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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10)] 목숨 걸고 밀항·유학한 조슈의 다섯 청년 

두려움? 모험과 호기심으로 극복했다 

최치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마사루, 엔도 긴스케, 야마오 요조가 주인공…내각·외교·조폐·공학·철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 근대화에 큰 기여

▎메이지 시대를 전후해 변화하는 한·일 관계를 보여주는 일본 목판화. 조선의 사신이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일행(왼쪽)에게 내정개혁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협정서를 건네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68세의 노회한 책략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31세의 젊은 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진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비롯해 일본 근대화의 지도자로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앞장선 이토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동양 평화를 위협하며 대한제국을 병탄한 침략 원흉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조야(朝野)는 이토가 사무라이답게 전장(戰場)에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칭송한다.

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저격당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동아시아 역사 무대에서 대한제국의 병탄에 앞장서며 동양 평화에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됐는지는 제대로 모른다.

이토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자. 22세에 영국으로 밀항해 견문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토는 그때부터 세계를 향해 호기심을 갖고 견문을 넓히기 시작했다. 서구 배우기 일환이었던 일명 조슈(長州) 5걸(傑)의 영국 유학 이야기다.

서구의 식민지 전락을 앞둔 일본을 구하기 위해 나선 다섯 명은 밀항을 한다. 조슈번 5인의 번사를 영국에서는 ‘Chosu Five’라고 부른다. 양이(攘夷)를 위해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으로 건너가 선진 기술문명을 살펴본다.

하지만 도영(渡英) 후 그들의 계획은 ‘서양 배우기’로 즉각 수정된다. 자신들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등 변신을 시도한다. 그들이 배운 최강의 문명과 기술은 일본을 동아시아 선도국으로 이끈다.

조슈는 일본 혼슈(本州)의 가장 서쪽 지역인 야마구치(山口)현에 위치한다. 1600년(게이초 5) 동·서군이 크게 싸운 세키가하라(関ヶ原)전투에서 서군의 주력부대로,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대항했다 패해 영지 축소를 당한다. 이들은 혼슈 서쪽 끝 하기(萩)지역까지 밀려났고, 260여 년 동안 막부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았다. 메이지유신(1868년)을 통해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빠른 국제정세 파악 능력과 한 발 앞선 서구 학습을 꼽는다.

올해로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알리는 깃발이 간간이 나부끼는 아마구치현의 인구 5만 소도시 하기시. 하기시의 명물 회벽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인물들의 사진이 자주 눈에 띈다. 학업으로 웅지를 키우고 세계로 나아가 국제감각을 익힌 메이지 유신 주역의 고향이다.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는 사진의 주인공은 1863년 런던에서 유학했던 조슈 출신 다섯 청년이다. 그들은 왜 그 시절에 런던에 갔을까?

“죽어도 좋다. 서구로 가자”


▎1863년 런던에서 카메라 앞에 함께 선 조슈 5걸.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전체가 양이와 개국의 기로에서 흔들리던 에도막부 말기인 1863년, 조슈번의 다섯 젊은이는 일본의 부활을 위해 영국으로 밀항한다. 당시 미국으로 밀항을 시도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역사를 보더라도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그들은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청강생으로 공부한 뒤 일본으로 돌아와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며 근대 일본의 ‘나라 만들기’에 앞장섰다.

이 청년들이 밀항으로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 역사 배경부터 살펴보자. 1854년(안세이 원년) 막부는 미국에 굴복하듯 미일화친조약을 맺는다. 1862년(분큐 2년)에 사쓰마번(薩摩藩)의 행렬을 가로지른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生麥) 사건, 1863년(분큐 3년)에는 조슈 제후에 속한 무사에 의한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이 일어나는 등 서구열강과 일본 사이에 전면전의 위험이 높아졌다.

