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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 비스타, 아바나(9)] 결핍의 시대를 사는 쿠바인의 사랑 

가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의 노래 

김해완 작가
인종·국적 가리지 않는 자유분방한 연애관 뒤에 숨겨진 세속성…가난 때문에 결혼·출산 포기하고 국제결혼으로 신분상승 꿈꾸기도

▎말레꼰은 바다의 방파제를 뜻한다. 쿠바인들은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말레꼰에 앉아서 파도를 감상하며 음악을 듣는다. 젊은이들이 구애 상대를 찾으려고 많이 찾는 로맨틱한 장소이기도 하다.
미스터리 하나. 아바나에 가기 전, 이 낯선 장소를 알기 위해 쿠바를 다룬 작품을 골라봤다. 검색을 하자 결과가 나온다. 영화 [쿠바의 연인] (정호현 감독), 에세이 [쿠바에 애인을 홀로 보내지 마라] (배영옥 시인)…. 그런데 희한하게도 공통 키워드가 사랑이다. 내가 일부러 이 주제로 작품들을 고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이것은 쿠바에 대해 외국인이 덧씌우는 환상일까, 아니면 쿠바는 정말로 카리브해가 품은 사랑의 섬인 걸까?

미스터리 둘. 아바나에 막 도착했다. 하숙집 주인인 쿠바인 노부부는 이메일을 보낸 학생이 한국인 여성인 것을 알자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그리고 신신당부를 한다. 쿠바노(Cubano; 쿠바 남자)를 조심하라고, 여기서 연애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이 잔소리는 날이 바뀌어도 똑같이 반복됐다. 한국에 계신 우리 부모님도 이 정도로 당부하진 않으실 것 같다. 쿠바의 연애가 얼마나 파란만장하기에 미리부터 걱정을 사서 한단 말인가?

미스터리 셋. 아바나 길거리를 걷는다.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역시, 그 뒤로 쿠바노의 익숙한 추파가 따라온다. “치나 린다(China linda; 예쁜 중국 여자)! 미 아모르(Mi amor; 내 사랑)!”이렇게 길거리마다 내 성별과 인종을 자각시켜주는 곳은 또 처음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차별은 아니라고 한다. 단지 이국적인 외모와 여성의 미(美)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호기심이라는 것이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애정행각에도 거침없다. 남의 시선을 받아내야 하는 불편함과,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맞대는 자유로움의 공존. 한국의 연애 문화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것이 단지 문화의 차이일까? 이곳 사람들은 왕성한 표현 속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 이외에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미스터리를 시간 순으로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연애는 아바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장소에서든 벌어지는 인간대사 아닌가. 그러니 굳이 쿠바인들의 ‘사생활’을 들춰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었다. 연애를 빼놓고 아바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연애, 결혼, 사랑, 성생활, 이를 뭐라고 부르든 간에 남녀 간에 통하는 정(情)은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어떤 곳보다 더 강력하게 사회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인생역전 드라마부터 불법 돈벌이까지, 아바나에서 연애란 개별적인 사생활이 아니라 엄연한 ‘개인 사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종 간 연애장벽 없는 이민자의 나라


▎공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쿠바인들은 내 집 네 집 가릴 것 없이 길거리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들이 어디에서 놀든 안심할 수 있다. 동네 문화가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
이제 아바나의 풍경을 훑으면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하자. 아바나의 연애 공기는 서울과 많이 다르다. 싱글이 점점 늘어가는 한국과 달리, 이 카리브해의 도시에서는 파트너 없이 홀로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파트너가 배우자든 정부(情夫)이든, 자기 자신이 이미 늙었든 아직 젊든, 다들 자신의 옆구리를 시리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왜 이렇게 연애가 쉬운 것일까?

원래 남아메리카 대륙은 문화적으로 사랑에 대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편이다. 그중에도 쿠바 사회는 특히나 사랑하려는 이들에게 관대하다. 나이, 국적, 인종은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커플도 많고, 말 한마디도 못하는 외국인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서 결혼에 성공한 쿠바인들도 많다. 요즘 세대는 배우자를 정할 때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는 추세이기 때문에, 가족의 반대 때문에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한국식 드라마도 벌어지지 않는다.

