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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21)] 일본, 조선 압박해 제물포조약 체결 

임오군란 책임자 처벌 등 7개 조항 요구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상황만 허락되면 즉각 전쟁 일으키겠다며 별러…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 심화로 반청 감정 고조돼

▎제물포조약(1882년) 체결 22년 후인 1904년 제물포의 모습.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포구가 크게 붐비고 있다.
임오군란 소식을 접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대부분 즉각적인 군사보복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일본 군부의 실세였던 야마가타 아리도모(山縣有朋)였다. 그는 태정대신 산조 사네도미(三條實美)에게 편지를 보내 천황의 영광과 일본의 안보를 위해 이번 기회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런 의견이었다.

하지만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다른 입장이었다. 그 역시 장기적으로는 청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시점에서 일본 해군이 이홍장의 북양 해군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다고 예상했다. 게다가 조선이 구라파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직후 시점에서 일본이 먼저 전쟁을 도발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 청나라 편을 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즉 이와쿠라는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기에는 아직 군사적·외교적 준비가 미흡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와쿠라는 즉각적인 군사 보복 대신 외교적 해법을 주장하면서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해군력을 대폭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도 메이지 천황은 이와쿠라의 의견을 존중해 외교적 해결을 명령했다. 외교 담판을 맡게 된 하나부사 요시토모(花房義質)는 4척의 군함에 분승한 1500여 병력과 함께 조선으로 갔다. 그때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로부터 훈조(訓條)를 받았는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군란 주동자들이 조선정부를 적대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정부를 적대한 것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상황을 조사하고 각각의 경우에 따라 대응조치를 마련한다. 둘째 군란이 재발해 또다시 일본인을 공격한다면 조선정부의 대책과 관계없이 군사력으로 진압한다. 마지막으로 조선 정부에서 하나부사를 접대하지 않거나 일본의 요구사항을 무시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경우 인천항으로 돌아와 적당한 지점을 점령하고 전쟁에 대비한다.

이와 같은 훈조는 당시 일본정부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당장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전쟁을 도발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허락하기만 하면 곧바로 전쟁을 도발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청나라 “조선 내 일본군 주둔은 불가”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정치가 이와쿠라 도모미.
한양에 도착한 하나부사는 임오군란이 조선정부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관계는커녕 고종 자신이 임오군란의 최대 피해자였다. 왕비 민씨를 비롯해 고종 측근들이 대거 살해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양에는 난병들이 왕비를 핍박해 음독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고종은 대원군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유폐 상태였다. 그런 고종을 상대로 임오군란 책임을 추궁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하지만 하나부사는 그런 고종을 상대로 임오군란 책임을 추궁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그동안 일본이 관철하고자 했던 국가이익을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나부사는 임오군란의 책임자 처벌, 배상, 재발방지라는 명목으로 7개 조항을 고종에게 요구했다.

첫째 15일 이내에 책임자를 체포해 처벌할 것, 둘째 사망자들을 예우해 장례를 치를 것, 셋째 유족에게 5만원의 위로금을 지불할 것, 넷째 일본에 손해배상금을 지불할 것, 다섯째 부산·원산·인천의 일본인 활동영역을 100리로 확대하고 함흥·대구·양화진에서 일본인의 통상을 허락할 것, 여섯째 일본 외교관의 자유로운 조선 여행을 보장할 할 것, 일곱째 일본 공사관에 호위 병력을 주둔시킬 것이다.

그런데 7개 조항 중 다섯째와 여섯째는 임오군란과 아무 관계없는 요구사항이었다. 오히려 강화도조약 이후로 일본정부가 집요하게 요구하던 외교 현안이었다. 예컨대 인천의 경우 일본은 집요하게 개항을 요구했지만, 조선정부는 한양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하나부사는 이번 기회에 인천을 개항시키는 것은 물론 부산·원산·인천에서 일본인의 활동 영역을 100리로 확대하고자 획책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이 함흥·대구·양화진까지 개항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 외교관의 자유로운 조선 여행을 요구함으로써 조선 전역을 일본의 영향권 안에 묶어 두고자 했다.

