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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8)] 피로 쓴 이성계 시대의 전제·군정 개혁 

조선 설계자들이 꿈꾼 ‘백성의 발견’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신흥권력의 급진적 사전(私田) 해체, 고려의 멸망 앞당겨…무너진 군사 시스템 복원, 공격적 방어책 강구해 왜구문제 해결

▎이성계가 중심이 된 조선 건국 세력은 위화도회군 직후 고려의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과의 치열한 권력다툼은 불가피했고, 이는 고려의 멸망을 촉진했다. 사진은 역사의 전환점이 된 위화도 전경.
위화도회군 이전의 전제(田制) 개혁책은 기본적으로 법률적인 조치였다. 즉, 불법적인 토지 점탈을 처벌하고 금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파는 전면적 개혁을 원했다. 전면적 전제개혁은 재산권의 변동을 의미한다. 존 K. 갤브레이스(John K. Galbraith)의 지적대로 이런 “토지개혁은 실로 혁명적 조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의 한 집단으로부터 다른 집단으로 권력과 재산, 지위를 이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분도 재산 없이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재산권의 변동은 결국 지배계급 자체의 교체를 뜻한다.

요컨대 재산에 관한 개혁보다 더 비상한 개혁은 없다. 보통사람들에게 재산은 곧 생명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잊기 쉬워도 재산의 손실은 여간해서는 잊기가 어렵다”고 적시했다. 역사는 재산을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기본적인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부자와 빈자 사이에 일어난다”고 통찰했다. 그만큼 재산에 관한 개혁은 어렵다. 기원전 133년 무렵, 로마의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도 토지개혁을 시도하다 반대파에게 피살당했다.

사전(私田) 개혁은 매우 지지부진해 1391년 5월에야 비로소 과전법을 정할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직전이었다. 그 사이에 개혁안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은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립시키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원상(元庠)은 “우왕을 세워 그 일(사전개혁)을 저지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전제개혁은 이성계의 핵심적인 개혁이었다. 회군 뒤 가장 먼저 시작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완료되자 고려왕조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위화도회군 후의 권력투쟁은 실질적으로 전제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성계파가 권력 유지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기존의 지배세력과 타협하는 것이 더 안전했을 것이다. 5년여에 걸친 권력투쟁은 격렬하고 참혹했다. 수많은 사람이 고문당하고 죽었다. 조선을 건국할 때까지 누구도 안전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러한 대립은 1388년 7월 조준의 전제개혁 상소가 올라가자마자 시작됐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권력투쟁

사전개혁과 관련해 조민수가 1388년 7월 처음 제거됐다. 기록에 따르면, 조민수는 “임견미, 염흥방이 처형될 때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백성에게 빼앗은 밭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다시 득세하자 차츰 도로 빼앗아 탐하는 버릇을 부려, 사전을 개혁하는 것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쫓아내었다.”([고려사절요] 신우 14년 7월)

회군 후 권력투쟁 첫 단계에서 조민수는 고려 지배세력의 지도자였다. 그의 목표는 이인임 노선의 부활이었다. 당대의 정치에서 이는 사전개혁에 대한 반대로 가시화됐던 것이다.

조민수의 유배 뒤, 개혁파는 각 도의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바꾸고, 왕의 교서와 부월(斧銊, 도끼)을 주고, 파견해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했다. 전제개혁을 위한 기초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교서와 부월을 준 것은 왕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도관찰출척사로 임명된 인물은 정당문학 성석린, 전 평양윤 장하, 전 밀직부사 최유경, 전 밀직상의 김사형, 밀제학 조운흘이었다. 원래 안렴사는 정3품관이었다. 하지만 새 도관찰출척사는 개혁파의 핵심인물들이자, 2·3품의 주요 관서 대신들이었다. 전제개혁파의 결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개혁파들도 저항을 우려해 단계적인 시행을 건의했다. 그들은 개혁의 근거와 시안을 제시한 뒤, 조사 작업이 진행되는 3년에 한해서 사전의 소유권을 인정하되 조세는 국가에서 받아 분배해 줄 것을 제시했다. “지금 마침 토지를 측량할 때가 되었으니, 액수를 책정해 토지를 지급하기 전에 3년 동안 임시로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면 주요한 국사의 비용도 충당하고 관리의 녹봉도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6월) 그들은 토지조사와 재분배작업에 약 3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반(反)개혁파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우상시 허응 등이 9월에 올린 상소를 보면, 반개혁파도 타협안을 제시한 듯하다. “종묘·사직·도전(道殿)·신사(神社)·공신·등과(登科)의 토지에서는 조세를 징수하지 말자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반개혁파도 전제개혁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토지는 개혁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것이다. 1388년 8월, 창왕은 “사전의 조세를 국가에서 거두면 반드시 식록을 걱정할 것이니, 일시적으로 그 조세를 반만 거두어 국용에 충당”하게 했다. 개혁파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공신전과 등과전이 개혁 대상에서 제외되면 개혁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 때문에 개혁파는 조세를 반만 거두라는 명령은 법을 시행해보기도 전에 이를 폐기시키는 조치라고 반발했다. 또한 국가상황이 비상시국임을 주장했다. 창왕은 즉시 자신의 조치를 번복했다. 10월에는 급전도감(給田都監)이 설치됐다. 이로써 전제개혁을 위한 계획과 제도가 갖춰졌다.

