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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김정일 개혁·개방의 실패학 

북한 內 인프라, 국제 정세가 ‘통 큰 결단’을 가로막았다 

이영종 중앙일보
미국 패권주의 부상과 소련 붕괴 맞물리면서 탄력 잃어…북핵 완성한 김정은 승부수는 일단 담대한 모양새

▎생전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평양 락랑 영예군인 수지 일용품공장을 현지지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김일성 주석 집권 말기 북한 경제는 만신창이 상태였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에다 1990년을 전후한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그렇지 않아도 빈사 상태였던 산업 전반에 충격파를 던졌다. 근근이 버텨 주던 해외 수출 시장이 쪼그라든 건 물론이고 변변한 원조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개혁·개방을 택한 중국은 아직 북한에 의미 있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 처지가 못 됐다.

5년마다 열어야 하는 조선노동당 대회는 1980년 10월 6차 당대회 이후 개최되지 못하는 형국이 됐다. 노동당이 국가경제계획을 제대로 제시하기 힘든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1993년 12월 열린 당 6기 21차 전원회의에서는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를 자인해야 하는 막다른 길까지 몰렸다. 그 회의를 통해 농업·경공업·무역 등 3대 제일주의 노선을 밝혔지만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김일성이 공장·기업소와 협동농장 등을 동분서주하며 생산증대를 독려하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사정은 개선되지 못했다.

당시 상황은 김일성 사망 이틀 전인 1994년 7월 6일 소집된 경제부문책임일꾼협의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북한에서 ‘일꾼’은 해당 분야 간부를 의미한다. 경제 분야를 책임진 노동당과 내각의 고위 관료들이 참여한 일종의 대책회의라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가슴이 왜 이리 답답한가. 경제가 안 풀려 요즘은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게 됐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경제 각 부문이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말한 뒤 부총리와 장관급 간부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워 질책했다. 그는 “동무들! 농업·경공업·무역 제일주의는 당의 결정사항 아닌가. 화학비료는 남흥화학·흥남화학을 생산 정상화하도록 만들라우. 김환(화학공업담당 부총리)이는 비료공장 설비보수를 책임지라고 여러 번 지시했는데 아직도 제대로 집행하지 않고 있어”라며 농업생산 정상화를 위한 비료 생산을 강조했다. 이어 “우리가 배를 많이 만들어야 해. 큰 짐배(화물선)를 100척 정도 만들라우. 선박공업부(부장 이석)에게 내가 큰 짐배를 100척 만들라 한 지 여러 해가 됐는데 아직도 안 되고 있어”라고 질책했다. 이름까지 거명해가며 문책성 공세를 퍼부은 이례적인 분위기였다. 김일성은 참석 간부들에게 “경제가 엉망인데 동무들은 회의에서 아무런 문제 제시나 답변을 못하고 있다”고 호통을 쳤다.

수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총체적 경제난국


▎‘일 잘하는 충신은 있어도 말 잘하는 충신은 없다’는 남포경공업종합공장의 김정일 어록.
당시 상황은 [김일성 선집]을 비롯한 북한 문헌에 점잖은 말투로 순화돼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회의 내용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김일성의 노기 어린 목소리를 포함해 긴장됐던 회의장 분위기가 외부에 알려졌다. 김일성은 끝부분에서 “이틀 뒤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으니 부문별로 대책을 세워 보고하라”고 지시했지만 심근경색으로 숨지면서 회의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북한은 회의에서 나온 김일성의 지시를 ‘7월 6일 유훈교시’로 내세우며 북한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밝혀준 ‘강령적 교시’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총체적 경제난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넘겨받은 김정일에겐 험난한 앞날이 예고됐다. 세습을 통해 최고 권력자라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부채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북한 체제가 곧 몰락할 것이란 예견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혼란을 던졌다. ‘고장 난 비행기’에 비유될 수준으로 모든 게 비정상이었고, 언제 추락하거나 불시착해도 이상하게 없을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여기에다 김일성 사망 이듬해부터 연이어 닥친 대홍수와 이로 인한 식량난과 경제위기에 휩쓸려 허우적거려야 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포함한 고위 탈북 인사와 우리 대북 인권·지원 단체 등은 당시 200만~300만 명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은 “당시 북한 내부 정보와 분석 등을 통해 46만 명 정도가 아사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귀띔했다.

