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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14)] 블랙 데저트, 그리고 시나이의 고된 여로(旅路) 

환영(幻影)과 마주하는 전율에 이끌려 다시 사막으로! 

김미루 사진작가
편리한 도시 문명으로는 채울 수 없는 열망에 또다시 감행한 모험…동양화 속의 흑백 조화 이룰 검은 봉우리와 흰 낙타를 찾아서

▎블랙 데저트에서 검정 낙타 세 마리와 찍은 작품. 고생 끝에 얻은 만족할 만한 작품이었다.
맨해튼에서 보낸 2012년 가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나는 이때 이집트와 요르단으로 다시 갈 것만을 구상하며 새로운 모험을 준비했다. 나의 육신이 있는 곳에 나의 정신이 있질 않았다. 도시의 삶은 무의미하게만 보였다.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왜 나는 꼭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나를 실어야만 하는가? 트래픽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는 길 한복판에 갇혀 있을 땐, 왜 나는 택시미터에 올라가고만 있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파티룸에서 왜 나는 그들과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희희덕거리고만 있어야 하는가? 왜 철근콘크리트의 고층건물이 서있고, 아스팔트 깔린 대로들이 존재해야만 하는가? 왜 나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만 하는가?

나를 둘러싼 환경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지 간에 모두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너무 과도한 것뿐이었다. 내가 여행할 동안 향유할 수 없었던 사치들, 맛있는 해산물요리라든가 끝없이 쏟아지는 더운물 샤워라든가 하는 것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화이트 데저트(White Desert)로 갈 꿈만 꾸고 있었다. 나의 작업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벌여 놓은 일은 마무리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2012년 10월 끝 무렵, 내가 사막으로부터 돌아온 지 불과 3주쯤 되었을 때였다. 미국 동부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미증유의 슈퍼스톰인 허리케인 샌디(Sandy)가 뉴욕 심장부를 덮쳤다(1400㎞ 반경의 거대한 회오리바람으로 미화 700억 달러의 손해가 발생하고 최소한 233명이 죽었다). 내가 아파트 창문을 통해, 이스트 리버(East River)의 물이 급증해 맨해튼의 건물 사이를 휩쓸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침범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뉴욕도시 전체가 흑암 속에 침잠해 버렸다. 나는 허리케인의 광란에도 불구하고 그냥 잠에 취해 버렸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북적대는 주변의 사람들보다 나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기도 없었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태는 당분간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는 것일까?

두 번째 사막여행 손꼽았던 맨해튼의 가을


▎다시 찾아간 화이트 데저트의 환상적인 광경.
나는 사막에서 잘 훈련된 반문명 베테랑이었다. 밤에는 촛불을 켜고, 음식은 상할 것을 먼저 요리하고, 물은 절약할 수 있는 대로 절약한다! 이것은 이미 나의 정상적 생활의 일부였다. 나는 곧바로 다른 방식의 생활규범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사막체험은 도시적 삶에 대하여 내가 소중하게 지니고 있었던 이전의 관념들을 서서히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내가 품어 왔던 가치관은 실로 우물 속 개구리의 비전 같은 것이었다. 우물 속의 세계가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이고 최선의 것이라는 환상은 [장자] ‘추수(秋水)’편 우화 속에도 잘 그려져 있다.

