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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20)] 임오군란보다 더 큰 고난의 ‘예고편’ 

청일(淸日) 군사가 한양 땅에 동시 출동하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민씨 척족의 농간에 폭발한 구식 군대가 ‘병란(兵亂)’ 일으켜…왕비 민씨와 흥선대원군 간 끊이지 않는 권력투쟁은 또다시 잠복돼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사극 [명성황후]의 한 장면. 고종 황제(이진우 분)와 명성황후(이미연 분)가 정사(政事)를 의논하고 있다.
1882년(고종 19, 광서 8, 메이지 15) 4월 6일, 역사적인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마건충과 정여창을 경복궁으로 초청했다. 조미수호조약을 위해 조선까지 온 수고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4월 8일 오후, 한양에 도착한 마건충은 회현방의 남별궁에 머물렀다.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살던 집이 남별궁이었다. 그래서 남별궁은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이라는 지명은 소공주댁에서 유래했다.

접견 예정일인 10일까지 마건충은 남별궁에 머물며 이곳저곳을 유람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마건충에게 고종은 10일 새벽 김홍집을 은밀히 파견했다. 차마 남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마건충은 조선어를 못했고, 김홍집은 중국말을 못했다. 그래서 둘은 한문으로 필담(筆談)을 나눴다.

김홍집이 필담에서 제일 먼저 꺼낸 언급은 “조선은 땅이 좁고 백성이 가난해 국가 경비가 졸렬하며 부족한 항목이 파다합니다. 그래서 일본인 중에 간혹 차관(借款)을 주선하겠다는 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차관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청나라에 요청하는 것이 낳지 않겠습니까?”였다. 고종은 은밀하게 청나라 차관을 제공받고 싶었던 것이다. 굳이 일본 사람들이 차관을 제공하려 한다는 말까지 한 이유는 혹시라도 마건충이 거절하면 일본에서 차관을 빌리겠다는 암시였다.

만약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빌린다면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강화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따라서 마건충은 차관 제공에 적극적이었다. 마건충은 조선이 차관을 제공받으려면 상환 방법이 분명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어떤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그때 김홍집은 광산과 홍삼세를 거론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금광을 비롯한 좋은 광산들이 많이 있었고, 홍삼은 조선을 대표하는 특산품이었다. 그런 광산과 홍삼세를 언급한 것은 조선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차관 담보로 제공하겠다는 뜻이나 같았다.

당시 고종은 재정 문제에서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하던 정부 재정은 강화도조약 이후 급속도로 악화됐다.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외교 교섭이 빈번해지면서 재정지출이 급속도로 늘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 구조조정, 군 근대화, 산업 근대화 등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했다. 고종은 그런 자금을 자체 조달할 방법이 없어서 마건충에게 차관을 요청했던 것이다. 마건충은 중국의 광산 기술자들을 조선에 파견해 조사한 후 차관 교섭을 구체화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마건충과 김홍집 사이에 차관 교섭은 일단 성사됐다.

비리 탄로날까 두려웠던 민겸호의 악수(惡手)

고종은 4월 10일 오후 3시쯤 경복궁 사정전에서 마건충과 정여창을 접견했다. 하지만 차를 마시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눴을 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고종의 최대 관심사인 차관 교섭이 이미 타결됐기 때문이다. 접견을 마친 마건충은 다음날 한양을 떠났고, 4월 12일 인천을 출항해 천진으로 갔다. 이것으로 조미수호조약에 따른 후속문제까지 일단락됐다.

한편 고종은 조미수호조약 체결 직후 영국·독일 등 서구 열강과도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연미론(聯美論)을 축으로 하는 고종의 개화정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개화정책은 대외정책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전방위로 확대됐다.

특히 군사 방면에서 근대화 바람이 급속히 불었다. 당시 고종의 군 근대화는 별기군을 중심으로 추진 중이었다. 1881년 4월 11일, 5군영에서 선발된 80명으로 시작된 별기군은 조선 최초의 사관생도 훈련 기관이었다.

