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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9)] 위화도회군 후 대명(對明) 관계 둘러싼 암투 

‘불신의 역모’를 돌파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이성계, 개국 명분 얻으려 아들(이방원) 명나라에 인질 보내…감국(監國) 요청, 최영의 처형 이후 이색 등 반대파와 연립정권 수립

▎정몽주(오른쪽)가 ‘최후의 고려인’이었다면, 정도전(왼쪽)은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적 가치 체계에서 조선 건국 후 정몽주는 조선이 추구하는 이념(忠)의 상징이 됐고, 정도전은 ‘패역의 화신’으로 규정됐다. 사진은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한 장면. / 사진:SBS
개혁과 참혹한 권력투쟁이 병행되던 시대였다. 개혁파는 궁극적으로 왕조 교체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반개혁파는 고려왕조의 존속을 위해 싸웠다. 개혁파가 모두 반역적인 것은 아니었고, 반개혁파가 모두 수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개혁과 충성이라는 두 가치가 분열됐다. 누구든 하나의 가치를 선택해야 했다. 중립이나 공존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양심적인 정치가들은 내면적 분열과 고통을 겪었다. 정몽주는 두 개의 가치 사이를 방황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최영처럼 정몽주는 시대의 정치적 상황이 초래한 비극적 인물의 전형이 됐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그 분열과 고통을 의도적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는 충성의 화신으로서, 조선이 추구하는 이념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정도전은 그 반대로 패역의 화신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정도전 없이는 조선건국도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패역 위에 세워진 것인가? 사실의 관점에선 그렇다. 아무리 성리학이라 할지라도 그 이념이 서식할 국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패역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인정하면 성리학은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성리학의 존재는 천리(天理)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건국의 패역은 정도전 개인의 죄악으로 치부된다. 또한 정몽주를 사실상 조선건국의 정신적 뿌리로 인식한다. 이는 성리학이 정치의 세계에 들어갈 때 직면하는 곤란과 당혹을 은폐하려는 정신구조다.

영토문제로 촉발된 고려와 명(明)의 갈등

회군 후 첫 권력투쟁은 조민수파와 이성계파 사이에 전개됐다. 두 번째 단계의 투쟁은 창왕이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한 1389년 11월까지 약 1년 4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수는 명(明)의 입장이었다. 만약 명이 우왕의 폐위와 창왕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성계는 이인임의 운명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째 정치적 변수는 이성계파가 반대파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개혁파는 특히 이색을 처리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했다. 제2단계의 권력투쟁에서 이색이 반개혁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를 제거하기엔 그의 명망이 너무 컸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지 않는 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이 단계에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수용한 지식인 집단이 분열됐다. 또한 이색에 대한 대응책에 따라 개혁파 내에서도 일차적인 분열이 발생했다.

1388년 6월, 창왕이 즉위한 지 오래지 않아 박의중이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는 고려의 요동정벌에 앞서, 마지막으로 중국의 철령위 설치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사신이었다. 그의 사행(使行)은 성공적이었다. 중국은 매우 긴 외교문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첫째, 고려와 명의 국경 문제는 재고하겠다는 것이다. “고려 표문에 이르기를, 철령 인구와 호구(人戶)의 일은 조종 이래로 문천·화주·고원·정평 등의 주가 본래 고려에 예속하였다 하니, 왕의 말을 따르면 그 땅은 마땅히 고려에 예속될 것이다. 이치로 말하면, 그 몇 주의 땅은 일찍이 원이 통치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요동에 예속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가 말한 바를 가볍게 믿을 수 없으니, 반드시 자세히 살핀 다음이라야 할 것이다.”([고려사] 창왕 즉위년 6월 신해) 고려의 주장을 일단 접수한 것이다.

둘째, 우왕대 이래 고려의 대명외교가 범한 다섯 가지의 실책을 열거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진헌하는 말의 품질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이다. 당시 명은 건국 초의 숱한 전쟁으로 말의 수요가 매우 높았다. 원이 탐라(제주도)에 목장을 설치해 직접 말을 사육했기 때문에, 명은 고려에 양마(良馬)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 여파로 말 문제는 고려 우왕대 이래 조선 세종대까지 국가를 괴롭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됐다. 중국은 말 값을 지불했지만, 계속되는 말의 반출로 국가의 군사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정도였다.

