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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인물] 국내 유일 민선 6선 김관용 전 경북도지사의 귀거래사 

“생각과 행동의 바탕은 국민이 있는 현장”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23년 재임 동안 경북도청 이전, 새마을운동 세계화 등 숱한 업적 남겨…퇴임 후 보수의 가치 연구에 집중, 국민과 대화할 기회 만들 듯

▎6월 20일 경북도청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부인 김춘희 여사와 함께 인사말을 하는 김관용 전 경북지사.
"후임자가 유능해서 마음 놓고 떠납니다. 많은 분이 자리를 해주신 걸 보면서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를 느낍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깊고 높은 마음을 담아서 잘 살아 가겠습니다.”

초여름 후덥지근한 더위가 땀샘을 자극하던 6월 20일 오후 경북 안동의 경북도청 동락관. 이곳에서 열린 ‘김관용 북콘서트’ 말미에 김관용 당시 경북지사가 행사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정중한 고별사를 고했다. 이날은 3선 퇴임을 열흘 앞둔 그가 민선 6선 23년 만에 처음 발간한 저서 [6 현장이야기] 출판기념회가 열린 날이다. 올해로 75세를 맞은 그가 살아 온 인생 역정을 담았다. 북콘서트장에는 그의 후임인 이철우 경북지사 당선인을 비롯해 권영진 대구시장, 강석호 국회의원 등 각계 인사 20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워 ‘거인’의 출판과 아름다운 퇴장을 함께 기념했다.

[6 현장이야기]는 구미시장 3선과 경북지사 3선 등 총 6선 지자체장의 경험을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이다. 대한민국에서 6선을 기록한 지자체장은 그가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선거제도의 신봉자, 아니 숭배자에 가깝다. 저서와 이날 콘서트에서 자신의 성공이 선거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사실 저는 선거제도가 없었다면 경북지사도 못했을 겁니다. 스펙도 약하고 조건도 좋지 않았는데 선거가 있어 지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간 줄곧 생각해 온 게 가치입니다. 집사람으로부터 늘 시건(철, 경북 지역의 사투리)이 늦게 터진다고 핀잔을 듣습니다.”(북콘서트)

“고백하자면 지금의 현실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가난했고 미래에 대한 꿈조차 꾸지 못했으며 인물, 학벌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국비를 지원해 주는 사범학교에 가야 했던 시골 아이가 도지사가 됐으니 이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출세한 것도 좋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것도 자랑스럽지만,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겠는가?”([6 현장이야기] 6쪽)

대한민국 지방자치가 낳은 최고의 스타


▎김관용 전 경북지사는 경북도청의 안동 이전으로 지역 균형발전에도 전기가 마련됐다는 입장이다.
김관용 전 경북지사는 한국 지방자치사에서 최장수 지자체장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그의 지자체장 재임 기간은 구미시장 3선(1995~2006년), 경북지사 3선(2006~2018년) 등 모두 23년에 이른다. 승률도 6전 전승, 100%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딛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대한민국 지방자치가 낳은 최고의 스타이기도 하다.

김 전 지사는 1942년 11월 29일 경북도 구미시 문성리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읜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도 또래보다 늦게 들어갔고, 1958년 열일곱의 나이에 학비를 지원해 주는 대구사범학교에 간신히 진학할 수 있었다. 19세 때인 1961년 구미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구미초등학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졸업한 학교다. 이와 관련해 그는 저서에 “구미초등학교를 졸업한 박 대통령이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잠깐 문경초등학교 선생이 된 것은 내 인생의 이력과 이상하게 비슷하다. 따지고 보면 내게는 하늘 같은 선배였다”고 인연을 부각시켰다.

