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8)] 선(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 

본성은 운명에서 나오고 운명은 하늘이 내려준다 

하영삼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던 동양적 가치의 급속한 해체…견리망의(見利忘義) 횡행하는 시대에 되새겨야 할 인간 본성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봤다. 어린아이가 위험헤 처하면 누구나 달려가 구하듯이 인간의 본성에는 善(착할 선)이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 대단히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중국의 한 도시에서 19세 여고생이 고층빌딩에 올라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를 보려고 몰려든 군중이 말리기는커녕 “어서 뛰어내리라”고 부추기거나 “겁을 먹어 못 뛰어내린다”는 식의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조대원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부여잡고 있던 여고생은 끝내 손을 뿌리치고 뛰어내렸고, 이를 본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까지 쳤다는 것이다.

믿기지도 않고 믿고도 싶지 않은 가히 엽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몇 년 전 5세짜리 여자애가 공중화장실에서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모두들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해 충격을 줬다. 또 2세짜리 아기가 차에 치여 쓰러졌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사망한 일도 있었다. 길에서 사고를 당해도, 테러를 당해도 나의 일이 아니라 그저 지켜보거나 심지어 특이한 경험이라며 사진까지 찍는 게 현실이 됐다.

이 슬픈 소식이 남의 나라 일인가 했더니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다. 며칠 전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여성 행인이 두통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그 옆을 무심코 지나치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지켜보기만 하거나 심지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사건은 “미투 당할까 봐” 스스로 자기방어벽을 만든 ‘펜스룰(Pence Rule)’ 때문이라고도 하고, 이 보도 자체가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나 개인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던 동양의 전통적 가치는 급속도로 해체됐다. 지독한 개인주의를 넘어서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한다.

일전에는 인공지능(AI)에게 부정적인 학습을 집중시켰더니, 모든 사고가 부정적으로 변했고, 인간에게도 매우 적대적인 존재로 성장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인간은 본성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1. 정말 인간은 ‘선(善)’한가?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
전쟁이 일상이었던 시대, 마치 하루살이처럼 내년이나 다음달은 물론 내일 하루조차 기약하기 어려웠다는 전국(戰國)시대, 증오와 잔혹한 살생, 그칠 줄 모르는 폭력과 형언할 수 없는 참상으로 얼룩진 그 혼란의 시대, 그 피폐한 환경에서도 인간의 본성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본 학자가 있다.

바로 맹자(孟子)다. 그는 “아래로 흐르지 않는 물이 없듯, 선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고 선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우물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의 부모나 친척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달려가 위험에 빠져드는 아이를 구하듯이, 인간의 본성에는 善(착할 선)이 내재돼 있기 때문에 선은 교육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것(良知良能, 양지양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성선설(性善說)’이라 불린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겨난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선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면 세상에는 왜 살인이나 폭행과 같은 범죄가 생기며, 범죄까지는 아니라 해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사태가 벌어지는가?

맹자는 이 사태의 원인을 경제적인 것에서 가장 먼저 찾았다. 사람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지 못하다면, 먹고 살기에 급급해 의(義)를 따르지 못해 본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無恒産, 無恒心). 이렇게 보자면 맹자는 철저한 유물론자이며, 오늘날의 의미로 풀자면 경제에 기반한 유가사상가다. 사회 질서가 세워지려면 먼저 생존의 문제에 급급하지 않도록 탄탄한 경제적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에서 맹자는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을 단순히 경제적 동물로 한정되지 않았다.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사람들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그 시대 지도층 인사를 비판하고 공격했다. 그에게 선함의 추구가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가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함은 인간을 짐승과 다른 존재로 규정하는 특성인 동시에 인간 본성 그 자체 속에 내재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넘어선 신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운명에서 나오고, 운명은 하늘이 내려 준다(性自命出,命自天降)”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을 인간에게 내재적인 동시에 인간을 넘어선 신적인 것과 연결시켰고 인간의 존엄성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런데 본성이라는 것이 외부의 경제적인 이유로 잃어버리거나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라면 선(善)이란 씨앗의 형태로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인간의 잠재성이나 잠재적 역능(力能)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잠재성이란 겉으로 발현될 수도 있지만,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이다. 잠재적 선(善)이 현실 세계 속에서 구체적 덕목으로 발현된 형태, 즉 선이 수행적이고 실천적 양태로 드러나는 것이 인(仁)과 의(義)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맹자는 선(善)을 정의하면서 누구나(배가 고프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도 포함해) 수련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 노력을 통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존엄한 본성을 발아시키고 꽃피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맹자]를 읽으며 놀랐던 점은 전쟁과 폭력이 난무해 거리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백성은 죽음을 피하기에 급급했던 시대,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특권층은 앞다퉈 사리사욕을 취하던 그 어려웠던 난세에 모든 인간에게는 선이 내재해 있고, 그로부터 질서를 세우고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역능을 식별해 내고, 개인의 자발성과 주체성을 그가 확인했다는 점이다.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21세기의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고 유효해 보인다.

