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31)] ‘인장을 만드는 인간’ 호모 시길룸(Homo Sigillum) 

문명과 인류 존재를 증명하다 

배철현 서울대 교수
정체성 표현과 무역의 증거인 도장인장과 원통인장…사실적 권력 상징인 우룩 스타일과 아직도 해독되지 않은 젬뎃-나스르 스타일

▎기원전 2220~기원전 2159년 사이에 제작된 무릎 꿇은 나체 영웅들을 묘사한 원통인장. 인장은 정체성 표시의 도구이기도 했다. / 사진:배철현
소유(所有). 인류문명의 동력이자 근간은 개인이 어떤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을 제거한다면 인간들 간의 경쟁도 존재하지 않고, 탁월함의 총체인 문명도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자도 개인 간의 소통과 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다. 자신의 소유권을 객관적으로 표시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문자의 원형은 기원전 3500년경 남서부 이란과 남부 메소포타미아 ‘우룩(Uruk)’이란 도시에서 처음 등장했다. 문자는 도시 행정을 돕기 위한 소통 수단이었다. 이 당시 등장하는 행정문서들은 주로 상거래를 증명하는 소위 ‘영수증’이었다. 영수증에는 상거래의 상세한 내용과 일자가 포함됐을 뿐만 아니라, 상거래 당사자들 간의 ‘서명날인(署名捺印)’이 필수적이다. 그들은 오늘날 도장처럼 원통 형식의 값비싼 돌이나 보석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양과 이름을 새겨 만들었다. 이 인장은 대부분 원통모형이다. 공식적인 문서를 만드는 당사자들이 아직 마르지 않은 토판문서 위에 인장을 용이하게 굴려, 그 문양들을 온전히 새긴다.

예를 들어 이 인장은 기원전 2220~2159년 사이에 제작된 무릎을 꿇는 나체 영웅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원통인장의 소유자는 자신에게 중요한 신들의 모습이나 물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네 명의 영웅은 모두 전면을 응시하고 오른쪽 다리를 꿇고 왼쪽다리는 세웠다. 그들은 왕홀(군주의 손에 쥐는 장식이 화려한 상징적인 지휘봉)을 양손으로 잡았다. 이들의 머리 위에는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들의 상징을 그려 넣었다. 초승달, 샛별, 두 줄기 물을 내뿜는 항아리, 그리고 물고기다. 이 문양들은 그림이면서 수메르 문자다. 초승달은 ‘난나(nanna)’를 상징하고, 원형 안에 원에서 여덟 줄기의 빛이 나오는 문양은 샛별신은 ‘인난나(Inanna)’다. 양 갈래로 물을 내뿜는 항아리는 ‘지혜의 신’이면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의 담수를 관장하는 신인 ‘엔키(Enki)’다. 맨 왼쪽 물고기 문양은 ‘지혜’를 상징하는 ‘아브갈(Abgal)’ 신(神)이다. 신들 사이에 정형화된 쐐기문자가 등장한다.

도장인장, 소유와 정체성의 표시


▎기원전 5600~기원전 5000년 할라프 시대에 제작된 녹니석 도장인장.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다. / 사진:배철현
신석기시대 인류는 제한된 지역에 정착하면서, 자신의 소유 표시를 위해 ‘도장인장(圖章印章)’을 사용했다. 도장인장은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까지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대량 출토됐다. 이 도장 표면에는 다양한 십자모양, 동심원 동그라미, 지그재그 혹은 평행선과 수직선을 이용한 기하학적인 형태로 조각됐다. 또한 염소, 뱀, 전갈 등이 인간이나 가옥모양과 함께 새겨졌다. 이들의 용도는 그 가운데 구멍을 뚫어 줄로 연결하여 목에 거는 목걸이다. 기원전 6000년경 텔 아인 엘-케르크(Tell Ain el-Kerkh)에서 발견된 목걸이는 크기가 다양해 허리 혹은 손을 장식하기 위한 도구였다.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장식품이다. 도장인장과 목걸이나 팔찌와 같은 장식품은 기원전 3300년경 문자가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자극이 됐다.

