어 접촉에서 그 실마리를 풀려고 시도했지만 아직 그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 하고 있다.

※ 배철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셈족어와 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삼중 쐐기문자가 기록된 베히스툰비문의 권위자다. 2003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심연]이 있다.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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