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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 특별기획] ‘세계 최고’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을 가다 

400명 동시 바벨 들고 600명 식사 함께할 수 있는 엘리트 스포츠 요람 

글 정영재 중앙일보 스포츠 선임기자
159만4870㎡ 부지에 들어선 세계 최대 규모 종합 스포츠 훈련 시설…35개 종목, 1150명 선수가 한꺼번에 훈련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 자랑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의 심장에 해당하는 웨이트트레이닝장. 400명의 선수가 한꺼번에 운동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보름 앞둔 지난 1월 25일.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처음으로 만났다. 장소는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빙상장 앞. 박철호 감독과 선수 12명, 지원 2명으로 구성된 북한 선수단이 버스에서 내렸다. 어색한 첫 만남의 순간, 박철호 감독이 세라 머리 한국팀 감독에게 다가가 자신이 받은 꽃다발을 건넸다. 박 감독의 돌발 행동에 잠시 멈칫한 머리 감독은 곧바로 “감사합니다”라는 우리말과 함께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다음 날부터 ‘진정한 하나’를 향한 남북 선수들의 합동 훈련이 시작됐다. 머리 감독은 “첫날 코치실에서 비디오 분석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들은 매우 샤이(shy)했어요. 모든 게 새로웠으니까요. 매일매일 미팅하고 용어 가르쳐주고 하면서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남북한 사이에 골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는 외국인으로서 이들이 차츰 하나가 돼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신기하고 특별한 경험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종목 선수를 수용할 수 있는 스포츠 시설이다. 진천선수촌은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훈련을 계기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8월에 열리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여자농구·조정·드래곤보트(카누의 일종) 등 6개 세부종목에서 남북 단일팀이 출전하기로 했다. 남북한 선수들은 진천선수촌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아시안게임 개막 전까지 합동훈련을 할 예정이다. 세계 최고의 엘리트 스포츠 훈련 시설이라는 본령에다 남북 화해와 평화의 현장이라는 보너스를 받아 진천선수촌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세계 유일 육상·수상·빙상 훈련이 가능한 선수촌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국가대표 선수들이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손발을 맞춰보고 있다.
진천선수촌은 지난해 9월 27일 문을 열였다.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의 159만4870㎡(약 50만평) 부지에 지어진 선수촌은 시설과 규모에서 세계 최대의 종합 스포츠 훈련 시설을 자랑한다. 총 5130억원을 투입해 2009년 착공 후 1, 2단계로 나눠 8년 만에 완공됐다. 숙소 8개 동 823실, 21개 훈련 시설을 갖춰 최대 35개 종목 1150명의 선수가 한꺼번에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을 갖췄다.

무이산 자락에 자리 잡은 진천선수촌은 큰 규모만으로도 방문객을 압도한다. 세계 최초로 육상·수상·빙상 훈련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을 갖췄다.

진천선수촌 직원의 안내로 주요 시설을 둘러봤다. 먼저 수영센터. 국제규격 경영 풀(길이 50m, 가로 2m) 10개를 포함해 아티스틱 스위밍·수구·다이빙 풀을 따로 갖췄다. 자연 채광으로 밝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테니스장은 케미컬 코트 4면을 갖춘 실내 테니스장과 케미컬 6면, 클레이 4면이 있는 옥외 테니스장으로 나눠져 있다. 복싱·태권도·유도 등 투기 종목을 모아 놓은 필승관에는 가림막이 내려와 남녀 선수들을 분리시켜 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세계 최강의 선수를 키워내는 양궁장은 실내와 실외로 구분돼 있다. 실외는 16개 사로(射路)가 있고, 4개 사로(射路)를 갖춘 실내는 간접 조명을 비춰 눈부심을 최소화했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실외 양궁장에서는 올림픽 금메달보다 힘들다는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 양궁의 대부 장영술 감독은 “양궁인의 요구 조건을 잘 받아들여 세계 수준의 양궁장을 만들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빙상장은 컬링·아이스하키·쇼트트랙을 각각 할 수 있는 독립된 빙면이 조성돼 있다. 스피드스케이팅은 경기장(트랙 400m)이 워낙 커 진천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사이클 벨로드롬은 관중석까지 갖춰 대회를 치를 수도 있고, 관중석을 빙 돌아서 만든 350m의 트랙에서 러닝 훈련도 할 수 있다. 야구장은 남자 대표팀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여자대표팀과 소프트볼 대표팀이 주로 사용한다. 사격장은 10m·25m·50m 경기장마다 60개의 사대와 전자표적을 구비하고 있어 국제대회 개최도 가능하다.

