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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29)] 평안도에 문풍(文風) 일으킨 의병장 지산(芝山) | 조호익 

책무를 다할 뿐 공 내세우지 않아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관서(關西) 유배지에서 20여 년간 가르침과 교화에 힘 쏟아 임진왜란 시기 남북을 종단하며 의병 진두지휘

▎13대손 조인호(왼쪽)씨와 조순 교수가 지산고택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1576년(선조 9) 3월 전가사변(全家徙邊)의 명이 내려져 강동(江東)으로 유배되었다. 창원에서 강동까지 거리는 2000여 리가 되었지만 선생은 편안한 얼굴로 길에 오르며 조금도 원망하는 뜻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하면 단지 ‘운명일 뿐’이라고 했다.”

한 선비의 행장(行狀)에 나오는 유배(流配) 관련 기록이다. 유배지 강동은 평안도다. 경상도 창원에서 반도의 북쪽 관서(關西)지역으로 전 가족이 이주하라는 명령이다.

강동은 어디일까. 현재 북한 행정구역으로 평양시 강동군이다. 강동군은 평양시에서 대동강의 동쪽 지역으로 시 전체 면적의 19.6%를 차지한다. 단군릉이 위치한 곳이다.

그는 부인과 함께 유배지 강동에 도착해 지씨(池氏) 집에 머무른다. 그때 나이 32세. 북과 남에서 제자를 기르고 의병장으로 활동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 선생은 이렇게 일생의 전기를 맞이한다.

매일처럼 남북한이 거론되는 요즘 그의 발자취가 궁금했다. 6월 20일 13대손 조인호(80) 옹의 안내로 지산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경북 영천시 대창면 도잠서원(道岑書院)에 먼저 들렀다. 서원 입구에 ‘關西夫子(관서부자)’라 쓴 표석이 있었다. 부자는 대학자란 뜻이다. 표석 뒤에 내력을 새겼다.

‘선조 8년(1575) 최황의 무고로 이듬해 평안도 강동으로 귀양 가 학규(學規)를 세우고 문인을 교화했다. 선조 21년 최황이 경연에서 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대관들도 번갈아 상소했으나 임금께서 나도 모르는 바 아니나 관서에는 본래 문교(文敎)가 없었으므로 더 머물게 해 권장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노라 했다. 이듬해 관서 유생 황경화 등이 억울함을 상소했으나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고 오히려 ‘관서부자’ 네 글자를 크게 써서 하사하고 장려했다. 지산은 선조가 이렇게 호칭했을 만큼 평안도에 문풍(文風)을 일으킨 학자였다.

당시로 돌아가 보자. 조호익은 강동에 도착해 다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고지산(高芝山)으로 들어간다. 그는 숲이 무성한 곳에 집을 지어 수지재(遂志齋)·풍뢰당(風雷堂)이라 이름 붙이고 좌우에 서책을 쌓은 채 단정히 앉아 독서에 몰입했다. 그때부터 지역이 달라진다. 행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오랑캐 인접한 유배지 강동 교화하고 후학 양성


‘(…)관서 지역은 북쪽으로 오랑캐와 인접해 있고 서울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예로부터 선생이나 덕망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학문을 몰랐는데, 소문을 듣고 원근에서 식량과 서책을 짊어지고 모여들어 문밖에 항상 신발이 가득했다. 선생은 이들을 재주에 따라 가르치고 인도했다.(…)’

지산은 강동 원근 학생과 이곳에 수령으로 부임하는 자제들을 가르쳤다. 행장을 쓴 사람은 당시 그곳 수령으로 부임한 김비의 손자 김육(金堉)이다. 가르침을 받은 김육은 이후 대동법을 주창하고 효종 시기 영의정을 지낸다. 지산은 만년에는 남녘 영천에서 후학을 배출한다. 그를 기리는 서원이 남북에 세워진 까닭이다.

조호익은 본래 창원에서 태어나 16세에 유교의 도덕 실행을 임무로 삼았다. 그때부터 잠자고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글을 읽었다. 이듬해 그는 안동으로 퇴계 이황 선생을 찾아가 배움을 청한다. 지산은 “퇴계 선생이 순수하고 온화해 모시고 있으면 화기(和氣)가 사람을 엄습한다”며 큰 감화를 받는다. 23세엔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올라가는 퇴계를 모시기도 했다. 3년 뒤 스승은 세상을 떠난다. 지산은 햇수로 10년 동안 퇴계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에 액운이 닥친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시묘를 마친 뒤다.