그러나 전제개혁의 추진은 지지부진했다. 이듬해인 1389년 4월, 도당에서 전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재개됐다. 1388년 9월, 조세의 절반 징수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뒤 거의 6개월만이었다. 이때까지 조정의 의견은 양분돼 있었다.

이색은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이론적 논거를 제시했다. 이색은 우왕 대에는 정치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요동정벌 국면에서도 수동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우왕의 폐위와 창왕의 즉위에서 시작해 전제개혁 초기 국면에서는 적극적 입장을 개진했다.

이색은 개혁 자체를 넘어 역성혁명을 걱정했을 것이다. 신하가 왕이 시행해야 할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장악한다면, 반란의 가능성은 목전에 와 있는 것이었다. 한비자는 신하가 임금을 위협하는 다섯 가지 경우(壅)를 말하고 있다. 임금의 이목을 가로막는 것(閉其主), 이익을 제어하는 것(制財利), 명령을 마음대로 하는 것(擅行令), 사의를 행할 수 있는 것(得行意), 자기 사람을 심는 것(得樹人)이 그것이다. 전제개혁은 이성계가 왕의 이익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 사람을 심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색이 개혁에 찬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제개혁은 결국 전통적인 고려 지배세력의 몰락과 신흥세력의 득세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명분이 무엇이든 현실적으로는 조민수에 이어 이인임 노선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외척세력인 이림과 우현보도 반대했다. 무장세력 중에는 변안열이 반대파에 가담했다. 변안열은 군공과 군세에서 이성계에 밀렸다. 하지만 당대의 유력한 무장세력이었다. 신진유신 중에는 후덕부윤(厚德府尹) 권근과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유백유가 이색에 찬성했다. 문신, 무신, 외척이 뭉친 것이다.

서로 다른 길 걸어간 정몽주, 이색, 조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리스도교가 추구했던 인간상과 차별화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정치에 녹였다.
정몽주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몽주는 그해 11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기 위한 흥국사 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이 회의의 주역인 8장상 중 1인으로서, 공신에 책봉되기도 했다. 이는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후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의 처형도 인정하는 것이다. 정몽주는 이색과 달리 역성혁명의 위험보다는 개혁을 우선시한 것이다. 그는 이듬해인 1390년(공양왕 2년) 7월에 가서야 비로소 노선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김저 사건으로 반개혁파의 중심인물인 이색, 이임, 우현보, 변안열 등이 처형되거나 유배되고, 많은 인사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였다.

이색을 중심으로 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1367년(공민왕 16년) 성균관의 중창을 계기로 결집됐다. 그들은 1374년 공민왕의 암살 뒤 대외노선의 변경을 둘러싸고 이인임 세력과 대결했다.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는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투쟁에 패배해 죽거나 유배됐다. 우왕 14년간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치적 존재감은 없었다. 이색은 침묵했다. 염흥방은 이인임과 타협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갔다. 그리고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전제개혁을 둘러싸고 이들은 두 집단으로 분열됐다. 이들 중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극소수만이 이성계파에 가담했다. 이색, 이숭인, 권근 등 대부분의 주요 인물은 반(反)이성계파에 섰다. 정몽주도 결국 반이성계파로 돌아섰다.