셋째, 한나라부터 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가 한반도 국가를 정벌한 사례를 차례로 열거하고, 그 책임을 한반도 국가에 돌렸다. “그 흔단(釁端)을 찾아보건대, 모두 고려가 자초한 것이요, 중국의 제왕이 병탄하기를 좋아하고 영토에 욕심냄이 아니었다.” 외교문서에서 전쟁을 거론하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다.

[명사(明史)]를 보면, 주원장은 철령위 문제에 대한 고려의 해명을 의심했다. “고려가 예로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고 하여, 이제 철령에 관해 그럴 듯하게 말을 꾸몄지만, 거짓되고 속이는 게 분명하다. 이런 뜻을 짐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하여 흔단을 만들지 말라고 유시한다.”([明史] 列傳 第208 外國1, 태조 21년 4월)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인식한 듯하다. 중국은 고려의 과오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전쟁 위협까지 가했지만, 저간의 뜻은 결국 양국 간 영토문제를 재고하겠다는 것이었다.

반(反) 이성계파 거두 이색의 대명(對明) 외교


▎밑바닥에서 출발해 명(明) 왕조를 세운 주원장. 이성계는 권력을 잡은 뒤, 중국의 ‘승인’을 얻는 데 외교 역량을 집중했다.
영토 문제가 전쟁으로 비화될 뻔했다는 사실은 그해 8월 고려의 천호 진경(陳景)이 명에 투항해 말한 진술에서 분명해졌다. “올해 4월 우왕이 요동을 침범하고자 하여 도군상(都軍相) 최영과 이성계가 서경에서 군대를 갖추고, 이성계가 진경으로 하여금 애주(艾州, 신의주)에 둔치게 했는데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퇴군했습니다. 왕이 노해 이성계의 아들을 죽이니, 이성계는 군대를 돌려 왕성을 공파해 왕과 최영을 가두었습니다.” 진경의 이름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다. 진경의 진술을 들은 명 태조는 요동의 수비를 엄중히 하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

