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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섭의 검은대륙 아프리카를 가다(6) | 마지막회] 무지개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2) 

“자유가 이곳에 군림하도록 합시다” 

김성섭 작가
식민전쟁과 인종차별이 빚어낸 명소 곳곳에… 파란만장 역사 마침표는 민주주의 승리로

남아공 여행에는 보는 즐거움을 넘어 읽는 즐거움이 있다.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민주주의까지 세계사를 흔든 이데올로기가 이 나라 역사를 관통해 왔기 때문이다. 정부청사는 물론, 호화 카지노와 국립공원의 케이블카까지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에서 비켜난 곳이 없다.


▎넬슨 만델라는 퇴임 후에도, 서거 후에도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국부(國父)다. 프리토리아에 있는 정부청사 앞에 두 팔을 벌린 넬슨 만델라 동상이 있다.
아침 일찍 케이프타운의 명소 테이블마운틴(Table Mountain)으로 향했다. 테이블마운틴은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발견했다. 해발고도는 1086m로, 북한산(836m)보다 조금 더 높다. 200㎞ 밖에서도 보여 아프리카 남단을 항해하는 이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산봉우리는 8부 능선쯤에서 칼로 싹둑 자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판판한 바위로 된 평지가 약 3㎞에 걸쳐 펼쳐진 광경을 볼 수 있다.


정상까지 만만찮은 높이지만, 오르는 데는 8분이면 족하다. 케이블카가 운행되기 때문이다. 1929년 시운전을 시작했으니 역사가 90년을 넘는다. 테이블마운틴을 오르는 교통수단을 세우자는 제안은 1870년대부터 나왔다. 그러나 1880년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금과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두고 네덜란드계 백인인 보어(Boer)인과 전쟁을 벌이면서 전면 중단됐다. 1912년 케이블카 건설을 두고 주민투표가 이뤄질 정도로 공론화가 이뤄졌다. 그러나 곧 이은 세계대전으로 다시 한 번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첫 제안이 나온 뒤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6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케이블카에서는 세월의 주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1997년 대대적인 보수 끝에 재개장된 덕분이다. 케이블카가 360도 회전하면서 대륙의 끄트머리에서 번영한 도시의 파노라마를 맘껏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걸어서 오를 수 있는 등산로도 있다. 그러나 수천 명의 관광객이 케이블카로 정상에 올라 경관을 즐기는 동안 걸어서 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재빨리 카메라의 줌을 당겨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에 ‘걸어서 하늘까지’라고 이름 붙였다. 그만큼 테이블마운틴을 오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1912년 케이프타운 주민들은 막대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전폭적으로 케이블카 건설을 지지한 이유일 터다.

아프리카의 라스베이거스, 선 시티


▎1870년대부터 논의된 테이블마운틴 케이블카는 두 차례 좌절 끝에 60여 년 만에 건설됐다. 1997년 재단장한 케이블카가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아프리카 어느 한구석 감동스럽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남아공의 케이프타운만큼 정감 넘치는 도시도 흔치 않을 것이다. 활동하기에 알맞은 기후, 맑은 날씨, 그리고 깨끗한 도시 모두가 좋다. 그렇다고 혼자 남을 수도 없다. 떠나기 아까운 곳일수록 훌쩍 떠나는 게 내 여행철학이다. 그래야 여운이 오래 남고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항공편으로 2시간가량이 걸려 요하네스버그로 간 뒤 다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선 시티(Sun City)’로 이동한다.

선 시티라고 해 도시 이름인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초대형 고급 리조트다. 남아공의 부동산 그룹인 ‘선 인터내셔널’이 1979년 ‘남아프리카의 라스베이거스’를 모토로 삼아 건설했다. 당시 남아공 정부에서 금지한 카지노를 주요 시설로 내세운 것이다. 과거에 ‘보푸사츠와나’라는 흑인 자치국가가 이곳을 관할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남아공 정부는 흑인민족의 자치를 존중한다며 보푸사츠와나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실상 흑인 격리정책과 다름없었다. 도무지 자립기반을 마련할 수 없는 메마른 땅이었기 때문이다. 보푸사츠와나는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면서 남아공에 통합됐다.