그렇다면 어원적으로 선(善)은 무엇이며, 갑골문 속에서 선(善)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맹자의 유가사상과 어떻게 접속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 ‘선(善)의 어원: 양의 눈


우리말에서는 보통 선(善)을 ‘착하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착하다’는 말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함”을 말한다. ‘착하다’는 말의 유의어로 부드럽다, 양순하다, 순하다, 순탄하다, 온순하다 등이, 반의어로는 악하다, 흉하다, 악랄하다 등이 순서 지어 나타나고 있다(네이버 사전). 이로 볼 때 ‘착함’은 ‘부드럽고 순함’을 말한다 할 수 있다.

정말 선(善)이 ‘착하다’는 뜻일까? 먼저 어원부터 살펴보자. 선(善)은 갑골문 시대 때부터 나타나는 중요한 글자이다. 갑골문에서는 과 같이 써 양(羊)과 눈(目)으로 구성됐고, 금문부터는 선으로 써 양(羊)과 경(말다툼을 벌이다)으로 구성됐다. 이는 양(羊)의 신비한 능력이 말다툼의 시시비비를 판정해 준다는 고대 중국에 전해져 오던 신판법(神判法)의 전통을 반영했다.

갑골문에서는 이처럼 ‘양의 눈’으로 선(善)을 직접 표현했다. ‘양의 눈’을 내포한 선(善)은 바로 정의로움의 상징이다. 이후 인간사가 복잡해지고 다툼이 많아지자 송사의 판단을 내포한 선이라는 글자로 변화했고, 이후 자형이 줄어 지금의 선(善)이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善)은 길상의 상징이 됐으며, 인간이 언제나 지켜야 할 덕목, 즉 도덕의 지향점이 됐다. 게다가 유가철학의 핵심 개념의 하나로서 유가가 지배한 동양의 공통된 덕목이자 가치 기준이 됐다.

선(善)에 등장하는 양(羊)은 알다시피 일찍부터 고대 중국인들의 숭배 대상이 됐으며, 이 때문에 선(善)뿐만 아니라 상(祥: 상서롭다), 미(美: 아름답다), 의(義: 옳다) 등 중요하고도 좋은 개념을 나타내는 글자에 들어 있다.

게다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지 않은 이를 징벌한다는 정의의 상징인 해치(해태)도 ‘뿔이 하나 달린 양(一角羊)’, 즉 양의 한 종류로 표현될 정도였다. 이렇게 볼 때 선(善)은 출발부터 양(羊)과 연계됐는데 양이 신적인 정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양(羊)은 우리가 상상하는 온순하기 그지없는 면양은 아니다. 험준하고 척박한 산지를 마음껏 누리는 ‘산양’이 그 원형이다. 즉 인간에 의해 가축화되고 길들여지기 이전의 자연신, 혹은 토템의 대상으로서의 야생 양이다.

양(羊)으로 구성된 의(義)를 보면 더 그렇다. 우리가 자주 쓰는 정의(正義)는 서로 대비되는 정(正)과 의(義)가 결합한 어휘이다. 정(正)은 정(征: 정벌하다)의 ‘원래글자’로 성을 정벌하러 가는 모습을 그려 ‘정벌하다’가 원래 뜻인데 ‘정벌’과 같은 전쟁은 정의로운 것이어야 함에서 ‘옳다’는 뜻이 나왔다.