대사헌 조준과 예문관제학 정도전, 대사성 윤소종은 전제개혁을 옹호했다. 고위 관인들 다수는 반개혁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일반 관리들에게 의견을 물은 결과 53명중 80~90%가 찬성했다. 반대자는 모두 대가의 자제들이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뒤에 이렇게 회고했다.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개혁하고자 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가부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윤소종이 정도전 등과 더불어 힘껏 청하여 이것을 개혁하였다.”([태조실록] 태조 2년 9월 기미)

고려의 핵심 그룹 내에서는 반대가 주류를 이뤘다. 이색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그는 단순히 사적인 이익의 옹호자이기보다 지식인 집단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사실 이성계도 급진적 개혁을 감행하는 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대중국 관계였다. 우왕 대의 이인임처럼 반역의 혐의를 받을 염려가 컸다. 그래서 이성계는 1388년 10월 이색, 이방원을 사신으로 보내 명의 감국(監國)을 요청했다. 명의 직접 지배를 받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1389년 3월에 귀국한 사신 강회백은 매우 어두운 자문을 가지고 왔다. “이제 신하가 그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왕으로 세워 중국에 조회하러 오기를 청하니, 대개 인륜이 크게 무너지고 왕의 도가 전혀 없으며, 신하 노릇하지 않는 반역이 크게 드러났다.”([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3월)

명이 위화도회군 후의 조치를 부정한다면 이성계의 권력 기반은 크게 타격받을 것이다. 장래의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전제개혁은 상대적으로 한가한 문제일 수 있었다. 이런 불안한 상황은 이해 9월, 명이 이성계파의 조치를 인정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개혁을 강행했다. 1389년 8월 조준은 사전개혁에 반대하는 논의를 비판하고 개혁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다시 올렸다. 조준은 반개혁파를 강하게 비판했다. “권세가와 권력자들이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우리 왕조에서 작성된 법전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없앨 수 없으며 만약 무리하게 없앤다면 선비들의 생계가 날로 어려워져 필시 장사치나 공장(工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구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며 사전을 되살려 자신들의 부귀를 보존하려 한다.” 이것은 이색을 견제하는 견해였다. 이색에 대해 조준은 “혹시라도 사전을 되살린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백만의 민중을 기름불 속에 던져 넣는 것과도 같다”고 극언했다.

이에 앞서 이색은 1389년 7월, 문하시중의 직위에서 물러나기를 간청했다. 그는 대신 외척인 이림(李琳)을 천거했다. 그는 중국 사행으로 자청해 가면서, 창왕의 친조를 추진했다. 중국이 창왕을 공식 승인한다면 이성계도 쉽사리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실패했다.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색은 위험을 느낀 듯하다.

권력암투 승리한 이성계의 개혁 드라이브


▎이색은 고려를 끝까지 수호하려는 세력의 정신적 지주였다. 이색은 사상적으로 역성혁명에 반대했고, 이성계와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사전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성계를 암살하려는 모의를 진행시켰다. 그 사건은 1389년 11월 우왕 복립을 기도했던 김저(金佇)·정득후(鄭得厚)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김저는 최영의 생질이고 정득후는 최영의 족인이었다. 두 사람은 여주에 유배된 우왕을 몰래 만나러 갔다. 우왕은 이들에게 팔관회 행사 때 이성계를 암살하도록 촉구했다. 기록이 옳다면, 이 사건에는 개혁 반대자들이 대거 연루돼 있었다. 그 결과 우왕·창왕이 처형당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개혁파의 공세는 김저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389년 9월부터 본격화됐다. 개혁파는 개혁의 지체에 위기감을 느낀 듯하다. 또한 9월, 중국에서 당도한 자문이 개혁파를 크게 고무했을 것이다. 중국은 이성계파의 행위와 명분을 모두 인정했다. “왕위는 왕씨가 시해를 당하여 후사가 끊어진 이후 비록 왕씨라고 꾸며서 이성(異姓)으로 왕을 삼았으나, 이것은 삼한이 대대로 지켜왔던 좋은 일이 아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9월)

