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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7)] 14세기 말, 전제개혁 논쟁과 경제의 역설 

혁명가 이성계가 고민한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고려 말 토지와 백성의 소수 독점에 따른 중앙집권제 해체…기득권 부정하고 국가 재산 새롭게 분배한 이성계의 ‘혁명’

▎서울 종묘 공민왕 신당에 있는 영정. 공민왕(오른쪽)이 노국공주와 그려져 있다. 공민왕의 개혁 시도로도 기울어진 고려를 재생할 순 없었다.
14세기말 고려의 최대 현안은 토지제도 문란이었다. 겸병에 의한 사전(私田)의 확대가 문제였다. 그 원인은 역설적으로 사회적 잉여의 확대에 있었다. 13세기말 이래 사회적 잉여가 두 배 이상 커졌다. 1세기에 걸쳐 두 배의 경제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자연적 농업경제에서는 가히 경제적 폭발이라 할 만하다. 이 때문에 잉여 분배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발생한 것이다. 대대적인 겸병을 통해 극소수의 특권세력이 잉여를 독점했다. 여기에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이 직접 교역에 나서고, 왕실 전용 농장을 경영했다. 국가와 농민은 상황이 오히려 악화됐다. 지배세력도 이원화됐다. 힘에서 밀린 자는 영락할 운명에 빠졌다. 염흥방의 강제 점탈에 저항한 조반의 옥사, 그리고 1388년 무진정변도 그렇게 일어난 일이다.

국가가 약화되자 관료체계가 취약해졌다. 관인들에게 적절한 보수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지 300결을 받아야 할 재상이 오히려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가지지 못하게 됐고, 360석의 녹봉을 받아야 할 재상이 20석도 못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공민왕대의 명신 경복흥은 공민왕의 인척이자 오랫동안 재상직에 있었지만 매우 가난했다. 개성 근교에 토지가 전혀 없고 집안에 곡식 한 말도 없었다. 사적으로 재산 증식을 도모하지 않으면, 고위 관료도 경제적 곤란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충목왕 원년 개혁상소에서, 이제현은 경기 지역의 전제(田制)를 개혁하면, “기뻐할 자는 심히 많고 기뻐하지 아니할 자는 권호 수십 명뿐일 것입니다. 무엇을 꺼려하여 과감히 실시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이제현전]) 관료층도 이처럼 양극화돼 있었다. 공민왕은 관리들의 근무태만을 질책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국방체계도 거의 붕괴됐다. 병사들에게 군전(軍田)을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388년 7월 전제개혁 상소에서 조준은 그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국가가 기름진 땅을 베어 42도부(都府)의 갑사 10여 만 인의 녹으로 하니, 그 의복과 양식, 군사장비가 모두 밭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나라에 양병하는 비용이 필요 없었으니, 조종의 법은 곧 삼대에 군사를 농업에 간직하는 뜻을 따르던 것입니다. 지금은 병사와 밭이 함께 망하여 매양 급한 때를 당하면 농부를 몰아 군사에 보충함으로써, 병졸이 약해져 적의 먹이가 되고, 농민들의 양식을 쪼개어 양병하기 때문에 호수가 줄어들어 읍이 망했습니다. 조종이 지극히 공평하게 나눠준 전지를 한 집안 부자간에 사유(私有)로 삼아서, 한 번도 문을 나와 조정에 벼슬하지 않은 자와 한 번도 발을 들어 군문(軍門)을 밟지 않은 자가 비단 옷과 맛난 음식으로 앉아서 그 이익을 누리며 공후(公侯)를 멸시합니다. 비록 개국공신의 후예와 밤낮으로 왕을 시위하는 신하와 백전근로의 장사라도 도리어 한 뙈기의 먹을 것과 입추의 토지도 얻지 못하여, 그 부모 처자를 봉양하지 못하니, 무엇으로써 의로움을 권장하여 공업을 독려하며, 전공을 연마하여 외침을 막겠습니까.”([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중앙집권제 해체가 불러온 토지제도의 문란