이에 비해 의(義)는 양(羊)과 아(我)로 구성됐는데 아(我)가 의장용 창(혹은 도끼)을 상징해 정의로운 양의 장식이 달린 실제로는 사용하지 못하는 의장용 ‘창’을 말한다. 그래서 정(正)이 외부의 적을 정벌하는 것이라면 의(義)는 내 속에 있는 불의를 처단하는 것이며, 혹은 공동체 내부의 불의를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의(義)를 구성하는 양(羊)은 불의를 비판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과 연결된다. 의(義)에서 파생된 희(羲=義+兮)도 그렇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마지막 숨을 내쉬며(兮) 완수하는 정의로운(義) ‘희생’을 뜻한다.

3. 맹자의 ‘선(善)’ 속에 내재된 양의 눈


▎중국 산동성 제녕시(濟寧市) 추성(鄒城)에 있는 맹묘(孟廟). 맹자는 공자에 버금간다는 뜻에서 아성(亞聖)이라 불렸다.
이처럼 선(善)은 양(羊)의 눈(目)에서 출발했고, ‘양의 눈’은 범신론적 ‘신의 눈’, 혹은 자연신으로서의 하늘(天)과 통한다. 신은 사사로움에 치우치지 않고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성이 바로 선(善)이며, 이 선(善)이 맹자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리고 선(善)의 대표적 실천 덕목으로서 맹자는 인(仁)과 의(義)를 꼽았는데, 인(仁)은 선(善)의 긍정적 발현 양태이며, 의(義)는 선(善)의 부정적 발현 양태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양’이 들어간 선(善)에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인(仁)을 결합하여 선(善)을 개념화했던 것이다. 다만 양(羊)이 들어간 대표적 글자인 미(美)를 그의 사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점이다. 물론 선(善)과 관련해서 정의를 하자면 미(美)는 현상적 아름다움(유용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숭고미를 포함하는 인간 본성의 감각적 발현이라 볼 수 있다.

맹자가 선(善)의 실천 덕목으로 동원했던 인(仁)의 어원을 보면 갑골문과 금문에서 각각 이나 과 같이 썼는데 각각 선 사람(人)과 앉은 사람의 모습에다 어떤 부호로 보이는=로 구성됐다. 여기서 =는 인인(人人)의 생략된 형태로, 인(仁)이란 바로 ‘사람(人)과 사람(人) 사이의 마음’, 즉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을 바로 인(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의 ‘사람의 마음’이란 바로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맹자도 인(仁)이란 남을 어여삐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바로 인(仁)의 확인점이라 했던 것이다. 이후 전국시대 때의 죽간에서는 과 같이 써 신(身)과 심(心)으로 구성돼 ‘사람이 몸소 실천해야 할 마음’임을 강조했다. [설문해자]에서는 로 써, 소리부인 신(身)이 천(千)으로 바뀌었으나, 지금은 다시 仁으로 쓴다.

맹묘(孟廟). 맹자를 기리는 사당 아성전(亞聖殿)의 모습이다. 공자에 버금간다는 뜻에서 아성(亞聖)이라 불렸다. 산동성 제녕시(濟寧市) 추성(鄒城)에 있다. 원래는 북송 경우(景佑) 4년(1037)에 맹자의 무덤 옆에 지었으나, 수재로 선화(宣和) 3년(1121)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맹자가 설명하는 인(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마음으로, 이는 타인을 보고서 어여삐 보살피는 마음(心)인 측은지심(惻隱之心),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 구성된다. 앞서 말한 우물가의 아기를 보고 본능적으로 아이를 구하는 것은 측은지심에 해당한다. 이 둘은 선(善)의 긍정적 발현형태로, 보통 ‘옳고 그름’이 개입하기 이전에 발생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의(義)는 수오지심(羞惡之心)에 해당하는 것으로 선(善)의 부정적 발현인데 ‘부정’이란 비판과 금지를 포함한다는 말이다. 이는 해로운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나 자신도 남을 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의(義)에 인(仁)에는 없는 ‘양의 눈’이 들어가 있는 것은, 불의를 비판하고 지양하고 제거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仁)이 개인적 차원의 윤리라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포함된 의(義)는 사회적 차원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仁)이 개인적 차원의 선(善)으로 좋은 삶을 지향한다면, 의(義)는 공동체적인 공동선(the common good) 혹은 공공선(the public good)을 지향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맹자의 사상은 공자의 사상보다 더 진보적이고 발전했다 할 것이다.