고종은 이유원과 김홍집을 조선 측 대표로 임명해 하나부사와 협상케 했다. 형식적으로 협상 대표자는 이유원이었지만 실제 협상은 김홍집이 담당했다. 따라서 7개항 협상은 하나부사와 김홍집 사이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근대 외교협상 경험이 없던 김홍집은 사사건건 마건충에게 조언을 구해야 했다. 예컨대 김홍집은 하나부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마건충을 찾아 7개 조항을 토론하면서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때 마건충은 둘째와 여섯째는 수용할 수 있지만 일곱째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마건충이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한 일곱째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이었다.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면 청나라 역시 무슨 명분을 들어서라도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려 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청·일 간의 군사충돌로 이어질 것이란 예상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건충은 일본군의 조선 주둔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나머지 요구사항은 절충하는 게 좋겠다는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를테면 첫째 요구사항인 15일은 너무 촉박하니 좀 더 기간을 연장할 것, 셋째와 넷째는 액수를 최대한 낮출 것 그러고 다섯 째 중 함흥·대구는 절대 허락하지 않되 그 외는 적당히 수용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일본의 7개 요구 사항 중에서 마건충은 군사 주둔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김홍집은 그것보다는 넷째의 손해배상 문제를 더 걱정했다. 하나부사가 액수를 명시하지 않았는데, 만에 하나 터무니없이 높게 부를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어느 정도에서 타협해야 할지 걱정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의 재정 상황이 너무나 열악하다 보니 군사 문제보다 돈 문제가 더 시급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마건충은 하나부사가 상식선에서 요구할 것이라며 많아야 5만원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조선정부의 1년 예산이 일본 돈으로 환산해서 약 150만원 정도 됐는데 유족 위로금 5만원과 손해 배상금 5만원을 합한 10만원은 비록 적지는 않다고 해도 감당할 만한 액수였다.

그런데 막상 협상을 시작하자 하나부사는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요구했다. 조선정부 1년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김홍집이 무슨 근거에서 50만원인가 하고 따지자 군란을 막지 못한 것은 조선정부의 책임이고 그 책임에 대한 벌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부사는 만약 조선정부에서 50만원을 상환하기 어려우면 광산 채굴권을 넘기라고 했다. 일본이 스스로 광산을 개발해 50만원을 채운 뒤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또 조선정부의 재정이 그렇게 어렵다면 10만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조선의 대일(對日) ‘군사적’ 종속 시작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
자존심이 상한 김홍집은 깎지 않아도 된다고 응수하고 말았다. 결국 김홍집은 함흥과 대구를 통상지로 만드는 것은 거절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함흥과 대구를 거절하자 하나부사는 그 대신 사죄 사절을 파견하라 요구했고, 김홍집은 이를 수용해야 했다.

그 결과 1882년 음력 7월 17일 하나부사·이유원·김홍집 사이에 7개 조항의 ‘조일강화조약’과 2개 조항의 ‘수교조규속약(修交條規屬約)’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제물포에서 체결됐므로 일명 ‘제물포조약’이라고도 했다. 이 조약으로 조선정부는 재정적으로 큰 곤란에 빠지게 됐다. 뿐만 아니라 공사관 호위라는 명분으로 일본군이 한양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조선정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일본정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파견돼 임오군란을 진압한 마건충은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청나라도 제물포조약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바로 1882년 봄에 이홍장과 어윤중 사이에 논의되다가 임오군란으로 중단된 무역협상을 속히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마건충은 귀국길에 어윤중을 동반해 천진으로 함께 갔다. 이홍장과 어윤중 사이에서 논의되던 통상협상을 속히 마무리 짓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난 1882년 2월 17일,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됐던 어윤중은 통상협상을 문의하기 위해 이조연과 함께 청나라에 파견됐었다. 고종은 그들에게 “일본에 대해서는 이미 개항해 통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아직 해금(海禁)을 지키고 있으니 친중국(親中國) 해야 한다는 뜻과 어긋난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이미 개항했으니 서로 무역하고, 장애 없이 왕래하며, 힘써 약속을 지키자는 뜻을 또한 총리아문과 통상대신 이홍장과 논의하라”고 명령했다.

