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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리포트] ‘아메리카 퍼스트’가 만드는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 

더 이상 지구에 수퍼히어로는 없다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국익에 반하는 중국엔 관세 철퇴, 러시아엔 나토 군비 압력 등 전방위 실력 행사…전통적인 맹방보다 극우 정당 지배하는 국가를 우대, 한국의 대응책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휴가지로 활용되는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라라고 리조트. / 사진:연합뉴스
먼저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 노래부터 들어보자. ‘섬씽 저스트 라이크 디스(Something Just like This, 이하 섬씽)’라는 곡으로 지난해 2월 출시됐다. 주 단위로 변하는 엔터테인먼트 환경을 감안할 때 이미 한물간 노래로 볼지도 모르겠다. 예상과 달리 아직 건재하다. 2018년 여름 들어 곳곳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장수 히트곡이다. 지난해 1년 동안 앨범 130만 장을 팔아 미국 내 판매 순위 6위를 기록했다. 콜드플레이 멤버들은 50대다. ‘섬씽’을 아재나 꼰대 노래라고 볼 듯한데, 그 정반대다. 2030 밀레니얼 세대는 물론 십대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좋아하는, 청춘 애청, 애창곡이다.

인기곡으로 만들고 인기를 지속시키는 주인공은 오히려 30대 이하의 젊은 세대다. ‘섬씽’은 노래만이 아니라 비디오를 통해 인기를 더해갔다.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된 공상세계 속의 비디오다. 지난 1년간 11억 건의 접속 수를 기록해 유튜브 인기 비디오 1위에 올랐다.

노래는 세상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시대의 거울에 해당된다. 새삼스럽게 히트송 ‘섬씽’을 꺼낸 것은 그 같은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다. 주목할 부분은 청년들이 ‘섬씽’을 좋아하게 된 근거다. 어떻게 해서 어린이부터 십대 2030세대에 이르는 다양한 폭의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을까? 콜드플레이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더불어 한 번만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멜로디 덕분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핵심은 가사에 있다.

“줄곧 읽어 온 책은 전설과 신화로 이뤄진 고전들이야. 아킬레스의 골드, 헤라클레스의 재능, 스파이더맨의 조정 능력, 배트맨의 주먹… 이제 내가 알게 된 것은 나는 그 같은 (전설·신화 속 영웅) 리스트에 올라설 수 없다는 사실이야. 그런 나에게 네가 말했지. ‘이제 어디로 갈 건데? 얼마나 큰 위험을 기대하니? 내가 바라는 것은 수퍼히어로의 재능이나 동화 속 축복이 아니야. 내가 의지할 수 있고, 고개를 돌려 키스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할 뿐이야’.”

‘섬씽’ 비디오에서의 주인공은 안경을 쓰고 망토를 걸친 어린이다. 로켓보다 빨리 날고 지구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초능력 소년이다. 어린이의 ‘영웅적 활동’과 더불어 노래 가사가 크고 작은 자막으로 이어진다. 비디오 속 소년은 오늘이 아닌, 어제의 나의 모습이다. 한때 영웅을 꿈꾸며 슈퍼맨 흉내를 낸, 어린 시절의 꿈을 영상화한 것이다. 어릴 때 가진 수퍼히어로의 이미지는 하늘을 날고 힘이 센 초능력 보유자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수호하고 인류의 평화를 지키자는 의미에서의 수퍼히어로다. 지구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수퍼파워다.

그러나 그 같은 꿈을 현실로 바꾼 사람은 극히 드물다. 수퍼히어로 자체를 믿지 않을뿐더러 지구 평화를 지키려는 의지도 사라진다. 현실에 적응해 가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노래 ‘섬씽’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통해 영웅에서 멀어진 나를 격려한다. 글로벌 차원에서 활동하는 수퍼히어로보다 ‘의지하고 키스를 나눌 사람’이면 충분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위한 메시지다.