특히, 타 인종 간의 연애(interracial relationship)에 대한 거부감이 낮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식민지 출신 나라 중에서 가장 낮은 편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후안 곤잘레스는 [미국 라티노의 역사](그린비)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국 청교도 전통이 강했고 노예주와 노예의 사회를 철저하게 분리시키던 북아메리카와 달리, 가톨릭을 믿었던 스페인인들은 타인종과 피를 섞음으로써 그들을 직접 개종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덕분에 남쪽 대륙에서는 물라또(mulato: 흑인과 백인의 혼혈)와 메스티소(mestizo: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가 대량으로 양산됐다. 게다가 쿠바는 남아메리카 중에서도 드물게 100% 이민자로 구성된 나라다. 원주민은 몰살당했다. 텅 빈 섬에는 온갖 사람이 도착했다. 식민지를 만들려는 스페인인과 서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 노예, 전쟁을 피해 온 중동인과 아이티가 독립한 후 갈 곳을 잃은 프랑스인, 그리고 이주민 노동자로 잠깐 건너 왔다가 아예 눌러 앉은 중국인…. 세상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은 카리브해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이들은 뒤죽박죽 섞여서 뜨겁게 연애하고 또 애를 낳았다. 쿠바야말로 진실된 의미로 인종의 용광로가 된 것이다!

오늘날 쿠바인들은 이런 500년 사랑의 결실이다. 쿠바인의 인종 비율은 65%가 백인, 25%가 물라또, 10%가 흑인이다. 그러나 쿠바인들의 피부색은 이런 세 가지 카테고리 속에서 깔끔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하얀색과 다크 초콜릿 색사이에서 가능한 모든 색깔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모 역시 전형적인 얼굴상을 벗어난다. 피부는 까맣지만 유럽인처럼 오똑한 코와 얄쌍한 입술을 가졌다거나, 반대로 피부는 하얀데 얼굴상은 아프리카인의 형태가 묻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아바나에는 이 풍요로운 유전자 풀(pool)에 자신의 유전자를 추가해 보려는(?) 외국인으로 득실거린다.

그러나 이런 선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쿠바인들의 줄기찬 연애 욕망이다. 연애에 관해서만큼은 쿠바인들은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 들이대는 것에 개의치 않고, 거절당할 것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세 번째 미스터리에서 언급한 길거리 추파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추파는 ‘삐로뽀(piropo)’라고 불리는데, 쿠바에서 삐로뽀는 그 자체로 나쁜 게 아니다. 단지 좋은 삐로뽀와 나쁜 삐로뽀가 있을 뿐이다. 현명한 남성은 시적인 언어로 여성의 심금을 울릴 것이고, 수준 떨어지는 남성은 그저 ‘나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자’는 일차원적인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삐로뽀를 던지는 남성이나 이를 못 들은 척 지나가는 여성이나, 이 문화적인 게임을 능숙하게 해낸다. 남성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서로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사회가 공인한 셈이다.

시의적절한 삐로뽀는 남녀를 잇는 큐피드의 화살이 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현지인의 남편은 젊은 시절에 버스에 탔다가 지인에게 한눈에 반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삐로뽀를 짜냈다고 한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곧 둘은 연애를 시작해 결혼까지 성공했다. 아바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로맨스 이야기다. 비바 쿠바(Viva Cuba), 비바 삐로뽀(Viva piropo)!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쿠바의 ‘이포세대’


▎주말을 맞아 아바나 비에하에 놀러 나온 가족들. 비에하는 외국인이 자주 찾는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나들이 나온 쿠바인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바나 내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건축물과 기념비들이 골목마다 꽉 차 있다.
여기까지 보면 첫 번째 미스터리는 풀렸다. 쿠바를 관찰하는 외부자라면 연애에 시선이 꽂히지 않을 수가 없다. 온 세상을 등진 것처럼 조용한 아바나지만, 연애만 등장하면 갑자기 에너지가 폭발하고 온갖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런 양상은 쿠바 예술과 비슷하다. 쿠바의 모든 사회적 조건이 낙후되고 있는데 왜 쿠바 예술만큼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을까? 현실에서 내 손으로 내 미래를 만들 기회가 줄어들면, 사람들의 잉여 에너지는 현실적 제약 없이도 창조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예술)’에 흡수된다.