조선은 그동안 청나라와 유사시에만 사신을 파견하는 비상주(非常住)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사신들을 통한 공식 무역관계만 맺고 있었다. 이 같은 외교·통상 관계가 바로 조공책봉체제였다. 고종은 기왕의 조공책봉체제 만으로는 조선과 청나라 양쪽에 모두 불리하다고 판단해 새로운 외교·통상 관계를 맺고자 했던 것이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은 이미 일본과 공사관을 통한 상주 외교관계와 사무역을 통한 자유 무역관계를 맺었다. ‘연미국(聯美國)’에 입각해 수호조약을 추진하는 미국과도 곧 같은 관계를 맺을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조선과 청나라는 전통적인 조공책봉체제만 고집하고 있었다. 고종은 청나라와도 상주외교와 자유무역 관계를 맺는 것이 양국에 유리하다는 점을 내세워 청나라를 설득하려 했다. 청나라를 설득한 후 고종은 조선도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북경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외교관을 상주시키려 했다. 또한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개항장에서 조선 상인들이 자유로이 무역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결국 기왕의 사대관계를 버리고 근대적인 조약관계를 수립하자는 의미였다. 문제는 청나라의 반응이었다.

어윤중과 이조연은 3월 28일 천진에 도착해 영선사 김윤식을 만났다.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은 모친상을 당해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4월 3일부터 어윤중은 천진해관도 주복(周馥)을 상대로 외교·통상 문제를 논의했다. 어윤중이 제시한 핵심 사항은 다음의 네 가지였다.

첫째,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이 가능하다면 세부사항은 청나라에서 결정해도 좋다. 둘째,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 무역은 러시아 때문에 불안하니 폐지하는 것이 좋다. 셋째, 상주외교를 시작하면 사은사·진주사 등의 사신 파견이 불필요하지만 혹 황제의 명령이 있다면 파견할 수 있다.

넷째, 상주외교를 시작하면 조선 파견 사신에게 중국에서 경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다. 주복은 자유무역에 대해서는 별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주외교에 대해서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주복은 조선이 상주외교를 요구한다면 청나라 안에서 분명 논란이 제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상주 외교에 관한 문제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어윤중은 이홍장을 대신해 북양대신으로 있던 장수성을 찾아갔다. 장수성 역시 주복과 같은 반응이었다. 장수성은 조선과의 상주외교 문제는 북경의 예부 소관이니 그곳으로 가서 논의하라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미국·영국·독일과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4월 21일에 천진을 출발한 어윤중은 23일 북경에 도착했다. 다음 날 어윤중은 예부에 상주외교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는 청나라 조정에 큰 논쟁을 불러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에서 요구한 상주외교는 거부됐다.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의 상주외교 요구를 조공책봉체제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로 판단했다. 그래서 청나라 관료들은 조공책봉체제 안에서만 조선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조선과의 외교·통상을 모두 예부에서 관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까지 조공책봉체계에 집착한 서태후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이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기념사진.
하지만 서태후는 약간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청사고]에는 ‘조선이 사신을 북경에 상주시키겠다고 요청했지만 허락하지 않고, 오직 개항 항구에서의 무역만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서태후가 상주외교 요구는 거절하고 자유무역 요구는 허락하되 그 관할을 예부가 아니라 총리아문에서 담당하게 했다는 뜻이다.

서태후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고종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였다.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을 요구하는 고종이 만약 거절됐을 때를 대비해 어떤 복안을 준비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서구열강의 경우 청나라에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을 요구하면서 거절될 경우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했었다.

실제로 서구열강은 그렇게 했다. 지금 고종은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거절될 경우 고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서구열강처럼 무력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에 실망한 고종이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미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상황이라 일본에 밀착될 가능성도 있었다.