사비 아브야드(Sabi Abyad)에서 300개 정도의 도장인장과 목걸이이 발견됐다. 이것들은 물건을 주고받으면서, 그 사실을 보증하기 위해 토판문서에 눌러 새기기 위한 중요한 행정 도구다. 이 물건들은 소위 ‘불탄 마을(Burnt Village)’이라고 알려진 고고학지층 VI에서 발견된 직사각형 건물들과 지붕이 높이 솟아 오른 원뿔형 건물인 ‘쏠로이(tholoi)’ 건물들에서 발굴됐다. 이 인장들은 분명히 지푸라기 바구니나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바구니에 보관된 음식 혹은 다른 물건들의 소유자의 상징들을 표시했다. 모두 67가지 모양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 17%는 염소, 10%는 ‘S’자 모양의 뱀, 5%는 지그재그 모습을 한 전갈을 표시했다. ‘불탄 마을’은 기원전 6000년경 발릭 계곡(Balikh Valley)을 여행하는 대상들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이 인장은 기원전 5600~5000년 고고학적 용어로는 ‘할라프(Halaf)’ 시대에 제작된 녹니석(綠泥石, chlorite) 도장인장이다. 크기는 1.4 x 1.09 x 2.59㎝다. 이 도장인장은 기학학적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인장은 북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서식했다는 동물인 ‘고슴도치’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세 직선과 다섯 평행선이 겹치면서 여러 개의 정사각형이 생겼다. 정사각형 안에는 갈지(之)자 무늬가 하나씩 들어가 있다. 고슴도치는 이 지역에서 천년 이상 서식했다. 이 동물의 신화적인 상징을 후대 신화에서도 등장하지 않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장인장들은 마을 안에 사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물이나 특별한 모양을 한 도장인장을 착용했다. 그들은 이 인장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주로 사용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위치시켰다. 인장들은 자신에 관한 성, 사회적 위치, 직업, 신앙들을 표시하는 수단이었다.

원통인장, 기원전 무역의 증거


▎기원전 3100년경, 우룩에서 발굴된 토판문서들. 쐐기문자와 인장의 모형이 새겨져 있다. / 사진:배철현
‘원통인장(圓筒印章)’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사용하던 작은 원통모양의 물건이다. 원통인장은 흔히 돌이나 보석으로 만들지만, 때로는 유리나 도기로 만들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적철광(赤鐵鑛, hematite), 흑요석(黑曜石, obsidian), 동석(凍石, steatite), 자수정(紫水晶, amethyst), 청금석(靑金石, lapis lazuli), 그리고 홍옥수(紅玉髓, carnelian)와 같은 보석으로 제작됐다. 이 원통인장의 중앙을 관통하는 긴 구멍이 있다. 이 인장의 소유자는 인장을 목걸이로 착용해, 필요할 때마다 사용했다. 원통인장은 기원전 3500년에 등장했다가 기원전 500년까지 3000년 동안 사용됐다. 원통인장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사용한 첫 번째 인장은 아니다. 북부 시리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첫 번째 인장은 기원전 6500년경 ‘도장’ 형태로 등장한다. 이들은 대개 남근형태 도장에 특별한 상징기호를 새겼다. 혹은 여성의 성기를 새긴 모습이다. 이 도장들은 일종의 부적(符籍)이다.