▎북한 개성에 위치한 공민왕릉. 부인인 노국공주와 쌍분을 이루고 있다.
국방문제는 일차적으로는 토지문제였다. 그런데 14세기말 고려 정부는 군인전을 지급할 수 없어 정규군이 없었다. 군대는 사병으로 존재했고, 위기 시에는 일반 농민을 징발했다. 군량도 확보할 수 없었다. 군량이 없으면 군대도 없다. 이성계의 유명한 ‘안변책’ 역시 세족과 관리의 수탈로 인한 군량부족과 북방경비의 난조를 지적했다. 공민왕 19년 이성계가 지휘한 요동공벌에서 전투에서 이기고도 철군해야 했던 이유는 군량의 부족이었다. 고려 말 40년에 걸친 왜구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이처럼 국방체계가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토지문제의 문란으로 행정 기능이 마비됐다. 겸병으로 토지분쟁이 폭주했기 때문이다. “안으로 판도사(版圖司: 戶部의 다른 이름)와 전법사(典法司)가, 밖으로 수령과 안렴사가 그 본직을 폐하고 날마다 토지소송을 듣는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고 땀을 뿌리고 붓 든 손을 불며 문권을 상고하고 증거를 조사한다. 전호(佃戶, 소작농)를 심문하고 노인에게 묻는다. 무릇 재판에 연관된 자가 옥에 차고 뜰에 가득하여 농사를 폐하고 판결을 기다린다. 수개월의 안건이 산같이 쌓이고, 한 뙈기의 쟁송이 수십 년을 끌어 침식을 잊고 폐하여도 확단하여 주지 못하는 것은 사전(私田) 때문에 쟁단이 생겨 소송이 번거롭기 때문이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사회적 분쟁도 많았다. 부자와 형제간, 혹은 동료 간에도 토지분쟁이 생겼다. “자식이 부모에게 약간의 토지를 요구하였다가 혹 여의치 못하면 도리어 원한을 품어 길가는 사람 보듯이 하며, 심한 자는 겨우 상복을 벗으면 병간호하던 노비를 채찍질하여 밭의 공문서를 요구하게 되니, 지친에게 이러한데 하물며 형제간이겠는가. 이것은 사전(私田)으로 인해 인륜을 금수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조정의 사대부들이 겉으로는 서로 좋은 것 같으나, 마음으로는 서로 시기하여 은밀히 중상함에까지 이르니, 이것은 사전으로 함정을 만든 것입니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이른바 인륜에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조선개국공신 유만수는 형제의 전민을 빼앗았다. 관리들 사이의 토지분쟁도 많았다. 개혁파 윤소종도 친구의 사위인 최을의와 노비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 국가사회를 내적으로 결속시키는 관습적 규범 역시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국적 지식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근심했다. 권근은 “밤이 되어도 자지 못하고, 밥을 대해도 탄식하여 가슴을 치며 슬픔을 금하지 못 하는 바”라고 탄식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잇달아 일어나고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 나라에는 수개월간의 저축이 없고, 백성은 하루 저녁거리의 마련이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과 구렁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이웃 나라가 국경 가까이 군사를 주둔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며 우리의 인민을 꾀어 가고, 또 왜적이 깊이 들어와 약탈해서 각 고을이 소요하여 버려져 적의 구혈이 되었어도, 수령이 능히 막지 못하고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위란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섶을 쌓아두고 불을 지르는 것도 족히 현재의 다급함에 비유할 수 없고, 침대가 부서지고 사람의 몸에까지 화가 미친다는 것도 족히 현재의 절박함을 비유할 수 없습니다.”([고려사절요], 우왕 9년 8월, 권근의 상소)

고려 말의 상황은 공전공민제를 근간으로 한 통일적인 중앙집권제가 해체돼 가는 과도기였다. 토지와 인민은 소수 가문에 독점돼 소유권 점탈을 둘러싼 분쟁이 폭증했지만, 그것을 조정할 국가권력은 거의 유명무실했다. 조반사건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국가권력은 이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최종적인 권력을 의미했다. 사병 집단을 기반으로 토지와 인민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전면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다.

조선 건국은 사유재산제와 지방분권제의 역류


▎일본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지방분권적 봉건국가의 문을 열었다. / 사진:위키미디어
이상의 상황을 볼 때, 당시 고려는 중대한 갈림길에 처했다. 대안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공전제와 공민제를 포기하고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방법이다. 한국사에서는 1424년 처음으로 토지가 사유재산으로 공인됐다. 세종은 부모의 장례를 치르거나 묵은 빚을 갚기 위해서라는 특별한 사유에 한하여 토지 매매를 허용했다. 농민의 경작권은 곧 이어 상업적 소유로 전진할 만큼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이영훈, [한국경제사1], 326쪽) 15세기 후반 이후 토지는 개인의 상업적 소유로 취득되고 처분됐다. 16세기에는 관의 입안 없이도 토지 매매가 이루어졌다. 완전히 자유화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토지 소유권이 국가에 있다는 왕토주의 이념이 포기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국가의 통제력이 엄존하는 상태에서 백성의 경작권을 인정한 것이다.