서태후는 조공책봉체제를 지키면서 최대한 고종의 요구를 들어주려 했다. 즉 형식적인 상주외교만 거절했지, 사실상 조선과의 자유무역을 총리아문에서 관장하게 함으로써 조선이 자유무역을 핑계로 북경에 외교관을 상주시킬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와의 자유무역 문제를 관장하기 위해 조선 외교관이 북경에 상주하며 총리아문과 업무 협의를 하게 되면 당연히 의전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외교관이 서구열강의 외교관과 동일한 의전을 요구하면 그것은 결국 조공책봉체제의 와해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청나라가 종주권을 내세워 조선 외교관에게 차별적인 의전을 요구하면 서구열강의 외교관들이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미국·영국·독일 외교관들은 자신들과 대등한 조선 외교관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의전을 행할 경우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예부와 총리아문에서는 서태후에게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 문제가 복잡해지자 서태후는 이홍장이 판단해서 처리하게 했다. 어윤중은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다시 천진으로 갔다. 5월 4일 북경을 출발한 어윤중은 다음날 천진에 도착했다. 어윤중은 김윤식을 만나 상주외교 문제를 의논했다. 강하게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어윤중은 출국할 때 고종으로부터 ‘사대의 예절은 마땅히 더욱 정성껏 해야 하지만 형식에 매여 백성과 나라에 폐단이 되는 예절은 구례에만 안주할 수 없다’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은 생각하기에 따라 상주외교를 반드시 관철시키라는 뜻도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만약 ‘백성과 나라에 폐단이 되는 예절은 구례에만 안주할 수 없다’는 면만 생각하면 상주외교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했다.

하지만 ‘사대의 예절은 마땅히 더욱 정성껏 해야 한다’는 면만 생각하면 굳이 상주외교를 관철하지 않아도 됐다. 결국 어윤중과 김윤식은 청나라의 뜻에 따라 처리하자는 것으로 정리했다.

당시 이홍장은 조선과의 외교와 통상을 분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외교는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북경의 예부에서 담당하고, 통상은 천진의 북양아문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과의 자유무역을 북경의 총리아문에서 담당하게 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청나라와의 자유무역 문제를 관장하기 위한 조선 외교관이 북경 아닌 천진에 상주하면 의전 문제로 서구열강의 외교관들과 다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외교·통상 분리로 해법 찾으려 한 이홍장


▎명성황후 민자영의 소싯적 모습. 그는 44세이던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자객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5월 14일 김윤식은 주복을 만났다. 그때 주복은 ‘수백 년간 지켜온 규칙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다’고 했다. 북경에서의 상주외교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또 자유무역도 북경의 총리아문에서 담당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천진의 북양아문에서 자유무역을 담당할 테니 양해하라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김윤식은 “상주외교는 원래 번거롭게 요청할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북경에서의 상주외교를 반드시 관철시킬 의도로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실토한 셈이었다. 그때 김윤식과 어윤중이 북경에서의 상주외교를 강하게 요구했다면 이홍장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알 수 없다. 쉽게 응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거절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약 거절될 경우 조선은 청나라와의 단교도 각오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면 최소한 처음에 서태후가 결정한 대로 자유무역을 북경의 총리아문에서 관장하는 정도로 타협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윤중이나 김윤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고종의 명령이 강력하지 않았고 또 그들의 인식이 아직 중화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어윤중이나 김윤식은 청나라의 종주권이 궁극적으로 조선에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을 벌이는 상황에서 만약의 경우 조선이 청나라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어윤중이 이홍장과 더불어 자유무역 문제를 협의하던 중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어윤중과 김윤식은 결말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청나라 군사를 따라 6월에 조선으로 귀국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자유무역은 임오군란이 수습된 후에야 결말을 불 수 있었다.

다시 문의관에 임명된 어윤중은 8월 12일 한양을 떠나 천진으로 향했다. 마건충과 함께였다. 8월 17일 천진에 도착한 어윤중은 다시 주복·마건충 등을 상대로 자유무역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그동안 상황은 확 바뀌어 있었다. 한양에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 중이었다. 서태후나 이홍장은 더 이상 조선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나 강화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을 직접 식민통치하는 일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윤중이 천진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8월 16일에 한림원 시강(侍講) 장패륜(張佩綸)이 이른바 ‘동정선후 6책(東征善後六策)’이라는 상소문을 서태후에게 올렸다. 요지는 일본을 정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청나라의 속국이던 유구를 병탄하고 이제 또다시 조선에까지 손을 뻗치는 일본을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장 정벌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정벌 원칙을 세우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자고 했다. 장패륜은 동정에 필요한 6가지로서 이상정(理商政), 예병권(預兵權), 구일약(救日約), 구사선(購師船), 방봉천(防奉天), 쟁영흥(爭永興)을 제시했는데 대부분 조선과 직결되는 내용이었다.