당시 막부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 파기와 강경한 양이 주창에 앞장선 무리가 조슈번이었다. “이대로는 일본이 식민지가 되는 것이 확실하다. 미국의 요구를 물리치고 대등한 입장에서 개국 교섭을 다시 하자. 이를 위해 서구에 건너가서 해군에 관한 병술 등 국방의 기초 등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요시다 쇼인은 스스로 시모다(下田)에서 미군 함정에 승선해 밀항을 기도하지만 계획은 실패한다. 5년 후 쇼인은 막부에 대한 비판과 막부의 정무 총괄직인 로주(老中) 암살 계획 혐의로 투옥됐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옥사한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쇼인의 유지를 이으려는 자들이 나타나면서 조슈번에서는 개혁파가 세력을 확장했다. 그중에서도 번의 학교인 메이린칸(明倫館)에서 수학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일찍이 외국행을 강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난학을 배우고 차례로 병학 연구에 매진하던 이노우에는 외국의 병학을 배워서 번의 군사기반을 근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무렵 하코다테(函館)서 항해술을 배우고 있던 이노누에 가오루, 러시아에 도항 경험을 가진 야마오 요조(山尾庸三)도 해군학을 배우기 위해 영국행을 희망했다. 13대 조슈 번주인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에게 “밀항해서 서구 문명의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을 배우고 귀국해 양이를 이룬다”는 계획을 털어놓는다.

목적이 양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이룩한 기술과 문명을 공부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번주 스스로 국법 위반인 해외로 도항을 허가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번주는 ‘묵인’이라는 형식으로 3인의 도항을 지원했다.

번주가 도항비로 1인당 200량을 지급했지만, 이 돈만으로는 영국 생활이 불가능했다. 야마오가 영국의 상사 자딘 매터슨(怡和控股有限公司)의 요코하마(横浜) 지점인 에이이치반칸(英一番館)에 알아본 금액은 1인당 1000량 정도였다. 미국에서 구입 예정이던 철포 대금 5000량을 융통해 도항비로 충당하려고 했다. 철포 구입을 맡던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오랜 친구인 이토에게 밀항 계획을 밝히고 동행하자고 설득한다. 항해술 배우기를 희망하던 엔도 긴스케가 추가된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불린 오무라 마스지로 (大村益次郎)의 목숨을 건 보증으로 자금 융통에 성공한다. 참고로 그의 동상은 야스쿠니 신사에 위치한다. 일행은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오무라는 요코하마의 요정 사노 시게루에서 환송회를 열어준다.

양이(攘夷)? 번영한 모습에 망연자실


▎도쿄의 관청이 밀집한 가스미가세기 부근을 지나가는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 행렬. / 사진:눈빛출판
행선지는 런던, 목표 기간은 3년이었다. HSBC 은행의 설립과 만다린오리엔털호텔 경영으로 알려진 영국의 자딘 매터슨상회의 첼스윅호에 오른다. 5월 12일 한밤중 어둠 속에 흩어지듯이 5인은 범선에 승선한다. 범선의 석탄 창고에 몸을 숨기고 출항을 기다렸다.

요코하마 항을 떠난 배는 5일 후 상하이(上海)에 도착한다. 5인은 상륙 후 일본에서 밀항을 도와 주던 자딘 매터슨상회의 상하이지점에 도착한다. 상하이에서 런던행 배의 알선을 부탁한다. 일본 지점에서 받은 소개장을 보여주자 “무엇 하러 영국에 갑니까?”라고 묻는다. 일행 중 이노우에 가오루만이 말 뜻을 겨우 알아듣고 “Navigation(항해술이다)”이라고 대답했다. Navy(해군학)이라고 했어야 했지만, 항해술을 배우러 간다고 잘못 말한 것이다. 나중에 배를 타고 온갖 잡일에 시달리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승선객으로 정중한 대접을 기대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항해술을 배우는 견습생으로 잡일을 배당받는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갑판 청소를 하거나 수부로부터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항해 도중 오해가 풀리기는 했지만 11월 런던에 배가 도착했을 때는 모두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런던의 항구에서 5인의 눈에 우선 띈 것은 바다에 즐비한 증기선이었다. 일본에서 본 적 없는 선박뿐이었다. 상륙하자 거리에는 고층 건물에다 교외로 연결되는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렸다. 세계 최첨단 근대 기술이 모두 모인 곳이었다. 이노우에는 훗날 “번영한 모습을 보고 거의 망연자실해 양이 따위라고 하는 것은 일순간에 날아가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5인의 런던 생활이 드디어 시작됐다.

