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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연구] ‘만년 바닥권’ 한화 일으켜 세운 ‘한용덕 매직’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곧 운명이 된다” 

이재국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중심’ 전문패널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 팀 맡아 상위권 도약 이끌어…존중과 배려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가을야구는 나의 사명”

▎한용덕 한화 감독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팬들에게 가을야구를 선물하는 것은 나의 사명”이라고 힘줘 말했다. / 사진:한화 이글스
"그럼 그렇지.”

시즌 개막 후 8경기에서 2승6패로 부진한 출발을 하자 모두들 예상했다는 듯 그러려니 했다. 이후 승수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다들 “초반이잖아”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월까지 5강에 자리 잡으며 선전을 펼쳤지만 “저러다 말겠지”라며 애써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세상은 ‘양치기 소년’ 대하듯 한화 이글스를 냉담하게 바라봤다. 어쩌면 지난 10년간(2008~2017년) 가을잔치의 방관자에 머물며 프로야구 역대 최장의 암흑기 역사를 써온 팀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는지 모른다. 거듭된 실망감. 그래서 한화 팬들조차 “이젠 안 속는다”며 한화 야구를 곁눈질로 보며 간을 봤다.

그러나 5월이 지나고 6월이 와도 한화는 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5위에서 4위로, 4위에서 3위로, 3위에서 2위로 한 계단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10년 만에 단독 2위까지 치고 올라가자 시즌에 앞서 “별 수 있겠어?”라며 최하위 후보로 분류했던 전문가들이나, “꼴찌 아니면 다행”이라며 자포자기했던 한화 팬들은 자신의 눈을 비비면서 한화 야구를 달리 바라보기 시작했다.

1점차 승부에서 좀처럼 지지 않는 끈끈한 야구. 가장 많은 역전승을 이끌어내는 짜릿한 야구. 황폐화된 텃밭에서는 유망주들이 새싹처럼 돋아나고, 다른 팀에서 버림받거나 저평가된 선수들은 돌아가며 승리의 주역이 되고 있다. 스타 몇 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 넘치는 선수들이 비빔밥처럼 버무려져 승리를 만들어가는 모습에 한화 팬들이 다시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팬들도 한화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걸치고 야구장으로 집결하고 있다. 이젠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한화 경기가 열리는 전국의 야구장은 ‘표구하기 전쟁’이 벌어진다. 한화 팬들이 부르는 ‘나는 행복합니다’는 노래는 구슬픈 ‘반어송(song)’이 아니라 진정 행복해서 부르는 ‘희망가’가 되고 있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기에 ‘설레발’은 금물이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만으로도 한화 야구는 재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한 ‘언더독(Under Dog)’의 유쾌한 반란. 이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은 놀랍게도 ‘초보 사령탑’ 한용덕(53) 감독이다. ‘우승 제조기’ 김응용(77)도, ‘야신’ 김성근(76)도 실패했던 한화의 가을야구 진출 숙제를 과연 풀어낼 수 있을까. 신선한 돌풍을 이끌고 있는 한용덕의 리더십과 숨은 매력은 무엇일까. 무엇이 꼴찌 유력 후보 독수리 군단을 비상(飛上)하게 만들었을까.