김 전 지사는 1965년 야간대학(당시 청구대, 현 영남대)을 다녔고 나이 서른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중앙부처 공직을 떠나 1995년 6월 구미시장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6선의 지방자치단체장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그의 성공은 가난 탈출의 집념과 타고난 승부근성의 산물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그의 유년 시절은 먹고 살고 공부하고 어머니가 속상하지 않게 지내는 것이 전부였다. “꿈을 꾼다는 것은 나와 먼 세상의 일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대구사범학교 시절은 달랐다. “인간에 대한 생각, 나라의 정체성, 삶에 대한 깊이, 물론 좋은 선생님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지만 내게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다.” 그에게 사범학교 시절은 구원과도 같은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더하기, 빼기만으로 삶을 살아가던 어린아이에게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을 던져주었던 시절이었다. 한 아이에게서 술지게미 냄새가 났다고 하자. 이 아이는 술을 마신 것인가, 아니면 고픈 배를 채운 것인가. 이런 간단한 질문에도 심리가 스며들고 논리가 살아 숨 쉬도록 배우고 무던히도 애쓰며 공부했다.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애벌레에서 나비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는 매일 대구에서 구미까지 통근열차에 몸을 실었다. 왕복 3시간의 열차 출퇴근을 감내하면서 그의 미래를 바꾸게 되는 사건들을 접한다. 새벽 열차에 탄 승객들이 나누던 대화가 그랬다.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내뱉는 ‘학점’이라는 말이 그를 야간대학으로 이끌었고 나중에는 또 ‘고시’라는 단어가 그의 심장을 찌른 곳도 바로 열차 안이었다. “새벽 열차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에 내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그는 저서 [6 현장이야기]에서 밝힌다. “누군가가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새롭게 바꾸려면 환경을 바꾸고 새로운 경험을 갖는 수밖에 없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기차 안을 서재 삼아 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준비하고, 대학생으로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고시를 결심하고부터는 7년간 감사의 시간으로 기억되던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공부에 몰입했다. 당시에도 선망 직업이던 선생님이 됐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 합격, 제대 후 1973년 충북 병무청 과장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다. 임명직 공무원 인생은 그의 말대로 ‘공무원이 맞지 않는 공무원’이었다. 행시 합격 후 처음 들어간 병무청과 다음 보직인 국세청에선 한직으로만 돌았다. “폐쇄적인 명령체제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병무청에 이어 또다시 흔들렸다. 타협 없이 손바닥을 비비지 않고 걸어가는 길은 어려웠다. 나는 젊었고 불의와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승진은 포기했다.”

‘버리고 싶은 과거’들과의 결별, 그리고 관운


▎2016년 2월 신청사를 향해 출발하는 트럭을 배웅하는 김관용 당시 경북지사와 도청 직원들.
대표적인 예가 문민정부 청와대에서 쓴 ‘안가 보존 보고서’라고 그는 기록한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 옆 안가 폐지 문제가 불거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안가를 철거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역사적으로 아픈 기억은 사장할 게 아니라 보존하고 바로 세움으로써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안가 철거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일로 청와대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그 역시 불려가서 혼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보고서를 또 제출했다. 철거가 불가피하다면 그곳의 물건들을 구미의 박 전 대통령 생가에 보내자는 의견이었다. 그는 이 일로 청와대를 떠나게 됐다고 밝혔다.

김 전 지사에게도 ‘흑역사’가 있는 걸까? 430여 쪽에 이르는 두툼한 그의 저서 [6 현장이야기]에서 임명직 공무원 시절을 다룬 분량은 달랑 12쪽에 그칠 정도다. 그의 30년 이상 된 중앙정부 공무원 시절은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로 더 많이 채워져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 또한 저서에서 “나의 30년 공직생활 동안 잘못한 부분도 없는데 여러 차례 한직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사람을 친소 관계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인사권을 발휘할 때 기본 원칙이 된다”며 공직 인사에 대한 유감을 표했을 정도다.