그러나 요동정벌의 정치적 책임에 관한 문제는 남아있었다. 1388년 6월, 창왕 즉위에 즈음해 발표된 정비의 교서는 바로 그 점을 천명하고 있었다. 즉 요동정벌의 모든 책임을 최영 한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우왕은 왕위를 사퇴하는 형식에서 매듭짓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7월 문하찬성사 우인열과 정당문학 설장수가 중국에 파견됐다. 우왕의 이름으로 보내진 표문 역시 정비의 교서와 동일한 취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왕의 사퇴가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뜻에 의해 이뤄졌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신이 그윽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최영이 이에 이른 것은 진실로 신으로 말미암아 이루게 된 것이니 부끄럽고 송구하여 죄를 피할 바 없습니다. 하물며 신은 본래 질병이 있고 국사는 또한 매우 번잡하니 한거하여 정양하기를 진실로 원합니다.”([고려사] 창왕 즉위년 6월 신해) 이 표문은 또한 우왕의 사퇴가 고려의 정치적 전통에 근거해 이뤄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이 생전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역사적 사례가 그것이다. 이는 회군파에 대한 명의 의심을 불식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그런데 이 표문을 본명 태조는 “전에 그 왕이 갇혔다고 들었는데 이는 반드시 이성계의 모략이니, 잠시 기다리면서 사태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觀變)”고 말했다.([明史] 列傳 第208 外國1, 태조 21년 10월) 고려의 상황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1388년 10월, 이색이 이숭인과 함께 명에 사신으로 파견됐다. 이색이 자원한 사행이었다. 이 사행의 의미에 대해, 이색은 이성계에게 “중국과 분란을 일으킨 뒤를 당하여 집정한 사람이 친히 황제의 조정에 조회하지 않으면, 공(公, 이성계)의 충성을 천하에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명은 공민왕의 죽음이 “역신(逆臣)이 임금을 죽인 시해”이며, 그 주모자가 이인임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래서 “공민왕이 돌아간 뒤로부터 천자가 번번이 집정대신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다.”([태조실록] 5년 5월 7일, 이색 졸기) 우왕 14년간 이런 상태로 불안한 대외관계가 지속됐다. 우왕의 퇴위에 대해서도 명은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우려가 컸다. 이색 자신이 나서서 이럴 위험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색의 지위와 명망을 고려하면 이 사행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었다. 명 태조도 이색의 명망을 들어 알고 있었다. 조선 태종대에 명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던 왕연령은 우정승 성석린에게 “이색 같은 분은 중원(中原)에도 한두 사람에 지나지 못하오. 중원 사람이라고 어찌 다 조선 사람 같겠소?”라고 말했다.([태종실록] 3년 11월 15일) 이색은 아버지 이곡과 함께 원의 과거시험(制科)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했다. 1353년(공민왕 2년) “가을에 정동행성의 향시에 장원하였고, 갑오년(1354)에 회시에 합격하였으며, 전정(殿庭)에서의 대책(對策)에서 제2갑(甲) 제2명으로 합격하였다.”([태조실록] 5년 5월 7일, 이색 졸기) 원의 과거시험은 지배지역에서도 시행됐다. 향시를 보는 곳은 11개 행성, 2개의 선위사, 직예성부로 17개 지역에서 실시해 300명을 뽑는다. 고려는 정동행성의 향시를 통해 3인을 선발한다. 향시 합격자는 다시 회시에 응시하는데, 3분의 1인 100명이 선발된다.(고혜령, [고려 사대부와 원 제과]) 정동행성 응시자 중 합격자는 1명으로 제한돼 있다. 회시 합격자는 다시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에 응시한다. 전시는 대책문으로 합격자 중 순위를 가리는 시험이다. 몽고, 색목인과 한인(漢人), 남인(南人)을 나눠 방을 붙인다. 이색은 한인에 속한다. 제1갑은 3명이므로 제2갑 제2명은 한인, 남인 전체 중 5등에 해당한다.([元史] 志31 選擧1) 과거시험에 제출된 그의 책문은 시험 감독관들의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독권관 참지정사 두병이(杜秉彝)와 한림승지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한림문자·동지제고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았다.”([태조실록] 5년 5월 7일, 이색졸기) 국정에 대한 이색의 식견은 공민왕 원년에 올린 그의 유명한 ‘복중상서’에서 입증된 바 있다.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그는 장래 조선건국의 개혁 청사진에 준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색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 이성계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명의 요구대로라면 이성계가 가야 했던 것이다. 이색의 의도는 복합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반이성계파의 정치적 명분을 제고시키는 것이다. 고령의 노재상이 국가 현안의 해결에 솔선수범함으로써, 반이성계파의 정치적 입장이 국가 대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이성계에게 정치적 부채를 지우는 것이다. 부담을 느낀 이성계는 “나와 공(公)이 일시에 사자로 가면 나라 일은 누가 맡겠는가? 내가 자식 하나를 택하여 공을 쫓아서 가게 하면, 내가 가는 것이나 다름없소”라고 말했다. 장래의 조선 태종인 5남 이방원이 서장관으로 파견됐다.([태종실록] 4년 2월 18일)

감국(監國)까지 자청한 이성계의 ‘불안’


▎경기도 고양시의 최영 장군 묘. 최영 장군의 한(恨)이 서린 듯, 600년 동안 붉은 풀이 자라났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색의 사행 목적은 ‘감국(監國)’이었다. “나라를 보전하는 것은 사대에 있고 먼 곳을 편안하게 어루만지는 것은 감(監)을 두는 데 있습니다. (…) 생각건대 소읍(小邑)이 멀리 변방에 처하여 비록 성교(聲敎)의 미침을 입었으나 아직도 예의의 풍습에 어두우니 왕관(王官)이 오셔서 오직 성스런 교화(聖化)의 선포를 바라나이다.”([고려사] 창왕 즉위년 10월) 이는 명에서 파견된 관리가 고려를 직접 통치하라는 요청이었다. 일종의 총독정치인 셈이다. 명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성계 등 회군파의 불안은 이 정도로 컸다.