전기가 복구되자마자 나는 곧바로 사막에 가는 작업에 착수했다. 나는 우선 11월 16일부터 12월 16일까지 이집트에서 체류하는 한 달간의 여행스케줄을 예약했다. 나의 계획은 우선 화이트 데저트로 가서 그 영역에서 흰색의 낙타를 찾아보고, 다음에 요르단의 와디 럼(Wadi Rum)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시나이까지 간 후, 그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홍해를 건너 요르단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나 혼자서 다 실행한다는 것은 매우 과감한 발상이었다. 이미 그곳은 여행경고지역이었다. 무바라크정권에 대한 2011년의 민중항거 이래로, 이집트의 정세는 매우 불안정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살해되고 난 후부터 집권하기 시작해 자그마치 30년을 대통령직에 머물렀으나 그와 그의 친족 통치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민중의 저항을 초래했다. 그는 2011년 2월, 18일간 계속된 민중의 데모에 의하여 퇴임당했고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그는 2017년 3월 24일 석방되었다. 우리나라 촛불혁명의 위대함에 미치지 못 한다. 정확한 반성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시나이반도의 정세는 더욱 불안했다. 이 지역을 할거 한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국경을 건너 이스라엘에 공격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말리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논리는 이러했다. 내가 저자세로 다니고, 외국인 냄새를 피우지 않으면서 원주민들이 타는 지역교통수단을 활용한다면, 내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체포당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한편 달리 생각해 본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자동차사고로 죽거나, 뉴욕의 어떤 황당한 갱스터의 총에 당하거나, 어린아이가 쏘아대는 총에 맞거나, 이집트 시장의 어느 자살폭탄자가 단추를 누르는 그 순간에 내가 옆에 서 있거나 하는 가능성은 항상 동일한 수준의 확률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디든지 안전하지 않다. 인생이라는 것 그 자체가 요 정도의 위험확률을 항상 지니는 도박인 것이다.

백색 낙타를 찾아 다시 사막으로


▎화이트 데저트의 토끼바위를 바라보는 타쿠시.
이집트 2차 여행에 관해 하마다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불행하게도 내가 그곳에 가 있는 첫 이틀 동안에 그는 프랑스인 관광객들의 가이드 노릇을 해야만 했다. 선약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보고 관광요금을 따로 물지 말고 프랑스 관광그룹에 따라붙으라고 했다. 나 또한 하마다와 다른 관광약속이 되어 있었다. 타쿠시란 이름의 젊은 일본인과 그의 친구를 위해 내가 도착한 며칠 후부터 관광을 같이 하기로 약속을 정해 놓았던 것이다. 타쿠시는 주카이로 일본대사관에서 인턴수련을 하고 있는 젊은이였는데, 암만에 있는 한 친구의 소개로 그를 알게 되었다.

타쿠시는 사막에서 생활을 했고 가이드와도 친분이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을 알지 못 했다면, 자기 혼자서 화이트 데저트를 여행하는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했을 것이다. 대사관에서 오래 일했지만 자기 생활의 루틴에서 빗나갈 생각은 하지 못 하는 것이다. 타쿠시는 나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좋은 기회로 여겼다. 나 또한 그와 그의 친구를 데리고 간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리고 하마다에게는 이런 여행이 좋은 비즈니스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가 나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 준 성의에 나는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했다. 나의 계획은 이런 여행들을 하는 중간중간 흰 색깔의 낙타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번 체류의 마지막 단계에서 흰 낙타와 기획했던 나의 작품사진을 찍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획에 스스로 대만족했다. 왜냐하면 바하리야 오아시스 지역에 오래 머물면서 지역민들의 생활상과 사막의 생태계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내가 한 달을 있는다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계획이 나의 재량권에 속한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어느 곳에 머물고 싶으면 마냥 머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화이트 데저트와 바하리야에 열두 날을 머물렀다. 그런데도 시간은 놀랍게 빨리 지나가 버렸다.