긍정 | 이유·근거·의미 있는 지혜의 산물


▎한용덕 두산 수석코치가 지난해 KIA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투수 니퍼트와 포수 박세혁을 불러 볼 배합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 / 사진:양광삼
2018시즌 개막에 앞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한화를 3약으로 꼽았다. 냉정하게 꼴찌로 놓는 전문가도 많았다. 5-8-8-7-8-9-9-6-7-8.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이어진 한화의 순위표다. 2012년까지는 8개 구단, 2013~2014년은 9개 구단, 2015년 이후는 10개 구단 체제였다. 그러니 최근 10년 사이 꼴찌만 절반에 해당하는 다섯 번이나 차지했다. 천하의 명장들도 울고 간 한화, ‘초짜 감독’에게 용빼는 재주가 있을까. 특히나 구단 운영도 최근 수년간 물불 가라지 않고 대대적으로 투자하던 기조에서 벗어나 긴축 재정을 통한 리빌딩을 기치로 내걸었다. 지난해 팀 연봉이 10개 구단 중 1위였지만, 올해는 6위로 떨어졌다. 성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흔히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하는데 마운드의 주축을 이루던 국내 투수들 중 전임 감독 아래 혹사 후유증으로 전력에 가세하지 못하는 투수들이 많았다. 박정진(42)·권혁(35)·송창식(33)이 대표적이다. 이들 3명이 없는 한화 마운드가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여기에 외부 FA(프리에이전트) 영입도 없었고, 외국인 선수들은 다른 구단에 견줘 이름값과 경력이 떨어지는 값싼 선수들로 구성됐다. 외국인 선수 3명 중 몸값이 100만 달러를 넘긴 선수는 없었다. 투수 키버스 샘슨과 타자 제러드 호잉은 70만 달러, 또 다른 투수 제이슨 휠러는 57만5000달러에 계약했다. 3명의 외국인선수 연봉 총액은 197만5000달러. 지난해 한화 외국인 선수의 연봉 총액은 무려 480만 달러(알렉시 오간도 180만 달러, 카를로스 비야누에바 150만 달러, 윌린 로사리오 150만 달러)였다. 모두 150만 달러 이상이었다.

누가 봐도 밀리는 전력이었다. 게다가 스프링캠프와 시범 경기를 거치는 동안 그 어디서도 선전을 기대할 만한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화의 호성적을 예상하는 이가 오히려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정도다.

그러나 한용덕 감독은 달랐다. 지난해 11월 한화 제11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한화에도 자원은 많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이후에도 언론 인터뷰를 할 때마다 “불펜은 두산보다 자원이 많다”며 긍정의 신호를 내보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열린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한 감독은 “2018년 한화는 144경기 도전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고 과감하고 공격적이고 멋있는 야구로 한화 팬들에게 멋진 경기를 보여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는지 모른다. 시작도 하기 전에 ‘앓는 소리’부터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초보 감독의 막연한 호기(豪氣)만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고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라고 평가한다. 한화 박종훈 단장 역시 한 감독의 장점을 묻는 질문에 가장 먼저 “지극히 긍정적인 사람”이라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라, 분명한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는 긍정이다. 지혜를 바탕으로 가지는 긍정의 힘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감독의 리더십 출발점은 바로 ‘긍정’인 셈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이에 대해 “감독 몇 년 한 것도 아니고 이제 초짜인데 리더십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며 손사래를 치며 자세를 낮추더니 “감독 부임 후 우리 팀에 자원이 많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특히 감독이 되기 전 바깥에서 볼 때 한화에 젊은 자원이 부족해 보였다. 얼마만큼 자원이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며 웃었다.

뚝심 | 강물은 바람 따라 길을 바꾸지 않는다


▎한용덕 한화 투수코치가 박찬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1년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에서 뛰었던 박찬호는 2012년 국내로 돌아와 고향팀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 스스로 선수들을 믿어주고 긍정적으로 바라본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자원이 많이 보였다. 숨은 자원 말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우리는 시즌 초반부터 어린 선수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신·구조화가 잘되고 있다. 순위보다는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것이 더 고무적”이라고 자평했다.

실제 한화에는 올 시즌 새로운 전력들이 속속 탄생하고 있다. 2000년생 고졸 신인 정은원(18)은 사실상 터줏대감 2루수인 정근우(36) 자리를 꿰차면서 ‘한화의 미래’로 눈도장을 찍었고, 마운드에서도 서균(26)·박상원(24)·박주홍(19) 등이 불펜에서 새로운 필승카드로 자라나고 있다. 육성선수 출신 포수 지성준(24)도 안방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다른 팀에서 넘어온 백창수(30)·김민하(29)는 간절함을 무기로 악착같은 플레이를 펼치며 요긴할 때 팀에 활력과 자극을 불어넣고 있다.