고려 말은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지극히 취약한 상태였다. 이 경우 중세 일본처럼 지방분권적 봉건국가로 갈 수 있다. 이 길은 소유권 확보를 둘러싼 상당 기간의 내전을 거치게 된다. 일본은 645년 고토쿠(孝德) 천황의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계기로 귀족지배를 불식하고 공전, 공민의 천황체제로 전환했다. 남녀 공히 6세가 되면 일정한 토지를 받고 세금을 납부하는 것으로서, 이는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의 근간이다. 그러나 점차 중앙의 군사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결과 지방을 중심으로 장원이 발생했다. 장원 소유자들은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양성했고, 헤이안(平安, 794~1192년) 시대 초기에 분권적 봉건체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가권력이 취약하여 토지 분쟁과 치안 부재가 초래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가정권인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탄생했다. 그리하여 정치적 정통성은 중앙의 천황 또는 조정에 둔 채 실질적 권력은 막부에서 행사하며, 전국의 토지와 인민은 각지의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장악하는 분권적 봉건제가 1867년 메이지유신까지 지속됐다.

고려도 이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고려 말의 농장주들은 지방에 대규모 군사력을 양성하지는 않았다. 염흥방의 경우 겸병에 저항하는 조반을 체포하기 위해 순군(巡軍) 400여 기를 백주로 보냈다. 관병을 동원한 것이다. 그런데 조반은 수십 명의 기병을 동원해 염흥방의 가노 이광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가병이었을 것이다. 이미 상당한 사병이 존재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성계다. 그의 친병은 2000명 규모로서, 영흥을 중심으로 한 동북면 일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최영을 비롯한 모든 유력한 장군도 처한 상황이 같았을 것이다. 위화도회군 뒤, 이들 대부분은 제거됐다. 최영, 변안열, 정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고도 사병은 해체되지 않았다. 제1·2차 왕자의 난도 사병을 기반으로 발생한 것이다. 사병은 태종대에 해체됐다. 고려가 일본의 지방분권제로 가지 않은 것은 사병 집단이 제거됐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집단의 문화도 달랐다. 고려 무신정권이나 고려 말의 사병 집단은 지방에 상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개성에 머물렀고, 중앙에서 권력투쟁을 벌였다.

토지의 소유권 문란을 막는 두 번째 길은 사적 소유권을 혁파해 공전, 공민제로 복귀하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이 취했던 방법이다. 고려 원종 이래 모든 전제개혁은 이와 동일한 정치적 구상을 지향했다. 중앙집권국가로의 역사적 운동과 정치적 지향이 강력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개혁 이념과 운동이 왕권 강화를 목표로 하고, 국가의 공공성 회복을 고창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 건국은 사유재산제와 지방분권제에 대한 역류였다. 이성계의 전제 개혁은 사전(私田)을 완전히 부정하고 토지를 몰수해 국역(國役)이라는 기준에 따라 재분배하려는 것이었다. 공전공민제로의 복귀인 것이다. 성리학은 보편적 우주론과 정치론을 제공해 통일적인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에 공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상(理想)은 ‘공전제(公田制)’, 하지만 현실은…


▎고려사는 1451년 조선 문종 때 편찬됐다. 고려 말 부와 권력을 손에 쥔 권문세족의 부패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1388년 이후 전제개혁 과정에서 치열한 이념논쟁이 발생했다. 먼저 정의로서의 공전론(公田論)과 관습으로서의 사전론(私田論)이 대립했다. 사실 1388년 전의 전제개혁론은 관습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제현과 이색의 개혁론도 그랬다. 문제는 토지의 ‘사유’가 아니라, 그 사유권을 불법으로 혼란케 하는 ‘겸병’이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래서 현실적 ‘관습’을 인정한 가운데 그 폐단을 개선하려 했다. 그 반면 이성계파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원칙’ 아래 전제를 재편하고자 했다. 그들이 반대한 것은 단순한 토지겸병이 아니라 토지의 사적 소유권 자체였다. 그들은 국전제의 원칙에 따라 모든 토지를 회수한 다음, 국가에서의 역할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하고자 했다. 정도전의 말을 들어보자. “전하(이성계)는 즉위 전에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을 혁파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눠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조선경국전상], ‘부전’-경리)