이 밖에 골프장과 워터파크, 사파리 등 다양한 휴양시설이 마련돼 있다. 선 시티 초입에서부터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뾰족한 첨탑들로 치장한 ‘팰리스 호텔’이다. 외벽 소재로 쓰인 황토 빛 사암(砂巖)은 정제된 권위를 풍겨낸다.

입구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호텔이라기보다는 이름 그대로 어느 대부호의 성(城)처럼 보인다. 현관에 도착하니 커다란 분수와 사슴 떼가 비상하는 조각 작품이 이방인을 반긴다. 호텔 내부는 얼룩말 가죽의 소파와 벽에 걸린 카펫, 만델라의 초상화를 담은 액자는 누구라도 여기가 아프리카 남아공 땅임을 실감케 해준다. 마이클 잭슨이 남아공에 오면 꼭 이곳에서 묵고 갔단다. 최근에는 세계 각국의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다녀가기도 한다.

다음날 아침 방을 나와 호텔 경내를 둘러봤다. 이른 아침이라서인지 객실 창문과 커튼이 열려있는 곳이 많다. 자칫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판단에 얼른 외곽으로 나갔다. 곧바로 초록 잔디로 뒤덮인 골프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습하는 사람들이 자꾸 뒤땅을 때린다. 뒤에서 쳐다보는 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당장 라운딩을 할 수는 없으니 무작정 서너 홀을 거닐었다. 홀로 사진을 찍는데 점잖게 생긴 서양인 두 쌍이 지나며 경기를 시작하는 장소인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 빈 폼이라도 클럽을 잡아 보란다. 시키는 대로 했다. 느닷없이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지른다. “홀인원, 홀인원!” 내 생애의 첫 홀인원은 2017년 2월의 어느 아침 남아공에서 그렇게 터졌다.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비싼 홀인원 보험을 들어 놓은 지 이제 10년이 되어 가는 참이다.

기나긴 아프리카 여행이 단 하나의 일정만 남겨 놓고 있다. 남아공의 행정 수도 프리토리아(Pretoria)로 간다. 남아공 북동쪽에 있는 요하네스버그에서도 북동쪽으로 60㎞를 더 가야 한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지만, 인구는 케이프타운의 두 배가량 되는 75만 명이다.

프리토리아의 얼굴은 단연 ‘유니언 빌딩(Union Buildings)’다. 1910년 수립된 남아프리카 연방의 정부청사로 쓰기 위해 1913년 준공된 건물이다. 여전히 남아공의 정부청사와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고 있다. 돔 지붕이 얹힌 건물의 양쪽 ‘날개’는 남아프리카 연방 수립 당시 주된 언어였던 영어와 네덜란드어를 상징한다. 건물 이름인 ‘유니언(Union)’이 말해주듯, 지배집단이었던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의 화합과 결속을 반영한 설계다. 프리토리아는 애당초 네덜란드계 백인인 보어인이 세운 ‘트란스발공화국’의 수도였다. 두 차례에 걸친 보어전쟁의 결과로 남아프리카의 패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정부청사의 양 날개에 깃든 ‘남아공 정신’


▎테이블마운틴은 정상을 8부 능선쯤에서 삭둑 잘라낸 모양을 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곳을 ‘죽기 전에 가봐야 할 1001곳’ 중 한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유니언 빌딩은 1994년 남아공 최초의 자유총선거를 계기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선서를 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만델라의 모습을 보려고 남아공 전역에서 수십만의 군중이 유니언 빌딩 앞으로 몰려 들었다. 지금도 두 손을 벌리고 서 있는 그의 동상이 유니언 빌딩 바로 앞 정원 한가운데 서 있다. 그날의 영광을 각인해 둔 모습이다.