“생각을 조심해라. 그건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그건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그건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그건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그건 운명이 된다.” 영국 첫 여성 총리가 된 마거릿 대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이런 조언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생각→말→행동→습관→성격→운명. 결국 생각의 차이가 운명을 가른다는 의미다.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양지차의 결과를 낳는다. “선수가 없다”고 푸념하는 대신 “자원이 많다”고 바라본 한용덕의 긍정적 시각이 한화에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자양분의 출발점이 됐다.

“이름에 ‘덕’자가 있어서 ‘뺑덕이’가 됐는데, 왜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고집이 세서 그렇게 불린 게 아닌가 싶긴 하다.”

‘과거 별명이 뭐였느냐’고 묻자 한 감독은 창피한 듯 웃음을 지었다. ‘뺑덕어멈’은 고전 [심청전]에서 심술 많고 고집 센 악처다. 캐릭터만 놓고 보면 매치가 잘 되지 않는다. ‘인간 한용덕’을 잘 아는 사람들은 “호인”으로 평가하기에 더욱 그렇다.

오랫동안 한화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정민철(46)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한 감독에 대해 “언사 자체도 매우 신중하고 상대가 후배라도 존중할 줄 아는 선배”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화 한 토막을 들려줬다.

“1992년 빙그레(한화 전신)에 신인으로 입단했을 때 첫 룸메이트로 인연을 맺었다. 당시 나는 고교(대전고)를 갓 졸업하고 해외 스프링캠프에도 못 간 햇병아리 투수였는데, 마산 시범경기 때 1군에 합류하라는 호출이 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방에 들어가는 순간 한용덕 선배께서 웃통을 벗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계셨다. 남자답게 가슴에 털이 북슬북슬하게 나 있는 게 눈에 확 들어와 긴장했다.(웃음) 전년도(1991년) 17승을 올린 대투수인 데다 하늘 같은 대선배라 더 그랬다. 그런데 어린 나한테 다정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친절하게 조언도 많이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나도 배팅볼 투수부터 시작해 어렵게 야구를 해서 이 자리에 있다. 너도 지금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다’라면서 글러브를 선물로 주셨다. 당시엔 스폰서도 없던 시절이라 정말 고마웠다. 그 글러브를 끼고 입단 첫해 14승을 했다. 선배님은 시간 날 때마다 늘 책을 읽으셨는데, 남에게 과시하려는 용도가 아니고 독서를 통해 내면을 다스렸다. 선배의 모습에 영향을 받아 나도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습관이 만들어지더라.”

그러나 정 위원은 한 감독에 대해 “부드럽지만 마냥 무른 성격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한용덕 감독은 송진우(52)나 구대성(49) 선배처럼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수퍼스타가 된 게 아니라 장종훈(50) 선배처럼 연습생(현 육성선수)으로 입단했다. 어려움을 극복한 분답게 흔히 말하는 ‘깡다구’가 있다”면서 “부드러움 속에 카리스마가 있다. 그런 걸 알기 때문에 선수 시절에도 후배들이 잘 따랐다”고 덧붙였다.

실천 |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킨다


▎2007년 한용덕 한화 투수코치가 당시 고졸 2년차 투수인 류현진을 격려하고 있다.
한용덕 감독은 동아대 시절 야구를 포기하고 막노동 현장을 누비며 생계를 이어갔다. 3년간 야구를 떠나 있다가 돌아왔다. 한 감독 역시 “당시의 그런 경험이 인생의 큰 자산이 됐다”고 돌이켰다.