사막을 여행한다는 것은 항상 새로웠다. 지루함이 있을 수 없었다. 하고 또 해도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사막의 삶이었다. 어느새 화이트 데저트는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어 가고 있었다. 타쿠시와 그의 친구가 도착한 첫날 밤, 나는 그들을 모래 위의 캠프파이어에 둘러앉게 하면서, 마치 내가 그들을 나의 집 거실로 초대한 것과도 같은 기묘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사막은 나의 원초적 감정과 유리된 타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문명의 총아 스마트폰으로는 찾을 수 없는 것


▎바위티 시내에서 만난 한 주민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우리 일행에게 전통 음식을 차려 내줬다.
놀랍게도, 그 지역에서 흰 낙타를 찾는다는 것은 헛수고였다. 실망이었다. 하마다는 내게 어느 지역엔가 흰 낙타가 있다고 말하곤 했지만, 결국 그것은 그가 들은 얘기를 한 것이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었다. 흰 낙타를 찾는다는 것, 무엇이든지 좀 희한한 것을 찾는다는 것은 바하리야 같은 곳에서는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하마다는 그의 친구들에게 흰 낙타에 관해 계속 문의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선 통신수단인 전화가 믿을 수 없었다. 소통이 확실히 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몸으로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쓰는 전화기가 작은 노키아 셀룰러폰인데 사막에선 잘 터지질 않았다. 셀폰 하나만 믿고 어디를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전자기재에 삶을 의존하지 않는다. 셀폰이 있어도 가지고 다니질 않는다. 현대인의 도시생활에서는 무의식적으로도 이미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체크하고, 자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하는 일과가 스마트폰의 문자나 영상을 확인하는 것이다. 도시의 삶은 우리를 스마트폰과 대화하는 요청에 종속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과연 우리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는 것이 선진일까?

흰 낙타를 찾는 수고의 궁극적 결과와 무관하게, 무엇을 그렇게 몸으로 찾는 과정 그 자체가 진실로 새롭고도 신선한 체험이었다. 인터넷을 두드려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로 물건을 배달받는 요즈음 세상! 아파트 문밖을 나갈 필요도 없고, 누구와 얘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아직도 아프리카대륙에서는, 내가 찾는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몸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그리곤 그들과 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때가 되면 그들 집안으로 끌려 들어가 밥도 같이 먹어야 한다. 그리고는 교외 어딘가에 있는, 낙타를 기르는 사람 집을 알아낸다. 그리고 그 사람이 흰 낙타를 한 마리 혹은 두 마리 정도 기르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낸다.

바하리야 지역의 메인 읍내격인 바위티(Bawiti)는 놀랍게도 인구가 2만 명 정도 되는 상당히 큰 타운이었다. 나의 개인적 체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요르단 와디 럼 빌리지 인구의 열 배가 넘는 큰 규모였다. 바위티의 중심가는 내가 생각하는 ‘모던’의 개념을 뛰어넘었다. 고층의 건물들과 포장된 도로, 그러나 도로의 바깥은 모래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레스토랑과 상점들, 그리고 호텔도 있었다. 나머지는 시멘트 벽돌로 지은 단순한 주택들로, 요르단의 집들과 대동소이했다.

집에 들어가면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이 있다. 나는 여성이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다. 이야기는 하마다가 했기 때문에 나는 잠자코 앉아 있기만 했다. 이틀 동안 차를 몰면서 사람들을 방문하여 낙타에 관하여 문의해 보았지만, 바위티 타운에서는 단 한 마리의 낙타도 목격할 수가 없었다.

블랙 데저트의 장엄한 아름다움


▎바하리야 지역, 아가바트에서의 필자.
종국에 우리는 두 개의 다른 장소에서 두 마리의 옅은 색깔의 낙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낙타는 모래색깔의 어린 낙타였다. 단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노리끼리한 브라운색깔의 털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 낙타는 비교적 하얗게 보였지만, 그것은 기실 우리에 있는 나머지 낙타가 브라운 아니면 검정색에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이동하다가 두 번째 낙타를 만날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성년이었는데, 크림색과 모래색조의 낙타였다. 그런데 그 낙타는 매우 슬퍼 보였다. 성년이 되기 위해서 너무 고생을 한, 혹조차 쪼그라든 것을 보면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게 분명한 작은 녀석이었다. 암놈이었는데, 낙타라기보다는 라마에 가까웠다. 그리고 성격도 험상궂었다.