런던의 명문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캠퍼스에는 일본인 24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보인다. 150년 전 막부 말기에 조슈번에서 5명, 사쓰마번에서 19명의 젊은이가 영국으로 건너와 UCL에 유학한 것을 칭송해 세웠다. ‘해외 도항을 금지한다’는 국법을 위반하고 건너가 메이지 일본의 기틀을 다진 에도(江戶) 막부 말기 유학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웅번의 밀항 유학에 앞서 도쿠가와 막부는 개국 후 1862년(분큐 2) 6월 일본 최초의 유학생을 네덜란드에 파견한다. 해군 훈련소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釜次郎), 아카마쓰 노리요시(赤松則良), 반쇼시라베(蕃書調所)에서 니시 아마네(西周)와 쓰다 마미치(津田眞道), 나가사키 양생소에서 의학 공부 중이던 이토 보세이(伊東方成)와 하야시 겐카이(林研海) 선박 대목수인 우에다 토라키치(上田寅吉) 등이 선발돼 해군·의학·인문과학을 배웠다.

막부는 그 뒤로도 영국·러시아·프랑스 등에 유학생과 사절을 파견한다. 일본의 근대국가 발돋움에 기여한 선구자 가운데 막부 타도를 실현한 여러 웅번 세력 출신자와 함께 옛 막부의 신하도 포함됐다. 그 무렵 번들 사이에는 해외에서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흡수하려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실현은 불가능했다. 도쿠가와 300년의 쇄국이 깨어졌지만 해외 도항은 막부에 의해 엄격하게 막혔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이 금지령을 어긴다. 조슈번은 1863년(분큐 3) 5월, 사쓰마번은 1865년(겐지 2) 3월 각각 밀항 유학생을 배출한다. 밀항 유학생 탄생에서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요시다 쇼인과 사쓰마번의 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를 빼고 말하기는 어렵다.

UCL의 자유로운 학풍, 진취적 정신이 큰 힘


▎쇼카손주쿠 (松下村塾). 요시다 쇼인이 단기간에 유신의 지도자를 양성한 사숙이다. / 사진:최치현
요시다 쇼인은 개국 전인 1854년(안세이 원년), 페리 함대가 화친조약의 응답을 얻으러 다시 찾았을 때 시모다에서 미국 군함에 승선해 미국행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한다. 쇄국의 금령을 어기고 해외 지식을 얻을 필요성을 호소했지만 결국 도항을 단념해야 했다. 그는 5년 후 안세이 대옥(安政大獄) 때 사형을 당한다.

사쓰마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1857년(안세이 4)에 밀항 유학생 파견을 구상하지만 이듬해 급사했기 때문에 사쓰마번은 프랑스인에게 알선을 의뢰하고 1859년(안세이6) 봄에 유학생을 선발했다. 두 차례 동시 유학생 파견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쇼인, 나리아키라의 문명 개화적 사상을 문하생들이 받들었다.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 중 하나로 평가된다.

쇼인 사후 4년이 지나 조슈번의 수뇌는 개국 후 외교 협상에 대비하는 인재 육성에 주력한다. 또 쇼인의 유지를 이어받은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도 서양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출국을 계획했다. 이런 번 내의 움직임을 배경으로 영국으로 밀항 유학한 것이 조슈 5걸이었다.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밀항 시 28세),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27세),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26세)와 불과 반년 전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에 가담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22세)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20세) 등 5명이다. 2006년 개봉한 영화 [조슈 파이브]로 일약 유명해진다.

이들 유학생을 UCL로 영입하고 도움을 준 인물은 알렉산더 윌리엄슨 교수였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UCL에 모인 것은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1826년 창설된 UCL만이 신앙이나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학도에게 문호를 개방하던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두 대학은 영국 국교 신자만 입학시킨다. UCL의 자유로운 학풍과 진취적 정신은 일본인 유학생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이국 땅에서 배우려는 일본 청년을 영입한 윌리엄슨 교수는 39세에 런던화학협회장을 지낸 소장파 화학자였다. 그는 조슈와 사쓰마를 포함한 많은 일본인 유학생을 도와줄 뿐 아니라 중도하차하고 객사한 유학생의 장례도 치러줬다.