“난 동아대 졸업생이 아니고 중퇴생이다. 1학년 때 왼쪽 무릎이 너무 아팠다. 물이 차올라 뛰지를 못 하니 야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야구를 그만뒀다. 솔직히 당시엔 ‘내가 밖에 나가서 뭘 해도 못 먹고 살겠느냐’고 호기를 부렸던 거였다. 항간에는 내가 트럭 운전수였다고 하는데 트럭을 직접 몰지는 않았고 운전수 옆에 앉아 조수를 했던 것이었다. 잠시 하려던 것이었는데 트럭 운전수가 나를 예뻐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오래하게 됐다.(웃음) 전봇대를 직접 타고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전기선을 정리하고 전화기를 수거하는 일도 해봤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군대(방위)에 가게 됐는데 그때 무릎 수술을 하고 재활을 했더니 괜찮아지더라. 군복무를 마치고 ‘세상에 나와 보니 그래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야구구나’라고 생각하면서 3년 만에 다시 야구공을 잡았다.”

그는 1987년 빙그레에 배팅볼 투수로 들어갔다. 천안 북일고 시절 은사였던 김영덕 감독이 빙그레 제2대 사령탑으로 지휘봉을 잡은 뒤였다. 그리고는 1988년 정식선수가 됐다. 이강돈·이정훈·강정길 등 주력 타자들이 배팅볼을 던지는 한용덕의 구위에 대해 극찬을 하자 김영덕 감독은 구단에 정식선수 등록을 요청한 것이었다. 김 전 감독은 “선수들이 공이 좋다고 하니 그 말만 믿었다. 내가 직접 확인하지도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고생을 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절실함을 아는 친구다. 그 경험에서 얻은 배움이 좋은 지도자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며 자신의 뒤를 이어 한화 지휘봉을 잡게 된 제자를 믿었다.

투수 한용덕은 2004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17년간 통산 120승118패24세이브, 평균자책점 3.54를 기록하며 연습생 신화를 썼다. 여기엔 60완투와 41완투승, 16완봉승이 곁들여져 있다. 정민철 위원의 말처럼 그는 힘든 과정을 겪은 만큼 내면이 강한 사람이다. 파란만장한 선수생활을 하면서 차돌처럼 단단해졌다. 그러면서 다져진 그의 뚝심은 감독이 된 뒤에도 잘 발현되고 있다.

정 위원은 “마운드만 놓고 보자. 시즌 개막 후 1군에는 박정진·권혁·송창식 등 핵심 투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들 없이 한화 마운드를 꾸려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없어도 마운드가 잘 돌아가고 있다”면서 “굳이 필승조·추격조·패전조로 구분하지 않고 역할 분담을 통해 모두를 쓰임새 있는 투수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그동안 비주류로 분류되던 투수들을 중요한 순간에 기용하면서 그들의 자존감을 올려줬다”며 환골탈태한 한화 마운드의 숨은 힘을 높게 평가했다. 이어 정 위원은 “시즌에 앞서 ‘마무리투수 정우람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웃카운트 3개 이상 잡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더니 그 약속을 뚝심 있게 지키고 있다. 그것 때문에 이겨야 할 몇 경기를 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보다는 득이 많았다. 어쨌든 그런 언행일치를 통해 벤치가 선수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다. 나도 현장에 있어 봤지만 이렇게 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는 다소 무리라고 판단해도 실적이 있는 투수를 찾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한용덕 감독은 팀 내부에서 선수들의 서열을 규정짓지 않고 모두를 같은 전력으로 본 것이다. 그러면서 비주류에 있던 선수들도 중요한 순간에 투입되고 이겨내면서 한 뼘씩 성장해 전력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감독은 이에 대해 “시즌 초반에 성적이 나지 않을 때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는 않았다. 여론도 좋지 않았다. 솔직히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결심한 부분이 틀리지 않았다면 초지일관 뚝심 있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의 언행일치는 선수단 운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뒤 투수들에게 “도망가는 피칭을 하면 2군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시범경기부터 개막 직후까지 과감하게 투구하지 못하는 안영명(34)·이태양(28)·장민재(28) 등을 2군에 내려보내며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자 한화 투수들은 공격적으로 투구하기 시작했다.