원통인장은 이란의 수사와 메소포타미아의 우룩에서 처음 등장했다. 원통인장은 도장과 비교해 사용하기가 어렵다. 원통인장은 단순한 도장보다는 넓은 범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됐고 토판문서가 통용된 지역에서 골고루 발굴됐다. 우룩에서 발견된 한 토판문서의 한 면엔 쐐기문자가, 다른 면엔 인장의 모형이 새겨져 있다. 기원전 3100년으로 추정되는 이 토판문서는 우룩에서 발견됐다. 세로5.5㎝, 가로 6㎝, 두께 4.15㎝ 크기의 토판문서로 보리 분배에 관한 행정문서다. 이 문서는 문자와 원통인장이 동시에 등장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룩에서 발견된 최초 원통인장은 단순한 도장보다는 커다란 돌을 다듬어 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룩처럼 태고로부터 충적토로 이뤄진 평원에서 원통인장에 필요한 돌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 원통인장을 만들기 위한 돌이나 보석들은 수입품이다. 이러한 돌들은 그 당시 다른 정교한 석기 용기들을 제작하기 위해 수입됐다. 특히 기원전 3500년부터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위치한 수사와 우룩은 정교한 무역망을 구축해 교류했다.

‘특수기술’ 우대받은 인장 장인들


▎기원전 3200년경, 우룩에서 제작된 원통인장. 제사장이나 왕이 우룩의 안안나 여신을 위해 의례를 행하는 모습이다. / 사진:배철현
수메르인들은 원통인장을 ‘키쉽(kiship)’, 바빌로니아인들은 ‘쿠누쿰(kunukkum)’이라고 불렀다. 왕을 포함한 귀족부터 노예까지 계약체결을 보증하기 위해 원통인장을 토판문서에 굴렸다. 개인 간의 상거래가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계약을 확증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원통인장이 점점 더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드러내도록 예술적으로 정교해졌다. 원통인장은 작은 도장인장과는 달리 이것을 제작하는 장인의 예술성이 더욱 가미됐다. 장인들은 그 인장에서 주인의 정체성은 물론 그의 직업과 신앙관과 세계관을 표현했다. 그 인장은 주인이 바구니를 만드는 사람인지, 목동인지 사냥꾼인지, 혹은 서기관인지 왕인지를 표시했다. 이 표현들은 우룩 경제사회의 다양성과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원통인장을 만드는 사람들을 수메르어로 ‘부르굴(burgul)’, 아카드어로는 수메르어 차용어인 ‘푸르쿨룸(purkullum)’이라고 불렀다. 부르굴은 당시 최고 예술가로 자신의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 기원전 14세기 우가리트(Ugarit)라는 도시에서 발견된 문헌은 이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장비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진흙 항아리 안에, 조그만 구리로 만든 조각칼, 두 개 뾰족한 구리 조각칼, 숫돌, 송곳, 그리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인장들이 있다.” 이들은 청동이나 구리를 사용해 드릴과 송곳, 그리고 날을 만들어 인장을 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돌을 처음부터 작업한 것이 아니라 공작실에서 이미 잘 다듬어진 돌을 구입해 작업했다. 이 당시엔 인장을 다루는 두 종류의 장인이 있었다. 한 부류는 산에서 돌을 채석해 다듬은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는 인장을 제작하는 사람과, 그 인장에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문양을 새겨 넣는 사람이다.

원통인장은 평면에 글자, 기호, 그림을 옴폭하게 새기는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다. 이 음각은 사진이나 복사를 위해 물체 본래의 명암과 반대로 된 상태와 마찬가지다. 장인은 이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거꾸로 뒤집어 새겨야 한다. 이 작업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으로 장인들은 르네상스 조각가와 같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우룩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원통인장 하나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이 인장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당시 주민등록증과 같았다. 고고학자들은 우룩에서 지금까지 원통인장 2000개를 발굴했고, 20만 개 이상의 인장이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사실성 구현한 우룩 스타일

원통인장의 스타일을 크게 다음 두 가지로 구별된다. 우룩 스타일과 젬뎃 나스르 스타일이다. 우룩 스타일은 사실적이다. 자연에서 발견된 동물이나 모양을 그대로 표현했다. 장인들은 자신들의 예술적인 표현이 누구나 손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구상적으로 표현했다. 주제들은 신전, 배, 제사를 표현하는 의례이거나 자연세계의 계급을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이 문양들은 명료하고 상세하고 대칭적이며 미적으로 흥미롭다.