경상 도사(都事) 최황이 장정을 군적(軍籍)에 올린다며 창원을 찾는다. 최황은 “군적 검사와 감독은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며 조호익을 지명했다. 지산은 인순왕후 국상으로 모친상 절차를 마치지 못해 상복을 벗지 않은 때였다. 또 시묘 등으로 병이 나 있었다. 군적 일을 하지 않았다.

거기서 일이 꼬였다. 최황은 성을 내며 돌연 한정(閑丁: 토목공사에 나가지 않는 장정) 50명을 바치라고 다그쳤다. 지산은 어린 종까지 동원했지만 숫자를 채울 수 없었다. 최황은 급기야 형장(刑杖)을 치며 ‘토호(土豪)’라는 죄목으로 장계를 올렸다. 그가 강동으로 유배 간 배경이다.

지산은 유배지에서 가르치고 교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하나씩 늘었다. 1592년 4월 지산은 유배지 산사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수심에 잠긴다. 유배 생활 17년째다. 까닭을 물으니 지산은 “고향의 선산(先山)이 적의 소굴이 되겠구나” 하고 걱정했다. 그리고 며칠 뒤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임진년 5월 선조 임금이 피난길에 올라 개성에 이르렀을 때다. 서애 류성룡은 동문수학한 지산이 무고로 유배된 사정과 신원(伸寃)의 당위성을 아뢰었다. 선조는 그를 석방하라 명한 뒤 의금부도사 관직을 주어 소모관(召募官)에 임명했다. 지산은 명을 받자 중화(中和)로 달려와 임금을 알현한다. 선조는 “그대가 관서 지방에 오래 머물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대는 의병을 모아 강탄(江灘)을 지키는 장수에게 넘기라”고 하명했다.

그러나 지산이 어명을 받들기도 전에 어가는 평양을 떠나고 강탄을 지키던 장수는 궤멸됐다. 그가 다시 어가를 찾아가자 서애는 호종(扈從)보다 의병으로 왜군을 토벌해 달라고 요청한다.

지산은 성천(成川)으로 들어가 제자 윤근·박대덕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500여 명을 규합했다. 군기를 세우고 진을 친다. 왜군은 평양에 머물며 사방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관군은 얼씬도 못했다. 의병장 지산은 군사를 거느리고 중화와 상원(祥原)을 오가며 낙오한 왜군을 공격해 전과를 올렸다. 그해 11월 그는 전공으로 장례원(掌隸院) 사평(司評)에 제수되고 얼마 뒤 형조정랑을 받는다. 12월엔 정3품 절충장군 용양위상호군에 오른다.

군졸들처럼 잠 잘 때도 옷을 입은 채로


▎1. 도잠서원 입구에 세워진 ‘관서부자’ 표석. / 2. 제자 김육이 석 달 시묘했다는 조호익의 묘. / 3. ‘도(道)의 봉우리’라는 뜻의 사액 도잠서원.
그는 군중(軍中)에 있을 때 군졸들과 같이 잠잘 때도 옷을 벗지 않았으며 대삿갓을 쓰고 가죽버선을 신었다. 한번은 한밤중에 참모를 불러 진영을 옮기라고 했다. 일부가 반대하자 지산은 “명령을 어기는 자는 참수하겠다”며 마침내 진영을 옮겼다. 얼마 뒤 적병이 습격했다. 그의 예지력에 모두 탄복했다. 조인호 옹은 “선생이 왜란으로 고향이 분탕질되는 걸 알아내고, 한밤중 주둔지를 옮기는 등 신인(神人)과도 같은 일을 몇 차례 한 기록이 전한다”며 “아마도 [주역(周易)]을 깊이 공부하며 체득한 지혜일 것”이라고 말했다.

1593년 지산은 명군(明軍)을 따라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의 연보를 보자. 명나라 장수 낙상지·오유충 등을 따라 보통 문으로 쳐들어가 적의 목을 잇달아 베었다. 왜적이 후퇴하자 내성으로 들어간다. 지산이 내성을 공격하고 왜적은 성 위에서 조총을 마구 쏘아댔다. 명군은 왜군의 형세가 곤궁해지자 성에서 나와 퇴로를 열어 주었다. 지산은 왜적이 밤중에 도망칠 것을 예상하고 대동강 주변에 군사를 매복했다. 이날 밤 왜군이 예상대로 몰려오자 지산은 그들을 맞아 싸워 수백 급을 베었다. 그리고 임진강까지 왜군을 추격해 대파한다. 또 함경도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양주까지 추격한다. 전투는 계속된다. 지산은 왜군의 뒤를 밟으며 남쪽으로 내려가 양산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그는 그러고도 공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의병장의 명망은 더욱 높아졌다.