북한 당국도 당시를 ‘고난의 행군(行軍)’이라고 부를 정도다. 본래 고난의 행군은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을 선전하는 가운데 나오는 개념이다. 식민통치 시기인 1938년 말~1939년 만주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무리가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하기 위해 겨울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며 100일 넘게 이동했던 상황을 말한다. 김정일 집권 시기 곳곳에 나붙은 구호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말이었다는 점에서도 북한이 마주했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당시 북한이 ‘혁명적 낙관주의’란 개념을 당 간부와 주민들에게 전파할 정도로 수세적인 국면이었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통치노선을 따르는 이른바 ‘유훈(遺訓)통치’로 위기를 극복하려 시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7년 10월 노동당 총비서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른바 3년상을 치른 뒤 권력을 넘겨받은 것이란 관측도 있지만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장애물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란 분석도 있다. 김정일은 집권 내내 정치·경제보다 군사 분야를 앞세우는 이른바 ‘선군(先軍)정치’를 통해 북한이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려 시도했다. 2009년 4월 개정한 헌법에는 ‘선군사상’을 처음으로 명기하기도 했다. 군부는 기세등등했고 김정일은 원로세력을 비롯한 군 핵심 인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당근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선군정치는 김정일 집권 시기 내내 북한을 지배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2005년 2월 북한 관영매체들은 김정일이 “우리에게는 사탕보다 총알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점을 강조하며 선군노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내가 최근 한 10년 동안 일하면서 얻은 결론은 군대를 강화하고 당과 인민의 일심단결을 튼튼히 다지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며 그 어떤 강적도 굽어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도 강조됐다.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이 믿을 건 군사력밖에 없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경제 분야에서 가장 관심을 쓸 수밖에 없던 건 역시 먹는 문제의 해결이었다. 집권 초반부터 스트레스로 자리했다. 남한과의 적십자 회담이나 차관급 당국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는 대북 식량지원 문제였다. 이른바 ‘인도주의 협력’이란 이름으로 이산가족 상봉과 식량 원조를 맞바꾸는 거래가 이뤄졌다. 김정일도 내부적인 식량 증산책을 서둘렀다. 하지만 “풀판을 고기로 바꾸자”며 토끼 기르기를 장려하고 열대메기를 북한 전역에서 기르라고 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북한 풍토에 잘 맞지 않는 열대메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양식장으로 쓰던 곳은 미나리꽝으로 바뀌어 버렸다.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량 아사라는 참혹한 사태를 목도한 노동당의 젊은 간부와 엘리트 계층 사이에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암암리에 번지기 시작했다. 소장파 무역 일꾼이나 신진 간부들은 선군정치나 자력갱생 노선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일도 벌어졌다. 어떻게든 외화를 벌어들이고 새 기술도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야 북한이 주장하는 강성대국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에서다. 이들 중 일부는 실속 없는 대남·대미 선전전이나 기싸움에 집착하는 노간부를 ‘꼴통’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냈다.

