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대중문화 트렌드] 과로사회 반작용일까? ‘여행 예능’ 전성시대 

돈 없고, 나이 먹어도 나도 한번쯤 ‘스테이케이션’을 꿈꿔!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의 아날로그적 삶의 욕구 저격…주5일제, 52시간 근무제 확산과 맞물려 원하는 이상과 로망에 대한 탐색

▎여행 예능의 원조격인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사진캡처·tvN
30대 직장인 은영씨는 틈날 때마다 항공권 앱을 들어가 보는 것이 취미다. 여행지를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앱에는 ‘어디로 떠날지 고민이십니까?’라는 메시지와 함께 ‘모든 곳’(everywhere)이 자동 입력된다. 여행 기간을 임의로 쳐 넣자 일본·태국·그리스·네덜란드·노르웨이·뉴칼레도이나 등으로 가는 최저가 항공권이 쏟아진다. 은영씨는 ‘어디론가’를 넣고 검색하는 순간부터 마음이 들뜨고 해방감을 느낀다. 답답한 회사 생활과 일상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잠시나마 충족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 그녀가 또 하나 즐겨보는 것이 바로 여행 예능 프로그램이다. 방송사마다 황금시간대에 방송되고, ‘틀면 나와서’ 안 볼래야 안 볼 수도 없지만 일상을 탈출하고 싶을 때 여행 예능처럼 대리 만족을 주는 것도 없다. 사실 연예인들이 나와서 신변잡기를 늘어놓거나 자기네들끼리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예능에는 취미를 잃은 지 오래. 물론 여행 예능에도 연예인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 정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이국적인 풍광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은영씨는 “언젠가는 저곳도 가보리라”라는 마음을 품고 오늘도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시킨다.

사실 여행 프로그램은 과거에 주로 예능보다는 교양의 영역에서 다뤄지던 아이템이었다. 여행 프로그램의 스테디셀러인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EBS의 [세계 테마 기행]처럼 주로 역사 유적지나 문명의 발상지 등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프로그램이 대다수였다. 성우의 안내 멘트나 안내자의 여행 루트를 따라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정보의 전달 위주의 다소 단조롭고 딱딱한 구성이 많았다.

방송계에서 여행을 예능 소재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7월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다.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꽃미남 F4를 패러디한 ‘평균 연령 76세 H4’의 황혼의 배낭여행이라는 콘셉트는 여행과 예능의 성공적인 공존을 알렸다. 이 시리즈는 tvN의 케이블적인 한계를 넘어서 지상파 못지 않은 높은 시청률을 보였고, 온라인상에서도 다시보기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매출 2억원을 돌파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꽃보다 누나] [꽃보다 청춘] 등 인기 연예인이 등장하는 ‘꽃보다 시리즈’는 여행 예능의 원조로 자리 잡았다. [꽃보다 할배]는 미국에서 리메이크 된 첫 한국 예능으로 미국 NBC에서 [베터 레이트 댄 네버(Better Late Than Never)]라는 제목으로 방송됐고, 올 초 시즌2까지 제작됐다.

떠나지 못한다면 TV에서라도 대리만족


▎JTBC [효리네 민박]은 자연친화적 삶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방송계의 관점에서 보면 예능에서 스튜디오 토크쇼가 사라지고 야외 버라어이티로 대세가 옮겨가면서 여행 예능은 더욱 각광받았다. 과거 게임 위주의 야외 버라이어티쇼는 최근 대부분 여행 버라이어티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했다. 화려한 볼거리와 여행 정보는 기본. 여기에 출연자들의 케미까지 더해지면서 ‘여행 예능’은 TV 기피자들도 보게 되는 ‘예능 종합세트’로 떠올랐다.

‘꽃보다 할배’의 성공 이후에는 각종 지상파와 케이블TV의 편성표에 한두 개쯤 여행 예능이 등장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여행 예능’이 대세로 떠올랐다. 오지로, 사막으로,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 예능은 어느새 먹방과 쌍벽을 이루는 방송과 흥행 불패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주말 프라임 시간대에 편성되는 것은 예사, 시청률도 높아 장수하는 여행 예능도 등장했다.