이성계파는 비로소 근본적 불안에서 해방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반개혁파와의 본격적 대결에 나선 것이다. 이후의 권력투쟁에서 우왕과 창왕이 폐위, 처형됐다. 변안열도 처형됐다. 이색은 장단의 별장에 은거했다. 하지만 그는 고문을 당했고, 유배됐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대사헌 조준은 12월에 다시 전제개혁 상소를 올렸다. 이것은 세 번째 단계의 논의였다. 조준은 이때가 전제개혁의 호기라고 주장했다. “하늘이 다시 화란을 뉘우쳐서 여러 흉인이 이미 멸망되고 신씨(우왕, 창왕)도 이미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사전을 일체 개혁하여 백성을 부유하고 오래 살게 해야 하는데, 이 때가 그 기회입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12월)

이 상소에서 조준은 특히 경기지역 밖으로 과전(科田)을 확대하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반대파들은 사전을 포기하되 차선책으로 녹봉의 양을 확대하려고 했던 듯하다. 그러나 조준은 경기지역 밖으로 과전을 확대할 경우, 사전겸병의 재발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경기지역에 과전을 한정하면 사전이 재발해도 일정 지역 밖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실적으로 전국 경작 가능한 토지의 수가 50만 결이므로, 왕실과 관료, 퇴임자 등의 비용을 빼고 나면 17만 결밖에 남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다. 토지가 절대 부족했다. 그리하여 조준은 “거실의 유언비어를 꺼려서 생민의 큰 해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외방에 사전을 복구하여 간활한 자들의 겸병하는 문을 열어 삼군을 굶기는 등의 폐해를 부활시키는 것은 경국제민의 정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고려사] 식화지1, 전제, 공양왕 원년 12월)

이렇게 사전개혁이 본격화됐다. 이듬해 1월 급전도감에서는 품계에 따라 토지문서를 지급했다. 9월에는 공사의 토지 문서를 모두 불살랐다. “공전과 사전의 전적을 저자거리에서 불살랐는데, 불길이 수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종의 사전의 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개혁되니 애석한 일이다’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9월)

11월에는 급전도감에서 지방의 토지지급을 확정했으며, 관리들의 녹봉을 결정했다. 1391년 7월에는 전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유백유가 유배됐다. 1391년 5월에 과전법이 정해졌다. 1392년 5월 급전도감이 폐지되고, 호조에 환속됐다. 몇 달 뒤 고려왕조는 망했다.

14세기 말 토지개혁의 역사적 의미


▎김홍도의 풍속화 ‘타작.’ 양반은 일하지 않고도 소득을 취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의 얼굴은 밝다. 조선 건국세력이 꿈꾼 이상적 세계관일 수 있다.
사전개혁은 고려 말의 대개혁이었다. 사전개혁은 정확히 권력투쟁의 단계와 일치하고 있다. 그만큼 격렬한 대립을 수반한 것이다. 현대 국가에서 토지의 정치적 중요성은 결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전근대의 삶에서 토지는 거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국가를 상징하는 사직(社稷)은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토지는 정치권력과 부, 신분의 원천이었다. 정치체제와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토지를 매개로 결정됐다. “역사적으로 토지와 정치는 긴밀하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토지의 소유형식은 정치 권력의 패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정한 권력형태는 특정한 소유형식을 유지했다. 이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원시공산제 사회, 중세사회, 그리고 가족경영적인 농업사회에서 분명히 나타났다.(김상용, [토지소유권 법사상])

생존의 측면에서 국가는 ‘필요(needs)’의 영역이며, 그중 “가장 우선적이고 커다란 욕구는 우리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식량이다.”(Plato, [Republic]) 공자도 국가의 세 가지 기본요소 중 하나로 족식(足食)을 제시했다.([논어], ‘안연’) 백성의 본질은 ‘욕망을 가진 존재(民有欲)’이다.([서경], ‘중훼지고’) 그래서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君以民爲天 民以食爲天)”라고 주장했다. 또한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요, 백성은 나라의 바탕이다(食者民之本也 民者國之基也).” 그래서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어진 정치는 밭둑에서 비롯된다(夫仁政 必自經界始)”고 한 맹자의 말도 그 말이다. 즉, 국가의 선(善)은 백성들의 필요를 얼마나 만족스럽고 정의롭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은 기존의 사적 소유권을 모두 부정하고 국역에 의해 재분배하려는 것이었다. 단순한 시정이 아니라 근본적인 외과수술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만약 하나의 토지제도가 심각하게 결점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을 바로 잡으려는 행동은 모든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때만 의미가 있다. 작은 문제나 상징적인 개선책을 가지고 땜질하는 것은 어떠한 항구적인 결과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생산 요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농업 사회에서 일종의 ‘게임 규칙(rules of the game)’의 변화다.”(Hung-Chao Tai, [Land Reform and Politics])