‘영웅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21세기 미국 청년들


▎지난해 4월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내한공연. / 사진:현대카드
‘섬씽’ 가사는 현재 미국 청년들의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2030 밀레니얼 세대는 물론 그 이하 젊은 층이 추구하는 가치관이 분명하게 드러난 노래다. 간단히 말해 ‘글로벌 아니 우주 차원의 평화나 자유보다는 옆에서 나를 지켜주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면 충분’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크고 넓고 글로벌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옆 사람들 간의 관계가 더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다. ‘청년이여 야심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는 말은 아마 40대 이상 한국인이라면 귀에 익은 도덕경일 것이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 즉 넓은 마음과 정의로운 기운으로 대하는 세계관도 한국인에게 익숙한 경구다. 현재 미국 청년들에게 그 같은 ‘통 큰 웅변’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이나 무식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키스를 나누고 내가 의지할 상대가 있으면 되지, 카오스로 뒤덮인 위험한 세상에서 왜 시간을 낭비하나?” 자신도 없지만 해야만 된다는 근거나 정당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크고 넓고 강하게 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수퍼히어로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세상은 더 이상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9세기 말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21세기 초 미국 청년들은 영웅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영웅이 사라진, 수퍼히어로가 필요 없는 미국 청년의 세계관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 정치·경제·군사·외교 무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지구의 평화·안전·번영을 지키던 어제의 슈퍼맨이 ‘아메리카 퍼스트’란 슬로건과 함께 한순간 사라진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노래 ‘섬씽’의 히트 시기와 맞물린다. 골치 아프고 책임도 져야 할 글로벌 이슈보다 ‘의지하고 키스를 나눌 사람’에게 주목하자는 세계관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국제경찰이 아닌, 주변 사람들과 인생을 재미있게 살겠다는 ‘나만의 행복 추구’가 아메리카 퍼스트와 ‘섬씽’이 갖는 공통점이다. 언뜻 보면 미국 청년들 대부분이 트럼프에게 반대하는 것 같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서로 ‘동병상련’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샤이 유권자(Shy Voter)’로 통하는 트럼프 지지자는 40대 이상 장년에 국한되지 않는다. 2030세대와 10대 이하 청년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일상적 현상이다. 리버럴 미디어의 반(反)트럼프 정서 때문에 밖으로 표출되지 않을 뿐, 정책이나 선거와 관련된 이벤트가 있을 경우 친(親)트럼프 결과로 나타난다. 35%까지 내려갔던 지지율이 최근 40%를 넘어 최고 45%까지 올라간 것은 그 같은 상황 변화를 설명해 주는 좋은 증거다.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은 바로 트럼프와 미국 청년, 나아가 국민 모두에 흐르는 ‘이심전심’을 기초로 한 것이다. 신문·방송에서는 ‘샤이 유권자’를 뭔가 비밀스러운 존재로 분류한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이미 ‘트럼프 지지 커밍아웃’이 전국화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우 KKK단만이 아니라 2030 세대를 포함한 평범한 미국인도 트럼프 지지 세력으로 나선다. 이미 2020년 제2기 대통령 선거운동은 시작됐다. 1기 선거운동 때와 달리 트럼프 지지를 공개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시진핑 발언과 정반대의 중국 실상


▎요즘 들어 트럼프 대통령 지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미국인이 늘어나는 추세다. / 사진:유민호
평화·안전·번영을 지키던 슈퍼맨 국제경찰이 사라진 지구. 현재 매일 닥치고 있는, 아메리카 퍼스트 세계가 만들어가는 안갯속의 불확실한 세계다. 아직 아수라 상태까지는 아니지만 여차하면 추락하기 직전이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불안에 떤다. 10년 내, 20년 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던 대국굴기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중 무역마찰이 관건이다. 한국 내 기사를 보면 언제라도 트럼프의 완패로 끝날 듯하다. 국제 룰을 무시한 깡패 트럼프에 비해 공산 독재국가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손자병법에 도통한, 자유무역의 수호자로 비쳐진다. 독선 일방통행의 트럼프보다 중국이 무역마찰의 최종 승리자가 될 것이란 전망도 넘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정반대다. 양쪽 모두 피해가 나겠지만, 서로 치킨게임으로 갈 경우 중국이 입을 피해는 복구 불능의 수준이 될 전망이다. ‘5056억 달러 대 1539억 달러’가 그 근거다. 지난해 중국의 대미(對美) 수출과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 총액이다. 수치상으로 중국은 3517억 달러의 대미 수출 흑자국이다. 대략 하루에 10억 달러에 달하는 흑자다. 트럼프가 요구하는 것은 중국의 엄청난 흑자를 결자해지하라는 것이다. 2020년까지 대미 흑자액을 최소한 2000억 달러 이하로 낮추라는 것이다.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도 내리고, 수입도 많이 하라는 의미다.