협력 |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


▎현역 생활 말미이던 2001년 한용덕의 투구 모습. 키킹(kicking) 때 왼쪽 다리를 가슴 높이까지 들어올리는 동작이 인상적이다.
이런 한화의 공격성은 투수뿐만 아니라 야수들에게도 침투됐다. 공격적으로 치고, 공격적으로 수비하고, 공격적으로 주루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실패를 하더라도 용납이 된다. 그러나 기본에 충실하지 않거나 면피 위주의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곧바로 2군행을 통보 받는다. 팀 내 최고참 격인 배영수(37)도, 정근우(36)도 마찬가지였다.

한화 운영팀 관계자는 “감독님은 선수를 2군에 내려 보낼 때는 꼭 불러서 왜 내려가는지, 뭐가 부족한지, 무엇을 만들어 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시더라. 개인 감정이나 주변 평판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팀에 필요한 역할을 해달라고 선수에게 당부를 한다. 선수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결정은 반발만 불러올 뿐이다. 정확한 메시지를 주고, 방향성을 제시하니 선수들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을지언정 납득을 한다. 그런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선수단과 프런트의 혼선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강물은 바람 따라 물결치지만 바람 때문에 갈 길을 바꾸지는 않는다.” 장태평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펴낸 시집 [강물은 바람 따라 길을 바꾸지 않는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뺑덕이’ 한용덕의 고집과 뚝심이 한화 선수단에 흔들리지 않는 모체로 작용하고 있다.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의 자리에 오른 자들은 간혹 ‘동굴의 우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편견, 자신만의 성공 방정식이 옳다고 믿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동굴에 갇힌 인간은 동굴 속에 켜진 촛불로 인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진리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용덕 감독은 이런 오류를 차단하기 위해 먼저 말하기보다는 듣기부터 한다. 한화 프런트 관계자는 한 가지 사례를 들려줬다.

“한용덕 감독과 송진우 코치는 레전드 투수 출신이다. 자신만의 야구관이 뚜렷할 수밖에 없다. 한 감독은 처음 한화 선발 마운드를 6선발로 구상했다. 그러나 송 코치는 ‘현재 한화 투수진으로 봤을 때 6선발보다는 5선발 체제가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한 감독은 고민 끝에 송 코치의 말을 들어 줬다. 코치의 주장이 일리가 있으면 자신의 의견과 달라도 일단 들어주는 스타일이다. 우리 팀에는 고동진(38)·이양기(37) 등 젊은 코치들도 많다. 그들에게는 경험 많은 감독이 지시해도 되지만 항상 먼저 묻고 방법을 같이 찾는다. 그러다 보니 코치들도 자신의 주장이 수용되면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연구한다. 감독에게 결과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한 감독은 선수 생활을 끝낸 뒤 투수코치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다. 스카우트(2005년)도 해봤고, 2012년에는 LA 다저스 연수도 다녀왔다. 단장 특별보좌역(2014년)으로 프런트 경험도 쌓았다. 2012년에는 한대화 감독 중도 퇴진 후 감독대행(28경기 14승13패1무)도 해봤다. ‘영원한 이글스맨’으로 남을 줄 알았지만 2015년 김성근 감독이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한화를 떠나 두산 옷을 입었다. 두산에서도 2군 총괄코치와 1군 수석 및 투수코치를 지내면서 1·2군을 모두 체험했다. 2017년 김태형(51) 감독이 시즌 도중 게실염으로 입원했을 때 두산 감독대행(3경기 2승1패)을 맡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그에겐 큰 자산으로 적립됐다.