“어떻게 지켜낸 군사분계선인데 소떼를 몰고 오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1989년 중국을 방문하는 김일성 당시 주석(오른쪽)의 특별열차에 올라 환송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은 북한 내부에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왔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시기 남북 경협을 통해 북한이 당면한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당시 북한 군부는 정 회장 일행의 판문점 통과 방북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지켜낸 군사분계선인데 남조선의 재벌 영감이 소떼를 끌고 넘어오게 놔둘 수 있느냐”는 취지였다는 게 당시 대북 접촉을 벌인 경협 관련 인사와 정부 당국자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김용순 당 대남비서가 김정일을 설득해 성사시켰다. 군부에 휘둘리던 김정일의 집무실에 직접 뛰어 들어가 판문점 소떼 방북의 의미와 허용 필요성을 직언했다는 얘기다. 이런 움직임은 같은 해 11월 금강산 관광선 첫 출항으로 이어졌다. 이때도 북한 군부는 군사 요충지인 장전항 개방에 반대했지만 김용순은 빈사 상태이던 북한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서는 9억4200만 달러의 대가가 약속된 금강산관광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맞섰다고 한다.

금강산관광은 첫 남북 정상회담의 돌파구를 여는 역할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김 대통령님께서 저를 은둔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했다. 조크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이후 행보는 베일에 싸여 있던 북한 최고 지도자의 ‘해방’에 가까웠다. 김정일은 금강산관광을 포함해 개성공단 개발과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공사 같은 이른바 3대 경협사업을 본격화하며, 경협을 중심축으로 한 남북 관계의 속도전을 벌였다. 김정일은 개성공단 개발과 관련해 현대 측에 “개성 땅은 현대에 몽땅 내준 것이니 알아서 개발하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파산 위기에 처한 북한 경제를 살리려면 무엇보다 남한과 손을 잡는 게 가장 효과적이란 판단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가동이 본격화하면서 북한은 비교적 안정적인 달러 수입을 챙길 수 있게 됐다. 특히 개성공단은 북한이 달러벌이 측면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사업이다. 2004년 12월 처음 제품 생산이 이뤄진 개성공단은 북한이 각별히 챙기는 수입원이었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도발로 남북관계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북한은 “개성공업지구는 끝까지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거나 “공단 사업은 정세와 상관없이 끝까지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고립 야기한 북한 정부의 정세 오판


▎함흥 시내의 농민시장(일명 장마당). 2003년 북한은 장마당 형태의 시장을 공식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김정일은 2002년 북한판 경제개혁 구상인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는 김정일식 경제 개혁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물가·임금 체계와 중앙집권적 경제 체제에 수술을 가한 주목할 만한 정책변동이란 점에서다. 평균 200원 수준이던 근로자 월 임금은 3000원 수준으로 조정됐고, 환율도 달러당 2.15원에서 143원 정도로 바뀌었다. 2003년 3월에는 김정일 지시로 장마당 형태의 시장이 공식 인정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북한 전역의 종합시장은 100여 개 이상으로 늘었고 전문도매업 성격의 유통망도 생겼다. 북한 관료와 주민들 사이에 실력·실적·실리를 중시하는 이른바 3실(實) 주의가 등장한 것도 7·1조치가 가져온 변화였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평양에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이 생겼고 ‘고기겹빵’으로 불리는 햄버거 전문점도 등장했다. 북한이 햄버거의 평양 상륙 과정을 설명하며 김정일의 개혁·개방 성향을 드러내는 보도를 내보낸 사례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 매체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2000년 9월 노동당의 한 간부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세계적으로 이름이 있다고 하는 한 빵 품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그 빵에 못지않은 고급 식빵과 감자튀기(튀김)를 우리 식으로 생산해 대학생들과 대학교원, 연구사들에게 공급할 결심”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맥도날드 같은 국제적 브랜드의 햄버거를 모델로 삼아 도입을 지시했다는 얘기다. 남한의 평화자동차가 남포 현지 공장에서 생산하는 승용차 ‘휘파람’의 광고판이 평양에 등장하는 등 자본주의적 요소가 선을 보여 서방 언론의 관심을 받은 것도 이 즈음이다.