훈련은 일본 공사관의 공병장교 호리모도(堀本禮造) 소위가 맡았다. 군사훈련은 제식 훈련과 군사 기초이론으로 구성됐으며, 총기 사용법 학습은 서양식 신무기가 중심이었다. 복식은 주로 일본식을 모방해 초록색 군복과 군화를 착용했으며, 모자는 서양식을 따랐다. 1882년 2월 별기군의 사관생도는 140명으로 확충됐다. 아울러 1882년 3월부터는 6개월 속성과정을 거친 사관생도들이 장교로 임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별기군 출신들은 임용이나 승진에서 크게 우대됐다. 뿐만 아니라 별기군 자체도 구식군대와 비교해 많은 우대를 받았다. 그에 비례해 구식 군대의 불만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여기에 열악한 국가재정과 민씨 척족(戚族)의 부정부패가 더해짐으로써 구식 군대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당시 한양에는 약 1만 명의 구식 군대가 있었다. 그들 중 절반 정도가 정리 대상이었다. 그들을 안정적으로 정리하려면 많은 자금과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종이나 개화파는 아직 경륜도 부족했고 국가 재정도 넉넉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왕비 민씨가 끌어들인 민씨 척족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4월을 전후로 뭔가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봄철 농사가 한창인데 비가 내리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계속된 흉년에 봄 농사까지 망칠까 걱정한 고종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6월이 됐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청나라의 광산 기술자들도 오지 않아 차관 문제는 여전히 지지부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식군사들에게 지급할 봉급이 13개월 치나 밀릴 정도로 국가 재정은 악화됐다. 그때 마침 호남의 세곡선 몇 척이 한양에 도착해 6월 5일에는 군사들에게 한 달 치 봉급을 지급할 수 있게 됐다. 봉급 지급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청지기가 맡았다.

그런데 중간에서 무슨 농간을 부렸는지 봉급으로 내준 곡식에 겨가 가득했다. 얼마나 겨가 많이 섞였는지 한 손으로 한 섬을 번쩍 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구식 군사들에게 지급된 월급만 그랬다. 불만이 폭발한 구식 군사들은 민겸호의 청지기에게 달려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39세의 김춘영(金春永)이 대표 격으로 앞장서서 항의했다. 말싸움이 거칠어지면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때 28세의 유복만, 34세의 강명준, 37세의 정의길 등이 합세해 청지기를 잡아 집단 구타했다. 청지기는 흠씬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상황은 민겸호 때문에 더욱 악화됐다. 민겸호는 본때를 보이겠다며 김춘영 등 주동자 4명을 잡아 가두고 장차 모두 죽이겠다고 공언했다. 민승호의 친동생인 민겸호는 탐욕스럽고 무식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군사들의 봉급을 빼돌린 민겸호는 자신의 비리가 탄로 날까 두려워 주동자들을 죽이려 했다.

민겸호의 이런 처사는 구식 군사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당장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劉春萬)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굶어 죽으나 법에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다. 차라리 죽일 놈 죽여서 분이나 한번 풀어보자’며 통문(通文)을 작성해 왕십리 행수(行首) 문창갑(文昌甲)에게 전달했다. 당시 왕십리는 구식 군사들의 가족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군인 마을이었다. 왕십리를 중심으로 통문이 돌면서 수백 명의 군병과 하층민들이 호응했다.