맹자는 인(仁)과 의(義)가 충돌할 때는 인(仁)이 더 근원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는 주장이라든가 “잘못된 왕은 폐해야 한다”는 등 그의 혁명적 정치론을 펼칠 때는 원래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의(義)를 강조했기 때문에,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이 더 있는 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갑골문 어원에 의거할 때는 “타인의 배려”를 말하는 인(仁)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의(義)의 가치가 우선한다.

다만 어느 쪽이든, 선(善)이 양(羊)으로 이뤄진 합성자이기에 선(善)을 ‘면양’처럼 착하고, 순하고, 순진하고 순종적인 개념으로 풀이해 단순히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4. 선(善)의 반대는 악(惡)인가?


▎1527년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 총 3360자를 4자씩 33가지 주제에 따라 나누고 음과 뜻을 달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선(善)의 반대가 악(惡)이라 하지만, 이 역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악(惡)은 어원이 완전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이 글자를 구성하는 아(亞)는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의 현실(玄室)을 지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나 그런 일, 혹은 그것을 담당하던 관리를 지칭하던 아(亞)에 심(心)이 더해진 악(惡: 사실은 동사로 쓰였기 때문에 ‘오’로 읽어야 한다)에 싫어하다, 미워하다, 증오하다의 뜻이 들게 됐다. 이후 ‘악함’을 뜻하는 추상명사로도 쓰이게 되자, 동사나 형용사로 쓰일 때는 ‘오’, 명사로 쓰일 때는 ‘악’으로 구분해 읽었다.

여하튼 선(善)과 짝을 이루는 악(惡)도 처음부터 선(善)의 대칭 개념은 아니었으며, 선(善)이 ‘좋다’는 뜻으로 변질되면서 이의 대칭어로 악(惡)이 설정됐다.

옛날의 문헌 용례를 보면 이러한 어감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컨대 [노자]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美)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惡).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함(善)을 선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선함이 아니다(不善).”(제2장)라고 했는데 여기서 선(善)의 대칭어는 악(惡)이 아니라 불선(不善)으로 등장하며 악(惡)은 도리어 미(美)의 대칭개념으로 설정됐다. 그렇다면 악(惡)의 원시의미는 ‘추하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며, 오늘날 선악 개념에서 말하는 ‘악’보다는 ‘싫어하다’가 더 원시적인 의미임을 알려준다.

5. ‘옳음’에서 ‘착함’으로


▎성균관 대성전에서 진행되는 석전대제에서 학생들이 팔일무(八佾舞)를 추고 있다. 석전대제는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공자·맹자 등 4성(聖)과 최치원·안향 등 동국(東國) 18현(賢) 등 중국과 우리나라 유교 성현에게 지내는 제례의식으로 중요무형문화재 85호다.
타인을 배려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본성으로 정의됐던 선(善),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착하다’는 뜻으로 변했을까? 물론 ‘착함’도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도덕적 지향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가치가 ‘옳음’과 ‘정의’에 비할 수 있을까?

‘옳음’은 강직함의 원천이다. 개개인부터 옳아야 하고 옳음을 지향해야 하며, 그들을 대표하는 지도자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지향이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환영할 만한 것은 못 된다. 왜냐하면, 목숨조차 새털처럼 가벼이 여기는 ‘군자’의 강직함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뿌리치지 못하는 숱한 유혹에 둘러싸인 통치자 자신도 이를 지킨다는 것이 엄청난 고행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가 사상이 나라의 통치 철학으로 정착한 한나라 이후 선(善)은 소리소문 없이 변신을 하게 된다. 이전의 ‘정의로움’에서 좀 더 완화된 개념으로, 좀 더 부드러운 개념으로, 좀 더 통치에 유리한 개념으로 교묘하게 포장을 바꾼다.

실제 언어생활에서 사용된 예를 봐도 한나라에 들면 “선린에 능한 형가를 보내면 됩니다(所善荊卿可使)”([사기] ‘자객전’)라는 용례에서처럼 ‘남과 잘 지내다’는 뜻으로 이미 변하고 있다. 송나라 때의 사전인 [집운(集韻)]에서는 선과 같다고 하면서, 선을 완(緩: 느슨하다), 비(婢: 비천하다)로 풀이했다.