이와 관련해 이색의 또 다른 의도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명의 ‘감국’은 이성계파에 대항해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일찍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원종이 취한 정책이었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항복을 위해 중국에 갔다. 그런데 제4대 칸 몽케가 죽고 후계를 둘러싼 내전이 발생했다.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크부카가 경쟁했다.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원종은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감격한 쿠빌라이는 “다시 감히 난을 일으켜 위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너희 임금을 범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곧 우리의 법을 문란케 하는 것이다. 나라에 상헌(常憲)이 있으니, 사람마다 이를 주륙해야 한다”([고려사] 원종 원년 4월 병오)고 선언했다. 원종은 원의 군사와 함께 고려에 돌아와 무신 집권자들을 제거했다. 이렇게 100여 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무너졌다. 공민왕 5년, 고려의 표문을 보면 원의 지배 하에서 “사람이 분수를 범하면 반드시 베일 것을 아는데, 어찌 참월하게 명분을 범하여 난역을 꾀하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원의 통치를 찬양했다.([고려사] 조일신전)

둘째, 이방원은 일종의 인질이었다. 적어도 이색이 중국에 파견돼 있는 동안은 어떠한 정치적 변혁도 시도하지 않겠다는 이성계의 약속 같은 것이다. “이색은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에서 마음이 그에게 돌아감으로써,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아들 하나를 같이 가기를 청하니, 태조가 전하(이방원)로써 서장관으로 삼았다.”([태조실록]총서) 그 반대로 이성계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이방원을 대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안로(金安老)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이색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한 것은 장차 어떤 계획이 있었던 까닭에 태조가 의심할까 두려워서 태종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명 태조를 보고 우리나라를 붙들어 보호하여 달라는 뜻을 말하였으나, 황제가 일부러 알아듣지 못하는 체하였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1, ‘태조조고사본말’) 그러나 이성계파가 설사 이색의 의도를 알았다 해도 중국의 의심을 불식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었다.

1388년 11월, 다시 밀직사 강회백과 밀직부사 이방우가 중국에 파견됐다. 이성계는 자신의 장남을 직접 파견했다. 이들의 사행 목표는 창왕의 ‘친조(親朝)’였다. 황제에게 인사하기 위해 왕이 직접 중국에 가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회군을 전후한 일련의 사태가 극히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입증코자 했을 것이다. 회군파는 ‘감국’으로도 불안을 씻을 수 없었던 것이다.

1388년 12월, 해가 가기 전에 최영을 처형했다. 정국이 유동적인 상황에서 최영을 중심으로 반이성계파가 결집하거나, 그가 중국으로 압송될 경우의 문제도 고려했을 것이다.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명(明)이 던진 ‘불신의 역모’가 불러온 파장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하고 있는 [송조천객귀국시장]. 조선 세종대 명(明) 수도 베이징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조선의 ‘사대외교’는 다양한 포석을 지닌 전략이었다.
그런데 회군파가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1389년 3월에 입국한 강회백은 회군을 둘러싼 정치과정을 ‘불신(不臣)의 역모’로 규정한 황제의 글을 가지고 왔다. “이제 신하가 아비를 쫓아내고 그 아들을 세워 내조하고자 청하니, 대개 떳떳한 윤리가 크게 무너지고 임금의 도리가 전혀 없어 불신의 역모가 크게 드러났으므로, 사신을 타일러 돌아가게 하고 동자(창왕)도 반드시 내조할 필요가 없다. 세우는 것도 저에게 있고, 폐하는 것도 저에게 있으니, 중국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고려사] 창왕 원년 3월)

이는 회군파의 정치적 입지에 치명적이었다. 우왕대 내내 고려를 괴롭힌 악몽이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4월에 입국한 이색의 전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감국을 요청하러 갔던 그는 겨우 ‘황제 주위의 자제들과 결혼시킬 여자를 보내라’는 서신을 가지고 왔다. “내가 여기에 아이들을 몇몇 갖고 있는데, 고려의 지체 좋은 집안의 여아들을 데려와 친혼을 맺도록 하라.” 이는 공녀의 재개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회군파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 중국의 진정한 의도에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이 때문에 6월에 문하평리 윤승순과 첨서밀직 권근을 중국에 보내 다시 왕의 친조를 청했다. 회군파로서는 중국의 의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중국의 입장이 모호했기 때문에, 이성계는 정치적 구상을 새롭게 바꿔야 했던 듯하다. 이 시기에 그는 반이성계파와의 연립정권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이색의 말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색은 중국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남경에 조회가서 예부에 이르니,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세우니 천하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느냐. 왕과 최영이 모두 갇혔으니 이것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말하기를, ‘최영이 왕으로 하여금 요양을 범하도록 하였으나, 장군 조민수와 이성계가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의주까지 왔으나 감히 출발하지 못하니, 최영이 자주 독촉하므로 마지못하여 군사를 돌이켜 최영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왕이 노하여 여러 장수를 살해하고자 하므로, 태후가 왕을 폐하여 강화에 안치하였으나 개경과 거리가 20여 리이며, 옛 수도의 경치 좋은 곳이므로 정신을 수양하기에 이 땅과 같은 곳이 없으며, 또 재상이 시위하고 의장·기물과 조석의 음식이 모두 평일과 같은데 어찌 내쫓았다고 하리오’라고 하였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2년 2월) 이것은 강회백이 가져온 중국 예부의 자문 내용과 같은 것이다.