예컨대 ‘이상정’은 조선에 청나라의 고위관리를 파견해 외교·통상은 물론 내정 일체를 감독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예병권’은 조선에 청나라의 무관을 파견해 무기 구입, 군사훈련을 장악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또한 ‘쟁영흥’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조선의 영흥만을 조차하려고 하니 청나라에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감국 또는 총독을 두고 조선을 직접 통치하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서태후는 이홍장으로 하여금 장패륜이 주장한 내용을 검토하게 했다. 이홍장은 부정적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을 정벌하기에는 청나라의 해군력이 턱없이 약하다고 했다. 조선에 감국 또는 총독을 두고 직접 통치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만약 조선에 감국 또는 총독을 뒀다가 조선이 저항하거나 서구열강이 항의할 경우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이홍장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명확히 밝히고 서양 사람들을 재정고문 또는 외교고문 형식으로 조선에 파견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조선의 내정·외교에 올가미가 된 청의 ‘종주권’

이홍장은 자신의 생각을 어윤중과 협상 중인 무역장정(章程)에 반영하고자 했는데, 무역장정 초안은 심복인 마건충과 주복으로 하여금 작성하게 했다. 이홍장의 뜻을 잘 아는 그들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무역장정에 명문화하고자 했다.

기왕의 조미수호조약 및 제물포조약에 대응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명확히 하려면 무역장정에 그것을 밝혀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마건충과 주복이 초안을 잡은 8개 조항의 ‘조청수륙무역장정(朝淸水陸貿易章程)’은 청나라 종주권을 중심으로 규정됐다.

8월 22일에 이 초안을 받아본 어윤중은 혹시라도 서구열강이나 일본이 이 무역장정을 명분으로 동일한 요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마건충과 주복은 ‘귀국은 은근히 중국과 대등한 체제를 원하면서 단지 일본이 두려운 것은 알면서 중국이 두려운 것은 알지 못하는가’라고 협박했다. 그 결과 8월 23일에 조청수륙무역장정은 거의 수정 없이 초안 내용 그대로 결정됐다.

이렇게 결정된 무역장정의 첫머리에는 ‘이번에 체결한 수륙장정은 청나라가 속국을 우대하는 것이다’는 내용이 들어감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이 명시됐다. 또한 무역장정의 제1조에는 ‘북양대신의 신임장을 가지고 파견된 상무위원(常務委員)은 조선의 개항 항구에 주재하면서 중국 상인들을 돌본다’는 내용과 ‘조선 국왕도 고위 관리를 파견해 천진에 주재시키는 동시에 다른 관리들은 이미 개항한 중국의 항구에 따로 파견해 상무위원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들어감으로써 조선과 청나라의 자유무역은 조공책봉체제를 훼손하지 않는 형식을 취했다.

이장정은 9월 12일에 서태후의 결재를 받음으로써 확정됐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진수당을 상무위원으로 임명해 한양에 파견했다. 고종은 남정철을 주진대원(駐津大員)으로 임명해 천진에 파견했다. 한양에 상주하는 진수당과 천진에 상주하는 남정철은 사실상 상주 외교관이었다.

그럼에도 형식적으로는 상주 외교관이 아니라 단순히 통상업무를 관장하는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청나라와 조선은 형식적인 조공책봉체제와 실제적인 근대조약 관계가 결합된 이중관계를 맺게 됐다.

고종과 어윤중은 청나라와의 이중관계가 국익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 기대했다. 실제적인 근대조약관계는 자유무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형식적인 조공책봉체제는 국가 안위를 뒷받침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전과 달리 3000명의 병력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청나라는 형식적이던 종주권을 점점 현실화하려 했다. 그것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으로 구체화됐다.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질수록 조선 안에서는 반청 감정이 높아졌다. 반청 감정은 격렬한 반청운동을 불러왔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10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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