한국인들이 여행 예능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헬조선’ ‘과로사회’ 등의 단어가 부상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대학 입시와 취업 스트레스, 직장 내 과로로 시달리던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외치며 해외로 눈을 돌렸고, 과로사회에 지친 직장인들도 ‘느리게 살기’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를 외치며 여행을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스트레스의 해방구로서 여행을 가장 먼저 떠올렸고, 떠나지 못한다면 TV에서라도 대리만족을 하기 원했다.

이에 앞서 서점가에서는 ‘한 달 살아보기’ ‘1년 살아보기’ 등을 다룬 책이 쏟아지면서 ‘스테이케이션’ 열풍이 불었다. ‘스테이케이션’은 머물다(stay)와 휴가(vacation)를 합성한 신조어로서 주마간산식 여행이 아니라 한 곳에서 살면서 그곳의 문화를 충분히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스테이케이션은 본래 집이나 집 근방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뜻하지만 최근에는 여행 중 한 곳에 머물며 현지인처럼 살면서 현지 문화를 만끽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단순히 관광의 개념을 넘어 ‘과로사회’를 탈출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눈길을 준다. 기저에는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정답인가?” “누구를 위한 과로인가?”에 대한 질문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국내외의 여행지에서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경험하면서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람들의 심리를 가장 먼저 ‘귀신같이’ 잡아낸 사람이 바로 나영석 PD였다. 그는 [꽃보다 할배]의 성공 이후 2014년 10월 [삼시세끼]를 처음 론칭했다. 그는 정선, 고창 등 농촌 편에 이어 어촌 편까지 총 7기에 걸쳐 농촌과 어촌을 돌며 [삼시세끼]를 선보였다.

나 PD는 처음부터 “도시적인 두 남자가 자연의 시간에 맞춰 생활하는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대리만족을 자극하겠다”고 선언했고, 이서진과 옥택연처럼 도시적인 이미지의 연예인들을 등장시켰다. 삭막한 회사 생활에 지친 직장인들은 ‘불타는 금요일’에 술집이 아니라 맥주 한 캔을 사 들고 TV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삼시세끼]는 나 PD의 말처럼 자연 속에서 먹고 자면서 느리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줬고 젊은 층부터 중장년층까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도시의 빌딩숲 속에서 어디론가 떠나고 숨통을 트이고 싶어 하는 이들의 아날로그적인 삶에 대한 욕구를 그대로 저격한 것이다. 사실 도시의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씨 뿌려서 밥을 해먹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판타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삼시세끼]는 농촌과 어촌의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면서 요리와 토크쇼를 접목해 자연스럽게 대리만족을 시켰다.

‘놀며 쉬며 일하며’ YOLO족을 겨냥


▎16%대의 시청률을 기록한 tvN [윤식당]은 야근도, 과로도 없다. / 사진캡처·tvN
이 같은 ‘스테이케이션’ 열풍으로 중장년들은 강원도에 세컨드 하우스를 만들어 놓고 주말에 산과 바다를 즐기고, 아예 도시를 벗어나 ‘제주도의 푸른 밤’을 꿈꾸며 제주도로 삶의 근거지를 아예 옮기는 젊은 층도 증가했다.