1864년 4월 급진적인 양이파인 조슈번에 대해 열강 4개국이 공격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접한 조슈의 5인은 머리를 맞댔고, 이토와 이노우에가 6개월 만에 먼저 귀국한다. 두 사람은 귀국 후 열강과 싸우는 무모함을 번에 설득하려다 실패했다. 결국 죠수번은 1864년 8월의 시모노세키(下關)전쟁에서 서구 연합국에 참패한다. 이후 조슈번은 양이에서 개국으로 전환한다.

영국에 남은 세 사람은 런던대의 강의를 듣는 한편 조폐·조선·철도 부설 등의 현장을 견학하는 등 최신 기술과 지식을 배웠고 귀국 후 각각의 길을 걷는다.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의 아버지’, 이노우에 가오루 ‘외교의 아버지’, 엔도 긴스케는 ‘조폐의 아버지’, 야마오 요조는 ‘공학의 아버지’, 이노우에 마사루는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린 것에서 보듯 모두 각 분야에서 선구적인 공적으로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주로 정계에서 활약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이노우에는 평생 친구인 이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와 함께 ‘조슈의 삼존’이라고 불렸다. 이토는 ‘지모’ 야마가타는 ‘용감’, 이노우에는 ‘기민’한 사람으로 불렸다.

최신 기술·지식 습득해 각자 다른 길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때 근위병들 앞에서 러시아 군복 차림으로 긴 칼을 차고 있는 충정공 민영환.
5인의 주요 이력을 보자.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1836~1893, 도영 당시 27세)는 조폐의 아버지로 불린다. 에도에서 항해술을 배우고 번선 진주 쓰마루(壬戌丸)에 승선한다. 1866년 귀국하자 조슈 번주와 영국 해군 제독의 회견을 성사시키는 등 대외 절충 역을 맏는다. 메이지 신정부에 출사하고 오사카의 조폐 기숙사 건설에 종사하며 조폐 책임자에 발탁된다. 영국인 조폐장 토머스킨 등과 대립하고 잠시 물러나 있기도 했다. 복귀 후 조폐국장에 취임했으며 1893년 퇴임 때까지 일본인 기사에 의한 서양식 새 화폐 제조에 주력했다. 벚꽃의 개화시기에 맞춰 일반 공개하는 오사카 조폐국의 ‘벚꽃의 통행’을 발의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1843~1910, 도영 당시 20세)는 철도의 아버지다. 나가사키에서 병학을, 에도에서 포술을, 하코다테에서 영국 영사관원에게 영어를 배운다. 1868년 귀국해 조슈번에서 광업 관리에 종사했지만 이토의 부탁을 받고 메이지 신정부에 출사한다. 1871년에 철도 기숙사가 마련되자 광산과 철도 책임자에 취임한다. 철도국장, 철도청 장관을 지내고 1893년에 퇴임 후에도 철도 외길을 걷는다. 1896년 기관차의 국산화를 목표로 기차 제조 합자회사를 설립한다. 철도원 고문으로 해외 시찰 중 런던에서 객사한다. 장례식에는 은사 윌리엄슨 교수의 부인도 참석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도영 당시 22세)는 소년 시절 쇼인의 문하인 쇼카손주쿠에서 배운다. 영국 사관 방화사건에 참여하는 등 존왕양이(尊王攘夷) 지사로 활동하는데 1863년 도영하고 UCL에서 배운다. 귀국해 막부 타도 운동을 이끈 후 메이지 새 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한다. 일본 제국헌법을 기초하고 제정에도 주력했다.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 후 1, 5, 7, 10대 4기 동안 총리대신을 맡는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초대 조선총감에 취임했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진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도영 당시 27세)는 제후 자제 교육학교 메이린간에서 배운 뒤 에도에서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을 공부한다. 존왕양이에 공명하고 타카스기 신사쿠 등과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에도 참여한다. 영국으로 건너가 국력 차이를 목격하면서 개국론으로 돌아서고 시모노세키 전쟁 때 이토와 함께 급히 귀국하고 강화 담판에 주력했다. 메이지 신정부 대장성에서 재정에 종사하지만 오자리고와(尾去澤) 구리 광산의 독직사건으로 사직한다. 잠시 실업계에 몸담았다가 이토의 부탁을 받고 관직에 복귀해 외무부장관, 농상무장관, 내무부장관, 재무장관을 역임한다. 외무대신으로 불평등 조약 개정에 힘썼다.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1837~1917, 도영 당시 26세)는 에도에서 항해술을 배우고 영국으로 건너가 UCL에 공부하다 나중에 글래스고에서 조선술을 배운다. 네피아 조선소의 견습공으로 기술을 익히면서 앤더슨즈 칼리지의 야학에서 공학을 배웠다. 1868년에 귀국하자 메이지 신정부에서 공학경과 법제국의 초대 장관 등을 역임한다. 1871년 도쿄대 공학부의 전신인 공학 기숙사를 창설했다. 네피아 조선소에서는 농아의 장인들이 일한 것부터 맹농(盲聾)학교의 설립에도 주력했다.