번창하는 연애 사업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끝나버린 혁명에 대한 환멸과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 속에서, 쿠바인들은 자포자기보다 서로를 더욱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을 끌어가고 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한국의 정책자들은 이런 무대포식 정열이 부러울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피 끓는 젊은이의 신체가 아닌가?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 올인하는 ‘케세라세라’식 태도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아바나의 연애는 그 열정이 빛나는 만큼 그림자도 넓다. 너무나 드넓어서, 이제 연애는 누구나 남의 이야기도 내 이야기처럼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완연한 사회적 문제가 됐다. 음지는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한국의 삼포세대와 맞먹는 ‘이포세대’, 그리고 외국인 애인만 골라서 사귀는 ‘히네떼로(Jinetero: 말에 올라타는 자)’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삼포세대라고 불린다. 돈이 없어서 연애, 결혼, 출산이라는 세 가지 활동을 포기한 세대란 뜻이다. 모두 적지 않은 돈을 필요로 하는 소비활동이다. 쿠바의 젊은 세대, 특히 대도시에 몰려 사는 젊은 아바네로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단지 쿠바에서는 소비활동이 사랑의 이름으로 촉진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쿠바에서는 모두가 가난하기에 가난은 흉이 아니다. 젊고 가난한 연인은 손을 잡고 말레꼰을 걷다가, 공원에 앉아서 2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사 먹다가, 각자 부모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 커플이 새 출발을 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아바나의 모든 문제가 총체적 난국이 되어 이들 앞을 가로막는다. 아바나에선 빈 아파트는커녕 빈방도 찾을 수 없고(4월호 주거 편), 정직하게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도 부모에게서 독립할 만한 생활비를 모을 수 없으며(6월호 경제 편), 아이를 키우려니 분유부터 이유식까지 적절한 식재료를 구하는 것도 문제다(2월호 음식 편). 그래서 이들은 분가하지 않는다. 부모부터 오촌까지 모두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 얹혀 산다.

이런 현실적 문제 때문에 아바네로들은 연애만 열심히 한다. 이 연애 활동이 실질적인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긍정적이지 않다. 10년 된 독립 언론 매체인[아바나 타임스(Havana Times)]는 쿠바인의 결혼 케이스가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4분의 1로 떨어졌다고 기록하며(200만에서 50만), 뉴욕 타임스는 쿠바의 이혼율이 이미 10년 전부터 60%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즉, 아바네로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포세대’가 된 것이다.

이포세대에서 탈출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바로 ‘히네떼로’다. 이 단어는 직역하면 ‘말 타는 자’라는 뜻이지만, 쿠바에서 외국인에게 몸을 파는 남자(히네떼로) 혹은 여자(히네떼라)를 지칭하는 은어로 쓰인다. 히네떼로들이 꼭 매춘부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법은 없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합법적으로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배우자란 곧 경제적 조력과 외국 여권이 나온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쿠바인들이 쿠바를 떠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히네떼로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야기하는 생계 문제를 남녀 관계로 해소하려고 한다. 이들은 연애 감정과 성욕 사이에서 모호한 줄타기를 한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맺어준 성관계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매춘 관계일까? 외국인과 쿠바인 사이에 오고 가는 돈은 애인을 위한 원조일까, 아니면 연애 서비스에 대한 가격일까? 대답은 유예될 것이다. 연애가 다 끝날 때까지 말이다.

어쩌면 히네떼로들은 진심과 가식을 구별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마음이나 새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은 어쨌거나 모두 ‘진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쿠바를 찾는 외국인 중에는 이런 상황을 역이용해서 히네떼로에게 성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럴 의도가 없는 쿠바인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일이다.

자, 두 번째 미스터리도 풀렸다. 마냥 자유로워 보이는 아바나의 연애는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 위에서 성립된다. 그래서 이미 수많은 경우를 목격한 하숙집 노부부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포세대에서 탈출하려는 젊은 히네떼로에게 이용당할까 봐, 아니면 미래 계획이 없는 쿠바 청년을 히네떼로의 세계로 유인할까 봐.

혁명으로도 해결 못한 ‘연애의 자유’


▎젊은 부부가 유모차와 갓난아이와 함께 걷고 있다. 쿠바에서 유모차는 값비싼 수입품에 속한다. 그래서 대개 가족이나 친척들끼리 대대로 물려받아 쓰곤 한다.
연애 자체를 기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을 뜯어고치는 것이다. 혁명정부는 적은 비용으로 큰 이윤을 얻는 ‘효율’보다 먼 미래 후손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보고 정책을 편다. 당장 청년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끔 단기적으로 유인책을 내기보다는, 전체적인 삶의 질을 높이는 게 목표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이 정말로 효과를 얻으려면 기다려야 한다. 그 와중에 원동력이 떨어지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는 1959년에 혁명을 일으킨 정부가 반세기 동안 반복해서 확인한 쓰디쓴 진실이다.