이장희 전 성균관대 교수는 “왜군은 조선에서 유교정신으로 무장한 의병 봉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며 “전쟁 초기 나라 명맥을 유지하고 재기의 길을 트는 데 의병의 힘은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이후 전선은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지산은 의병을 해산하고 제자들을 관서로 돌려보냈다. 5년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 지산은 강동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

1594년 지산은 성주목사에 임명된다. 얼마 뒤 그는 벼슬을 버리고 선대의 고향인 영천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니었다. 전쟁이 이어져 가족은 수시로 굶주리는 등 정착할 곳이 못 되었다. 지산은 다시 괴나리봇짐을 지고 제자들이 있는 정든 땅 강동으로 돌아갔다.

조목·김성일·이덕홍·류성룡과 함께 퇴계 문하 ‘6철’


▎1. 성종 시기 대구부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푼 청백리 조치우(지산의 증조)를 기리며 임금이 내린 옥비. / 2. 도잠서원 앞에 조성된 도화담. 못 가운데에 있었다는 지어대는 사라졌다.
1599년 지산은 병이 깊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힘들여 써 온 원고를 불태운다. “남겨 두면 항아리를 덮는 종이로 쓰일 뿐이다.” 주자(朱子)의 주석이 치밀해 경전에 군더더기를 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불사른 자료는 ‘역전변해(易傳辨解)’ ‘유석변(儒釋辨)’ 등이다.

수구초심일까. 그해 7월 지산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1600년 체찰사 이원익이 도움을 요청한다. 연해지역 울산(蔚山)에 군민(軍民)으로 변방을 지키는 일을 추진해 달라는 것이다. 일종의 민방위 조직이다. 지산은 일이 어느 정도 진척되자 사임하고 영천으로 돌아왔다.

1603년 그는 마침내 만년을 보낸 영천의 지산촌(芝山村)에 터를 잡는다.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도잠서원이 있는 마을이다. 서원 앞 도화담(桃花潭)이 넉넉해 보였다. 못 가운데 지어대(知魚臺)는 있다가 지금은 사라졌다. ‘관서부자’ 표석을 지나 서원으로 들어섰다. 안쪽 가장 높은 곳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성모묘(聖慕廟)’가 있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도잠서원은 숙종 임금이 편액을 내렸다. ‘도잠(道岑)’은 도의 봉우리란 뜻이다. 조호익은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간재 이덕홍,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와 함께 퇴계 문하의 ‘6철(哲)’로 불린다. 그러고 보면 지산은 퇴계학을 관서까지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서원에는 ‘지산선생기념사업회’와 ‘지산학연구소’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문중을 중심으로 지산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최근 활발해졌다. 지난 5월엔 첫 세미나가 열렸다. 인성교육관을 짓고 체험 프로그램을 곧 선보일 예정이다. 지산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조순(57)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선생은 6대가 내려갈 때까지 뒤를 받칠 이렇다 할 후손이 없었다”며 “일생 실천한 ‘표리무간 이험여일(表裏無間 夷險如一, 겉과 속이 차이 나지 않고 한결 같다)’ 정신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표리무간은 서애 제자 이준이 제문에 쓴 평이다. 지산은 책무를 다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서원에서 100m 떨어진 곳에 도잠서당이 있다. 그가 지산촌 시절 학문을 정리하고 후학을 가르친 곳이다. 서당 앞에 망회정(忘懷亭)이란 몸을 겨우 누일 정자가 있다. 지산이 거처하고 삶을 마감한 공간이다. 1609년 8월 조호익은 궤석에 기댄 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뒤적이다가 “이 책이 반드시 이 늙은이가 없는 것을 서운해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뒤 운명했다.

도잠서당을 나와 3㎞쯤 복숭아 과원을 지나자 신광리 마을에 지산고택이 나타났다. 수리는 마쳤으나 종손이 해외에 체류해 비어 있는 집이다. 사당을 들러 내려오자 집 앞으로 고속철이 굉음을 내며 질주했다. 여기서 다시 대창면사무소 쪽으로 4㎞를 가면 송청산(松靑山) 자락에 지산의 묘소가 나온다. 조인호 옹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전했다. “관서 제자 김육과 박대덕은 스승이 돌아가시자 달려와 장례를 살피고 석 달 동안 시묘를 했답니다. 특히 관직에 있던 김육은 인근 산지 700정보를 위토로 편입시켰어요.” 사제의 정은 이렇게 각별했다.