이 원통인장은 기원전 3200년경 우룩에서 제작됐다. 크기 6.2㎝, 지름 4.3㎝로 현재 루브라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인장은 소위 제사장이나 왕이 우룩의 주신인 인안나 여신을 위해 의례를 행하는 모습이다. 인류는 아직 세속적인 왕과 종교적인 제사장을 구별하지 않았다. 수메르인들은 ‘제사장-왕’을 수메르어로 ‘엔(en)’이라고 불렀다. ‘엔’ 글자는 ‘의자’를 상징하는 그림글자를 형상화했다. 수메르인들은 제사장이나 왕과 같은 통치자를 상징하기 위해 그들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물건인 ‘왕좌’를 그려놓고 왕좌가 상징하는 권력을 쥔 제사장과 왕을 표시했다. ‘엔’은 우룩의 최고 권력자다. 기원전 3500년부터 원통인장은 그전에 천년 이상 메소포타미아의 상거래를 장악했다. 원통인장은 다양한 주제를 상징적인 모양으로 표현해 토판문서에 굴려 끝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 원통인장의 등장은 우룩사회가 이전과는 다른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표시다. 원통인장은 최초의 도시들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와 문명을 표시한다. 그리고 또한 최초 문자들의 기호를 표시했다. 이 인장은 그 문명의 중심인 ‘제사장-왕’을 표현했다.

‘제사장-왕’이 의례를 행하는 모습이다. 이 인장의 왼편에 휘어진 나무는 풍요의 여신은 ‘인안나(Inanna)’를 상징한다. ‘인안나’의 원래 수메르 이름은 ‘닌.안나(nin.an.na)’로 ‘하늘의 여주인’이란 의미다. ‘하늘’은 우주와 우주를 운행하는 원칙과 섭리를 의미한다. 인안나 여신은 자연의 순환과 풍요를 관장한다. 인안나 여신의 상징은 곡식창고를 표시하는 기둥으로 표현된다. 갈대를 묶은 기둥이 인안나의 상징이다. 우룩인들은 인안나 여신의 도움이 없이는 곡식을 추수할 수도 없다고 믿었다. 초기 수메르 도시들은 자신만의 주신을 정해 섬겼다. 우룩의 주신은 인안나 여신이다. 우룩 도시의 중심에는 인안나 여신을 위한 신전 ‘에안나’가 가운데 우뚝 솟은 지구라트 형식으로 서있다. 제사장이자 왕인 ‘엔’이 오른손에 새끼 양을 들고 제사를 지낸다. 엔의 특징은 그 챙이 없는 모자다. 그는 모자를 쓰고 수메르 귀족들의 전형적인 의상인 발목까지 내려오는 모자이크 문양 치마를 입고 있다.

엔을 따라 누군가 농업을 상징하는 풍성한 밀 두 다발을 누군가를 향해 바치는 모습으로 들고 있다. 그는 엔을 수발하는 관리로 뒤가 긴 가발을 쓰고 체크무늬 치마를 입었다. 이 모습은 인안나 여신을 위한 거룩한 양이 먹을 곡식이다. 인장의 불쑥 튀어나온 윗부분에는 양이 행진하는 모습과 그 뒤에 인안나 여신의 상징인 갈대기둥이 새겨져 있다. 밀은 인류의 정착을 도와 준 최초의 농산물이다. 인류는 밀농사를 통해 사냥채집 생활에서 농경정착 생활로 전환했다. 이 원통인장은 인류문명의 중요한 자연의 순환을 관장하는 인안나 여신 숭배와 인류에게 안정된 먹거리를 제공한 농업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예술작품이다.