6월 9일 아침 수백 명의 군병이 동별영에 모였다. 구속된 4명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총 대장인 이경하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경하는 직접 민겸호에게 말하라며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정오쯤 수백 명의 군병이 직접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다. 마침 민겸호는 집을 비우고 없었고, 봉급을 지급하던 그 청지기가 대신 나왔다. 그는 수백 명의 군병을 보고 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흥분한 군병들은 청지기를 뒤따라 난입했다. 폭도로 변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았다. 방에서 꺼내온 비단과 보물은 한데 모아 놓고 불태워버렸다. 오후가 되자 폭동은 한양 전역으로 번졌다. 그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감금된 4명을 구출해내고, 민씨 척족들을 찾아내어 죽였다. 또한 별기군의 훈련장을 습격해 일본인 장교 호리모도를 살해하고, 서대문 밖의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파괴했다. 민겸호의 집과 일본 공사관을 쑥대밭으로 만든 구식 군사들은 다시 동별영에 집결했다.

하지만 통문을 작성해 일을 키웠던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뒷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 군사반란으로 몰릴 수 있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청탁할 곳도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이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은 왕비 민씨이고 그녀를 상대할만한 사람은 흥선대원군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뒷수습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날 흥선대원군은 김장손·유춘만 등 주동자 몇 명과 밀담을 나눴다. 왕비 민씨에 관한 내용이었다.

6월 10일 구식 군사들과 하층민들은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왕비 민씨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이 임오군란이었다. [고종실록]에는 임오군란에 대해 ‘난병들이 궁궐을 침범했다’고 간단하게 기록돼 있지만 [매천야록]에는 보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구사일생 목숨 건진 왕비는 충주로 달아나고


▎임오군란을 일으켰던 구식 군대의 훈련 모습. 복식은 주로 일본식, 모자는 서양식을 따랐다.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난병들이 창덕궁의 돈화문으로 밀려갔는데 대궐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총을 마구 쏘아 총알이 문짝에 맞아 멀리까지 콩 볶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대궐 문이 열리자 벌떼처럼 몰려 들어갔다. 고종은 변란이 급한 줄 알고 흥선대원군을 부르니, 흥선대원군은 난병을 따라 들어왔다. 군사들이 대전에 올라갔다가 민겸호와 마주치자 그를 잡아 끌고 갔다. 민겸호는 황급히 흥선대원군을 끌어안고 도포 자락에 머리를 처박으며 ‘대감! 저를 살려주시오’ 하고 울부짖었다. 흥선대원군은 차갑게 웃으며 ‘내가 어떻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 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그를 발로 차 계단 밑으로 떨어뜨리고 총으로 마구 찧고 칼로 쳐서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곧이어 난병들은 왕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크게 외쳤다. 그들의 말은 무도하고 흉측해 차마 듣기 어려웠다. 사방으로 수색해 휘장과 복도에 창과 몽둥이가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했다.”(황현 [매천야록])

구식 군사들은 왕비 민씨를 찾아서 죽이려 했다. 그들은 왕비 민씨에게 무도하고 흉측한 말을 퍼부었다고 하는데 분명 욕을 해대며 찾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왕비 민씨는 더 이상 왕비가 아니었다. 그때 만약 왕비 민씨가 잡혔다면 민겸호처럼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왕비 민씨를 찾을 수 없었다. 왕비 민씨는 천우신조로 궁궐을 빠져 나가고 없었다. 구식 군사들이 창덕궁으로 쳐들어갔을 때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부인 민씨와 함께 입궐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부인은 구식 군사들이 왕비 민씨를 찾아 죽이려 하자 자신이 타고 갔던 가마에 왕비 민씨를 숨겨 피신시켰다. 흥선대원군 부인은 차마 며느리가 폭도들에게 맞아 죽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왕비 민씨는 가마를 타고 대궐 밖으로 나가려다 얼굴을 아는 궁녀에게 들켰다. 그 궁녀가 입짓으로 군사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달려들어 가마의 휘장을 찢고 왕비 민씨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 내동댕이쳤다. 왕비 민씨는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속에 끼여 있던 홍재희라는 사람이 나서며 ‘이는 내 누이로 상궁이 된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라’고 외쳤다. 실제로 홍재희의 누이 중에는 궁녀가 된 사람이 있었다.

