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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15)] 사하라에서 아라비아 사막까지, 가깝고도 먼 길 

메말라 가는 오아시스처럼 위태로운 유목민의 삶이여! 

김미루 사진작가
밀려 드는 서방의 히피 문화에 베두인의 전통은 급속히 퇴색…사막의 신비 간직한 낙타는 온데간데 없이 관광 상품으로 명맥 이어

▎시나이반도의 해변에 위치한 숙소 나킬 인(Nakhil Inn)의 이국적 풍경. 해변에 있는 여행자들의 숙소로 쓰이는 원두막은 히피 문화에 젖은 젊은 유목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아카바 만 이집트 사이드의 작은 해변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은 진실로 완벽한 하나의 우연적 사태였지만, 이 누웨이바의 해변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하나의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체험했다. 나의 삶을 괴롭히는 매우 심오한 공포증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바다를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바다 포비아 증세를 이곳 작은 해변에서 비로소 극복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자꾸 반복되는 악몽이 하나 있었다. 바닷속을 들여다보면서 아주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의 산호와 물고기들을 본다. 아마도 이러한 꿈을 꾸게 된 것은 텔레비전의 자연 다큐 프로그램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점점 바닷속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리고 패닉상태에 빠져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깬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토록 아름다운 바다를 공포스럽게 생각하느냐고 묻곤 한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광막하고 황량한 다른 세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짙게 나를 짓눌렀던 것 같다. 아무리 다양한 형태의 생명이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살 수 없는 곳,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그 세계는 어린아이에게 더 무섭고 공포스러운 그 무엇으로 감지되었던 것 같다.

시나이의 그 해변에서 보낸 첫날, 나는 용기를 모아 스노클(snorkel)을 쓰고 바닷속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스노클을 쓰면 깊게는 못 들어가도 표면에서 바닷속 광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카바 만의 바다는 어찌나 깨끗하고 투명한지, 시감도가 너무도 좋아 바다 바닥까지 다 선명하게 보였다. 호텔 소속의 잠수선생이 그날 마침 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바닷속에서의 나의 활동을 잘 도와 주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산호초에 가깝게 갔을 때는 무서움이 엄습하기도 했지만 매우 새로운 체험이었다.

심연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다


▎나킬 인에서 아침식사로 나온 음식들.
시나이 반도는 육지상으로는 마른 땅의 사막이다. 그러나 바닷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온갖 생명으로 충만한 숲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들여다보는 바다의 세계, 한 곳에 그토록 다양한 물고기들이 밀집해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문자 그대로 생명의 축제였고 환희였다. 나는 너무도 환상적인 광경에 사로잡혀, 홍해 전체에 대한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만 모든 관광객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St. Katherine’s Monastery: AD 330년경 로마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모친 헬레나가 세운 건물이 모체가 돼 생겨난 수도원.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거의 유일한 수도원이다. 모세가 야훼를 만난 불타는 덤불도 이곳에 있다) 관광도 빼먹고 온종일 바닷가에 머물렀다.

이날 저녁, 나는 이 근처에 일종의 히피 커뮤니티 같은 것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실상 일종의 투어리스트 캠프였다. 라스 샤이탄(Ras Shaitan)이라는 이름 붙어 있는데 ‘악마의 머리’라는 뜻이다. 캠프 그라운드 내의 지형에 바다로 돌출한 부분의 바위 모양을 본뜬 이름이라 한다. 이것은 단순한 투어리스트 캠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많은 관광객이 2~3일 묵다가 그냥 좋아서 몇 달씩 묵게 되곤 해, 자연스럽게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 공동체는 이집트 남자와 결혼한 한 이스라엘 여인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었다.

해가 가라앉을 무렵, 나는 그곳에 당도했는데, 옥외의 중심 라운징 에어리어에는 지역의 토착민 베두인들과 외국인들이 캠프파이어 주변으로 둘러앉아 음악을 연주하고 해시시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편입이 되었다. 음악의 낌새를 영어로 ‘바이브스(vibes)’라고 하는데, 그 바이브스가 아주 유니크하고 정통적 히피 분위기를 풍겼는데, 특징이라고 한다면 로컬 시나이 베두인 문화와 서양의 히피문화가 혼합돼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돌려 피우던 해시시 꽁초를 나에게 건넸으나, 나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이 캠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취향의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재미있게 관찰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는 이곳에 돌아와 며칠을 머무르리라. 전기가 안 들어오는 물가의 한 외딴 오두막에서.

