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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섭의 검은대륙 아프리카를 가다(5)] ‘무지개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1) 

아프리카의 엘도라도 노벨평화상의 나라로 서다 

김성섭 작가
인종차별 정권 맞서며 ‘다문화 민주주의’ 모델로 우뚝…오랜 빈곤이 빚어낸 열악한 치안 환경은 여전히 과제로

3개의 수도와 9개의 주(州), 그리고 11개의 공용어. 서로 다른 민족이 모여 이뤄진 ‘무지개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설명하는 숫자다. 1994년 넬슨 만델라의 승리는 남아공을 ‘황금이 넘치는 변방’에서 ‘다문화 민주주의의 모델’로 변모시켰다. 글로벌 리더로 또 한 번 도약을 준비하는 그곳에서 빛나는 민주화의 기억과 어두운 빈곤의 그림자를 살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남단 도시 케이프타운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희망봉에서 내려다본 모습. 대서양과 인도양을 오갔던 항해자들은 희망봉 등대를 바라보며 안식을 얻었다. / 사진:김성섭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속의 유럽’으로 불리는 나라다. 한반도의 5.5배나 되는 122만㎢ 국토에 5700만 국민이 살아간다. 1인당 국민소득은 6300달러가 넘는다. 아프리카 유일의 G20 회원국인 남아공은 아프리카 최대 시장이자 아프리카 진출의 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국제적으로 높아진 지위 덕인지, 우리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몇 안 되는 아프리카 국가 중 하나다.


치안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2000년대부터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노상강도나 강간사건이 빈발한다. 한 해에만 살인사건이 2만여 건, 강간사건은 5만여 건 일어난다. 한국에서 각각 400여 건, 5000여 건 발생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2010 남아공월드컵 당시에도 모 방송사 PD가 화장실에서 목 졸려 기절한 사이 돈과 여권을 빼앗기는 등 아찔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만 월드컵을 기점으로 치안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다고 한다.

남아공의 수도는 세 개다. 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이다. 수도가 이렇게 나눠진 연원은 19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신인 남아프리카연방을 결성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방 결성을 주도한 3개국의 수도에다 3부(府) 기관을 하나씩 나눠 두었다. 여기에 사실상 ‘경제수도’로 불리는 요하네스버그가 있다. 요하네스버그는 1886년 금광이 발견된 후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로 성장했다.

이번 여행에서 필자가 직접 가보지는 못 했지만 많은 사람이 해양스포츠의 천국이라는 포토 엘리자베스와 인도양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인 멜빌(Melville)과 우리가 평창 겨울올림픽을 유치한 곳으로 친숙한 더반(Durban)도 추천한다. 한국의 권투선수였던 홍수환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던 곳이기도 하다.

여섯 가지 단색 선에 역사를 새겨 넣다


▎희망봉 등대로 올라가는 길. 볕 좋은 날에는 걸어 올라가기 좋지만, 장거리 여행에 지치고 시간에 쫓기는 여행객을 위해 트램도 설치돼 있다. / 사진:김성섭
남아공을 일컬어 ‘무지개의 나라’라고 한다. 전체 국민의 80%인 흑인을 비롯해 9%를 차지하는 백인과 기타 유색인들까지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아간다. 공용어만 11개일 정도로 언어도 다양하다. 월드컵 개막식 당시 코사어·줄루어·소토어·아프리칸스어·영어 등 5개 언어로 조합된 남아공 국가(國歌)가 울려 퍼져 이목을 끌었다.

6가지 원색으로 꾸며진 국기(國旗)는 남아공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대변한다. 빨간색은 흑인 해방을 위해 흘린 피를, 검정색은 흑인과 아프리카를, 하얀색은 백인과 평화를 상징한다. 또 파란색은 열린 하늘과 바다를, 초록색은 국토와 농업을, 노란색은 황금 등의 지하자원을 가리킨다. 중앙의 가로 놓인 ‘Y’자는 흑·백인과 각 부족, 9개 주(州)의 통합과 화합을 의미한다. 보통 3색 안팎인 다른 나라 국기보다 다양한 6가지 색을 사용했는데, 이렇게 컬러풀한 국기는 비슷한 색상의 남수단과 함께 단 둘뿐이다.