이후 명나라 때의 사전인 [정자통(正字通)]에서는 다른 사람을 환대하며 잘 지내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善)은 남과 잘 지내고 남을 배려하며 남을 보살피는 상당히 부드럽고 약화된 개념으로 변화했으며, 선행(善行), 친선(親善), 선의(善意) 등의 단어들을 만들어 갔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의 [훈몽자회]에서도 선(善)을 ‘좋다’로, [천자문]과 [유합]에서는 ‘어질다’로 풀이했으며, 조선 후기의 [자류주석] 이후부터 [자전석요]나 [신자전] 등에서는 모두 ‘착하다’로 풀이했다.

뿐만 아니다. 유가 경전에 나오는 선(善)조차도 많은 경우가 ‘좋다’라는 뜻보다는 ‘옳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리에 맞아 보인다. 예컨대 [논어]에 선인(善人)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선한 사람을 나는 본적이 없구나. 항상심을 가진 자라도 볼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할 것이다(善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恒者, 斯可矣)”(‘술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선인(善人)을 보통 ‘착한 사람’으로 풀이하지만, 공자가 설정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입해 보면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하다.

즉 공자가 설정한 최고의 이상적인 인간은 성인(聖人), 그 다음을 군자(君子), 그 다음이 방금 보았던 선인(善人)이며, 그 다음이 항상심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성인(聖人)은 요순(堯舜)으로 대표되며, 군자(君子)는 [논어] 곳곳에서 등장하듯 최고 지식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 다음이 ‘선인(善人)’이고, 그 다음이 항상심을 가진 자, 즉 어떤 상황이라도 변하지 않는 곧은 사람인데, 이를 ‘착하다’는 우리말 속에 담긴 순응하고 복종하다는 어감 때문에 단순히 ‘착한 사람’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북송 때의 [논어] 해설가였던 형병(邢昺, 932~1010)도 “선인은 군자라는 뜻”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에서 말한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진심’(하)]도 “뜻을 얻지 못해 궁할 때는 홀로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뜻을 얻으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세상이 혼란하고 나의 뜻을 받아주지 않을 때는 혼자서라도 권력이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본성의 함양에 힘을 쏟아야 한다.

내 한 몸조차 정의롭게 올곧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일이다. 하물며 남을 정의롭게 만들고, 사회를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란 정말이지 지난할 뿐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함께 노력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든다면 그가 비로소 성인이요, 요순이 바로 그에 자리한다고 할 것이다.

6. 이 시대의 정의로움은 뭘까

도덕의 최고 지향점인 선(善), 그 선(善)이 단순히 개인의 ‘착함’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義), 즉 불의를 비판하는 분노와 상대의 해로운 행위를 시정하려는 용기와 관련된 글자로서 공동체의 공동선, 즉 ‘옳음’이고 ‘정의로움’을 지향한다.

앞서 말했듯 맹자와 순자의 ‘성선설’과 ‘성악설’도 ‘착하냐 악하냐’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사회적 차원의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을 포함한다.

정의로움은 자신의 이익을 배제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신의 이익을 배제하려면 욕심을 줄여야 한다. 욕심을 줄이려면 속을 비워야 한다. 속을 비워야 남을 수 있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이나 사익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을 바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라 했다. “이익이 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것이 정의로운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유혹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유혹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견뎌내고 뿌리치고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 이익의 추구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이 사회에서 어원적으로 옳음과 정의에서 출발한 ‘선(善)’은 새로운 가지를 지니는 도덕적 지향점이다. [설문해자]의 해설처럼 의(義)가 바로 선(善)이고 선(善)이 바로 의(義), 선(善)과 의(義)가 감각적으로 현상할 때 그것이 곧 미(美)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사는 오늘날, 인간은 계층은 더욱 고착화되고, 개인은 날로 왜소해져 소외돼 가고 있다. 게다가 견리사의(見利思義)는 고사하고 모두가 이익추구에만 혈안이 돼 견리망의(見利忘義)만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서 구할 것이 의(義)고 선(善)이며, 그리고 그러한 사익에서 인간을 감각적으로 해방시켜줄 미(美)이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 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고,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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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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