어찌 되었든 당시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하마다에게 어떻게 이 낙타를 빌릴 수 있는지를 상담해 보라고 했다. 하마다는 주인에게 흥정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주인은 애당초 자기 낙타를 팔거나 렌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여튼 주인이 우리에게 자기의 낙타를 대여해 줄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나긴 탐색의 여정을 밟았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상했다. 그러나 발로 뛰는 세상에서는 이런 식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은 다반사였다. 그래서 인생의 희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바하리야에서 이미 일주일 이상을 보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희망은 이미 다 사라져 버렸다. 그때였다! 바위티로 돌아가기 위해 사막의 주간선 길을 타고 갈 때였다. 나는 창 밖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블랙 데저트(Black Desert)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블랙 데저트는 바하리야 오아시스에 인접한 지역인데 그곳은 원추형의 언덕들이 계속 연접해 있었다. 그 원추형의 언덕들은 까만 화산재와 바위로 덮여 있었는데 마치 상상의 하데스(Hades, 지옥)에서 바라보는 광경 같았다. 원추형의 봉우리 끝은 아주 까만 숯검댕의 색깔인데, 아래로 내려오면서 황금빛의 모래색깔로 변해 간다. 그리고 중간중간 산화철분의 붉은 색깔이 비친다.

일상의 내 인식 속에서는, 블랙 데저트라는 것은 화이트 데저트와 바하리야를 오갈 때 지나쳐야 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 순간, 블랙 데저트의 장엄한 기운이 나의 인식의 전환을 가져 왔다. 결국 아름다움이란 ‘만남’이다. 기와 기의 만남, 객체의 기운과 주체의 기운이 만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해가 가라앉고 몇 분 지나 만공산의 보름달이 개성 뚜렷한 봉우리들 사이로 솟아오를 때, 안개 자욱한 블루와 핑크의 양탄자가 하늘 위로 쫙 깔린다. 그것은 중국 북송의 화가 미불(米, 1051~1107, 호북 양양 사람으로 서법에도 뛰어 났다. 채양·소동파·황정견과 함께 ‘송사가-宋四家’로 불린다)의 그림을 실제로 보는 것만 같았다.

백색 낙타를 만나러 시나이반도로


▎흰 낙타를 찾는 데 실패하고 발견한 옅은 색깔의 낙타와 보통의 검정색 낙타.
미불은 안개가 짙게 깔린 중국 남방의 풍경을 묽은 먹물의 굵은 붓질로 과감하게 표현해 내었는데, 그가 그린 산들의 모습이 대강 내가 보고 있는 광경과 같았다. ‘미점(米點)’이라는 말이 있듯이 점묘를 통해 안개 위로 솟은 원추형의 산들을 툭툭 찍어 놓았다. 그 미점산수(米點山水)와 같은 광경이 너무 매혹적이었기 때문에 순간 나는 소리쳤다. “흰 낙타는 잊어 버리자! 세 마리 까만 낙타가 필요해! 저 블랙 데저트와도 같은 검은 낙타면 충분해!”

다음날, 우리는 당장 사진작업에 착수했다. 블랙 데저트에서 세 마리의 검정 낙타와 함께 사진을 찍는 작업이다. 만족할 만한 작품이 몇 개 나왔다. 나의 원래 일정에는 요르단여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집트에서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왔기 때문에 나는 일정대로 요르단으로 갈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마다에게 화이트 데저트에서 흰 낙타와 작품을 만드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기획을 위해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여러 군데 전화를 했다. 하는 척만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내 하마다는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일러줬다. 수단으로부터 흰 낙타 한 마리를 사올 수 있는데, 자기에게 1만 이집트파운드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그 돈은 미화로 1600달러에 해당되는 돈이었다(지금은 이집트 경제가 급추락해 환율상 60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나는 이 거액의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낙타값과 운송비, 사료비, 보살피는 비용을 포함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마다가 가격에 관해서는 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요번 여행에서 저 친구는 내게 최선을 다했잖아. 내가 원하는 낙타를 데리고 있기 위해서라도 하마다는 그 돈이 필요할지도 몰라!’