남아공의 예전 국기는 주황색과 하얀색, 파란색으로 이뤄진 단순한 삼색기였다. 백인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했던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상징이기도 했다. 1948년 국민당이 집권한 이후 약 50년간 시행했던 인종차별 법들을 한데 묶은 말이 그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다.

전설적인 인권 운동가인 넬슨 만델라가 1994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관련법은 완전히 폐지됐다. 이때 만델라가 소속된 정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당기(黨旗)가 검정색·초록색·노란색으로 이뤄진 삼색기였다. 이 색상을 반영해 1994년 현재의 국기가 만들어졌으니, 남아공의 국기는 그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지난한 역사를 거치며 남아공은 세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스위스·노르웨이·영국·프랑스·미국 등 몇몇 서방선진국을 제외하곤 흔치 않은 기록이다.

남아공의 첫 번째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1952년부터 1967년까지 16년간 아프리카민족회의를 이끌었던 앨버트 루툴리(Albert Lutuli, 1898~1967)다. 교사이자 부족장이었고, 또한 정치가였던 루툴리는 흑인의 권익을 옹호하고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공로로 196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아프리카 흑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자였다.

1984년에는 데즈먼드 투투(Desmond Mpilo Tutu, 1931~현재) 주교가 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한 공로로 두 번째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요하네스버그 인근 광산촌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신학을 공부한 투투는 1961년 남아공의 흑인으로선 처음으로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됐다. 흑인학교의 교목이기도 했던 투투는 남아공 교회협의회(SACC) 사무총장이 돼 흑인 의식화 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1993년, 넬슨 만델라는 당시 대통령인 프레드릭빌렘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1936~현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클레르크는 국민당 소속 백인 정치인이었지만, 넬슨 만델라와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힘을 모았다. 만델라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을 때 클레르크를 적극 추천해 함께 수상했다는 후문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민주주의를 잉태한 열세 살 소년의 희생


▎케이프타운에서 배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물개들의 천국’ 도이커 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천 마리의 물개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 사진:김성섭
흑인인권운동의 중심지인 소웨토 지역에 넬슨 만델라와 데즈먼드 투투 주교가 살던 집이 있다. 그리고 건너편에 ‘헥터 피터슨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가슴 시린 사연이 서려 있다.

1976년 6월 16일 대규모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항쟁이 소웨토에서 처음 일어났다. 국민당 정부에서 학교 수업의 절반을 아프리칸스어로 진행하도록 강제한 조치 때문이었다. 시위 제압 과정에서 군경이 발포한 총에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13세의 어린 소년 헥터 피터슨이었다. 총에 맞은 피터슨이 다른 학생의 품으로 옮겨지고 피터슨의 누나가 울부짖으며 따라가는 처절한 사진 한 장이 전 세계에 보도됐다. 6월 16일 하루에만 흑인 학생 150여 명이 사망했다. 남아공의 흑인인권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2년 헥터 피터슨을 비롯한 희생자들을 기린 ‘헥터 피터슨 박물관’이 소웨토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인종차별정책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만델라 전 대통령과 투투 주교의 집도 가까이 있으니 남아공 민주화의 성지나 다름없다. 관광 명소로 좀 더 널리 알렸으면 좋으련만, 상품화하는 게 마땅치 않은지 우리 여행일정에서는 제대로 둘러볼 기회가 없었다. 그곳에서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한 자원봉사나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만델라 대통령은 5년 임기를 채운 뒤 연임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남아공의 민주주의는 그때부터 다시 내리막길을 걸어 왔다. 만델라의 동지였던 타보 음베키와 제이콥 주마 등 후임 대통령이 권력남용과 부패스캔들에 연루된 탓이다. 주마 대통령은 자신의 부패 행적을 막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자신의 전 부인인 들라미니 주마 전 내무장관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었지만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 결국 올해 2월 14일 제이콥 주마 대통령은 취임한 지 9년 만에 전격 사임했다.