이는 ‘혁명’ 없이는 불가능했다. 기득권을 부정하고 국가의 재산을 새롭게 분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왕정 하의 토지 국유제는 관념적인 것일 뿐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에는 그것이 현실이 된다. 그것이 부정한 현실을 개혁하는 정의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원칙은 ‘공전제’였다. 정약용에 따르면 그것은 이렇다. “무릇 전(田)은 모두 왕전(王田)이다. 사주(私主)는 전주(田主)라고 하면 안 되고 잠깐 가지고 있다(時占)고 해야 한다.”([경세유표], 地官修制-전제9-井田議1) 왕전(王田)이라 해도 왕의 사유가 아니다. 왕은 사인(私人)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해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전은 공전이다. 공전이므로 국가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분배된다. 역할이 없으면 먹을 것도 없다. 역할이 끝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 토지 1결을 더 지급한 자, 더 받은 자, 빠트린 자, 미반납 자, 숨긴 자, 몰래 주고받은 자, 빼앗은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생활능력이 없는 퇴직자나 여자, 어린아이는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했다. 조준이 천명한 전제개혁의 원칙은 이렇다. “태조의 지극히 공정한 분전법(分田法)을 준수하고, 후인이 사사로이 주고받아 겸병하는 폐단을 고쳐, 선비도 아니고 군사도 아니고 나라의 일(役事)을 맡은 자가 아니면 밭을 주지 말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이 주고받지 못하도록 엄격한 한계를 세워, 백성과 더불어 새 출발(更始)을 시작하여, 국가의 재용을 풍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십시오.”([고려사],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즉, ‘공적 역할에 의한 토지분배’와 ‘사적인 토지거래 금지’가 2대 원칙이었다.

“공역(公役)을 맡은 자에게 모두 토지를 주었다”


▎태조 이성계. 조선을 건국한 뒤, 고려 말의 질서를 해체하고 국가의 재산을 새롭게 분배하는 중앙집권 정책을 꾀했다. / 사진:문화유산국민신탁
공전제, 그중 주나라의 정전제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의 영원한 이상이다. 맹자는 정전제를 이상국가의 실현조건으로 제시했다. 먼저 사방 1리(里, 약400m)인 1정(井=900畝=1頃)을 기본단위로 삼아 땅을 가른다. 다음으로 1정을 9등분하여, 성인 남성 8인에게 각각 100무를 배당한다. 남은 100무의 공전은 8인이 공동 경작해 납세한다. 이는 1/9세의 조세 제도다. 동시에 이를 기초로 행정 조직을 만든다. 병농일치제이므로 국방 조직이기도 하다. 전 국토를 이렇게 구획하므로 국토분할 및 개발 플랜이다.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토지제도 위에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정전제는 생산단위이자 가족제도, 사회조직이며, 조세제도이자 행정조직, 국방조직, 정치체계다. 이는 수학적 아름다움을 가진데다, 공정성과 효율성을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의 제도이다. 전제 조건은 땅이 고르고 평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이 많고 지형이 복잡한 곳에서는 실행이 어렵다. 가장 치명적 단점은 생산단위인 매호(每戶)의 노동력이 변동될 때마다 토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구변동과 토지분급이 연동돼야 한다. 이는 설사 가능하다 해도, 장기간 유지되기는 힘들다.

공전제의 이념은 평균지권(平均地權)이다. 모든 농민이 전주(田主)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대토지 소유를 막는 균전제(均田制)나 일정 이상의 토지소유와 매매를 제한하는 한전제(限田制)조차 고식책(당장 편한 것만을 택하는 꾀나 방법)이라고 봤다. 고대의 ‘황금시대’에는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문왕, 무왕, 주공은 정전제로 백성을 길렀기 때문에 주나라가 천하를 800년 동안 차지하였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어진 정치(仁政)이다. 그 반면 진나라가 망한 것은 정전제를 폐지하고 토지 사유제를 합법화했기 때문이다. 즉 사전제는 국망의 첫째 원인(私田爲亂之首)이라는 게 조준의 생각이다.