북·중 국경도시인 신의주를 경제특구로 지정하는 개방정책에도 나섰다. 대외관계 개선에도 적극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클린턴 정부 말기인 2000년 10월에는 군부 실세인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을 워싱턴에 특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곧이어 평양을 특사로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북·미 관계 개선의 단꿈을 꾸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2002년 9월 평양 정상 회담에서는 납치 일본인에 대해 시인하고 사과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모두 북한의 체제 유지와 경제난 타개를 위해 ‘통 큰 결단’이 필요하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이뤄진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체제의 민생경제 살리기와 개혁·개방 조치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식량 부족과 계획경제 체제의 붕괴로 인해 노동당의 배급망이 마비되는 등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기본 환경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다. 여기에 국가 경제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연합기업소 수준의 생산 단위는 물론 전기·철도·항만 등 인프라가 제구실을 못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해외시장의 위축과 중국의 불확실한 지위, 그리고 ‘팍스아메리카나’로 불린 미국 패권주의가 횡행하는 국제 정세는 북한의 입지를 더 좁게 만들었다.

여기에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호전적인 선군노선은 한국과 국제사회의 반감을 샀다.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으로 노무현 정부는 대북 유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했다. 북한을 감싸고 이해하는 입장에서 펼쳤던 정책은 한국 국민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국제사회의 반감을 샀고, 유엔 제재 국면에 한국 정부도 적극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북한은 판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경제 부문에서 대남 의존도를 크게 높여가면서도 이를 당연시하고 고압적인 태도까지 취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북한의 이런 태도에는 “남조선은 미군에 강점당한 조선반도의 일부”라는 대남 인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북한 회담 대표가 “선군정치 덕분으로 남측의 안전이 유지되고 있다”는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하며 대북 쌀 지원을 요구하는 상황도 이런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천안함 폭침 도발이나 연평도 포격 같은 군사도발 사태는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여론을 대북 제재 쪽으로 몰고 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경협·교류 등을 통해 터놓은 북한 경제의 숨통을 김정일 위원장 스스로 옥죄는 자충수였다.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설 것이란 기대가 점차 사라진 것도 이때쯤이다.

김정은식 ‘두 마리 토끼 잡기’ 구상


▎1949년 설립된 북한 최초의 화장품 생산기지인 신의주 화장품공장을 둘러보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담판까지 벌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승부수는 일단 담대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다. 조명록 특사를 워싱턴까지 보내고도 좌고우면하다 실기한 아버지 김정일과는 스타일이 달라 보인다. 김정은의 경우 직설적인 화법과 노골적인 구애 제스처로 트럼프의 심기를 파고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잇단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로 워싱턴 타격을 위협하던 김 위원장은 올 들어 대미 접근 쪽으로 급선회했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를 디딤돌로 삼는 전술을 구사했다.

김정은이 미국과의 적대관계 청산과 정상화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는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에서 드러난다. 지난 7월 6~7일 방북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통해 전달한 친서에서 김정은은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24일 전 싱가포르에서 있은 각하와의 뜻 깊은 첫 상봉과 우리가 함께 서명한 공동성명은 참으로 의의 깊은 여정의 시작으로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은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과 함께 경제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김정은식 ‘두 마리 토끼 잡기’ 구상을 엿보게 한다. 북한의 만성적인 경제난을 풀고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김정은의 복안은 집권 후 첫 공개연설에서 제시됐다. 2012년 4월 15일 김일성광장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날은 김일성 출생 100주년을 맞는 시점이었다. 연설 2개월 후에는 노동당이 통제하는 공장·기업소 등 경제 단위에 자율권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6·28 개혁 조치가 나왔다. 2013년 5월에는 경제개발구법을 만들어 공표했고, 지난해 말까지 중앙급 경제특구(5개)와 지방급 경제개발구(22개) 등 모두 27곳을 지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여파로 대북제재 강도가 누그러뜨려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6월 말~7월 초 이뤄진 김정은의 북한 북부지역 체류 일정은 꼼꼼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시점이 묘하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세 번째 중국 방문(6월 19~20일) 직후를 선택했다.