기원전 26세기 우룩의 전설적인 왕인 길가메시는 ‘엔’의 화신이다. 길가메시는 죽은 자를 인도하고 심판하는 제사장이면서 우룩이란 도시의 행정을 치리하는 세속적인 왕이다. 길가메시의 행적을 담은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는 바로 길가메시의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획득하려는 주제와 전쟁에서 승리하려 명성을 얻으려는 주제로 구성돼있다. 이 두 주제는 ‘엔’이 상징하는 제사상과 왕의 기능이기도 하다.

권력의 상징이었던 앗다인장


▎앗다 인장. 제사장이자 왕이 오른손에 새끼 양을 들고 제사를 지내려는 장면을 묘사했다. / 사진:배철현
원통인장의 소유자가 자신의 직업을 알리는 쐐기문자를 적어 넣기도 한다. 이 인장은 소위 ‘앗다 인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2300년경으로 추정되며 이라크의 시파르 지역에서 발견됐다. 길이 3.9㎝, 지름 2.55㎝ 크기의 녹암(綠岩)에 새겨졌다. 이 인장이 특이한 점은 인장의 주인의 이름과 그의 직업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 수메르 사회의 중요한 신들이 자신들이 우주 안에서 하는 기능들을 명료하게 표시했다. 이 인장에 등장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왕관’이다. 왕관의 모양은 원래 야생 황소의 커다란 뿔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바로 야생 소다. 몸무게가 2000㎏ 정도였고 키가 180㎝, 그리고 무엇보다도 뿔의 길이가 1.5m 이상이었다. 야생 황소는 지상의 어떤 동물보다도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제1토판 29~32행에서 길가메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29) 모든 다른 왕들보다 단연 뛰어난, 몸집이 영웅과 같은 이!

(30) 우룩의 용감한 자식, 고삐 풀린 야생황소

(31) 그는 앞에서는 선봉자!

(32) 그는 뒤에서는 그의 동료들이 믿을 수 있는 자!

수메르인들은 신의 속성을 야생 황소가 지닌 큰 뿔로 표현했다. 고대 수메르어에서 ‘신성(神性)’을 의미하는 단어인 ‘메(me)’는 이 뿔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들은 머리에 일곱 개뿔을 장착해 자신이 신이란 사실을 표현한다. 이 신들의 머리장식이 나중에 ‘왕관’이 됐다. 어떤 인간이 신과 인간의 중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가시적인 표식인 ‘왕관’을 쓴다.

이 인장엔 모두 다섯 명의 신과 두 마리 동물이 등장한다. 먼저 제일 왼쪽에 있는 신은 천둥번개의 신인 ‘닝기르수(Ningirsu)’다. 닝기르수는 활동적이기 때문에 오른쪽 발이 여러 개 주름으로 만들어진 치마 사이로 오른쪽 발을 내밀었다. 닝기르수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닝기루수 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장식이 있다. 그는 번개처럼 빠른 화살을 손에 쥐고 오른손으로는 화살을 쥐었다. 그의 왼쪽에는 천둥 벼락과 같은 큰 소리를 지는 사자가 포효하고 있다. 닝기루스신은 평원과 산에 내리는 비의 상징으로 메소포타미아인들 삶의 재산인 양과 염소에게 풀과 비를 주는 신이다. 그 오른쪽엔 두 날개를 펴고 산 정상 위에서 웃고 있는 신이 있다. 이 인장에 등장한 유일한 여신으로 위에서 언급한 인안나 여신이다. 인안나는 원래는 풍요의 여신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온 우주를 정복하려는 전쟁의 여신으로 거듭난다. 인안나 여신의 날개 위에 피어 오르는 선들은 ‘메’를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전쟁무기인 도끼와 망치를 어깨에 장착했다. 그녀의 왼쪽엔 나무가 한 그루 산 정상의 끝에 우뚝 서 있다. 이 나무는 대추야자나무다. 중동지방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나무로 아무리 건조해도 열매를 맺기 때문에 풍요의 상징나무가 됐다. 인안나가 왼손에 대추야자 다발을 들고 있다.