그러나 1391년(공양왕 3년) 최종 확정된 전제개혁은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지 않았다. 지급할 수 없었다. 토지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기와 6도 토지의 작황을 일률적으로 조사해 수확량을 계산했는데, 경기에서는 실제 경작 토지가 13만1755결, 오래 묵어 황폐한 토지가 8387결로 확인됐으며, 6도에서는 실제 경작 토지가 49만1342결, 오래 묵어 황폐한 토지가 16만6643결로 확인됐다.”([고려사], ‘식화지1’, 전제 녹과전, 공양왕 3년 5월) 경작토지 62만3097결, 묵은 토지 17만5030결, 총 79만8127결이었다.

1389년 12월, 공양왕 즉위 시 올린 조준의 상소에 따르면, 왕실비용이 13만 결, 관인의 녹봉과 과전이 각각 10만 결이었다. 이것만 해도 총 33만 결이었다. 여기에 군인전, 중앙과 지방관공서 경비가 필요했다. 1076년 고려 문종대의 경정전시과에 필요한 토지는 87만 결이었다. 요컨대 농민에게 분급할 토지가 없었다. 정전제의 이상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사회의 농민은 기본적으로 국전의 소작인이었다. 전객(佃客)이란 그런 말이다. 조선 세조 4년 “땅이 없는 백성이 거의 3할”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들은 소작지도 없는 백성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공역(公役)을 맡은 자에게도 모두 토지를 주었다”고 말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건전성은 충족시켰던 것이다. 고려 말은 국역(國役)을 지고도 땅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정도전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일대의 전법(田法)으로 삼았으니, 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자평했다.([조선경국전], ‘부전’-경리)

농민에게 중요한 것은 토지 소유권보다 가벼운 조세와 안정적 소작권이었다. 1391년 과전법에서 수조율은 1/10로 엄격히 통제됐다. “모든 공전과 사전의 조세의 액수는 수전(水田) 1결 당 조미 30두, 한전(旱田) 1결 당 잡곡 30두이며, 이 액수를 넘어 함부로 거두는 자는 뇌물죄로 다스린다.” 농민의 소작권도 보호됐다. “전주가 전객(佃客)의 경작지를 빼앗는 경우, 1부(負)에서 5부까지는 태형 20대를 가하고, 5부 늘어날 때마다 1등급을 추가하며, 형벌은 장 80까지 가하고 직첩은 회수하지 아니한다. 1결 이상이면, 그 정(丁)을 타인이 교체하여 수령하는 것을 허용한다.”

토지개혁 반대론자들의 목소리


▎[경세유표]는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관제·부역·토지 등, 국가행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책이다.
그러나 개혁 반대자들은 고려 중기 이래의 ‘사전제’를 정당한 것으로 인식했다. 1390년(공양왕 2) 9월, 공사(公私)의 토지문서를 불사르자, 공양왕은 “조종의 사전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되니 애석하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전제는 이미 관습적 원리로 정착됐던 것이다. 당대의 토지 소유자들은 공전제 안을 오히려 불법적 소유권 침해로 인식했다. 전대의 모든 개혁이 사법 조치, 즉 불법적인 탈점의 방지에 머문 것도 그러한 인식의 반영이었다. 그것은 개혁이라기보다 불법행위의 근절대책에 가까워, 감찰과 재판 위주로 진행됐다. 공민왕 원년의 개혁조치도 전법관으로 하여금 잉집(仍執: 토지, 노비의 불법점유)과 거집(據執: 소유권 문서위조)을 처벌하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개혁의 최대 목표였다. 충목왕 대의 정치도감이나 신돈 집권기의 전민변정도감의 목표도 같았다. 공민왕 원년, 이색의 복중상서도 충숙왕대의 갑인주안(甲寅柱案)에 따라 불법을 시정하자는 것이었다.