‘과로 사회’를 벗어나고 싶은 도시 사람들이 꿈만 꾸던 생활을 현실로 옮긴 대표적인 이가 바로 이효리다. 인기 걸그룹 멤버를 거쳐 대한민국 최고의 섹시 아이콘으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이효리는 동료 가수 이상순과 결혼한 이후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다. 더 많이 가지고 더 화려하게 살 수 있었던 그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주도로 내려와 자연을 이불 삼아, 동물을 벗 삼아 산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JTBC 여행 예능 [효리네 민박]은 그런 그녀의 자연친화적,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을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제안하면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효리네 민박]은 국내에서 스테이케이션 선호지 1위로 꼽히는 제주도에서 일찌감치 욜로족의 삶을 살고 있는 가수 이효리·이상순 부부의 제주도 신혼집에서 살아보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즌2까지 방영될 정도로 높은 호응을 얻었다. 시즌1에서는 제주도의 푸른 여름을, 시즌2에서는 하얀 겨울과 푸릇푸릇한 봄을 담았다. 이 프로그램은 이효리와 이상순이 민박집 사장 부부로 나오고 아이유, 윤아, 박보검 등이 알바생으로 등장하며 제주도 여행객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시즌2의 민박 신청자가 20만 명에 달했고 시즌2의 7회 방송분의 시청률은 10.8%를 기록해 JTBC 역대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효리네 민박] 촬영지인 애월읍, 곽지 해수욕장에 관광객들이 몰렸고, 이효리 부부는 사생활 침해 문제로 인해 결국 JTBC에 제주도 집을 매각할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저 오늘 떠나요 공항으로/ 핸드폰 꺼 놔요/ 제발 날 찾진 말아줘… Take me to new world anywhere… 어디든 답답한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자유롭게 fly fly 나 숨을 셔 /저 이제 쉬어요 떠날 거에요.”

최근까지 음원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가요계를 강타한 ‘볼 빨간 사춘기의 ‘여행’이다. 지난 휴가철에는 국내 어느 휴가지의 카페를 가든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과로와 야근에 지친 직장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대리만족을 자극했다.

여행 예능이 방송가의 키워드로 떠오른 이유는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보고 느끼면서 찬찬히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목표 지향적인 한국 사회에서 속도보다 방향성을, 효율성 보다는 느리게 살기를 하고 싶은 욜로족은 한 번뿐인 인생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이처럼 욜로족들은 미래를 위해 자신이 꿈꾸는 삶을 미루기보다는 지금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이상과 로망을 실현하며 살기를 원한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하고픈 연예인들


▎천혜의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 올리브TV [섬총사]. / 사진캡처·올리브TV
tvN [윤식당]은 이런 욜로족들을 겨냥한 여행 예능 프로그램이다. [윤식당]은 따뜻한 휴양지인 발리 근처의 한 섬에서 윤여정, 신구, 이서진, 정유미가 한식당을 차리고 관광객들에게 우리 음식을 파는 과정을 담았다. 이 [윤식당]에서는 누구나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논다. ‘까라면 깐다’는 가부장적인 위계질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예능 프로그램의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 매출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정말 하고 싶은 음식을 만들고, 재밌게 즐기면서 일한다. 정해진 근무 시간 외에는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관광지에서 여유를 즐긴다. 야근도 없고 과로도 없다. [윤식당]은 답답한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일도 하고 휴식도 즐기고 싶은 시청자들의 로망을 제대로 자극했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현대인들 모두의 로망”, “힐링이 돼서 몇 번씩 다시 보게 된다”는 소감은 물론 음식 자영업자들의 의견, 다음 촬영지 제안 등이 쏟아졌다.

그 결과 [윤식당]의 시즌1 시청률은 14.1%, 스페인의 가라치고에서 촬영한 시즌2는 최고 16%가 나오는 등 높은 인기를 누렸다. 제작진은 “해외의 휴양지에서 식당을 열고 낮에서 일하고 밤에는 쉬면서 안분지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걸 알지만 해외에서 작지만 예쁜 식당을 열어 번 돈으로 살아 보고 싶은 시청자들에게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말했다.

현재 시즌2가 방영중인 올리브TV의 [섬총사]도 도시를 벗어나 섬에서 한가롭게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을 겨냥한 여행 예능으로 인기를 모았다. 이 프로그램은 SBS [강심장] 등을 제작한 스타 PD인 박상혁 CP가 CJ E&M으로 이적한 뒤 처음으로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박 CP는 평소 절친한 강호동이 “그동안 예능인으로서 일에 파묻혀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왔지만 한가로운 섬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섬총사]를 기획했다.