혁명정부는 반세기 전에도 이포세대와 히네떼로의 문제와 대면했었다. 쿠바의 시곗바늘을 20세기 초로 돌리면, 사랑과 생식에 진정 자유로웠던 사람들은 아바나의 상류 계층뿐이었다. 아바나 밑바닥에서 미국 카지노 자본을 위해 일했던 노동자들, 혹은 아바나 바깥의 시골에서 살았던 농부들은 기본적인 의료 시설이나 글자 교육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부모의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단지 집안에 노동력을 하나 추가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세대를 잇는 인간대사(人間大事)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가로 삶의 기쁨을 포기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정부는 도농 격차와 빈부 격차부터 좁히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구세대들은 정부가 아무리 우왕좌왕하더라도 지지를 거두지 않는다. 혁명 이전에 평범한 가족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말없이 항의한다. 무료 교육과 무료 의료만으로 삶이 통째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아이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 무기력은 과거와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쿠바인에게 바닷가는 일상이 벌어지는 평범한 공간이다. 드넓은 바다의 풍경을 매순간 마주하는 것이 쿠바인의 야생성을 일깨우는 촉매제가 아닐까.
그 당시 히네떼로 문제는 더 심각했다. 20세기 초반, 카리브해의 파리라고 불리던 아바나는 매춘의 메카로 불렸다. 미국인 남성과 유럽인 남성은 흑인 여성 및 물라따 여성에게 성적 환상을 품었고, 본국보다 더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섹스 투어리즘을 애용했다. 매춘은 가난한 식민지 출신 여성이 일차적으로 밥벌이할 수 있는 직업으로 인식됐다. 혁명 정부는 이런 사회에 메스를 들었다. 매춘을 사회적 병으로 규정하고, 매춘을 알선하는 자들은 강하게 처벌하되 매춘 여성들에게는 직업 교육을 제공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소련이 무너지고 쿠바의 자원이 고갈되자, 생계를 위한 성매매는 부활했다.

나는 연애 문제가 쿠바 혁명이 해결해야 하는 최고 난이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새로 태어날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국가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19세기 말에 뉴욕을 주름잡았던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엠마 골드만은 ‘자연법’이 인간의 모든 법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법이란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를 있는 그대로 실현시키기 위한 법칙이다. 빌딩이 가리지 않는 햇빛, 오염되지 않은 공기, 깨끗한 물, 자연스러운 섹스, 공동체적 육아 같은 것 말이다. 그녀라면 쿠바 혁명 또한 쿠바인들의 자연법 실천을 위해 일어났다고 말할 것이다. 산모가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 아이가 생기 있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혁명의 효과는 같은 방향으로,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강화돼야 하지 않을까?

가난 속에서도 사랑의 노래는 계속된다


▎쿠바 젊은이들의 데이트는 주로 거리에서 이뤄진다. 가난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자유분방한 연애에 머무는 ‘이포세대’ 문제는 수십 년간 해결되지 않는 난제 중 하나다.
이제 마지막이다. 세 번째 미스터리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여기에 정해진 답은 없다. 사실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이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잘못되었다. 사랑은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개인의 마음속에는 사랑에 대한 문화적 표현법, 개인적 감정, 경제적 필요가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다. 쿠바에서는 이 내면적 맞물림이 우리보다 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뿐이다. 때로는 이런 부침을 겪은 자들의 사랑의 크기가 더 넓다는 생각도 든다. 쿠바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진리를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이라도 일단 가족의 테두리에 들어오면 똑같은 사랑으로 품는다. 아내가 전 남편 사이에서 얻은 딸이든, 아버지가 재혼해서 얻은 남동생이든.

어쩌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인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우리에게 힌트를 줄지도 모른다. 장소는 콜롬비아 북쪽 카리브해의 한 도시다. 원주민의 딸 페르난다 다사, 귀족집 아들 우르비노 다사, 저잣거리 사생아인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이곳에서 사랑의 삼각 관계를 형성한다. 신분 상승이 필요했던 페르나다는 상류층인 우르비노와 결혼하고,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평생 홀아비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이런 세속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들의 사랑이 진짜라고 말한다. 페르나다는 남편과 끝까지 생을 함께함으로써 이를 증명하고,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죽을 때까지 페르나다를 기다리며 이를 증명한다.

카리브해의 또 다른 도시, 아바나. 제1세계는 풍요 속의 불만족에 시달리고 제3세계는 빈곤 속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오늘날, 이 도시는 양쪽의 결핍을 모두 품고 있다. 아바나의 사랑은 사회적 모순과 금전적 계산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간의 유대와 사랑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이 결핍의 시대에 쿠바인들은 여전히 진지하게 같이 사는 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그 결핍을 메우는 데 가장 좋은 접착제는 아마도 타인을 사랑하고픈 진심 어린 마음일 것이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 [뉴욕과 지성-뉴욕에서 그린 나와 타인과 세상 사이의 지도]가 있다.

201809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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