주마 대통령의 퇴임은 아홉 번째 불신임 투표를 앞두고 내린 불가항력적인 결정이다. 주마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혐의와 취임 전 친구의 딸을 성폭행한 혐의 등 700여 건의 혐의를 받아 왔다. 비선 실세로 알려진 굽타 일가의 국정농단 의혹도 불거졌다. 지금은 부패·불법거래 등 16건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법원 주변에는 수천 명의 지지자가 모여 ‘주마를 100%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와 함께 연일 시위를 하고 있다.

주마 전 대통령은 부인들과 내연녀 사이에 20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결혼 횟수만 여섯 번이다. 세 번째 부인이었던 케이트 주마는 2000년 ‘주마 대통령과의 결혼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그가 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 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백년해로는 고사하고 원수(怨讐)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케이프 반도를 거쳐 캠스 베이 해변(Camps Bay Beach)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그림 같이 아름다운 해안선을 끼고 있다.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나 있는데 자연석을 이용한 톨게이트조차 예술작품 같다. 해안선의 바다는 은은한 청자 빛을 발하는데, 간간히 불어대는 해풍이 바닷물을 몰고와 새카만 바위에 부딪히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킨다.

아프리카 대륙의 끝에서 ‘희망’을 보다


▎케이프타운 남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 모습. 마을 앞쪽으로 탁 트인 캠스 베이 해변이 펼쳐지는 등 ‘은퇴자들의 천국’으로 부족함이 없다. / 사진:김성섭
요트들이 즐비하게 정박해 있는 조그만 포구에 도착해 유람선을 탔다. 다시마가 바닷속 가득히 자라고 있는 모습이나 물개들이 천연덕스럽게 모여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생경한 풍경이 아름답기만 하다.

‘물개들의 천국’이라는 도이커(Duiker) 섬을 유람선으로 40분 정도 돌아보는데 물개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현지 가이드가 ‘남성들은 콧구멍으로라도 물개의 정기를 맘껏 흡입해 가라’고 호들갑을 떠는데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도 물개 수컷의 생식기인 해구신(海狗腎)이 중풍을 치료하고 양기를 돋우는 데 효과가 있다고 적혀 있다. 인기만큼 가짜도 많다. 때문에 잠자는 개의 머리에 진짜 해구신을 얹어 놓으면 개가 광기를 한다는데 이로써 진품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런 얘기가 있을 뿐이다.

다시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아프리카의 최남단 케이프반도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희망봉’이다. 큰 봉우리일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다 위의 기선에서 보면 보기와는 달리 큰 편에 속한단다. 그곳을 사람들은 ‘희망봉(希望峰)’ 또는 ‘희망봉(喜望峰)’이라고 부른다. 목숨 걸고 항해를 하는 뱃사람들에게 육지가 가까워졌음을 알려 안도감과 희망을 준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엔 등대였지만 지금은 전망대인 곳까지 올라본다. 길이 잘 닦여져 있고 먼 거리도 아니나 트램을 타니 바로 정상이다. 왜 트램을 설치했을까. 몇 푼의 수입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짧은 시간에 여기저기 둘러봐야 하는 관광객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날씨가 좋아 걸어 올라가는 사람도 많지만,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타고 간다. 아니 성질이 급해서가 아니라 짧은 일정상 어쩔 수가 없다. 가는 곳마다 인솔자가 “시간은 20분, 30분 드립니다”라고 하는데 안 탈 배짱이 없다.