[섬총사]에서 강호동, 김희선, 정용화는 섬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자신들이 그동안 진짜 하고 싶은 일들을 해 보는 욜로족으로 변신했다. 강호동은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기타를 배웠고, 김희선은 갈고 닦은 목공예 실력으로 섬 어르신들에게 선물할 의자를 만들었다. 정용화는 동네 강아지들을 모아 자전거로 해변을 산책하며 자연을 만끽했다. 제작진은 예능이 아닌 다큐의 시선으로 드론 및 수중 촬영을 통해 자연을 담고, 섬마을 사람들과 출연자들의 교감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섬총사]는 비슷비슷한 여행 예능 속에서도 섬이라는 다소 외딴 공간과 사람의 손길이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과 사람의 공존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이 우러나다 보니 김희선이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시즌2의 캐스팅 당시 많은 여배우들이 출연 의사를 밝혔다. 시즌2에서는 강호동과 이수근과 함께 호흡을 맞출 여배우로 이연희가 낙점됐다. 청순가련형의 대명사였던 이연희는 이 프로그램에서 민낯 공개 등 털털한 모습으로 기존의 깍쟁이 같은 이미지를 벗는 데 성공했다.

방송 전문가들은 여행 예능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일속에 파묻혀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 ‘과로 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려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설명한다. [섬총사]의 연출을 맡고 있는 박상혁 CJ E&M CP는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스케줄에 맞춰 여러 곳의 관광지와 맛집을 탐방하는 데 의의를 두는 여행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체험하며 천천히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스테이케이션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교석 대중문화 평론가는 “일상을 넘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대리만족을 주는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팍팍한 현실을 잊게 해 주는 느리게 살기를 통해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핵심”이라고 풀이했다.

세대를 초월한 전 국민적인 여행 붐


▎박나래, 장도연 등 예능인들이 출연한 KBS [배틀트립]./ 사진캡처·KBS
과거 해외여행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주5일제, 52시간 근무제가 확산되고 일과 휴식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세대를 초월한 전 국민적인 여행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저가 항공(LCC)의 폭발적인 증가세는 엄청난 여행 수요를 창출했다. 저가항공 업체들은 부가 서비스를 유료화해 기본 운임을 낮춘 대신에 비수기에 파격적 할인 행사를 열면서 항공사 운임료가 대폭 낮아졌고, 저렴한 표가 있다면 무조건 떠나고 보는 이들도 많아졌다. 때문에 이제 여행업계에서는 뚜렷한 성수기와 비수기가 없어졌고, 인천국제공항 이용객도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여행을 일상처럼’이라는 한 LCC 업체의 슬로건처럼 여행의 일상화, 대중화가 되면서 여행비의 가성비를 중시하는 여행 프로그램들이 줄을 이었다. KBS [배틀트립]과 tvN [짠내투어]가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은 주말의 한가운데인 토요일 밤, 여행은 가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젊은 시청자들을 집중 공략했다.

KBS [배틀트립]은 특정 주제로 여행을 다녀온 2인1조 연예인들이 서로 다른 여행 루트로 경쟁하는 프로그램으로 2016년 첫 방송을 시작해 2년 넘게 방송되는 장수하고 있다. 인기 드라마들이 즐비한 치열한 밤 9시 주말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시청자층을 확보한 것은 색다른 여행 루트뿐만 아니라 저렴한 경비 대결로 ‘가성비 높은’ 여행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배틀트립]은 30개국이 넘는 국가의 여행지를 소개했고, 베트남 다낭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배틀트립]을 연출하는 손지원 PD는 한 강연에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여행 키워드는 “가성비, 인증샷, 소확행”이라면서 “싸고, 음식 맛있고, 사진 예쁘게 나오고,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세상이 학교다, 인생이 여행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배틀트립]은 이처럼 가성비에서 차별성을 두면서 2년간 장수했다. 손PD는 “가격정보를 주고 시청자들이 따라하기에 무리가 없는 여행지를 소개해 드렸던 부분이 강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관계나 사건 중심보다는 가격 정보 및 가성비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차별성을 뒀다”고 말했다.