공직생활 30년이면 일생을 풍미했다고 하겠다. 이때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1995년 민선 지자체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해 6·27 지방선거 구미시장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그는 자민련 후보의 거센 추격을 뿌리치고 초대 민선 구미시장의 영예를 안았다. 그가 ‘현장주의’를 행정의 요체로 삼게 하는 사건과도 마주하게 된다. 구미시장에 취임하고서 한 달여 지날 즈음 큰 장마로 낙동강 물은 불어나는데 댐의 수문이 닫히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댐의 수문을 닫아 수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전자업체가 밀집한 구미시가 침수될 판이었다. 현장에 달려간 그는 구미 LG건설로부터 조달한 철제 패널을 강물에 투입, 댐의 수문을 잠그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때부터 그는 현장 행정을 지자체장의 좌우명으로 삼는다. “나는 내 도시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으면 무조건 차를 돌렸다. 현장에 가보지 않고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그 순간 댐에 가보지 않았다면 나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방법을 얘기했거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은 채 탁상 행정을 했을지 모른다.”

그는 스스로를 ‘현장주의자’라고 정의한다. 그는 “세 번의 구미시장과 세 차례의 경북지사라는 자리를 따냈고, 겪어내면서 내 머릿속에서 항상 떠나지 않았던 것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생각과 행동의 바탕은 국민이 있는 현장이라는 것”이라고 저서에서 강조했다. 심지어 “김관용은 바로 현장이다”고 쓸 정도다.

그는 세 번의 구미시장을 끝으로 경북도지사 선거에 도전한다. 본선보다 더 어렵다는 경북지사 당내 경선이 관문. 김 전 지사에 따르면 당시 현직 경북지사를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분위기가 냉랭했다. 당선 가능성도 처음엔 아주 낮게 평가됐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보냈다. 그에게 유리한 지역에서 한나라당 도지사 경선이 치러진 것이다. 도지사 경선 지역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후보자들의 연고지인 구미와 포항을 놓고 지역별로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권오을 당시 경북도당위원장의 고향인 안동에서 경선을 열자는 쪽으로 중론이 모아진 것이다. 그는 이때를 일러 “아마 포항이었으면 나는 경북도지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경합을 벌였던 정장식 전 포항시장의 연고지인 포항에서 경선이 치러졌다면 역부족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포항 대의원 표는 1500표, 구미 대의원 표는 1000표에 불과했다. 그런 마당에 포항에서 경선이 치러진다면 기권하는 구미 대의원이 적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DRD’ 도지사, ‘미스터 새마을’…


▎2016년 3월 열린 경북 안동 경북도청 신청사 개청식.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별명이 따른다. 김 전 지사의 영어 별명은 ‘DRD(‘드리대’의 영문 머리글자) 도지사’다. “어디든 들이대는, 드리대(들이대) 도지사”라는 의미에서다. “분야와 상관없이 어떤 일이든 필요하면 일단 들이대는 데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직원들에 대한 자신감이다. 똑똑하고 알아서 잘해내니 걱정할 게 없다. 그들과 함께 방향을 정하면 그대로 밀고 나간다.” 그 역시 민선 지자체장 6선에 나서 당선된 것도 “들이댄 결과”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아마도 내가 들이대는 저력을 보아왔고 믿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6 현장이야기]에서 풀이했다. “내게서 작은 희망을 보았을 것이고 무슨 일이든 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12년 재임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족적은 크고 뚜렷하다. 경북도청 이전, 새마을운동 세계화, 삼국유사 목판 복원사업 등은 경북도정의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경북에서 만나는 공무원·도의원·언론인들에게 김 전 지사의 치적을 물으면 열에 아홉은 ‘경북도청 이전’을 든다. 도청 이전은 시·군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갈등 현안이라 그동안 누구도 쉽게 손을 못 댄 사업이었다. 1981년 대구시가 경북도에서 분리된 뒤로 도청 소재지(대구시 북구 산격동)와 관할구역(경북도)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 보다 못한 도의회가 1995년 이전 후보지를 제시했다가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없던 일로 되돌린 아픔도 있다. 김 전 지사는 “도청 이전은 도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자 도민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며 도청 이전을 밀어붙였다.