넬슨 만델라의 동상 앞으로 다가 갔다. 온화한 웃음 가운데 이곳저곳 내려앉은 주름에서 세월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쇠락한 부족장의 아들이자, 요하네스버그 금광의 광부, 종신형을 받고 27년간 복역한 인권 운동가까지, 범인(凡人)이라면 어느 것 하나 감당하기 어려웠을 풍파다.

만델라는 1918년 템부(thembu)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족장에서 물러나면서 가정형편은 어려워졌다. 1940년 대학 재학 중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보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학생대표 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총장에게 불복종해 학교를 그만뒀다. 집안에서 강요하는 결혼에 반대해 집을 나와 요하네스버그 금광에서 일하다 ‘집 나온 흑인’임이 알려져 그만뒀다.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며 변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Wit Watersrand)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1952년 요하네스버그에 비백인(非白人)으로는 처음 법률사무소를 열면서 본격적인 흑인 인권운동에 나섰다. 만델라는 아프리카국민회의(ANC)를 중심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남아공 정부는 만델라를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을 ‘공산주의 표방 정치세력’으로 간주하고 색출 포고령을 발령했다.

1960년 3월 21일, 만델라의 인생을 더욱 거친 폭풍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일어났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9명이 사망한 것이다. ‘모든 흑인은 이동할 때 신분증명서를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통행법(Pass Law)’에 항의하기 위한 집회였다. 비폭력 집회였기에 여성과 어린이도 사망자에 다수 포함됐다. 만델라는 이를 ‘흑인학살사건’으로 규정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법


▎황토 빛 사암으로 지어진 팰리스 호텔이 아프리카 고대왕국의 궁전 같은 신비로움을 연출하고 있다.
만델라는 이듬해 ‘국민의 창’이라는 비밀군대를 조직하고 에티오피아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1962년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와 국민의 창 비밀회동에 참석했다가 당국에 발각돼 체포되고 만다. 남아공 법원은 반역죄를 이유로 1964년 만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때부터 만델라는 케이프타운 항구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로벤 섬에서 27년간 수감생활을 한다.

1990년 백인 정부의 클레르크 대통령은 아프리카국민회의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흑인 지도자 375명을 석방했다. 그리고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참정권 보장 등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관철시켰다. ‘지구상 유일한 인종차별국’이라는 오명이 백인 정부를 짓누른 결과다. 남아공은 1974년부터 유엔 회원국 자격이 정지되고 경제제재를 받아 왔다. 클레르크 임기 때 남아공 실업률은 30%를 돌파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흑인조직에 대한 색깔론 명분도 사라졌다.

만델라와 클레르크는 협상을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흑인 운동가들은 혁명정부와 국유화를 포함한 ‘완전한 승리’를 원했고, 백인 엘리트들은 권력분점 등 기득권 양보를 최소화하길 원했다. 만델라는 “차별정책은 없어져야 하지만 남아공은 유지돼야 한다”며 백인 공무원 지위를 보장하고 인종 차별에 앞장섰던 경찰까지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레르크는 반대파에 맞서 1992년 3월 백인만을 대상으로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를 단행했다. 투표자의 69%가 개헌에 찬성했다. 협상의 끈을 놓지 않은 공로로 두 사람은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유니언 빌딩은 남아프리카 식민경쟁과 인종차별의 역사를 응축한 건물이다. 정면에 보이는 열주(列柱)는 수없이 많은 고난에도 무릎 꿇지 않은 민중을 상징하는 듯하다.
1994년 4월 마침내 남아공 사상 최초로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자유총선거가 이뤄졌다.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전체 표 가운데 62.55%를 확보했다. 득표율에 따라 의석이 배분돼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총 400석 가운데 252석을 얻었다. 의회 투표를 통해 넬슨 만델라는 마침내 남아공 대통령에 선출됐다. 다음은 만델라 대통령이 1994년 5월 10일 취임식에서 연설한 내용 일부다.