이성계파의 개혁안은 국가 전반의 혁신과 연계된 것으로, 새로운 국가의 창출을 위한 기초로서 구상됐다. 이성계의 인척이자 조준의 친우로서, 조선개국공신인 전법판서 조인옥은 전제개혁을 “오늘의 급무로, 사직의 안위와 생민의 휴척이 매달려 있는 것”이며, “전법이 바르면 사직이 편안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사직의 안위를 가히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려사], ‘식화지’, 전제 녹과전, 우왕 14년)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안은 그 체계성과 포괄성에서 한국 역사 초유의 것이다. 1949~1950년 남한의 농지개혁, 또는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에 비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전제개혁이 농민을 토지 소유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농민은 기본적으로 소작인이었다. 국가가 농민을 부르는 전객(佃客)이나 전호(佃戶)라는 호칭도 그점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고려의 전통적 지배세력을 완전히 교체한 것도 아니다. 고려와 조선의 지배세력은 단절적이기보다 연속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제개혁을 현대적 의미의 계급혁명으로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당대의 관념에서 국가의 건전성을 대폭 향상시킨 것은 사실이다. 전제개혁을 통해 개혁자들은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관료체계를 정비했으며, 민생 안정과 국방체제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는 국가의 건전성에 필수적인 요소가 모두 완비됐음을 뜻했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이성계파는 전통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민심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조선의 군정개혁, 군사력의 공공화(公共化) 작업


▎직지사의 탱화에 등장하는 왜구들. 원 지배기 고려의 군정 시스템이 망가진 40여 년 동안 극성을 부렸다.
당대의 개혁자들이 전제개혁만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다. 1388년 위화도회군 뒤 5년간 국가 모든 분야의 쇄신이 시도됐다. 전제개혁안은 그 일부일 뿐이다. 다른 분야의 개혁을 총체적으로 구상하고 이끈 것도 역시 조준이었다.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국에서 개혁을 이끈 게 조준이라면, 정치투쟁을 이끈 것은 윤소종이었다. 조준은 사헌부를, 윤소종은 대간을 담당했다. 1388년 7월 전제개혁안 후반부에서도 조준은 지방정치와 군사 선발, 역마 체제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또한 한 달 뒤인 8월에는 국가의 모든 분야에 대한 장문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조준의 상소는 조선건국의 청사진 초안에 해당하는 셈이다.

먼저 군정개혁을 살펴보자. 1351년 공민왕의 즉위 이후 고려는 숱한 전란에 시달렸다. 하지만 고려는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난 등 대규모 전쟁을 모두 극복했다. 하지만 위화도회군 전까지 왜구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했다. 고려는 본래 군사국가였다. 조준의 상소에서 나타난 바처럼,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체제였다. 단위부대는 총 42도부로서 병력은 4만5000명에 달했다. 1076년 개정 전시과를 보면, 중앙군의 마군과 보군은 토지를 지급받았다. 무관의 수는 정3품 3과에서 정9품 13과까지 무관 수는 1751명이다. 14과 대정 1838명까지 합하면 3589명이다. 문관은 424명이다. 문관과 무관의 토지 지급 비율은 1대 7이다. “고려왕조는 11세기 후반까지 무사들이 정부의 인적, 재정적 구성에서 지배적 비중을 차지한 군사국가였다. 왕도 개경에 집주한 중앙군은 국가체제의 중추를 이루었다. 중앙군은 대략 3500명의 무관과 3~4만 명의 마군과 보군으로 이루어졌다.” (이영훈, [한국경제사(1)], 221쪽) 지방군 중 주현군이 약 5만, 주진군이 14만 명 정도였다. 가용한 군사력이 총 23만5000명 정도였던 것이다.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고와 대결할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고려의 군사체제는 원 지배기에 무너졌다. 당시의 군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병역 종사자들이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사전개혁의 목표 중 하나는 이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병력 대부분이 사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체계적인 지휘체계가 결여돼 있었다. 각 군사지휘관은 독자적인 군대를 거느리고 독자적인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투가 있을 때는 연합군 형식으로 군대가 운영됐다. 그래서 통합적인 군사력 운용이 불가능했다. 조준의 지적을 보자. “근세에는 병제가 크게 무너져 전쟁을 한 지 30여 년에 군정의 통솔이 없었습니다. 전술이 없는 장수로서 교련받지 않은 백성을 거느리고 싸우게 되니, 적이 왔다는 풍문만 듣고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조그만 왜놈이 나라의 걱정의 되었으니 몹시 상심이 되지 않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예전 품계가 4품 이상의 관원은 3군에 소속시켜 군에 장좌를 두며, 5품 이하의 관원은 부위에 소속시켜 군부사에 통속되게 하여서, 상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연결되어 군정이 한 곳에서 처리되어,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곳에 통일된 후에 군령을 거듭 밝히고 사졸을 훈련한다면, 백만의 군사도 몸이 팔을 쓰는 것과 같고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빼앗지 못하겠습니까?”([고려사절요] 34, 공양왕 원년 12월)