2008년 6월 안동시 풍천면과 예천군 호명면 일원이 이전 후보지로 확정됐다. 도청 신도시는 2027년까지 단계별로 10.9㎢(332만 평)를 개발하는 경북도 최대 토목사업이기도 했다. 투입되는 예산만 3조원. 마침 공기업 구조조정 방침에 따라 합병을 앞둔 토지공사와 주택공사가 도청신도시 건설에 난색을 표했다 .결국 도지사가 교통정리에 나서 경북도 공기업인 경북개발공사에 신도시 개발을 맡기는 식으로 매듭을 지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3월 10일 신도청 개청식이 열렸다. 35년을 끌어온 도청 이전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도청 이전은 그가 도지사 3선 도전을 결심하게 된 계기의 하나로도 소개됐다. 이전을 결정한 자신이 사업도 마무리를 짓는 게 책임 행정이라는 판단에 따랐다고 그는 저서에서 밝혔다.

새마을운동의 세계화 또한 김 전 지사의 역작이다. 그에게 새마을운동은 국가 브랜드이며 빼어난 수출 상품이다. 1970년대 경북의 작은 마을(청도)에서 시작해 전쟁 위기, 극심한 가난을 극복한 대한민국 재건 운동으로 그의 기억에 새겨져 있다. 그는 구미시청에 새마을과를 설치했으며, 도지사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새마을운동 세계화 작업에 나섰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이라고 홍보했다. 그는 새마을운동이 정권 향배에 따라, 정치적 성향에 따라 훼손되거나 내둘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국제적 봉사운동으로 인정받는 길을 모색했다.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다.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에서 시작된 ‘메이드 인 코리아’ 상품”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애칭이 ‘미스터 새마을’일 정도로 새마을운동 세계화에 열정을 쏟았다.

나아가 낙동강 700리, 백두대간 800리, 동해안 1300리 등 강과 산, 바다를 성장 축으로 만드는 일에도 진력했다. 이른바 ‘낙동강백두대간 프로젝트’와 ‘동해안발전종합계획 수립’이 대표적인 사업이다. 경북 문화의 혼(魂)을 일깨우는 기념비적 사업도 그의 손을 거쳤다. 삼국유사 목판(木板)을 복원하고 [신라사대계]를 편찬했다.

경북도는 남한 면적의 5분 1을 차지한다. 대한민국 광역 지자체 중 가장 넓어 이쪽 시(市)에서 저쪽 군(郡)으로 넘어가는 것만도 두 시간을 넘기기 일쑤다. 그는 타고난 강골(强骨)이기에 초인적인 스케줄을 강행해도 끄떡없다고 했다. “경북에서 하루 네댓 개의 일정을 소화하면 피곤에 젖어 기진맥진하지만 샤워 한 번으로 피로를 확 날려버리는 체력의 소유자”로 자신을 평가한다.

“정무, 정치적 감각 뛰어난 도지사”


▎2016년 11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99주년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하는 김관용 당시 경북지사.
그래서인지 그는 불시에 회의를 소집하기로도 ‘악명(?)’이 높았다. 예정에 없던 회의가 오밤중이나 다음 날 이른 새벽에 불쑥 잡히곤 했다. 경북도청 셔틀버스로 통근하던 도청 간부들 중에는 청사 인근에 따로 숙소를 잡아두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언제 도지사로부터 호출이 떨어질지 몰라 아예 주중에는 인근에서 대기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공무원들을 ‘빡세게’ 돌리는 도지사로도 유명했다. 김 전 지사 역시 6월 20일 출판기념회에서 “저는 경상도 사투리로 ‘세가 빠지게’ 일했다”고 재임 시절을 돌이켰다.

10대 경북도의회에서 김관용 전 지시와 4년간 머리를 맞대본 황병직 경북도의원(영주·무소속)은 김 전 지사를 일러 “공과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리지만 관록으로선 신화적 존재”라고 기억한다. 황 의원은 “지역 간 갈등을 딛고 도청 이전을 단행한 것은 엄청난 추진력, 결단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도의회와의 관계도 매끄럽게 유지하는 등 정무·정치적 감각도 뛰어난 장점을 가진 지사”라고 설명했다.