“우리는 마침내 정치적 해방을 이뤄냈습니다. 이제는 모든 이들을 끝없는 가난과 결핍, 고통, 성차별 등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평화가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유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이 아름다운 땅에서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이제 자유가 군림하게 합시다.”

2013년 12월 만델라가 서거했을 때 세계는 큰 스승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유엔은 만델라를 기리기 위해 그의 생일인 7월 18일을 ‘넬슨 만델라의 날’로 지정했다. 만델라는 진정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이면서 보복이나 숙청이 아닌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취임할 때도, 퇴임한 뒤에도, 또 서거한 뒤에도 남아공 사람들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를 떠나기 전 공항 면세점 몇 군데를 돌아봤다. 만델라의 밀랍 인형이 입고 있는 남방셔츠가 시원해 보인다. 상품명도 ‘Presidential’이다. 사고 싶어 흥정 중인데 일행이 “아프리카에서는 잘 어울리는데 한국 가면 촌스럽다”고 귀띔한다. 흥정 중 이 한마디로 결국 사지 못했다. 그렇지만 만델라가 흑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여전히 그를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짐바브웨나 다른 나라 대통령도 그럴까? 한 인간이 영원히 사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1만2000㎞ 떨어진 나라를 위해 흘린 피


▎유니언 빌딩 바로 앞에는 추모정원이 조성돼 있다. 6·25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싸우다 희생된 영웅들을 기리는 비석도 찾을 수 있었다.
유니언 빌딩 바로 앞에 조성돼 있는 추모 정원을 둘러본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현충원인 곳이다. 중앙에는 6·25전쟁 때 파병됐던 남아공 공군(SAAF) 826명 중 전사자 25명과 실종자 1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남아공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인수한 F-51D 무스탕 전투기를 운용하며 평양과 개성 등 최전선의 상공을 누볐다. 적의 전력시설과 탄약고 파괴, 퇴로 및 보급로 차단 등 맹활약을 했다. 극적으로 사지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들의 입을 빌려 그들의 활약과 고난을 알 수 있었다.

1951년 9월 27일 남아공 공군 소속 데니스 존 어프 소위는 임진강 교량 폭파 임무를 수행한 뒤 복귀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임진강 북쪽에서 중공군의 대공포화가 쏟아지면서 비행기를 버리고 적진에 낙하하고 만다. 낙하하던 중 다리까지 다쳐 포로로 잡혔다. 어프 소위는 평양을 거쳐 11월 압록강 인근의 중공군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영하 40도를 오가는 엄동설한이었다. 어프 소위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포로들은 현장에서 사살됐다”며 “우리에게는 사망자들을 묻어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23개월 동안의 혹독한 포로생활 끝에 1953년 8월 3일 포로 교환으로 석방돼 마침내 고국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공군으로 복귀한 어프 소위는 1984년부터 4년간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뒤 예편했다.

제임스 스위니 중위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활약한 조종사였다. 스위니 중위는 1951년 5월 2일 무스탕을 몰고 북한군의 주요 보급로였던 사리원으로 출격했다. 마침 계곡 길을 지나던 북한군 트럭 다섯 대를 발견했다. 세 대를 파괴한 뒤 나머지 두 대를 공격하려고 저공비행을 할 때였다.

“갑자기 조종간과 좌석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어. 매복한 적군이 쏜 총알에 맞은 거지. 간신히 320㎞가량을 날아 서울 남쪽의 한 비행장에 착륙한 뒤 정신을 잃었어.”

척추와 엉덩이에 총상을 입은 스위니 중위는 곧바로 후방으로 후송됐다. 진해 군병원에서 이틀 간 치료를 받은 뒤 일본의 영국군 병원에서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더 이상 조종이 어려웠던 스위니 중위는 남아공으로 돌아가 한국전쟁에 참전할 조종사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근무했다.

