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책갈피] 21세기 팬덤의 ‘오타쿠’적인 진화 

‘에반게리온’에서 ‘방탄소년단’을 읽다 

안지영 청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교수
소비자들의 2차 창작으로 작품 끊임없이 재탄생…‘세카이계’, 한국의 문화흐름 짚는 키워드 될 것

요즘 서점에 가보면 방탄소년단(BTS)과 관련된 책을 파는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데미안]이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청춘소설은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가 어슐러 K. 르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까지 놓여 있는 것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들은 BTS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이색적인 레퍼런스들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역시 코너 한 편을 차지한다. 이 책은 BTS 제작자 방시혁이 BTS 앨범을 준비하면서 참고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예술이라는 단어를 서브컬처가 대체했다고 할 정도로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오타쿠 취향의 엔터테인먼트가 대세가 되면서 이들을 분석하려는 비평가들의 논전 역시 활발하다. 21세기에 이르러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이 결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신호로 오타쿠의 출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서브컬처의 지배력이 광범위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오타쿠가 아니더라도 현재 대중들의 예술향유방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가이드북이 돼준다.

‘세카이계(セカイ系)’라는 용어는 1995년 방영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TV애니메이션이 큰 인기를 끌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거대로봇’이나 ‘전투 미소녀’, ‘탐정’ 등 오타쿠 코드를 도입한 작품들이 연달아 제작되는데, 이들이 공통적인 ‘어떤’ 세계관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에반게리온 이전의 작품이 “한 작품의 세계관을 기초로 그것과 정합성을 유지하는 다른 이야기”(100)를 만들려 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세카이계 작품을 향유하는 소비자는 정합성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보단 작품을 요소요소로 해체해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로 소비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또한 작중인물의 독백이 현저히 늘어나는 등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자의식 과잉’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BTS의 경우 ‘삼포세대’ ‘수저계급론’ 등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나’의 이자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세카이계 작품에서의 등장인물과는 분명 구분된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고, 더 나은 2차 창작을 위해 의견을 교환하는 해석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가 있다.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유튜브에는 BTS의 소속사가 제작한 어마어마한 분량의 영상을 팬들이 2차 가공한 영상이 올라와 있다. 팬들이 자율적으로 가공할 수 있도록 소속사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인상마저 준다. 또한 BTS의 팬들은 앨범 콘셉트 북, 뮤직비디오, 숏 필름 등을 분석하면서 탐정놀이를 하듯 이들의 세계관을 분석한다. 팬들은 BTS의 뮤직비디오를 풀어내야할 의미를 담고 있는 수수께끼 상자와 같이 다룬다.

명망 있는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아이돌 가수가 판매하는 상품에서 ‘세계관’을 읽어내는 작업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일본 오타쿠들에게 이러한 접근은 당연한 것이다. 방탄소년단을 비롯해 아이돌 팬덤을 만들어내는 동력으로서 팬에게 요구되는 것 역시 오타쿠적인 자질인 셈이다. 21세기 팬덤은 오타쿠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오타쿠적인 것’의 생산성은 이제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무시 못 할 수준이 되고 있다.

※ 안지영 - 청주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문학평론가. 서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돼 등단했다.

201808호 (2018.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