미·중 무역마찰과 관련해 중국이 치킨게임에 활용할 실탄은 전부 1539억 달러다. 미국은 중국보다 세 배 이상 많은, 5056억 달러에 달하는 실탄을 갖고 있다. 미국은 7월 6일 500억 달러에 달하는 관세 부과에 이어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도 시행할 예정이다. 중국도 이미 500억 달러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보복에 들어갔지만, 트럼프의 2000억 달러 관세 부과에 대한 대응은 뒤로 미루고 있다.


▎지난 6월 경기도에서 실시된 한·미 화력훈련.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훈련의 중단을 결정했다. / 사진:유민호
그렇지만 보복을 한다고 해도 미국의 대중 수출 총액 1539억 달러 가운데 500억 달러를 제외한 1039억 달러가 전부다. 설령 중국이 실탄을 전부 쓴다고 해도 트럼프에게는 아직 2556억 달러의 실탄이 남아 있다. 중국이 중국 내 미국 기업에 대해 압력을 넣을 경우 미국은 월스트리트를 통해 금융 제재에 들어갈 수도 있다. 미국에서 접하는 ‘메이드 인 차이나’ 상품은 고난도 기술 집약 상품과 무관하다. 싸니까 구입할 뿐이다. 싼 노동력만 있다면 어디든지 옮겨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상품이 대부분이다. 의도적으로 메이드 인 차이나를 찾는 사람은 제로에 가깝다.

중국산 제품에 25% 추가 관세가 부과될 경우 저가의 매력이 사라진다. 미국에는 중국만이 아니라 베트남·인도·폴란드·우크라이나·모로코에서 만든 저가 상품도 많다. 언젠가 미·중 무역마찰이 해결이 되겠지만, 소비자가 다른 나라 상품으로 옮겨갈 경우 회복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단연코…’라고 대미 보복을 다짐하는 시진핑이지만 실상을 보면 전혀 반대다. 무역 흑자의 90% 정도를 미국에서 벌어들이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중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현재의 미·중 무역마찰이다. 하루 벌어서 늘려 가는 식의 자전거 경영에 익숙한 곳이 중국 기업이다. 매년 10% 가까이 신장하던 대미 수출이 줄어들거나 중단될 경우 연쇄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

2016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무역 의존도는 중국이 30.62%, 미국은 19.61%에 불과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수출 없이는 국내 경제 유지가 어려운 나라가 중국이다. 미국 없이 살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미국은 다르다. 무역의존도도 낮지만, 수입국을 다른 나라로 바꾸면 된다. 실업률이 조금 오르고 상품가격이 올라가겠지만 중국이 없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없다.

트럼프는 미국에 대적한 중국만이 아니라 미국의 우방이자 친구들도 어두운 안갯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7월 1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주된 무대다. 트럼프는 나토 정상회담에서 GDP의 4% 이상을 국방예산에 투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토는 원래 2024년까지 GDP의 2% 이상을 국방예산에 배정하기로 약속한 상태다. 트럼프는 2024년까지가 아니라 지금 당장 GDP 2% 이상으로 올리고 이후 4% 이상까지 증가시켜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에 이어 유럽에서의 미군 보이콧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두 지도자의 협력할 경우 그 파급 효과는 전 세계로 확산된다.
나토의 국방비 증가는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개입과 크림반도 강제 병합에 따른 대응책이다. 나토 입장에서 보면 언제 또다시 러시아의 무력 개입이 있을지 불안하다. 크림반도 강제 병합 이후 보여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어정쩡한 러시아 정책을 보면서 나토 스스로 GDP 2% 이상의 국방예산을 결정했다. 국방예산 증가는 미국을 포함한 28개 나토 회원국 모두의 협의를 통한 결론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4% 이상 발언은 요청 협의가 아니라 일방적 요구다.