중국과 마주한 북·중 접경지역을 잇따라 돌아본 것도 눈길을 끈다. 평북 신도군과 신의주시는 북한의 대표적 경제특구 중 하나인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가 위치한 곳이다. 또 양강도 삼지연군은 북한이 김정일의 출생지로 선전하며 이른바 ‘백두혈통’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는 지역이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북·미 관계개선과 미국 기업의 대북 진출까지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과의 접경지역을 방문했다는 건 ‘미국에 호락호락 끌려가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메시지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만남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대미 공조 방안을 협의하고, 중국의 지원을 통한 경제회생 쪽에도 공을 들이겠다고 의기투합한 분위기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얘기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이런 행보에 우려를 제기한다. 서울과 워싱턴과의 관계개선과 교류·협력을 통해 경제난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정상화할 수 있는 길과 다른 궤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다. 시진핑 주석의 말에 솔깃해하며 ‘완전한 비핵화’ 합의 이행을 머뭇거리다가는 김정은과 북한이 천재일우와 같은 체제생존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개혁·개방을 향한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이미 한계를 드러낸 ‘북한식 경제개선 조치’에 집착하려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정은은 7월 초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현대화 공사를 진행한다는 이 공장에서는 보수도 하지 않은 마구간 같은 낡은 건물에 귀중한 설비들을 들여놓고 시험 생산을 하자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숱한 단위들에 나가보았지만 이런 일꾼들은 처음 본다”는 말까지 쏟아냈다. 김정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5년 5월 대동강자라공장을 방문했을 때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을 말아먹었다”며 지배인을 처형토록 지시한 것으로 탈북·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전하고 있다.

북한 경제 상황에 대한 현실적 인식과 진솔한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는 말도 나온다. 김일성은 사망 이틀 전 회의에서 북한 경제 상황을 질책하며 “부족한 원자재나 기술은 돈을 주고서라도 외국에서 사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표현은 무려 10여 차례 언급됐다. 간부들에게 자력갱생에만 얽매일 게 아니라 외국으로부터의 기술 및 자재 도입 등 다방면의 대책을 강구하라는 뜻이다. 이에 반해 김정은은 여전히 ‘국산화’와 ‘자력갱생’을 강조한다. 신의주 방직공장을 찾은 김정은은 “우리 식의 국산화·현대화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는 때에 이 공장은 난관 앞에 주저앉아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동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정은식 생존전략의 진실의 순간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과 영접 나온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김정은은 북·미 정상회담 전야에 싱가포르의 밤거리를 돌아본 뒤 “귀국의 경험을 많이 배우려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권위주의 리더십을 유지하며 경제 발전을 이룬 싱가포르식 개발 모델에 관심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개혁·개방으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중국의 번창을 벌써 세 차례 이어진 방중 일정을 통해 김정은은 확인했다. 전용열차로 북·중 변경을 넘어 북한 땅으로 넘어오며 목도한 피폐한 경제 실상에 번뇌했을 공산이 크다. 2년 전 5월 노동당 7차 대회 연설에서 “개혁·개방 바람도 선군 총대의 기상으로 날려 버렸다”며 호기 있게 말하던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묘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다.

34세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앞에는 북한 체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길이 놓여있다. 한국과 서방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길이지만 북한엔 쉽게 선택하기 힘든 전인미답의 노정이다. 개방과 국제화라는 도도한 세계사의 흐름 앞에 노출된 김정은식 생존전략은 이제 진실의 순간을 맞았다. 개혁·개방으로 번영과 공존을 택하느냐 아니면 또다시 기약 없는 은둔과 고립의 질곡에 빠져드느냐 하는 문제다. 그건 선대 수령인 김정일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김정은은 6년 전 첫 연설을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말로 맺었다. 개혁·개방의 기로에 선 김정은이 생각하는 ‘최후의 승리’는 무엇일지 그의 선택이 주목받고 있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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