중국 정부의 비공식적 입장은 이보다 더 강경했던 듯하다. 이색은 귀국 후 이성계를 만나 이를 전했다. “이원명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어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흥은 먼 땅이니 가까운 곳에 두면 임금을 추방했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떻겠습니까”라고 권고했다. 중국의 입장을 통해 이성계를 위협해 우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색의 권고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반대파들의 결집을 촉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색이 회군파의 입장을 변호했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이색은 반이성계파의 사실상 우두머리였다. 위화도회군에 대한 이색의 변호를 자세히 살펴보면, 회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마지못해 단행된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러나 이성계파의 공식적 입장은 이성계가 처음부터 ‘사대’를 명백한 명분으로 제시하고 요동정벌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색의 진술에는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했으나, 그 명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1389년 7월, 이성계는 판삼사사 심덕부, 판개성부사 배극렴, 문하평리 정지 등 회군파의 핵심적인 장군들을 대동하고 우왕을 찾아가 잔치를 베풀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우왕과의 화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 따라 우왕을 복위시켜야 할지도 몰랐다. 권력의 관점에서만 보면, 최영의 처형은 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궁극의 처세술 보여준 홍영통


▎창덕궁 대보단. 1705년 설치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明) 신종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조선 ‘사대외교’의 징표처럼 각인돼 있다.
한편 1389년 7월, 이색은 사임하면서 후임에 창왕의 장인인 이림(李琳)을 천거했다. 이색은 회군 후 이성계파와의 권력 투쟁에서 중심에 서 있었다. 조민수를 도와 창왕을 즉위시킴으로써 이성계파의 의도를 일단 좌절시켰다. 다음으로 사행을 자원해, 명의 ‘감국’을 통해 고려왕조에 대한 보증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의도는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이 우왕의 폐위를 ‘불신의 역모’로 규정함으로써 이성계파는 궁지에 빠졌다. 그러나 중국이 군사적으로 고려를 압박하지 않는 한, 이성계의 권력을 직접 제거할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다음의 권력투쟁은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이 단계에서 이색은 반이성계파의 영수 역할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듯하다. 이후 이색의 정치적 거취는 적극적 대결보다는 시종일관 수동적인 것에 머물렀다.

이색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창왕은 오히려 이색을 판문하부사, 이림을 시중, 홍영통을 영삼사사에 임명했다. 반이성계파가 최고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최고 요직을 독점한 것이다. 홍영통처럼 정치적 격류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인물은 드물다. 하지만 이인임처럼 주도면밀하게 정치적 운신을 계산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보통 상식과 인정에 따름으로써 시류에 거스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천성이 순박하고 조심스러워 상례(常例)를 좇아 계책을 세워 건의하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태조실록] 태조 4년 10월 11일) 그 덕분에 여말선초의 정치적 격변기에 불구하고,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았다. 신돈 집권기에는 그의 측근이었다. 신돈이 아직 보통 승려였을 때, 그는 은혜를 베풀었다. 신돈이 집권하자, “신돈에게 빌붙어 늘 음식을 보내고 문안했으며, 그가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말을 타고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의 처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춘부, 김난과 함께 신돈의 최측근이었다. 감찰대부와 밀직부사를 역임했고, 불법 행위도 많았지만 항상 신돈의 비호를 받았다. 홍영통은 상당히 독실한 불교도였로서, 이색·이무방과 함께 남신사(南神寺) 불교 모임인 백련회 멤버였다.([고려사] 이색전) 신돈이 반대파를 다수 살해할 때, 그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들어 적극 만류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신돈이 실권하고 이춘부·김난이 모두 처형됐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우왕은 그와 인척 관계였다. 우왕대에 그는 이인임파로서 임견미, 조민수와 함께 내재추(內宰樞)가 됐다. “항상 궁중에 있었으며,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먼저 여기를 통과한 후에야 시행되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관직은 최고위직인 문하시중, 판문하 부사에 올랐다. 1388년(우왕 14) 무술정변 때도 홀로 목숨을 구했다. 오히려 그가 영문하부사가 되자 세상은 “홍영통 같이 탐욕스러운 자가 임견미와 염흥방의 참화를 면하고 벼슬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재상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복인이다”라고 평했다. 공양왕대에 간관들은 홍영통의 처단을 주장했다. “홍영통은 우왕의 인척이므로 혼자 살아남았는데도, 다시 변안열과 함께 우왕의 복위를 도모했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용납하지 못할 죄이오니 바라옵건대 대의로써 처단하소서.” 그러나 공양왕은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는 밀지를 보냈다. 그는 이성계와도 관계가 좋았다. 조선건국 뒤 이뤄진 첫 인사에서 판문하부사가 되었고, 개국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성계의 잠저 시절 옛 친구로서, 이성계의 사적인 주연에도 참석했다. “임금이 새 궁궐의 양청에 주연을 베풀었는데, 남양백 홍영통과 창녕부원군 성여완이 잠저 때의 친구들로서 참예하였다.”([태조실록] 4년 3월 20일) 1395년 그는 이성계의 생일날 주연에 참석했다가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이 격변의 시대에 정치적으로 계속 순탄한 길을 걸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색·이림·이성계의 불안한 동거