가장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곳은 ‘선수촌의 심장’이라 할 웨이트트레이닝장이다. 입구에서 맞은편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트레이닝장은 모두 4개 존으로 구성 첨단 트레이닝 장비를 갖추고 있다. 400명이 한꺼번에 운동을 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부대지원시설도 최고급으로 갖추었다. 선수 숙소인 화랑관은 지하 1층, 지상 15층 규모로 최고급 아파트를 능가하는 설비를 자랑한다. 편의시설로는 노래방·당구장·영화감상실·컴퓨터실·북카페 등을 배치했다. 200명을 수용하는 게스트하우스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돕는 파트너들이 묵는 곳이다.

선수식당은 60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으며 신선한 최고급 재료로 다양한 메뉴를 제공한다. 한 끼 재료비만 9000원(아침)-1만5000원(점심)에 달한다.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메디컬센터와 스포츠과학센터는 태극전사들의 메달 획득을 도울 최대 지원군이다.

태릉선수촌, 유네스코 압박에 철거 위기


▎한꺼번에 600명이 이용할 수 있는 국가대표 선수촌 식당.
진천선수촌은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 태릉선수촌의 대체 시설로 지어졌다. 1966년 완공된 태릉선수촌은 50년 풍상(風霜)을 거치면서 좁고 낡아져 ‘은퇴’가 불가피했다.

태릉선수촌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고(故) 소강 민관식 선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떠오르는 곳이 태릉 일대였다. 차를 몰아 내 눈으로 확인한 태릉은 전부터 꿈에 그리던 선수촌의 입지 조건에 완전히 일치하는 곳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께 건의했더니 ‘한 그루의 나무도 상하지 않도록 건설하라’는 지시와 함께 허락을 해주셨다.”

그 부지는 조선 왕릉인 태릉과 강릉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문화재 당국이 반대했지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1966년 2층짜리 본관 건물과 선수 숙소 4동으로 태릉선수촌이 출범했다. 체육 엘리트를 모아 집중적으로 훈련 시킨 결과 10년 만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 양정모가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을 시작으로 2016년 리우 올림픽까지 모두 116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50년 역사를 품은 태릉선수촌은 철거될 운명을 맞았다. 문화재청은 2009년 조선 왕릉 40기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능역 안에 있는 부적합 시설을 모두 철거하겠다고 유네스코와 약속했다. 지도를 보면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인순왕후가 잠든 강릉 사이에 태릉선수촌이 들어서 있다. 이로 인해 강릉의 능역은 축소됐고, 태릉과 단절돼 2013년까지 일반에 개방되지도 않았다. 지금은 태릉과 강릉이 태릉선수촌 뒤 산길로 연결돼 있다.

체육계는 50년 넘게 국민과 동고동락한 태릉선수촌 역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고 따라서 핵심 시설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체육회는 2015년 7월 운동장을 비롯해 월계관·승리관·챔피언하우스 등 8개 시설에 대해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신청을 했다. 등록문화재는 생긴 지 50년 이상 지났으며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체육계는 태릉선수촌이 이 기준을 충족한다는 입장이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 사적분과, 세계유산분과로 합동분과를 구성해 이 문제를 심의해 왔다. 지난 7월 11일 열린 회의에서는 체육사적으로 상징성이 있는 승리관과 월계관 등 건물 4동 안팎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태릉선수촌에 있던 훈련 기구와 집기 등은 지난해 여름 진천으로 모두 옮겨갔다.

태릉선수촌보다 3배 이상 규모가 큰 진천선수촌이 개촌하면서 ‘엘리트 스포츠의 국가주의’ 논쟁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스포츠에서 내셔널리즘이 퇴조하는 추세인데 국가가 연 1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국제대회 메달’이라는 목표 아래 엘리트 체육인들을 먹이고 재우며 훈련시키는 게 옳은가 하는 논의다. 여기에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 문제, 일부 개인 종목의 선수촌 기피 현상까지 겹쳐 있다.