남아공 현지에서는 대사관과 교민회가 주관해 매년 참전 용사들과 미망인 20명을 모시고 조촐하게 식사를 대접한다고 한다. 이곳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 등지에 모두 4개의 참전비가 있다고 한다. 마침 남아공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갖다 놓은 국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나와 일행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그 앞에 서서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였다.

대초원처럼 생동하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


▎로보스 레일과 블루 트레인은 아프리카 종단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블루 트레인이 초원을 가로지르며 유유히 달리고 있다.
연재를 끝내며 한 가지 더 추천하고 싶은 정보가 있다.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로보스 레일(Rovos Rail)’이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해 보스와나, 짐바브웨, 잠비아를 거쳐 탄자니아의 옛 수도인 다르에스살람까지 간다. 시속 60㎞로 달리는데 종점까지 15일이 걸린다. 고풍스런 역사(驛舍)에서 낡은 증기기관차의 기적을 들으며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는 데 제격이다.

로보스 레일이 유명세를 얻은 건 19세기 유럽 귀족들의 호화로운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초호화 인테리어 덕분이다. 은은한 색감의 목재 소파와 화려한 자수의 테이블은 물론, 더블베드와 화장실 및 샤워시설을 갖춘 로열 스위트까지 갖추고 있다.

객차 입구에는 승객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 놓는 자상함이 인상적이다. 승객은 최대 72명인데, 승무원의 수는 이보다 더 많다. 기차역의 특색에 맞는 맞춤형 이벤트도 준비돼 있다. 프리토리아 전용 역을 출발할 때는 관현악단의 연주가 울려 퍼지고,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일일 광부가 돼 숨겨진 다이아몬드를 찾는 게임이 진행된다. 무엇보다 달리는 기차 양 옆으로 펼쳐지는 날것 그대로의 아프리카 초원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한다.

남아공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블루 트레인(Blue Train)’도 빼놓을 수 없다. 푸른색 외관 도장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박 2일 동안 케이프타운에서 프리토리아까지 1600㎞를 달린다. 영국인 광산업자가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위해 1901년 개설한 철길이다. 로보스 레일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빅토리아풍 객실에서 아프리카 자연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1997년 정비를 거치면서 객실마다 전용 화장실과 샤워 시설이 마련되는 등 로보스 레일보다 쾌적한 환경을 즐길 수 있다.

두 종류의 기차 모두 타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보아온 기찻길이다. 그때마다 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개별 행동을 할 수 없어 타지 못했다. 대신 여기에 이렇게 적어 아쉬움을 달랜다.

6개월 동안 달려온 아프리카 답사가 종점에 이르렀다. 연재해 온 6개월이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는 속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도 연락이 왔고 멀리 해외에서까지 재미있게 읽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활자와 매체의 위력은 물론 더더욱 인터넷의 위력을 절감했다. 여러 곳에서의 강의 요청도 들어와 재미있고 멋진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다시 새로운 검은 대륙 아프리카 여행을 준비한다. 원고에 대해 혹독한 조언과 촘촘한 교정을 도맡아 해준 아내가 지난해 함께 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남편의 글을 읽으며 충분한 선행 답사를 하였으니 어서 빨리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한다. 필자 역시 겨우 5개국을 다녀온 터라 못 가본 나라가 많다. 5개국조차 제대로 다 보았다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크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위해 진정 할 수 있는 일을 구상해 와야 한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 김성섭 - 1979년 순경으로 입직해 2017년 6월, 37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경남 하동서장, 파주서장, 서울청 홍보담당관, 서울 중부서장을 거쳐 경찰청 인권보호담당관을 지냈다. 역사에 해박한 필자는 파주서장 시절 파주 경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박물관 개관에 힘써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7년 12월 과천서장을 끝으로 퇴직한 구본숙 전 총경과 부부 사이로 경찰 역사상 첫 순경 출신 부부 총경이라는 타이틀이 있다. 현재 아프리카 여행기 책 출판을 준비하면서 아프리카 현지에서 자원봉사 활동 계획도 세웠다.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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