나는 요르단에서 가장 싼 낙타의 가격이 미화 800달러 정도란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마다의 가격이 그렇게 뻥튀기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믿고 나는 그 돈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카이로로 돌아갔다.

내가 전에 묵었던 5성급호텔인 켐핀스키 나일(Kempinski Nile)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더운물에 몸을 푸욱 담가 사막의 때를 벗겨냈다. 기운을 다시 차린 뒤 타쿠시를 만나 카이로에 있는 최고급 정통 일본스시집에 가서 정교한 일본요리를 즐겼다.

다음날, 나는 히잡을 쓰고 어두운 선글래스로 얼굴을 가린 채 로컬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리고 시나이반도의 홍해변에 있는 누웨이바(Nuweiba)로 가는 버스를 수소문했다. 버스로 가득 찬 주차장 안에 작은 사무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누웨이바행 버스 티켓을 사자마자 누군가 나를 급히 버스로 떠밀었다. 막 떠나려는 버스에 운 좋게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진실로 7시간이나 걸리는 고된 여행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꼬박 9시간 걸렸다. 버스는 새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대로 정상적인 버스였다. 그런데 모든 좌석이 비닐포장으로 덮여있었다. 산 지 몇 년이 됐을 텐데도 아직도 포장지를 벗기지 않은 것이다. 한때 중국소년소녀들이 유행처럼 선글래스 한가운데 붙은 가짜외국상표를 떼지 않고 다니던 것과 비슷했다.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나는 후미의 창문 쪽 좌석을 차지하고 내 백을 오른쪽 빈 좌석에 놓았다. 아무도 내 옆에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유일한 여성이었고, 또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히잡을 둘렀든지 간에 결국 알아차린다. 로컬 남성들에게 둘러싸인다는 것은 좀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다짐하면서 내 신경을 안정시켰다. ‘이런 지역 버스가 관광버스보다는 테러리스트에게 당할 가능성이 작을 거야.’ 하여튼 여행 내내 한 사람도 내게 말을 걸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의 행동은 심히 웃기는 구석이 있었다. 9시간 동안 나는 버스 안에서 단 한 순간도 선글래스를 벗지 않았던 것이다!

카이로의 혼잡한 트래픽을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하이웨이의 모습은 너무도 황량했다. 홍해는 시나이반도를 두고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우선 카이로에서 수에즈까지 간다. 수에즈 운하는 지하터널로 지나간다. 그리고 수에즈로부터 아카바 걸프에 있는 타바(Taba)까지 모세가 이스라엘민족을 이끌었다는 시나이반도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 여정은 실로 단조롭고 메마른 불모의 땅이었다. 시나이사막을 건너는 데는 정말 모래와 먼지, 그리고 좀 높은 평원지대 외에는 볼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려 녹초가 된 여정


▎보름달이 떠오르는 블랙 데저트.
사막의 볼 만한 산이라든가 독특한 바위형성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루트35는 시나이반도의 가운데 허리를 거의 직선으로 가로지르는데, 구약성서에 나오는 독특하고 영험할 것만 같은 산의 광경이 없는 곳만 지나가고 있었다. 여행의 가장 어려운 점은 에어컨이 없고 먼지가 밖으로부터 심하게 유입된다는 것 이외에도 차가 심하게 덜덜거린다는 것이었다. 고속도로는 전혀 보수가 이뤄지지 않아 여기저기 깨진 데다 사막으로부터 날아온 돌과 모래로 덮여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남자가 버스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담배를 피고 있었다. 장시간 담배연기와 덜덜거림 속에 있는 것이 나를 괴롭혔지만, 그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차가 휴게소에서 멈추질 않아 오줌보가 터질 정도로 몇 시간째 소변을 참아야 했다는 것이었다.

