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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진짜 서울’ 찾아 나선 문헌학자의 기록 

사대문 밖에도 역사가 있다 

정헌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변두리에서 발견하는 ‘500년 역사도시’의 진면목…박제된 유적에서 적통(嫡統) 찾으려는 강박증 깨야

▎서울 선언 /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1만8000원
서울을 포함해 인천·부천·성남·안양·고양 등 서울에 인접한 도시의 인구수를 모두 합하면 2000만 명에 육박한다. 한국의 총 인구가 5000만 명이 조금 넘으니, 전체 한국인의 40%에 달하는 사람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모여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서울에 관한 미디어나 학계의 담론을 보면 ‘진짜 서울’의 이미지를 생각보다 좁은 시공간 범위로 상정하는 모습을 쉽게 접한다. ‘서울의 역사적 정체성’이나 ‘600년 고도 서울’과 같은 표현을 통해 은연중에 우리는 사대문 안쪽, 아니면 기껏해야 서울역 등 사대문 주변의 주요 장소만을 진짜 서울이라 여기곤 한다. 간직해야 할 역사유적을 고민할 때도 그 기준은 주로 경복궁이나 창경궁 같은 궁궐과 육조거리, 한양성곽 등 조선시대의 산물에 국한된다. 이를 통해 도시로서의 서울에 부여되는 정체성은 공간적으로는 사대문 안쪽과 근방, 시간적으로는 조선시대로 좁혀진다. 이 과정에서 배제되는 건 어떤 형태로든 서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온 무수히 많은 사람의 실제 삶과 기억이다.

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선언]은 이처럼 서울의 정체성을 사대문 안에서만 찾는 시선을 비판하고, 왕조국가 조선의 지배층이 아닌 공화국 시민의 공간으로 서울을 볼 것을 제안한다. 얼핏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문헌학이라는 분야와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에 관한 탐구는 걷기를 수반한 답사를 통해 결합된다. 마치 먼지로 덮인 낡은 고문헌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사료를 발굴하듯이, 평범한 공간을 걸으며 각지의 작은 이야기들을 포착하려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점에서 저자가 문헌학자로서 행한 도시 답사는, 현장에 직접 머무르며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인류학자의 현장연구와도 닮았다.

책에서 저자는 잠실에서부터 부천, 안양 등 서울에 인접한 도시들을 거쳐 다시 반포와 종로, 광화문 등 도심까지, 자신의 기억 속 공간에 대한 추억들을 풀어낸다. 이어서 청계천에서 출발해 남쪽 남산과 용산, 영등포 등을 거쳐 목동과 시흥 등지를 직접 걸으며 답사한 내용을 최근의 모습과 함께 소개한다. 조선시대까지 사대문 안팎에 불과했던 한양이라는 옛 도시가 경성, 그리고 서울로 이름을 바꾸며 확장해 온 역사적 변화는 저자가 직접 걸으며 찍은 천연색 사진들과 함께 생생히 눈앞에 펼쳐진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책 전반에 드러나는, 서울이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서 지워진 존재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다. 이를테면 해방 이후 고도성장 과정에서 당장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위해 파괴된 유산들, 멀리 삼국시대 초기 한성백제의 유적이나 근·현대 시기의 기억을 담은 건축물의 흔적들은 역사적으로 재조명된다. 이와 관련해 외국에 비해 한국의 도시에 남은 유물이나 유적이 부족한 현실에 대해 남 탓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특히 귀 기울일 만하다.

또한 엄연히 서울을 둘러싼 역사적 삶의 현장에 실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사회나 정치권력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되어 온 사람들 역시 다시 목소리를 부여 받는다. 역사는 현재의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초라하다 여기는 건 숨기면서 쉽게 낭만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남긴 크고 작은 흔적을 품고 있는 일상의 도시공간이 바로 그 증거다. 가공된 역사의 이상향을 넘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로서 한국의 도시를 이해하는 논의가 더욱 많아지길 희망한다.

※ 정헌목 - 도시공간과 주거, 공동체를 연구하는 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류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와 [마르크 오제, 비장소]를 냈다.

201809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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