가정에서 소외된 40~50대 가장들도 여행 예능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섰다. 바로 JTBC [뭉쳐야 뜬다]다. 이 프로그램은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며 ‘나만을 위한 시간’을 잊은 채 달려온 40대 가장들의 패키지여행 프로그램. 김용만, 김성주, 안정환, 정형돈 등 40대 남성 예능인들을 출연진으로 내세운 이 프로그램은 2016년 11월에 첫 방송된 이후 치열한 예능 프로그램의 전쟁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국내는 물론 동남아에서 서유럽, 아프리카, 미국 서부, 캐나다, 두바이 등 다양한 여행지의 정보뿐만 아니라 40대 ‘아재’들의 여행기로 독특한 케미로 일요일 밤 황금 시간대를 공략하고 있다.

이색 여행지 대결… 연예인 특혜 논란 불거지기도


▎ JTBC [비긴 어게인]은 해외에서 버스킹을 하는 콘셉트로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각 방송사별로 여행 예능 프로그램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최근에는 이색 여행지로 승부수를 띄우거나 특정 테마를 내세운 여행 예능 프로그램도 줄을 잇고 있다.

대표적인 오지 탐험 프로그램은 바로 SBS [정글의 법칙]이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극한 상황의 간접 체험에 가깝다. ‘무한도전’의 무인도 특집에서 콘셉트를 따와 김병만을 주축으로 이른바 ‘김병만 족(族)’이라 칭해진 멤버들이 아프리카 등 오지에서 ‘생존’을 위한 체험을 하는 콘셉트로 장수하고 있다. 지난 6월 첫 방송한 KBS 2TV [거기가 어딘데??]는 예능 최초로 아라비아 사막을 횡단에 도전했다. 지진희를 탐험 대장으로 한 차태현, 조세호, 배정남 등은 탐험대원들은 낮 평균기온이 40℃에 육박하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지도와 나침반만을 의지한 채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음악 예능에도 이색 여행지를 결합한 프로그램이 대세다. JTBC [비긴 어게인]은 해외에서 버스킹을 하는 콘셉트로 시즌1에서는 영화 [원스]의 배경인 아일랜드를 비롯해 영국 맨체스터, 스위스 몽트뢰 등 서유럽의 아름다운 다운 배경으로 이소라, 유희열, 윤도현 등이 버스킹에 나섰고 시즌2에서는 포르투갈의 포르투와 리스본을 비롯해 헝가리 등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김윤아, 박정현 등 여성 보컬들이 길거리 버스킹에 나섰다.

그런가 하면 여행과 교육을 접목한 에듀케이션형 예능도 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은 국경을 접한 두 나라의 닮은 듯 다른 역사와 문화, 예술을 직접 경험하는 프로그램으로 김구라, 이시영 등이 출연한다. 스타 역사 강사 설민석이 출연자로 등장해 마치 여행사의 가이드처럼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 세계사에 관한 정보를 전한다.

뿐만 아니라 일부 연예인은 물론 그들의 가족들까지 고가의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은 일종의 특혜가 아니냐며 여행 예능에 대한 일부 곱지 않은 시각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영석 PD도 [꽃보다 청춘] 시리즈 제작 때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준다는 지적에 시청자들과 함께하는 [꽃보다 청춘] 시리즈를 기획하기도 했다.

사실 연예인이라고 해서 많은 공짜로 여행을 가면서 그것에 대한 출연료를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시청자들도 있다. 게다가 고가의 해외여행과 외국에서 즐기는 것들이 각종 간접광고(PPL)와 협찬으로 이뤄진 것이란 사실도 때로는 씁쓸함을 안겨 준다. 전문가들은 감성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 여행 예능이 시청자와 제대로 교감하지 못하거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아 연예인끼리 여행을 떠나는 ‘그들만의 리그’로 비칠 때 위화감을 조성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대중문화평론가 김교석씨는 “시청자에게 감정이입이 아니라 위화감을 조성해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은 현대인들이 기존에 학습된 성공의 궤도에 의문을 품으면서 삶의 다양성과 성공의 기준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데 따른 것”이라면서 “대리 만족적 즐거움을 문화 콘텐트로 소비하고 있지만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보여 주기식이나 수박 겉핥기로만 흐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 이은주 서울신문 기자 erin823@naver.com

201809호 (2018.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