안동 출신으로 경북도지사를 역임한 심우영 전 총무처 장관은 김 전 지사와 행정고시 동기다. 초임 사무관 시절부터 김 전 지사의 인생 역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을 심 전 장관은 “김 전 지사는 일반직에서 선출직 공무원으로 진로를 바꾼 케이스”라며 “그는 민선 시대에 적합한 가슴이 따듯한 인물이었기에 지방선거 출마에 전폭적으로 찬성했다”고 일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심 전 장관은 김 전 지사를 언급하면서 “본인이 주경야독의 힘든 시절을 헤쳐 왔기에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헤아린다”며 “서민을 위한 지방자치 시대에 잘 하겠다는 믿음을 갖게 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또 김 전 지사는 “대중 유세에 능한데다 탁상공론을 하지 않고 현장에 강한” ‘팔방미인’으로 심 전 장관의 뇌리에 남아 있다.

김 전 지사는 2017년 대통령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해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재에 의해 파면을 당했다. 김 전 지사는 사람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제도의 잘못이 더 크다고 봤다. 그래서 ‘분권형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 제의 폐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대선에 나서게 된 동기의 하나다. 2017년 3월 14일 자유한국당 대통령 후보에 등록했다. 9명의 후보가 나선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1, 2차 컷오프를 거쳐 최종 4명의 후보군에도 들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부족한 준비에 비해서는 잘해냈다”면서 “(후보 등록 후) 보름 동안 날마다 성장해가는 나를 보았고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자평했다.

길 잃은 보수세력에 던지는 메시지


▎2017년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한 김관용 전 경북지사(왼쪽 둘째).
한국 지방자치 역사에 금자탑을 올린 그가 왜 대선까지 노크한 걸까? 저서 [6 현장이야기]를 보면 그 심경의 일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대선후보 출마와 관련해 “영남에는 오랜 역사가 있고 우리가 가는 길이 있는데 어느 날 그 길이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고 동기를 설명했다. 그는 “이미 선거를 여섯 번이나 했고, 이번에 떨어져도 도리 없다는 생각에 도전했다”면서 “졌지만 이겼다”고 출사표를 던진 즈음의 마음의 각오를 돌이켰다. “가난한 소년이 도지사가 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후보 경선까지 나섰다는 것은 천운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내게는 국민이 하늘인 나라에서 해야 할 많은 일이 있다. 그 일을 해내는 데 있어 내게 주어진 천운을 제대로 써보려 한다. 천천히 내게 주어진 길을 따라 걸어갈 것이다.”

주변에서는 김 전 지사의 여정은 도지사 퇴임을 끝으로 중단되는 게 아니라는 입장을 보인다.

오랜 세월 김 전 지사와 교류해 온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김 전 지사는 보수세력이 어려움이 처했을 때 누구나 기대고 싶어 하는 큰 어른”이라고 비유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겸손함, 비전을 추구하는 치열함 등이 보수 정치의 한 모델이 된다는 것. “길 잃은 보수세력에게 새 길을 열어 주는 디딤돌 역할을 할 몇 안 되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게 고 박사의 평가다. “지사직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보수의 가치를 제시한다면 방향을 잃은 보수세력에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김 전 지사의 팬클럽인 ‘용포럼’(회장 신동우)도 ‘보수 가치 재건’을 기치로 내건다. 용포럼 신동우 회장은 자유한국당 등 보수정당이 ‘폭망’한 이유를 “포용력 부족”에서 찾았다. 그는 “김 전 지사의 최고 장점은 포용력”이라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포용하는 그의 품성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공평한 행정의 밑천”이라고 평했다. 신 회장은 용포럼을 이런 김 전 지사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하는 재단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김 전 지사는 6월 20일 출판기념회에서 한국 정치의 미래를 전망하는 듯한 메시지를 슬쩍 흘렸다. 그는 “지금은 민주화 시대가 왔지만 오래 못 가 또 트렌드가 바뀌지 않을까”라며 “다음에 국민이 바라는 가치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을 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최근 관심사를 공개했다. 나아가 “가치 부분 공부를 집중적으로 해서 국민과 대화할 기회가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얘기하려고 한다”고 언급하는 등 대외 활동 재개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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