김승곤 대한체육회 정책연구센터장은 “지금 대한민국 체육에서 가장 큰 위기는 인구절벽이다. 1년에 80만 명은 낳아야 하는데 작년에 40만도 안 낳았다. 집집마다 하나뿐인 아이에게 힘든 체육을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에 ‘엘리트 스포츠의 효용이 끝났다’는 논리가 일어나고 있다. 일본이 19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사회체육으로 전환한 뒤 86년 아시안게임 때 한국한테 잡혔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3위(금 3개)를 하며 발칵 뒤집혔다. 일본이 2007년에 선수촌을 지은 것도 그 영향이 크다. 우리가 일본의 잃어버린 40년을 따라갈 이유가 없다. 우리는 엘리트를 유지하면서 생활체육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도균 경희대 체육대학원 교수 겸 한국스포츠산업협회장은 “엘리트를 위한 투자는 어차피 소수의 특별한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그런 공간은 특별하게 지어지는 게 맞다. 대한체육회 100주년(202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시기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과거에는 스포츠를 통해 국위선양을 했지만 지금은 스포츠카처럼 국가의 경제력과 수준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시설의 효용성이나 몇 명이 쓰느냐보다 그것을 통해 만들어 내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 1인당 소득 3만 달러 시대, 세계 10위 경제규모에 걸맞은 선수촌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 안에 콘텐트를 뭘로 채우느냐다. 과거에는 사람(선수)이 전부였다. 지금은 스포츠 산업·용품·시설·기술 등이 경쟁력이 된다. 선수촌이 그걸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 돼야 한다”며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보듯이 스포츠는 4차산업과 연계돼 무한한 부가가치를 만든다. 초당 찍는 사진이 1만 컷을 넘는다. 전에는 선수 개인의 노력으로 결과와 스토리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집단지성으로, 시스템으로 만든다. IT기반, 5G 기반에 합당한 선수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원화 계획보다 그 안의 콘텐트가 더 중요”


▎세계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진천선수촌의 조감도. / 사진:대한체육회
청원군청 사격 감독을 역임한 이종현 한국체대 교수(스포츠 사회학)는 “엘리트 스포츠 천국이라는 미국도 선수촌이 종목별로 3개로 나눠져 있다. 우리처럼 모든 종목 선수를 한 곳에 모아 훈련하는 곳은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시설과 운용의 비효율을 극소화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첨단 시설로 지어진 선수촌을 훈련뿐만 아니라 경기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스포츠 스타를 꿈꾸는 유소년의 동기부여 차원에서도 선수촌을 개방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학생 선수의 학습권과 관련해 이 교수는 “공부하는 선수를 만들자고 하면서 입촌으로 인해 학습권을 제한한다. 이동수업이 있긴 하지만 얼마나 효율적이고 학생 선수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수영 국가대표 출신으로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류윤지씨도 “지난 2000년 중학생 국가대표였던 장희진 선수가 기말고사를 위해 태릉선수촌 입촌을 거부했다가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한 적이 있다. 수영 같은 경우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가 되면 학업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 선수촌에 안 들어가면 불이익을 줬다. 이런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와 정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수영 같은 개인종목의 경우 박태환이나 김서영 같은 특급 선수들이 선수촌 입촌을 꺼리는 것이다. 개인 코치를 두고 훈련하는 이들 선수들은 “수영은 미묘한 영법 차이에 따라 순위가 갈리는 종목이다. 몇 년간 호흡을 맞춰 왔던 코치를 떠나 진천에서 대표팀 코치 지도 아래 운동하다가 기록이 떨어지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고 반문한다.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류윤겸 수영 국가대표팀 감독은 “개인 코치를 두고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굳이 여기 들어올 필요 없다. 그러나 이곳의 훈련 여건은 전 세계에서 최고다. 언제든지 1인 1레인을 쓸 수 있고, 각종 트레이닝 기구와 물리치료를 이용할 수 있다. 제대로 훈련해 기록과 성적을 내보고 싶은 선수는 진천으로 들어오는 게 맞다”고 말했다.

진천선수촌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스포츠 훈련시설이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남북한 단일팀이 이곳을 이용하면서 국제적인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있다.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전통과 토대를 굳건히 하고,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첨단 스포츠 시설로 키우는 것은 스포츠인들의 당면 과제다.

- 글 정영재 중앙일보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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