제자 김육, 스승 돌아가시자 석 달 시묘살이


▎도잠서당 앞 망회정. 지산이 생을 마감한 공간이다.
묘소 아래 지산의 증조(조치우) 재실인 유후재(遺厚齋)가 있다. 조치우는 성종 시기 대구부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푼 청백리다. 재실 오른쪽 비각 안에 옥비(玉碑)가 세워져 있다. 임금이 내린 비석을 통상 옥비로 부르지만 이곳 옥비는 재질까지 실제 옥이다. 유일하다고 한다. 문중이 자랑스러워하는 까닭이다. 조인호 옹이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우리 젊었을 땐 시제를 마치면 재실 마당에 빈자리가 없었어요. 당시 몇 말씩 준비하던 떡은 이제 한 되면 먹고도 남으니….”

그래도 드러내지 않는 충의(忠義) 등 지산의 뜻은 이어지고 있다. 후손 4남매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영천시장학회에 인재 양성에 써 달라며 거금 10억원을 기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원 밝히기를 끝내 거절했다. 역시 그 후손이란 말이 나왔다.

지산은 사후 영천 도잠서원과 함께 북의 서원 2곳에도 제향됐다. 사후 26년 만인 1635년 관서 사림이 평안도 성천에 지산의 충의와 학덕을 기리는 학령서원(鶴翎書院)을 세웠다. 1660년 현종은 김육의 건의에 편액을 하사한다. 또 지산이 유배지 강동에서 강학(講學)을 시작한 고지산 아래에는 청계서원(淸溪書院)이 세워져 퇴계와 함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북에 남은 학령서원과 청계서원은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 길이 없다.

지산이 일생 반도를 오르내린 물리적 거리는 불가사의하다. 젊은 날 배움을 찾아 창원에서 안동까지, 유배를 갈 때는 창원에서 강동까지, 또 의병 시기엔 평양에서 양산까지 등등. 기록으로 남은 것만 1만 리가 넘을 것 같다. 말을 달려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됐을 거리다. 그는 학문에 더해 온몸으로 이 땅을 체험한 선비였다.

6월 12일 북한과 미국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남북이 화해의 폭을 넓히는 교류와 협력도 이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해졌다. 지산의 발길을 따라 남과 북에서 사제가 나눈 충의와 권학 정신을 아픈 역사와 함께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박스기사] 퇴계학파의 대표 예학자로 꼽혀 - '주자가례' 의문 규명한 '가례고증' 집필


▎[가례고증]의 표지.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지산 조호익은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예학자로 불린다. 이 분야의 손꼽히는 저작이 [가례고증(家禮考證)]이다. 율곡학파 김장생이 저술한 [가례집람(家禮輯覽)]에 비견된다.

고영진(59) 광주대 교수는 지산이 예학에 관심을 둔 계기가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1571년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또 모친상을 당하면서 [주자가례(朱子家禮)]로만 해결할 수 없는 변례(變禮)의 필요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다른 의절(儀節)을 참고하면서 관심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강동 유배도 그랬다. 당장 제사가 문제였다. 장자(長子)는 아니지만 제사에 참석할 수 없게 되면서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지산은 부득이 지방(紙榜)을 써서 기제사를 올렸다. 관서 지방에서 유교 생활관습을 교화할 필요성도 예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지산은 1587년 [주자가례]를 읽고 의문스런 내용을 일일이 고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20년이 지나 1609년 그는 [가례고증]을 저술하기 시작했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그 이전 자신이 고증한 [주자가례]를 제자인 김육에게 전한 게 있었다. 김육과 제자들은 1646년 그 책을 바탕으로 보완해 완결판을 낼 수 있었다. [가례고증]은 1650년 경상감사 민응협이 김육의 요청으로 간행했다.

[가례고증]은 [주자가례]에 대한 일종의 주석서이다. 총 7권3책으로 이뤄져 있다. 1권부터 6권까지는 지산이 저술했고 7권은 사후 제자들이 보완했다.

1권은 [주자가례]의 서(序)와 사당(祠堂) 부분을 항목별로 정리해 주석을 붙였다. 2권은 심의(深衣)제도, 3권은 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 4권은 관례(冠禮), 5권은 혼례(昏禮), 6권은 상례(喪禮) 초종(初終)에서 대렴(大斂), 마지막 7권은 상례 성복(成服)에서 거상잡의(居喪雜儀), 제례(祭禮) 등을 항목별로 고증하고 주석을 달았다.

서술 방식은 [주자가례]에서 항목을 뽑은 뒤 그에 관한 경전과 학자들의 예설을 주석으로 달았다. 필요하면 지산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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