사실 2012년 감독대행을 맡아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두며 시즌을 마무리할 때만 해도 한화 감독 승격이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구단의 선택은 김응용 감독이었다. 그로부터 5시즌이 지나서야 한화 감독에 오르게 됐다. 당시 섭섭하지 않았을까.

경험 |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성숙해졌다


“당시엔 솔직히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만약 내가 바로 감독이 됐다면 독재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을 것이다. 단장 보좌역으로 프런트도 경험해 보고, 다른 팀에도 가서 다른 문화도 보고, 나보다 나이 어린 감독(김태형)도 모시면서 더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야구는 감독 혼자만 잘해서 잘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코치들과 프런트들의 고충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이해하게 됐다. 그러면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시야가 만들어진 것 같다. 사람인 이상 내가 생각 못 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 생각이 모일 때 오류를 줄일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결정할 경우 리더가 잘못된 판단을 하면 모든 게 다 무너진다. 그래서 먼저 말하는 것보다 듣게 되는 것이다.”

한용덕 감독은 ‘중앙집권의 힘’보다는 ‘분할의 힘’을 믿는다. 그는 이를 두고 ‘사람 중심’이라고 표현했다. “야구장에서 주인은 선수다. 선수가 역량을 발휘해야 강팀이 된다. 야구는 사람이 하는 스포츠다.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한다. 사람은 마음으로 움직이는데, 결국 마음과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팀이 바뀔 수 있다고 봤다. 취임할 때 선수들에게 ‘야구를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사랑하면 좀 더 정성을 들이고 아끼게 된다. 난 야구를 그만둬봤다. 다시 야구를 시작했을 때 절실함을 가지고 싸웠다. 그러니까 힘든 훈련을 할 때도 힘들지 않았다. 지금 우리 선수들은 야구를 사랑하고 야구에 정성을 쏟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그런 부분에서 내 얘기가 잘 전달된 것 같다.”

그는 한화 선수들에게 늘 “스스로 알아서 하라. 눈치 보지 마라. 더그아웃 보지 마라”라고 강조한다. 하고 싶은 야구를 하라는 주문이다. 한화는 올 시즌 가장 희생번트가 적은 팀이다. 이 자체가 변모한 한화의 한 단편이다.

“벤치가 개입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내가 번트 작전을 내면 성공률이 떨어지더라. 그런데 선수 스스로 번트 타이밍을 읽고 댈 때는 성공을 하더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은 크다. 난 현역 시절 훈련을 정말 많이 했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에겐 훈련을 강요하지 않는다. 미국에 연수를 가 보고, 두산에 가보고,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를 하면서 훈련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개인적으로도 돌아보니 나도 예전에 훈련하는 시간보다는 생각하는 시간에 더 많이 발전했던 것 같다. 생각을 할 때 깜짝깜짝 오는 게 있었다. 코칭스태프가 일일이 개입하는 것보다 선수들이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하고, 경기를 보는 눈을 기르고, 경기를 풀어가는 능력을 길러야 강팀의 토대가 만들어진다. 두산이 그렇지 않나.”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그는 동행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리더십(leadership)도 중요하지만 자발적인 팔로어십(followership)을 잘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한 감독은 “가자”를 주장하는 ‘보스형’이 아니라 “가자”고 제안하는 ‘리더형’으로 독수리 군단의 비상을 지휘하고 있다.

한용덕 감독은 야구를 떠났을 때 야구에 대한 절실함을 깨달았다고 했다. 잠시 이글스를 떠나 있을 때 이글스에 대한 애정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한 감독의 목표는 확실했다.

“한화 팬들이 부르는 ‘나는 행복합니다’는 노래가 더 이상 반어법이 아니길 바란다. 팬들도 그랬겠지만 나도 빙그레 시절엔 가을야구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 몰랐다. 한화 팬들에게 가을야구를 선물해 드리고 싶다. 이건 내 사명감이다.”

- 이재국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중심’ 전문패널 keystone71@naver.com

201807호 (201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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