트램을 타고 오르다 보니 케이블카 건설을 두고 갈등 중인 설악산과 북한산이 떠오른다.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 역시 일정이 촉박한 것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한국여행에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이상 투자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우리가 자랑하는 명산들을 둘러볼 엄두도 내지 못 한다. 서울에 체류하는 유학생이나 주재원도 어쩌다 한 번 북한산을 올라보고 ‘이곳이 설악산이냐’고 묻기도 한다. 환경을 보호하면서도 관광객을 배려하는 묘안이 없을까.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의회가 있는 입법수도이다. 이번 남아공 여행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다운타운의 면적은 서울보다는 좀 작은 496㎢이지만 인구 350만의 알맞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백인은 남아공 전체 인구의 9%에 불과하지만 케이프타운에 한정하면 35%를 차지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 무역의 보급기지로 개발하고 영국 식민통치를 받은 곳이어서 아프리카 지중해 또는 유럽의 대도시를 연상시킨다. 맑고 깨끗한 환경, 잘 정비된 촌락과 도로를 보자면, 여기가 정말 아프리카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천연덕스러운 펭귄과 검게 빛나는 어부의 팔뚝


▎볼더스 해변에 가면 아프리카 펭귄을 만날 수 있다. 펭귄들은 때때로 마을 깊숙이 들어와 사람들과 함께 유유자적한 삶을 보낸다.
캠스 베이 비치를 거쳐 달리는 해안도로는 우리나라의 동해안 고속도로처럼 아름답다. 한참을 달려 멈춘 곳은 또 서해안의 만리포 같다. 몇몇 사람이 넓고 맑은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을 걷다 보니 각국의 다양한 관광객이 눈에 뛴다. 일행 중 한 명은 중국 관광객이 없어서 좋다고 대놓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위험스러운 편견 중의 하나다.

백사장을 걸으니 잔잔한 수평선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래서 바다였던가? 잡학에 능한 일행의 말로는, 모든 걸 다 받아 준다고 해서 바다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또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바다를 찾는 이유도 다 받아주기 때문이란다. 맞든 틀리든 재미있게 듣는다.

뒤쪽 언덕에는 형형색색의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은퇴하고 노년을 편안히 지내기에 적당하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귀가 솔깃해진다. 주택임차료와 생활비가 그리 비싸지는 않아 좀 멀긴 해도 겨울에 한두 달씩 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남아공 청년들이 방어 그물을 당기고 있다. 펄떡이는 방어와 힘줄 세운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소진돼 가는 에너지를 회복했다. / 사진:김성섭
백사장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한쪽이 떠들썩하다. 줄다리기를 하는 양 청년들이 뭔가를 열심히 당기고 있다. 힘차게 당기는 건 그물이었다. 그물을 가까이 당겨 올수록 그물 속이 요란스럽다. 어른 장딴지만한 방어가 그물 가득히 펄떡거리고 있다. 방어들은 즉시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팔려간다. 그물을 당겨주지도 못하고 방어 한 마리 날라 주지도 못하고 사진만 찍었다. 더 잡을 수 있을 텐데 단 한 번만으로 끝내고 그물을 접는다.

다시 차를 달려 찾아간 곳은 볼더스 해변(Boulders Beach)이다. 남극에나 사는 것으로 알고 있던 펭귄이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에도 서식하고 있다. 아프리칸 펭귄(African Penguin) 혹은 케이프 펭귄이라고도 한다. 적도가 지나는 아프리카에 펭귄이 서식한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펭귄들이 마을 속까지 깊숙이 들어와 가축처럼 민가의 담장 밑에서 알을 품는 모습이 더 신기했다.

해안드라이브로 일정을 마감하는데 해변을 거니는 타조 가족을 만났다. 아름다운 해안도로에서 타조까지, 꿈속을 헤매는 듯 환상적이다. 많은 매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선정할 때 케이프타운을 빼놓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황금으로 세운 도시’에서 엿본 빈곤의 상처


▎2010년 6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대회 개막식 공연. 온갖 난관을 이겨내며 열린 남아공월드컵은 남아공과 아프리카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요하네스버그는 남아공뿐 아니라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도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나라의 수도로 착각한다. 요하네스버그 지명은 1856년 금광이 발견되었을 때 측량을 위해 파견됐던 ‘요하네스 마이어’의 이름에 독일어로 ‘마을’을 뜻하는 ‘Burg’를 조합해 만들어졌다. 이름의 유래처럼 요하네스버그는 1886년 금광이 발견된 후 골드러시가 이어지면서 날로 발전해 왔다.