다음 날, 나킬 인의 직원 한 사람이 나를 부둣가의 페리 정거장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부둣가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오래된 나무 벤치들이 즐비하게 널브러져 있는 거대한 텅 빈 정거장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내가 큰 페리선에 올라탔을 때는 이미 해가 가라앉고 있었다. 내가 올라탄 것은 불행하게도 급행이 아닌 완행 페리였다.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요르단으로 가는 이집트 노동자들이 가득 탄 완행! 낯선 남자들이 나를 째려보는 듯한 분위기에 이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여객선에는 여자라고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외딴 오두막의 베두인 ‘히피족’들


▎누웨이바의 선착장 대합실.
페리가 요르단의 아카바에 도착하기 얼마 전, 평복을 입은 어떤 중년의 사람이 나에게 내 패스포트를 달라고 요청했다. 비자를 받고 입국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패스포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요구였기에 나는 무심결에 나의 여권을 건네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페리가 아카바에 당도했을 때, 나는 그를 찾을 수 없었고, 나는 극심한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내 패스포트를 가지고 간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모든 사람들이 페리에서 하선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에게 여권은 절대로 상대방이 공식 요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건네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나는 모든 승객이 다 하선한 후에 가장 늦게 나갔다. 체크포인트에서 저지당했을 때, 나의 사정을 담당관에게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중 한 사람이 사라졌다. 그리고 몇 분 후에 그 사람은 손에 나의 여권을 들고 나타났다. 그 여권에는 비자가 찍혀 있었고 입국심사 도장도 찍혀 있었다.

의심과 고마움이 엇갈리는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힘없이 파킹장으로 나아갔다. 칼리드 무살렘이 자기의 하얀 4륜구동 도요타를 가지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도요타는 나를 싣고 곧바로 와디 럼으로 달려갔다. 이집트의 사하라로부터 요르단의 아라비아사막까지, 뭍으로 바다로, 나는 나의 여정을 기획대로 완수했던 것이다.

요번 와디 럼에서의 나의 일정은 칼리드의 소관이었다. 칼리드는 나의 첫 번째 가이드였던 아우데(Aude)의 이복형제들 중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내가 뉴욕에 있을 동안, 나는 스물다섯 살의 좀 맹랑한 성격의 청년인 칼리드와 교신을 했다. 그가 그나마 친절했고 이야기하기가 가장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럽, 미국, 오트스레일리아 등지로부터 오는 젊은 관광객을 많이 상대해 왔기 때문에 영어도 곧잘 했고, 서구문화에 감각이 있어 보였다. 우리는 스카이프로 교신했는데, 맨해튼에서 아라비아사막 한복판의 베두인과 얼굴로 마주보며 화상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진기하게 느껴졌다. 내가 있는 곳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어느 날, 대화를 하던 중 칼리드가 내게 미국에서 물건을 하나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카메라 앞에 짙은 핑크 잠바에 붙은 노스페이스 로고를 내보이며, 나에게 같은 브랜드의 점퍼를 하나 사달라고 했다. 지금 자기 것 칼라가 너무 여성적이라서 싫다는 것이다. 아라비아사막 한가운데 있는 베두인 청년으로부터 그와 같은 고급 브랜드의 옷에 대한 투정을 듣고, 또 새로운 칼라의 구매를 부탁받는 영상 채팅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묘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살렘 패밀리로부터 받은 유일한 부탁은 아니었다.

칼리드의 부자 형 살렘도 나에게 특정한 독일 브랜드 자이스 쌍안경(Zeiss binoculars)을 하나 구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자이스 쌍안경은 미국 돈으로 1000달러가 넘는 고가품이다. 그는 내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정확한 액수의 돈을 은행을 통해 송금해 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가는가. 흰색의 낙타를 찾고, 블랙 데저트에서 작품사진을 만들고, 시나이반도를 횡단하고, 홍해를 건너는 기나긴 여정 내내, 그 자이스 쌍안경과 검정-회색 칼라의 노스페이스 등산 점퍼를 오리지널 포장상태로 모시고 다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부탁을 받고 또 그 물건들을 모시고 다니는 것은 한없이 귀찮은 일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한 그들 베두인을 위하여 성의를 표시하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노스페이스’에 열광하는 유목민


▎베두인 가족들이 내가 만들어 대접한 저녁 식사를 맛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여자들은 뒤에서 따로 먹는다. 여자들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드디어 칼리드는 새 재킷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는 기뻐 날뛰었다. 나는 그 대금을 받지 않았다. 그냥 선물한 것이다. 살렘 또한 그의 새 장비에 너무도 흡족해 했다. 재미있게도, 베두인들은 선물의 가격을 꼭 묻는다. 칼리드는 자기 재킷이 150달러라는 것을 알고는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계속 자랑해댔다. 물론 가격을 빼놓지 않고 말하면서.