나토 대부분이 난색을 표명했지만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안하기만 하다. 4% 이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극단적으로 미국의 나토 탈퇴라는 상황도 가정할 수 있다. 당장 올가을로 예정된, 나토 회원국 4만 명이 참가하는 발트해 군사훈련이 주목된다. 트럼프 캐릭터와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미군이 참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6월 김정은과의 만남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일방 중단한 것과 같은 상황이 유럽에서도 전개될 수 있다. 미군이 빠진 나토 군사훈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앞으로 두고 볼 상황이지만 한반도에 이어 유럽에서의 미군 보이콧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발트해 군사훈련과 관련해 주목할 부분은 트럼프가 던진 한·미 군사훈련 중단 발언의 진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비핵화에 앞서 던져진 김정은을 위한 선물이 아니다. 미군 지원 비용과 관련해 한국 대통령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한·미 군사훈련 중단 발언이다. 미군의 발트해 군사훈련 불참은 러시아에 던지는 화해의 메시지가 아니다. 나토 회원국의 국방 예산 증가를 앞당기려는 ‘전(錢)의 논리’가 주된 이유다. 한미 군사훈련은 중지가 아니라 잠정적인 중단이다. 트럼프가 요구하는 것은 군사훈련에 따른 금전적 지원이다. 언제까지 한미 군사훈련이 중단될지 알 수 없지만 나토의 발트해 군사훈련 문제는 한국 정부가 참고할 최적의 모델이 될 듯하다.

이스라엘, 영국, 일본만이 내 친구!


▎지난 7월 캐나다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주요 국가 지도자들은 자유무역을 놓고 마찰을 빚었다. / 사진:연합뉴스
아메리카 퍼스트는 가상적 중국은 물론 민주주의라는 이념적 동지인 유럽조차 불안으로 몰아가는 아메리카 퍼스트. 미국의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비난에 맞서 아예 WTO 탈퇴라는 말까지 불사하는 트럼프. 거시적 차원에서 미국이 생각하는 내일의 세계 질서는 과연 어떤 것일까? 지난 6월 캐나다에서 열린 서방 선진국 7개국(G7) 정상회담에서도 확인됐지만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일방통행은 어떤 식으로 발전될 것인가? 모두가 불안해하면서도 궁금해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최근 워싱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뉴월드 질서(New World Order)’라는 큰 그림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 아직 미디어 수준에서 논의되는 발상이지만 크게 보면 다음의 8가지 공통점을 가진 새로운 국제질서다.