1389년 4월 도당에서 전제개혁이 논의됐을 때, 이색은 “옛 법을 경솔히 개혁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개혁의 범위만 놓고 보면, 이는 그의 본래 입장이다. 그러나 그는 청년 시절 “부자의 밭은 창졸히 빼앗기 어렵고 적년의 폐는 문득 고치기 어렵다”는 세론에 대해, 공민왕에게 “이는 무능한 왕이 행할 바이요, 전하에게는 바랄 바가 아니”라고 반박한 바 있었다. 이색은 대토지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한산과 면주, 이천, 여흥 등 최소한 10여 곳에 토지가 있었다.(홍승기, ‘노비의 사회경제적 역할과 지위의 변화’, 1983)

1389년 (창왕 원년) 8월, 조준은 “세신·거실은 오히려 폐풍을 답습하여 말하기를 본조의 성법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개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제개혁을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간관 이행 등도 온건 개혁론을 비판했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 권호의 무리들은 거의 모두 복죄하였으니, 마땅히 변정도감에 위탁하여 소송하는 사람의 고조·증조의 계약문서를 고찰하여, 그것을 가진 연대가 오래되고 파계(派系)가 명백한 것은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면, 억울하고 원통한 것이 없어지고 국가가 무사하게 된다고 하오나, 신등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종께서 입법한 뜻은 대개 왕족과 재상 이하 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전을 받아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보육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법이 폐하게 되고 밭을 한정하는 제도가 없으니, 늙은 부인과 어린 아들, 깊은 병과 몹쓸 병의 무리도 그 문을 나서지 않고 그 조부의 문권을 가지고 국전을 앉아서 먹는 것이 100~1000결에 이른 자가 있으니, 비록 관사로 하여금 지극히 공명하게 처결하여도 어찌 군국(軍國)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겠습니까.”([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국가의 정의로운 토지분배 제도는 존재하는가

공정한 재판이나 불법행위 근절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시대가 위기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전통국가의 위기는 반드시 토지소유의 극심한 불균형과 때를 같이 했다. 반란세력이 고창한 이념도 항상 ‘균평(均平)’이었다. 그래서 공자도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면 이 불평등성이 대폭 시정된다.

그러나 토지소유는 정확히 ‘욕망의 법칙’에 따라 변한다. 불평등이 자연적이며 평등은 인위적인 것이다. 평등하게 분배된 토지는 시간이 지나며 점차 독점화된다. 누구든 자신에게 분배된 토지를 반환하지 않고 나아가 타인의 토지를 점유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조준의 설명을 보자. “밭을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이는 법이 점차 해이해져, 간활한 자가 이 틈을 타서 기만하고 은폐함이 끝이 없다. 이미 벼슬하고 출가한 자도 오히려 한인전(閑人田)을 먹고, 군대에 소속되지도 않은 자가 함부로 군전을 받는다. 아비는 숨겨 감추어 사사로이 자식에게 주고, 자식은 가만히 도적질하여 국가에 돌리지 않아, 이미 역분전(役分田)을 먹고 또 한인전을 먹으며 또 군전을 먹는다. 그러나 토지를 관리하는 관원은 그가 이미 현직에 있어 마땅히 역분전을 받아야 할 자인지, 또 관직도 없고 출가하지도 않아 마땅히 한인전을 받아야 할 자인지, 또 그가 과연 군사인지, 그 아버지가 과연 요새지에 근무하는지, 그 조부가 과연 다른 나라로부터 귀화했는지 묻지 않으니, 밭을 주고 거둬들이는 조종의 법이 이미 무너지고 겸병의 문이 열렸다.”([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7월)

따라서 공전제의 성공은 바로 이 경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구체적으로 국역이 끝난 자로부터 어떻게 토지를 반납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조준의 전제개혁은 국역을 중심으로 한 토지분배안과 토지 회수안으로 양분돼 있었다. 토지회수와 관련하여 토지 1결이라도 탈락시킨 자는 사형에 처한다. 지나치게 엄격한 조치처럼 보이나, 공전제의 성공은 바로 그 점에 달려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전제는 일종의 시지푸스적인 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시소게임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 난점을 피할 수 없다. 적절한 분배의 정의 없이는 어떠한 국가도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체체의 순환은 욕망과 정의의 균형에 좌우된다.