긴가민가하며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홍재희는 얼른 왕비 민씨를 들쳐 업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실로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홍재희는 후에 홍계훈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당시 무예별감이었다. 무예별감이란 구식 군사 중에서 무예와 체력이 뛰어난 병사들을 엄선한 일종의 특수부대 요원이었다. 홍계훈은 처음에 구식 군사들과 함께 궁궐을 침범했다가 막상 왕비 민씨까지 죽이려 하자 마음을 바꿨다.

이렇게 극적으로 궁궐에서 빠져나온 왕비 민씨는 한양 관광방 화개동에 있는 윤태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일찍이 세자익위사의 세마(洗馬) 벼슬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왕비 민씨는 민응식·이용익 등을 은신처로 불렀다. 민응식은 충주에 살던 먼 친척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세자익위사의 세마가 돼 한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응식은 윤태준의 직장 후배이기도 했다. 이용익은 함경도 명천 출신으로 달리기의 명수였다. 왕비 민씨는 이용익을 시켜 양근으로 도망간 민영익에게 연락을 취하게 했다.

6월 13일에 왕비 민씨는 한양 벽동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옮겼다. 아무래도 한양은 불안해 장차 충주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다음 날 왕비 민씨는 한양 벽동을 떠나 충주로 향했다. 여주를 거쳐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 도착한 때는 19일이었다.

그곳에서 왕비 민씨는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흥선대원군은 왕비 민씨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아예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임오군란이 발발한 6월 10일 당일로 왕비 민씨의 죽음이 공포됐다. 혹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왕비 민씨가 추진했던 개화정책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려놓았으면서 왕비 민씨의 장례를 주도했다.

흥선대원군 제거 위해 청(淸)에 도움 요청한 김윤식


▎경기도 여주군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
6월 11일에는 시체도 없이 목욕과 염(殮)을 행했으며, 14일에는 시체 대신 옷을 관에 넣고 입관 의식을 치른 후 빈소까지 차렸다. 17일에는 무덤 이름을 정릉(定陵), 시호를 인성(仁成)이라고 정했다. 이제 왕비 민씨는 공식적으로는 저 세상 사람인 ‘인성왕후’가 됐다.

그런 왕비 민씨를 다시 이 세상 사람으로 다시 살려낸 것은 청나라 군사였다.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요구는 청나라 측과 조선 측 모두에서 나왔다. 조선 측에서 최초로 청나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람은 영선사 김윤식이었다. 당시 천진에 머물던 김윤식이 임오군란 소식을 처음 들은 때는 6월 18일로 천진 해관도 주복(周馥)을 통해서였다. 주복은 청나라의 주일공사 여서창의 보고를 통해 임오군란의 대략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알았다.

6월 9일 구식 군사들의 공격을 받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부하 29명과 함께 인천으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영국 배에 오른 하나부사는 나가사키로 향했다. 6월 15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화방의질은 외무성에 임오군란을 보고했다. 그는 부산과 원산의 일본 거류민들이 위험하니 속히 군함을 파견해 보호하는 한편 앞으로 조선과의 교섭을 위해 강력한 무력시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첨부했다.

16일 긴급내각회의가 소집됐다. 그 회의에서는 즉시 개전하자는 강경론과 우선 외교적 교섭부터 해보자는 온건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다음 날까지 연속된 긴급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메이지 천황이 온건론을 채택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조선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로 했다.

전권위원에는 하나부사가 임명됐으며, 군함 4척과 수송선 3척에 1개 대대병력 약 1500명도 파견하기로 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런 사실을 주일 청나라 공사 여서창에게 알렸다. 여서창은 본국에 타전한 보고문에서 일본정부가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니 청나라도 군함을 파견해 사태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이국 땅 천진에서 고국의 변란 소식을 접한 김윤식은 몹시 당황했다. 누가 왜 변란을 일으켰는지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없어 더욱 당혹스러웠다. 6월 19일에 김윤식은 천진 해관도로 직접 주복을 찾아가서 필담을 나눴다. 김윤식은 이번 변란은 작년에 있었던 이재선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을 것이란 뜻이었다.