버스가 한 검문소에서 드디어 멈추자 무장한 경찰관이 들어와 모두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한 경찰관에게 내 패스포트를 건네주자 그는 검문소 옆에 있는 건물 안으로 나의 여권을 들고 들어가 버렸다. 또 한 명의 경찰관은 운전사에게 짐칸을 열게 하더니 모든 승객의 짐을 밖으로 다 끌어내었다. 몇 승객은 버스에서 내려 그들의 짐을 조사받아야 했는데, 대부분이 담요 같은 것들이었다.

꼴을 보니 쉽게 떠날 것 같지 않아, 나는 버스에서 뛰쳐나와 한 경찰관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하맘, 하맘(hamam, hamam :터키식 목욕탕)!” 그 경찰관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경찰관을 시켜 건물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변소를 가리켰다. 나는 다시는 나의 패스포트를 돌려받지 못하리라는 공포감, 그리고 소변을 보는 동안 버스가 그냥 떠나 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눌 것은 누고 봐야지’ 하고 시원하게 방광을 비웠다.

내가 버스로 막 뛰어 돌아왔을 때, 나는 패스포트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가짜 경찰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버스는 20분가량 더 머물러 있었다. 모든 사람의 짐을 자세히 조사하고, 운전사를 건물로 데려가 길게 심문하는 것을 보면 경찰관들이 무엇인가 특별한 정보에 따라 구체적인 것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게 뭘까?

그 순간 의구심이 머릿속을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버스 안에 폭탄이 장착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순간 또 나는 하마다의 말을 생각해냈다. ‘상업적 버스 드라이버들 가운데 아편 밀수를 해서 돈 버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드디어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자문하고 자답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것은 폭탄이 아니라 짐 속에 숨겨진 아편이었다고.

우연히 마주친 인생 최고의 미경(美境)


▎호텔 앞에서 만난 홍해 아카바 만의 깨끗한 물과 해변 정원.
우리의 버스가 드디어 시나이반도의 동쪽 끝인 타바(Taba)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타바는 아카바 만의 가장 내륙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타바에서 아카바만 해변을 따라 밑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낮이었다면 아카바 만의 홍해의 물결이 보였겠지만, 이미 어두워진 터라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아카바 만을 따라 내려가는 해변 도로에는 심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버스는 최종목적지인 누웨이바에 도착했다. 요르단에서 본다면 타바가 더 가깝지만 요르단 가는 페리가 누웨이바에서만 떠나기 때문에 누웨이바까지 왔어야만 했던 것이다.

9시간의 여행과 차멀미 끝에 나는 심신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걸레쪽지가 돼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나는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나킬 인(Nakhil Inn)이라고 부르는 호텔에 방 하나를 인터넷으로 예약해 놓았다. 나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 호텔이 지정하는 택시를 보내 달라고 했다. 밤이었고, 연약한 여성인 내가 아무 택시나 올라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위기는 엉뚱한 곳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파라다이스였다. 그들은 나를 위해 특별한 만찬을 그 자리에서 만들어 주었는데 살아있는 싱싱한 오징어요리가 일품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감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 방은 독립된 통나무집이었는데 높은 천정과 널찍한 복층 로프트에 침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침대로 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1층의 거실에는 정원으로 열리는 슬라이딩 유리창이 있었는데 문을 열어 두면 아주 호의적인 개 한 마리가 들락거렸다.

길고 긴 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을 때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 아침햇살과 함께 들어왔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목도한 것은 창문에 비친 바다의 물결치는 푸른 색조였다. 나의 숙소 바로 앞에 나만의 개인 해변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곳을 비우고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아침식사도 매우 정중했다. 일부는 그곳의 고양이와 나누어 먹었다. 하루를 더 머물면서 해변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수정 같이 맑은 물과 조약돌로 덮인 요 작은 해변이야말로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 준 소중한 장소였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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