전제의 이념을 둘러싼 두 번째 논쟁은 ‘정신’과 ‘정의’의 대립이다. 보수파들이 제기한 두 번째 명분은 만약 토지 전체를 공유화한다면, “사군자(士君子)의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서 반드시 공업과 상업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색의 반대론으로서, 귀족제 사회의 전형적인 논리이다. 이 주장은 신분제 사회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국역에 따라 모든 부를 분배한다면, 모든 지식인은 관직시험에 몰두할 것이다. 이는 정신의 자유와 문명의 진보를 막는다. 밀(J. S. Mill)의 견해를 보자. “만일 이들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직접 정부에 의해 임명되고 급여를 받는 한편 그들의 입신출세는 오로지 정부에 기대를 걸게 된다면, 아무리 출판의 자유가 인정되고 의회의 민중적 조직이 인정된다 해도, 우리 영국이나 다른 어떤 나라도 명목 이상의 자유국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또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국내의 모든 유능한 인재를 통치집단에 흡수하는 것은 조만간 그 집단 자신의 정신적 활동과 진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자유론], 1859)

따라서 훌륭한 덕목을 갖춘 인재가 배출되려면, 정치적 보상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상을 추구할 여유가 허용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습 재산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여유가 자유와 덕목(virtue)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여유 없이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평등주의에 반대해 전통 영국사회를 옹호했던 에드먼드 버크도 의견이 같았다. “교회의 모든 수입이 마지막 한푼까지 언제나 자선에 사용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일정 부분은 대체로 자선에 사용된다. 인간을 단순한 정치적 자비(political benevolence)의 기계나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 보다는, 원래의 목적이 조금 훼손된다 해도 많은 부분을 자유롭게 쓰도록 놓아두어서 덕성(virtue)과 인간성(humanity)을 함양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 온 세상은 자유에 의해 이득을 볼 것이다. 자유가 없으면 덕성도 존재할 수 없다.”([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국가나 교회로부터 독립된 상당한 경제력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고, 이 자유가 덕성을 가능하게 한다. 신분, 명예, 재산은 덕성과 분리가 불가능하다.

국가의 정의 vs 경제의 효율성


▎에드먼드 버크의 초상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전통 영국사회의 수호자로서 프랑스 대혁명의 평등주의에 반대했다. / 사진:영국국립초상화갤러리
고려 말의 개혁파도 이러한 논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행은 공전제 개혁은 “사족(士族)이 업을 잃어 생계를 잇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선비의 무직자는 전토를 주어 농사짓게 할 수 있게 하고, 유직자는 녹봉을 주어 농사에 대신하도록 하면 가히 생계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준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비켜 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실직에 있지 않은 자(散官)나 퇴임자, 명예직(添設職), 그리고 가장이 죽고 개가하지 않은 처, 출가하지 않은 자제의 경우 생활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는 매우 한정된 것이었다. 공전제의 이상은 사회적 특권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덕성과 능력에 의하여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파들의 지적대로 사회 전체에 정치적 족쇄를 채울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개혁파들은 반대파의 주장이 궁극적으로 특권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준은, “사전(私田)은 사문(私門)에만 이롭고 국가에는 이익이 없으며, 공전(公田)은 국가에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도 심히 편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반개혁파가 “서로 뜬소문을 선동하여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고 사전을 회복하여 부귀를 보존코자 하니, 그것이 일가의 생계를 위해서는 득이 되겠으나, 사직과 생민은 어떻게 될 것이며, 만약 사전이 복구되면 이는 삼한 백만의 민중을 들어 기름불 속에 넣는 것”이라고 극언했다.

그러나 경제에 관한한 정의(rightness)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국가는 정의를 요구하지만 경제는 효율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전제는 옳지만 비효율적이다. 먼저 관리에 많은 비용이 든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행위 동기에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위 할 때 가장 적극적이다. 13세기 고려의 농업생산력이 폭발한 이유 중 하나도 그럴 것이다. 농장주는 국제무역의 확대와 생산기술의 발전에서 비롯된 잉여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래서 토지 소유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농장경영에 직접 나선 것이다. 국가가 약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그 결과 생산성이 가속화돼, 13세기에 잉여가 무려 2배나 확대된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패권에 의한 세계평화)’가 지속되고 토지 사유제가 더 진전됐다면, 더 큰 생산성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로 진행되어, 목가적 자연경제로 복귀했다. 생산체제의 변혁기는 항상 불평등이 심화된다. 구체제가 붕괴되고 신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대규모 집단이 비참한 빈곤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혁명세력으로 봉기한다. 그들의 목표는 옛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류의 발전에는 역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에서 정의가 항상 옳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밀이 지적하듯이 정신적 자유와 문명의 진보를 막기 때문이다. 경제의 역설이라 할 만하다. 경제의 기본은 자유에 두되, 정의로 보완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지혜이다. 하지만 13세기말에는 그런 지혜가 알려지지 않았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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