김윤식은 흥선대원군이 극단적인 반일정책을 펼까 우려했다. 그럴 경우 일본이 난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무력점령을 시도할지 몰랐다. 김윤식은 절대 그런 상황이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윤식은 주복에게 ‘일본의 손을 빌리느니 차라리 청나라에서 주도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며 ‘군함 몇 척에다 육군 1000명을 싣고 주야로 달려 일본보다 앞서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홍장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고 없었다. 유교장례법으로는 3년상을 치러야 하지만 서태후는 100일의 치상(治喪) 휴가만 허락했다. 당시 청나라에서 이홍장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했다. 이홍장은 7월말쯤 다시 복귀할 예정이었는데 그 사이 임오군란이 터졌다.

마건충 “모든 정령(政令)은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1.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해 국정을 간섭하고 일본·러시아를 견제했던 원세개. 신해혁명 때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아 임시총통이 됐고, 이어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 2.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자작 김윤식’. 3·1 운동의 충격 속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듯 생기 없는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이홍장 대신 임시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직을 수행하던 장수성은 일단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장수성은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과 도원 마건충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던 어윤중이 그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6월 22일에 천진을 출발한 정여창과 마건창은 27일 오후에 인천에 도착했다. 정여창은 군인이었으므로 현지 조사는 마건충의 몫이었다. 마건충은 어윤중을 보내 정확한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28일 정오에 돌아온 어윤중은 마건충과 필담을 나눴다. 어윤중은 임오군란의 배후가 흥선대원군이며 그가 건재하면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임오군란을 진압하려면 흥선대원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마건충 역시 같은 판단이었다.

그런데 마건충이 인천에 온 이틀 후에 일본 함대 역시 인천에 도착했다. 마건충에게는 병력이 없었지만 일본 함대에는 1대대 1500명의 병력이 있었다. 일본을 압도하려면 그보다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마건충은 최소한 3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제독 정여창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청나라로 되돌아가고 마건충은 조선에 남았다.

7월 7일 오장경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3000명의 군대가 정여창의 북양해군 함선 5척에 분승하고 인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 이미 일본 함대가 정박해 있어서 남양으로 옮겨 정박했다.

김윤식은 청나라 군대의 향도관(嚮導官)이라는 직책으로 함께 왔다. 김윤식은 일신(日新)이라고 하는 함선을 타고 왔는데 승선하기 전에 원세개를 소개받았다. 원세개는 호가 위정(慰廷)으로 오장경 휘하의 행군 사마(行軍司馬)였다. 김윤식은 원세개와 함께 일신호를 타고 오면서 친분을 쌓았다. 김윤식은 원세개의 위인 됨이 낙이영준(樂易英俊)하다고 평가했는데 여유만만하고 기세등등하다는 뜻이었다.

당시 원세개는 24세 젊은 나이였음에도 머리가 반백이었다. 그 까닭을 묻자 천하를 유력하다가 실혈증(失血症)에 걸려 그렇게 됐다고 대답했다. 원세개는 김윤식에게 상륙 즉시 수백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곧장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묻기도 했다. 김윤식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청나라 군사는 7월 8일 남양에 상륙한 후 선발대를 한양으로 급파했다. 그 선발대에 원세개가 끼여 있었다. 선발대에 뒤이어 7월 12일까지 청나라 군사 3000명 모두가 한양에 입성했다. 준비를 끝낸 마건충은 흥선대원군 납치계획을 세웠다. 7월 13일 점심 직후에 마건충은 정여창·오장경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사저를 예방했다. 예방을 받았으면 답방하는 것이 예의였다. 오후 4시쯤에 흥선대원군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청나라 군영에 찾아왔다.