와디 럼에서의 한 주일간 나는 빌리지(읍내)에 있는 칼리드의 집에서 머물렀다. 칼리드는 자기 엄마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고인이 된 무살렘의 첫째 부인이다. 그녀는 그녀가 낳은 막내아들이 스물다섯 살이니까 생물학적 나이는 60대 말이나 70대 초가 될 것임이 분명한데, 실제로 80대 말의 할머니처럼 보였고, 이빨과 시력을 다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종일 집에 머문다. 가벼운 집안일 이외로는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칼리드는 결혼하지 않은 유일한 자식이기 때문에 아직도 엄마와 함께 산다. 칼리드는 나에게 그의 방을 쓰라고 내줬다.

전형적인 소년의 방이었다. 어질러진 물건더미와 빨지 않은 블랭킷들, 그런데 이 소년의 방에는 널찍한 쇠침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칼리드는 어디론가 딴 곳에서 자는데, 어딘지는 내가 알 길이 없다. 칼리드는 매우 활동적인 젊은 친구라서 집에 잠시도 붙어있지 못하고 들락날락거렸다. 그래서 나는 홀로 집에 오래 머물러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지루함의 와중에 내가 발견한 것은 도기로 된 세면대의 케케묵은 때를 문질러 벗겨내는 일이었다. 모든 베두인의 가정에는 세면대가 변소 속에 있질 않다. 반드시 변소 밖의 공동공간에 세면대가 놓여 있는 것이다. 부엌에 있는 금속의 싱크대의 때를 벗기는 것도 킬링타임의 좋은 방편이었다.

나는 나의 청소의 결과에 대해 만족감을 느꼈다. 그 도기는 브라운이 아니라 새하얀 것이었고, 메탈은 둔탁한 알루미늄이 아니라 반짝반짝한 스테인레스였다.

내가 공을 들인 이런 작업도 내가 떠난 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그게 뭔 상관이랴! 내가 씻고 요리하는데 깨끗한 그릇을 쓸 수 있으니 됐지. 베두인 여자들이 음식을 만드는 것을 관찰한 후에 나는 그 패밀리 사람들을 위하여 디너를 만들어 주겠다고 공언했다. 나는 사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능과 다양한 문화체험 때문에 요리에 관해선 좀 특별한 조예가 있다. 맨해튼 사교계에서도 나의 요리 실력은 정평이 있다.

나의 디너에는 칼리드와 살렘, 둘째 부인 소생인 아우데와 아흐마드, 그리고 그들의 부인이 초대되었다. 그냥 평범한 자료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요리감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냉동 통닭을 녹여 마늘에 볶은 다음 토마토소스에 넣고 끓이는데, 감자와 당근, 그리고 푸른 호박도 같이 넣어 오래 끓인다. 그리고 쌀이 맛이 없기 때문에, 얇고 짤막한 스파게티 누들 스트립을 기름과 소금에 볶은 다음 거기에 물을 붓고 쌀과 같이 끓인다. 하여튼 최종산물은 정말 맛이 있었고 깔끔했다. 모든 사람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아주 훌륭한 요리사”라며 정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리는 장난을 안 치고 소박하게 만드는 것일수록 상품이다.

물론 요리와 청소가 와디 럼 한 주간에 내가 한 일의 전부는 아니었다. 요번 여행에는 칼리드가 나를 그의 도요타에 태우고 사막의 다양한 배경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며칠은 밖에서 야영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데리고 사냥도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벡스(산악지대의 뿔이 큰 염소)를 죽이는 일은 없었다. 내가 아우데의 엄마와 머무르고 있을 때는, 칼리드는 나를 데리고 다니질 못했다. 내가 애초부터 그의 손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내가 그의 손님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자유롭게 데리고 다녔다.

순결한 유목민의 삶은 자취를 감추고…


▎사냥을 나온 칼리드가 소총을 조준하는 시범을 내게 보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단순한 방문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그들의 재산목록 계보에 들어가는 하나의 자산과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칼리드를 통해서 왔기 때문에 칼리드의 자산이 된 것이다. 나를 칼리드로부터 빼앗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살렘이었다. 살렘은 그의 친형이었고 전 패밀리의 우두머리격이었다.