군통수권을 통일시키고 일원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1391년 1월에는 마침내 3군부가 설치됐다. 이는 물론 무력을 장악하기 위한 이성계파의 의도와 직접 관련돼 있다. 위화도회군 후 최영부터 시작해 조민수, 변안열, 우인열, 정지 등 유력한 장군들이 모두 제거됐다. 건국 과정은 사병 해체와 국가의 군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병은 조선건국 뒤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제1·2차 왕자의 난도 사병을 기반으로 일어난 것이다. 사병 문제는 태종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됐다. 사병의 해체와 일원적인 군 지휘체계의 확립은 국가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조치다. 군사지휘관들의 특권 남용과 부정 방지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즉, 군정개혁은 군대의 성격을 공적인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세 번째 문제는 지휘관들의 문제였다. 이는 일찍이 공민왕 원년 청년 이색의 복중상소에서 이미 지적됐던 것이었다. 이때 이색은 지휘관에 해당하는 군 고위직이 모두 권문세가의 세습직으로 바뀌어, 실제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관들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이색은 문과 시험과 동일하게 무과를 설치하여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할 것을 건의했다.([고려사] 열전28)

조준도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 장수를 가지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되고, 장수가 병법을 알지 못하면 그 임금을 적에게 내주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장수를 가려 왜적을 제어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무”라고 주장했다.([고려사절요] 34, 공민왕 원년 12월) 이 결과, 1390년 4월 도당은 무과 설치를 건의해 33명을 선발했다.

결국 군정개혁은 병역의무자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군대편성과 그 지휘권을 국가의 공적인 기관에 통합시키며, 적절한 군사지휘관의 선임을 핵심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군사력의 ‘공공화(公共化)’가 목표였다.

정치적 책략 너머를 추구한 민생개혁


▎정도전이 집필한 [경제문감]. 정도전은 조준과 더불어 조선의 민생을 시야에 넣은 개혁가였다.
이러한 군정개혁의 결과 왜구에 대한 방어력은 대폭 증강됐다. 40년에 걸쳐 고려를 유린했던 왜구문제가 이 시대에 와서 거의 해결됐다. 1389년 2월 경상도원수 박위(朴葳)는 대마도를 정벌했다. 왜구의 본거지를 공격한 것이다. 이는 왜구 문제 해결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징표로 볼 수 있다. 고려와의 전면전을 우려한 그들은 적극적으로 사신을 보내, 왜구금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거듭했다.

회군 후 이성계는 둘째 아들 이방과를 전투에 파견했다. 군대는 더 이상 전투를 회피할 수 없었고, 군사지휘관들은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마침내 왜구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이것은 개혁파들의 정치적 능력을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다. 고려 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것은 물론 군사력의 문제라기보다 전적으로 정치적 부패와 무능력 때문이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민왕의 말처럼, 고려는 대규모 전쟁을 승리를 이끌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왜구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즉, 고려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에서 한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국가는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으며, 그것을 개선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의 개선은 개혁파들의 국가 운영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모든 개혁을 고려해 볼 때, 민생에 대한 개혁파의 깊은 관심은 단순한 정치적 책략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 시대의 다른 정치집단과 비교할 때, 이것은 ‘백성의 발견’이라고 부를 만하다. 개혁의 선봉에 섰던 조준과 정도전은 민생을 몸소 목격하는 체험을 가졌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09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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