마건충은 흥선대원군과 필담을 나눴다. 필담은 두 시간 이상 지속됐다. 그사이 흥선대원군을 모시던 사람들은 조용히 격리됐다. 흥선대원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본 마건충은 “그대는 조선 국왕을 황제가 책봉했다는 사실을 아는가?”라고 썼다. 흥선대원군이 “안다”고 쓰자 마건충은 “국왕을 황제가 책봉했으면 모든 정령(政令)은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되는데 그대가 6월 9일에 변란을 일으켜 왕권을 빼앗고 사람들을 죽였으며 사사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여 황제가 책봉한 왕을 퇴위시켰으니 왕을 속인 것이요 실제는 황제를 우습게 안 것이다.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다만 국왕에게 부자지친의 의리가 있으니 관대하게 처분하겠다. 속히 가마에 올라 마산으로 갔다가 군함을 타고 천진에 가서 조정의 처분을 들으라”고 썼다. 흥선대원군은 공포에 싸여 사방을 돌아봤지만 측근은 한 명도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마건충에게 이끌려 강제로 수레에 태워졌다.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납치돼 청나라의 보정에 감금됐다.

올 때와는 정반대 성황… 위풍당당 왕비의 행차

흥선대원군이 납치되기 이전에 고종은 이미 왕비 민씨가 충주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김윤식이 7월 10일에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했는데, 그때 고종은 왕비 민씨가 충주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 소식을 들은 김윤식은 ‘속마음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움을 이기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왕비 민씨의 혼전(魂殿)에 가서 곡을 했다. 그때까지도 왕비 민씨는 공식적으로는 저 세상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로 미뤄보면 왕비 민씨는 6월 19일 충주에 도착한 직후부터 고종과 은밀한 연락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납치되고 일주일 후인 7월 20일에 전 현감 심의형이 오장경에게 밀서를 보냈다. 왕비 민씨가 충주 장호원촌에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밀서는 왕비 민씨가 보내게 한 것이 분명했다. 오장경은 김윤식과 어윤중을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왕비 민씨는 분명 살아 있었다.

보고를 받고 고종은 오장경에게 부탁해 충주로 청나라 군사를 파견해 왕비 민씨를 맞이해 오게 했다. 고종은 먼저 어윤중을 충주로 보내 필요한 준비를 하게 했다. 25일에는 서상조를 시켜 상소문을 올려 왕비 민씨가 충주에 은신하고 있으니 의장을 갖춰 맞이하자는 요청을 하게 했다.

그날로 고종은 왕비 민씨의 영접 준비를 공식화했다. 영의정과 제학·승지·한림·주서 등 핵심 요직에 있는 관리들은 모두 나가서 왕비 민씨를 영접하라 명령했다. 또 왕비 민씨를 경호하기 위해 청나라 군사 100명과 조선 군사 60명을 충주로 파견했다.

어윤중이 충주 장호원에 도착한 때는 7월 27일이었다. 그때 왕비 민씨는 민영위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왕비 민씨는 어윤중으로부터 문안인사를 받았다. 지난 6월 10일에 궁에서 피신한 후 처음 받아보는 공식 문안인사였다. 곧이어 도착한 청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들이 집 주변을 호위했다. 저녁때가 되자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모두 도착했다.

다음 날 왕비 민씨는 민영위의 집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올 때는 도망 길이었지만 갈 때는 위풍당당한 왕비의 행차였다. 어윤중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왕비의 행차를 수행했다. 앞뒤에서는 청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들이 경호했다. 29일 용인에서 숙박한 왕비 민씨는 8월 1일 한양에 입성했다. 왕비 민씨와 고종은 다시 평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청나라 보정(補政)에는 아직도 흥선대원군이 살아 있었다. 위정척사파 역시 그대로였다. 왕비 민씨와 흥선대원군 사이의 권력투쟁은 해결되지 않은 채 수면 아래로 잠복했을 뿐이었다. 더욱더 큰 문제는 한양에 청나라 군사와 일본 군사가 동시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왕비 민씨와 고종의 앞날에는 임오군란보다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09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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