1. 양국 관계에 기초한 제로섬(zero-sum) 게임

2. 비즈니스로서의 안보

3. 동맹 우방이 필요 없는 미국 예외 주의

4. 모두를 안심시키는 듯한, 미사여구로서의 ‘정치적 정의(Politically Correct)’ 배제

5. 국가 단위가 아닌, 아메리카 퍼스트에 동참하거나 비슷한 이념을 가진 정치가를 통한 국제정치

6. 장기간에 걸친 지역 글로벌 차원이 아닌, 양국 관계에 기초한 단기적, 즉흥적 손익계산 중시

7. 미국의 강력한 국방력에 기초한 국제정치

8. 오바마가 만든 글로벌 질서 전면 부정

이 8개 항목에 걸친 상황은 한반도를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뉴월드 질서 공통분모들이다.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척박하고도 살벌한 모습들이다. 적이나 경쟁국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를 동맹, 우방, 파트너의 어딘가에서 맺었던 나라들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북한의 비핵화 문제와 물리면서 미래의 청사진은커녕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불안한 상태다. 안보는 물론 심지어 경제 문제까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끌려가는 형세다. 민족 자주노선이란 쿨한 슬로건도 있지만, 전쟁용 실탄 보유량이 일주일분도 안 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반드시 미국일 필요는 없지만 그 같은 현실의 빈틈을 보충해 줄 나라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남의 힘을 활용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트럼프의 뉴월드 질서에 따르면 과연 어떤 나라가 미국의 친구로 남을까? 친구의 개념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겠지만 서로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관계를 친구라고 한다면 극히 일부만이 포함될 듯하다. 가장 먼저 오르내리는 나라는 이스라엘·영국·일본 세 나라다. 제1군 영역에 들어갈 나라다. 물론 이들 3개국이 아메리카 퍼스트의 무풍지대일 수는 없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안정적이고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아무리 아메리카 퍼스트라고 해도 미국 혼자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유럽의 영국, 중동의 이스라엘, 아시아의 일본이 지역 내 안내인이자 친구가 될 수 있다.

제2군 영역의 친구로는 최근 트럼프가 극찬하고 관심을 갖는 유럽 내 5개 나라가 후보들이다. 체코·헝가리·폴란드·오스트리아·이탈리아다. 이들 5개국의 공통분모는 극우정당 득세에 있다. 정권의 주도권이 극우정당에 있다.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체코의 자유와 직접민주주의, 헝가리의 더 나은 헝가리를 위한 운동, 폴란드의 법과 정의당이 주인공이다. 이들 정당은 반(反)이민, 반(反)유럽연합(EU), 반(反)글로벌리즘을 통해 정권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글로벌 시대의 ‘정치적 정의’로 활용되던 이민, 자유, EU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 차원에서의 안정과 번영에 나서자는 생각이다. 콜드플레이어 ‘섬씽’의 가사 ‘내가 의지할 수 있고, 고개를 돌려 키스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과 같은 나라 건설이 5개국의 주된 비전이자 어젠다다.

반(反)글로벌리즘 연대


트럼프는 이들 나라의 극우정당과 지도자를 특별하게 대한다. 트럼프 자신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과 똑같기 때문이다. 인권·언론자유 같은 민주주의 이념이 아닌, 반(反)글로벌리즘이란 현실론적 대응 방안을 통한 연대다. 이들 5개국 지도자는 트럼프의 생각과 비슷한 주장을 자국과 유럽 전체에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언뜻 보면 ‘트럼프 칠드런’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트럼프 행적을 보면 특별한 대접이 이들 2군 친구에게 주어지진 않을 것이다. 서로가 자국 퍼스트에 나서는 판국이기에 지극히 비즈니스 차원의 관계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일방통보를 하는 식의 무시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뉴월드 질서하의 트럼프 친구라고 불릴 수 있다. 현재의 유럽의 정치 상황을 보면 극우정당의 위력은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정당을 넘어서 정권주체가 된다는 의미다.

제3군 영역에 들어갈 친구는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가 될 전망이다. 무역전쟁, 해양 분쟁, 국경 분쟁으로 서로 각을 세우는 관계지만 ‘딜(Deal)의 달인’이라는 트럼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다. 1인 체제에 기초한 독재국가이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얘기하기보다 딜 하나로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며 기능적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미국의 이해관계를 건들이지 않을 경우, 즉 ‘착한 중국’으로 변신한다면 트럼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작은 나라 수십 개를 상대하기보다 중국 하나에만 올인해도 여러 면에서 득이 된다. 미·중 무역마찰과 남중국해 문제가 가닥을 잡을 경우 미·중 간의 특별한 밀월관계는 당연한 수순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7월 12일 트럼프는 푸틴 대통령을 친구도 아닌 경쟁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발언의 전후 맥락을 보면 친구로서의 경쟁자라는 성격이 강하다. “나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푸틴은 러시아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지만 언젠가 친구가 되길 바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와의 딜에 성공할 경우 그 파급 효과는 전 세계로 확산된다. 트럼프가 즐기는 속전속결 뉴월드 질서에 딱 들어맞는 국가들이다.