이 인장에 중앙에 위치한 산맥 사이에서 올라오는 신이 있다. 바로 태양신인 ‘우투(Utu)’다. 우투신은 아침마다 왼손에 톱니모양을 한 날을 지닌 칼을 들고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에 빛을 선물한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태양신인 우투를 ‘정의’의 신으로 섬겼다. 기원전 18세기 만들어진 함무라비 석비의 부조물은 왕좌에 앉은 태양신인 샤마시(Shamash: 바빌론에서는 태양신을 ‘샤마시’로 불렀다)가 함무라비에게 왕권을 수여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중죄를 지은 자에게 내리는 가혹한 형벌들 중 하나가 도시 밖 사막으로 범죄자를 내쫓는 행위다. 태양신이 그를 작열하는 태양열로 심판할 것이다. 태양신 옆에는 어깨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며 그 물에서는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신이 있다. 그는 오른발을 산 정상에 올려놓았다. 오른손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운명의 서판’을 훔친 신화 속 독수리인 ‘쭈’를 자신의 오른손 위에 안착하도록 내민다. 그의 양발 사이에는 고개를 처든 양이 웅크려 앉아 산을 응시한다. 이 신의 이름은 ‘엔키(Enki)’다. 엔키의 의미는 ‘땅의 주인’이란 의미다. 엔키는 메소포토미아 지역의 농사와 가축에 필요한 담수(淡水)를 공급하는 신이다. 그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두 물줄기는 각각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상징한다. 엔키는 지혜와 문자의 신이며, 의례를 관장하는 신이다. 신에게 바칠 흠 없는 양이 그의 가랑이에 안전하게 앉아있다. 인장의 맨 오른쪽에 양쪽을 골고루 살피는 두 얼굴을 가진 ‘우시무(Usimu)’가 있다. 우시무는 오른손을 들고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들의 우주 운행을 관찰하고 진행한다. 남자 신들은 모두 수염을 길렀다.

미궁의 美를 간직한 젬뎃-나스르 스타일


▎젬뎃 나스르 스타일의 인장 중 가장 대표적인 ‘돼지 꼬리 머리를 한 여인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징들이 담겨있다. / 사진:배철현
이 인장의 소유자는 서기관인 ‘앗다(Adda)이다. 포효하는 사자 위에 두 칸으로 구별된 직사각형이 있다. 그 안에 수메르어 글자 네게가 있다. 이 글자들은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앗-다 둡-사르’(ad-da dub-sar)가 된다. ‘앗다’는 사람 이름이고 ‘둡사르’는 앗다의 직업인 ‘서기관’이란 의미다.

앗다인장으로 대표되는 우륵 스타일과는 달리 젬뎃-나스르라는 지역에서 출토된 원통인장은 그 대상의 주체가 불분명하고 추상적인 기호를 사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소위 ‘돼지꼬리 머리를 한 여인들’이라는 인장이다. 1.7㎝ 크기의 적철광에 새긴 기원전 3500년 경 원통인장이다.

네 명의 여인이 왼편을 응시한 채 양 팔을 들고 특별한 모양의 의자에 앉아 있다. 그들의 몸은 단순한 L자 모양이다. 이 인장을 만든 장인은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정교한 끌로 둥그렇게 파냈다. 장인들은 이들의 머리도 한 도구로 파냈고, 머리 뒷줄엔 그들이 젊은 처녀라는 상징의 포니테일 머리를 그렸다. 이 여인들 중간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도장인장과 원통인장을 만듦으로써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소유’를 표현했다. 도장인장이 마을에서 살던 인간을 더 확장된 공동체인 도시의 일원으로 만들었다면, 원통인장은 문자와 함께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계를 구축하는 밑거름이 됐다.

※ 배철현 -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셈족어와 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삼중 쐐기문자가 기록된 베히스툰비문의 권위자다. 2003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심연]이 있다.

201809호 (2018.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