폐광이 되기까지 요하네스버그에서 캐낸 금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전 세계 금 생산량의 40%를 담당했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지하 3200m까지 내려가 채굴작업을 했는데 지금도 지하 200m까지 내려가 당시 현장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남아공은 1세기 동안 지켜온 금 생산량 1위 국가의 자리를 중국에 내줬다. 영국의 한 컨설팅기관이 발표한 2007년 금 생산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남아공의 금 생산량은 272t이고 중국은 276t을 생산했다. 남아공이 세계 최대의 금 생산국이라는 자리를 102년 만에 중국에 넘겨준 것이다. 비용 상승과 금광석의 고갈, 투자 부족 등이 이유로 꼽힌다.

한국에서 아프리카에 갈 때도, 케냐의 나이로비나 잠비아의 리빙스톤 등 아프리카의 주요 도시에 갈 때도 언제나 요하네스버그를 거쳐서 간다. 남아공의 도시는 말할 것도 없다. 높은 경제 수준만큼 항공을 포함해 아프리카 지역의 교통수단이 요하네스버그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여느 도시같이 아름다운 요하네스버그지만, 맘 놓고 거리를 둘러볼 수 없었다. 한국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느라 이동하며 슬쩍 시내를 한번 살펴봤을 뿐이다. 악명 높은 치안이 발목을 잡았다. 저녁 9시가 채 안된 시간에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대부분의 상가가 철문을 내려가며 문을 닫고 있다. 이미 문 닫은 가게들도 이중삼중의 튼튼한 철문으로 굳게 잠겨져 있고 정적이 감돌고 있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며 누군가가 뜯어간 전화통 없는 공중전화 부스 등의 모습이 요하네스버그의 현주소다.

2010년 월드컵 당시 남아공 치안당국은 골머리를 썩었다. 월드컵 개·폐막식을 요하네스버그에 지은 메인 경기장인 ‘사커시티(Soccer City)’에서 치렀기 때문이다. 당국은 월드컵 기간에만 치안비용으로 1억7000만 달러를 집행하고 4만4000여 명의 경찰 인력을 투입했다. 다행히 월드컵은 큰 사고 없이 치러져 아프리카 발전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도 1승 1무 1패로 사상 첫 원정 16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며 요하네스버그에 기분 좋은 추억을 남겼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당시 대통령인 만델라가 개막전은 물론 기간 내내 한 번도 경기장을 찾지 않았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물론 전 세계가 평화의 아이콘인 만델라의 참석을 손꼽아 고대했다. 만델라가 월드컵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아프리카 최초 월드컵’이라는 명분은 그만큼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사연이 있었다. 당시 열세 살이었던 증손녀 제나니 만델라가 개막식 전야제로 열린 음악회에 참석했다가 귀갓길에 교통사고로 숨진 것이다.

폐막식 당일! 세계는 숨을 멈췄다. 마침내 검은색 코트에 털모자와 장갑까지 낀 만델라가 골프카트를 타고 요하네스버그의 폐막식장에 나타났다. 숨죽이며 만델라를 기다리던 9만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마디바(Madiba)’를 연호했다. ‘존경받는 어른’이라는 뜻이자 만델라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우리는 언제쯤 목청이 터지도록 ‘마디바’, 아니 ‘어르신’을 외쳐 볼 수 있을까? 그날이 우리에게도 오기를 소원한다.

※ 김성섭 - 1979년 순경으로 입직해 2017년 6월, 37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경남 하동서장, 파주서장, 서울청 홍보담당관, 서울 중부서장을 거쳐 경찰청 인권보호담당관을 지냈다. 역사에 해박한 필자는 파주서장 시절 파주 경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박물관 개관에 힘써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7년 12월 과천서장을 끝으로 퇴직한 구본숙 전 총경과 부부 사이로 경찰 역사상 첫 순경 출신 부부 총경이라는 타이틀이 있다. 현재 아프리카 여행기 책 출판을 준비하면서 아프리카 현지에서 자원봉사 활동 계획도 세웠다.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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