전 세계가 새로운 질서에 맞춰지는 과정 속에서 과연 한국은 어떤 영역으로 들어갈 것인가? 워싱턴에서 이뤄지는 논의의 흐름을 보면 트럼프의 관심 밖 영역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적도, 친구도, 경쟁자도, 협력자도 아닌 방관자의 영역이 한국에 주어진 뉴월드 질서 속의 위상이다. 트럼프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고려해야 할 근거가 거의 없다. 한국 정부 스스로도 소 닭 보듯 미국을 대할 뿐이다.

안보 문제는 가장 먼저 나타난, 방관 영역의 증거다. 트럼프는 비행기 몇 대 띄우는 훈련비가 아까워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군사훈련 정도가 아니라 주한미군 문제까지 연결될 뉴월드 질서 속의 변화다. 한국 정부가 미군 주둔을 원한다면 결국 돈으로 해결해야만 할 것이다. 비용의 규모는 한국이 아닌, 미국의 일방 통보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미군부대 내 한국인 근로자 인건비, 각종 미군기지 내 건설비용, 군수지원비 같은 주둔비용만이 아니라 미군이 한반도 주변에 전개하는 전략자산 비용까지 요구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북한을 상대로 한 한·미·일 태평양 군사훈련비용도 상당부분 한국에 청구하는 식이다.

트럼프는 사라져도 ‘뉴월드’ 질서는 계속된다


▎지난해 11월 오산 공군기지 상공을 비행 중인 미국 전략자산 F-35A 라이트닝II 최신예 스텔스전투기.
황당한 발상으로 와 닿지만, 사실 한국은 이미 한반도 내에서 펼쳐진 전략자산의 덕을 본 나라에 들어간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이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받아낸 40억 달러의 안보경협이 그것이다. 차관을 활용한 경제지원금이지만 명분은 안보에서 찾았다. 당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이뤄진, 전대미문의 행적이다. 한국이 일본의 안보를 대신 지켜주는 데 대한 답례로 40억 달러 차관이 제공된 것이다.

같은 논리로 미군도 똑같이 일본을 통한 북한 견제라는 명분 아래 전략자산 비용을 한국에 요구할 것이다. 일본까지 나서서 전략자산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진 않겠지만 트럼프의 캐릭터를 보면 곧 닥칠 현실이다. 적당한 분담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미군 철수도 불사하는 것이 뉴월드 질서의 기본이다. 7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가 비핵화와 별개”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애매하게 처리되던 주한미군 문제였지만, 한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주둔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상 비용 분담 얘기도 곧 시작될 것이다.

트럼프의 뉴월드 질서는 히트곡 ‘섬씽’ 속의 가사와 일맥상통한다. 트럼프가 아니라 섬씽을 인기곡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세계관이 바로 아메리카 퍼스트의 배경으로 서 있다. 트럼프 단독 일방주의만이 아니라 미국인이 박수를 치면서 지지하는 ‘트럼프 퍼스트’에 기초한 뉴월드 질서다. 혹자는 트럼프가 끝나면 뉴월드 질서도 한순간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오바마가 만든 아름다운 세계에 중독된, 전혀 잘못된 판단이다. ‘섬씽’의 주된 애청자가 30대 이하란 점을 감안하면 나만의 세계에만 집중하는 탈(脫)수퍼히어로 세계관, 즉 아메리카 퍼스트 세계관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

트럼프는 세계 자본주의, 글로벌리즘의 아성 뉴욕에서 살아남은 인간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트럼프를 멀리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한 영원한 방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내버려진 아웃사이더가 아닌, 바람 불고 파도가 칠 때마다 생사 여부를 고민해야만 하는 돛단배 방관자다. 트럼프의 뉴월드 질서에 일방적으로 편입되기보다 직접 나서서 한국 스스로의 영역을 구축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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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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