살렘은 나를 그의 동생 타야(Tayah)가 경주용 낙타를 기르고 있는 곳에 낙타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데리고 갔다. 그곳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아주 깊숙한 사막의 외진 곳이었다. 그때에도 칼리드는 낙타치기들의 캠프에 나타나서 얼쩡거렸다. 틈만 나면 나를 다시 채가겠다는 심산이었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그것은 칼리드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과업이었다. 칼리드는 어린 독신의 남자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교섭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칼리드가 나에게 모종의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품는 어떠한 사적 감정도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살렘이 나에게 낙타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두 가지 일로 충격을 받았다. 첫째는 몇몇의 낙타는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비싸다는 것이다. 가장 값이 나가는 놈은 미화로 4만 달러나 된다. 둘째로는 풀타임 낙타치기들은 전원이 다 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보통 베두인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념은 지나치게 이상적이어서 과거 순결한 유목민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사막의 험난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고결한 사람들, 목초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아브라함의 후예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저들의 지혜로운 삶은 이미 찾아볼 수가 없다. 대부분의 베두인들은 이미 빌리지에 정착해버렸고, 많은 가축을 소유한 부유한 베두인들은 사막의 가축을 돌보는 어려운 일들을 못사는 나라들로부터 오는 노동자들에게 맡겨 버린다. 외국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작은 사막 빌리지의 공동체에서도 매우 처참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건설 노동자는 이집트 사람들이다. 그리고 양이나 염소, 낙타를 먹이는 목자들은 수단 사람 아니면 예멘 사람이다. 물론 아우데의 엄마와 같은 전 세대의 토착 베두인은 아직도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스스로 가축을 먹이는 일을 하고 산다. 그러나 이런 전통 베두인은 이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유목민적인 베두인 라이프스타일은 이제 와디 럼에서 사라지고 있고, 아라비아사막의 다른 곳에서도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낙타 치는 외국인, 돈 세는 베두인


▎낙타 캠프의 낙타치기들. 내 오른쪽으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수단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예멘사람들이다.
몇몇의 낙타는 매우 몸집이 컸고 또 정말 하얐다. 그들을 관찰하고 교감하면서, 나는 이집트에서 작품사진을 찍으려고 부탁해 놓은 흰 낙타에 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로서는 하마다가 내가 준 돈으로 흰 낙타를 구매하는 데 성공하기를 기원하는 것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요르단을 떠난 후로도 나는 이따금씩 하마다와 연락을 했다. 내가 반드시 그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을 확인시켜야만 했다.

요르단에서 나는 카이로를 거쳐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뉴욕에서 일주일을 머문 후에 나는 다시 아시아로 가야만 했다. 대만의 까오시옹(高雄) 뿨얼예술특구라는 곳에서 나의 대규모 솔로전시회, ‘황막(荒漠)에서의 원시, 낙타’가 열리기로 돼 있었고, 또 나는 가족을 만나러 한국을 가야만 했다. 그리고 인도로 가서 타르사막(Thar Desert: 인도 대륙의 북서쪽에 위치. 20만㎢에 이르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자연경계를 형성한다. 아열대지역에서 9번째로 큰 사막)에서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는 정황을 탐색할 계획이었다. 이 모든 복잡한 여정이 4개월이라는 시간을 잡아먹었다.

내가 드디어 다시 중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2013년 4월에나 가능했다. 중동으로 가기 한 달 전, 그러니까 2013년 3월 초, 나는 하마다로부터 그가 수단으로부터 흰 낙타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라는 것이다. 한 마리는 자기가 쓰려고 자기 돈으로 샀다고 했다. ‘자기 돈’이라는 말 속에는 정직하게 얘기하는 것을 힘들게 생각하는 그들의 언어감각이 들어 있다. 하여튼 내가 준 돈으로 두 마리라도 샀다면 다행일 수밖에.


▎타야의 낙타사육장. 이곳의 낙타들은 경주나 관광용으로 쓰일 뿐 더 이상 유목민의 이동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한 마리는 정말 하얗다는 것이다. 화이트 데저트의 백악군상처럼 스노우 화이트였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약간 그레이 톤이었다. 하마다는 이렇게 썼다. ‘나는 화이트 데저트에서의 화이트 낙타라는 당신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복했어요. 내가 짓고 있는 새 호텔에 흰 낙타떼를 양육할 꿈을 키우고 있소.’ 하마다는 바위티 근교에 꽤 큰 농장을 하나 샀다. 그 농장에 많은 방과 코트야드가 있는 단층 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것을 관광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서 활용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계획에 흰 낙타농장까지 첨가한 것이다.

반도 혀끝에서 아라비아의 중심으로


▎내가 물고 있는 빵을 암컷 낙타가 빼앗아 먹는 모습.
2013년 4월에 내가 다시 요르단으로 가기로 한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이사’였다. 나는 당분간 뉴욕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뉴욕 아파트에 있는 모든 필수물품을 이민가방에 집어넣었다. 나는 내 여행의 새로운 홈베이스로 요르단의 암만을 선택했다. 인종차별과 험악한 밤생활로 베이루트는 배제되었고, 정치적인 불안정과 위험으로 카이로에서 살 수도 없었다.