▎[삼국지]의 영웅인 조조의 초상화. 조조는 힘 없는 한나라 황제를 섬기는 모양새를 취하며 구석(九錫)의 특전을 받는 등 권세를 누렸다. 이를 본떠 고려 말 이성계의 연립정권도 동등한 특권을 행사했다.
1389년 9월, 창왕의 친조를 위한 행차가 준비됐다. 그의 친조는 이성계파와 반이성계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회군파는 창왕의 친조를 통해 명에게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색은 이 행차를 서둘렀다. 그는 요동의 겨울이 빨리 닥치므로 이른 시기에 출발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창왕의 어머니 근비의 반대로 행차가 중지됐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불신의 역모’라는 중국의 입장을 확인하고 근비는 상황을 낙관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성계파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색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창왕이 일단 명의 승인을 받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성계 파로서도 역성혁명을 꿈꾸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명의 입장이 확고한 것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뒀는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이색의 생각이 옳았다.

1389년 9월, 연립정권 구상이 현실화됐다. 이것은 정몽주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색·이림·이성계는 특별한 지위에 임명됐다. 세 사람에게는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전상(殿上)에 오르고 찬배(贊拜)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했으며, 각각 은 50냥과 비단 10필, 말 1필이 주어졌다. 전상은 왕이 거처하는 정전(正殿)의 안을 뜻하며, 찬배는 신하가 군주를 뵐 때 집례자가 행례의 절차를 알리는 것이다. 전상의 댓돌에 신을 신고 오를 수 있는 권리는 납폐(納陛)라고 한다. 모두 최고의 공신에게 베푸는 특별대우다.

중국에서는 최고의 공신에게 구석(九錫)이라는 아홉 가지 특전을 베푼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는 스스로 위공에 올라 구석의 특전을 향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30년간 조조를 위해 기략을 짜온 순욱이 반대했다. 그는 조조가 한실 부흥을 위한 충신으로 남기를 바랐다. 조조는 그에게 빈 찬합을 보냈다. 그는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창왕이 세 사람에게 내린 교서는 이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는 일종의 역할분담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색에게는 사부, 이림에게는 외척으로서 왕의 장인(元舅), 이성계는 공신으로서 원훈(元勛)의 역할이 주어졌다. 창왕은 “진실로 사부의 가르침(訓謨)과 원구의 보호(保佑), 원훈의 구함(匡救)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 능히 구제할 수 있었으리오”라고 말했다.([고려사] 창왕 원년 9월) 이색은 왕을 훈계하여 정치를 지도하고, 이림은 외척으로서 왕실을 보호하고, 이성계는 공신으로 정치를 담당하는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이성계의 정치적 의미는 축소됐다. 이성계의 역할은 일종의 정책 집행자에 한정됐으며, 국가의 지도원리와 왕실문제는 이색과 이림이 담당하게 됐다. 반개혁파와 왕실, 개혁파를 동거시키는 절묘한 구상처럼 보인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10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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