요르단에서 얼마 동안 버틸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4월 초로부터 7개월 동안 암만에 있는 아파트를 하나 전차(轉借)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암만 중심가의 매우 신식구역에 있는 소박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였다. 그 지역에는 서구화된 카페, 바, 그리고 해외거주자들이 많았다. 내가 빌린 아파트는 레인보우 스트리트(Rainbow Street)라 불리는 홍대앞 번화가와도 같은 예술촌으로부터 겨우 한 블록 옆에 있었다. 역사적 고도의 중심지도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전에 나는 아파트 빌리는 웹사이트인 에어비앤비를 통해 같은 아파트의 방 하나를 빌린 적이 있다. 그 아파트의 임대인은 나와 같은 나이의 팔레스타인 여자, 리나(Leena)였다. 리나는 친절했고,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내가 하는 작업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래서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아파트가 필요한 시점에 그녀는 팔레스타인 라말라(Ramallah)로 1년간 가 있어야만 해서, 자기 아파트 전체를 싼 가격에 임대하겠다는 것이었다. 방 하나만 자기가 가끔 들러 쓸 수 있도록 그대로 비워 달라는 조건을 수락하면 싸게 내놓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파트가 좀 낡기는 했지만 위치가 그만이었고 또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요르단의 아파트생활은 먼지와의 싸움이다. 매주 수요일 단 한 번 시영 물탱크차가 와서 아파트 꼭대기의 수조에 물을 채운다. 물은 아파트 수조가 찰 때까지 넣어 주기 때문에 급수시간에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집안먼지를 청소해야 한다. 그래야 결과적으로 더 많은 물을 공급받는 꼴이 된다.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아파트 내 방은 험난했던 사막여행 끝에 편히 쉴 수 있는 고향집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편안하게 암만이라는 고도, 에돔족, 모압족과 함께 킹스 하이웨이를 장악하고 있었던 암몬족의 고도, 그 구석구석을 발로 다니며 흠상했다.

수포로 돌아간 흰 낙타와의 조우


▎흰색 암컷 낙타. 수컷은 사나워서 함부로 만지지 못하지만 암컷은 온순해서 낯선 사람도 경계하지 않는다.
아파트를 깨끗이 치우고 여장을 풀고 정리한 후에 나는 또다시 와디 럼으로 가야했다. 나의 새로운 친구, 내 돈으로 산 흰 낙타 두 마리가 나를 이집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계획은 시나이반도로 먼저 가서 그 히피촌 라스 샤이탄에서 며칠을 머물고, 바하리야로 가는 것이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지 않기로 했다. 시나이반도 혀끝과 같은 지점에 샤르멜 셰이크(Sharm el Sheikh)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카이로로 날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하마다의 안배로 카이로에서 바하리야까지 자동차로 가면 만사오케이다.

시나이를 버스로 횡단하는 것은 생애에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족했다. 내가 암만에서 카이로로 직접 비행기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시나이를 또 들르게 된 것은 하마다의 스케줄과 내 스케줄이 잘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4월 7일 저녁부터 이미 암만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하마다는 나더러 바하리야에 4월 18일에 도착해 달라고 요청했다. 열흘 이상 암만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모험의 갈망을 채워야만 했다.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던 중 하마다로부터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 4월 10일 백설과 같이 흰 그 백색 낙타가 불현듯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백색 낙타가 왜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한 달 동안 우리에서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룻밤 흰 낙타가 쓰러졌고, 다른 낙타는 우리를 나와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그날로 도망친 낙타는 찾아 우리로 끌고 왔다고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나는 하루 종일 충격 속에 지내야만 했다. 어찌할까 생각해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원래 계획대로 이집트에 도착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불에 달아오른 쇠꼬챙이로 낙타의 배를 지진다. 이것은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뜸요법과 같은 병치료라고 한다.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는 와디 럼에 있는 아우데 엄마의 캠프였다. 칼리드와 머무는 대신 이번에는 아우데 쪽을 선택했다. 칼리드의 열띤 행동패턴은 타인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그리고 그에게는 나에 대한 불순한 갈망이 있었다. 아우데는 전혀 그런 걱정이 없었다. 그는 매우 성실한 패밀리맨이었고 조용하고 까다롭지가 않았기에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아우데는 칼리드만큼 적극적으로 나를 사막으로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시간이 없었지만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복동생 타야의 투어리스트 캠프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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