변함 없는 사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

1863년 8월 사쓰에이(薩英)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사쓰마번은 강화 협상에서 영국에 유학생 파견을 제안했다. 영국 측은 싸운 상대로부터 배우려는 자세에 놀라면서도 이를 높게 평가했다. 이로써 사쓰마번과 영국의 친목은 깊어진다. 사쓰마번은 4명의 시찰원과 15명의 유학생을 결정한다.

유학생들은 1865년 3월 사쓰마를 떠나 5월 런던에 당도했다. 유학생 15명 가운데 대학 입학 연령에 미달한 나가사와 가나에(長澤鼎)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머지 14명은 조슈번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UCL의 청강생이 된다. 시찰원 4명은 유럽 각지를 돌면서 국정 시찰이나 상담을 실시한다.

청강생이 된 14명은 런던에 도착한 뒤 대학에서 배우던 조슈번의 3명, 야마오·엔도·이노우에 마사루와 만난다. 이들은 윌리엄슨 교수에게 함께 배우면서 틈나는 대로 영국인과 교류한다. 야마오가 조선(造船)을 배우기 위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갈 때 사쓰마번의 유학생들이 1파운드씩 모아 빌려주기도 한다. 과거에는 서로 적대시하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었다. 하지만 삿초동맹(薩長同盟)이 맺어지기 전에 멀리 떨어진 런던에서는 이미 번의 테두리를 넘어 일본이라는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식이 깨어 있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뿐 아니라 물론 막부도 서구열강의 지식이나 기술을 배울 필요성을 느꼈다. 1862년 쇄국 중에도 접촉하던 네덜란드에 유학생 15명, 1865년 러시아에 유학생 7명을 보낸다. 1866년 해외 출국금지가 해제되자 영국으로 14명에 이어 프랑스에 유학생 10명을 보냈다.

영국 유학생들은 1866년 12월 요코하마를 떠나 1867년 2월 런던에 도착한다. 이미 UCL에는 서남 세력의 유학생이 배우는 것에 놀랐다. 강한 사명감에 넘쳐 유학에 나선 막부 유학생이었지만, 막부가 쓰러졌기 때문에 도중하차하고 귀국한다. 1868년 8월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일본은 사쓰마·조슈번을 중심으로 신정부군과 구막부 측이 보신전쟁(戊辰戰爭) 중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일본은 호기심의 시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험을 마다 않았고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몸을 낮춰 배웠다. 세월이 흘러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협상 대표로 1895년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의 전권대사로 일본으로 건너온 이홍장(李鴻章)과 마주 앉는다. 군비 배상과 영토를 제공하는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인한다. 영국 유학 32년 만에 일본은 전승국으로 아시아의 맹주가 된다.

서구의 두려움에 맞서 호기심과 모험으로 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변을 유린하는 일본의 시대가 열린다. 조선은 뒤늦게 세계를 향해 나간다. 청나라의 무능력함이 드러난 후인 1896년이다.

조선에서 최초로 세계일주를 했다고 알려진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은 일본의 패권주의를 눈치 채고 견제를 위해 특명전권공사의 자격으로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여한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세상의 가치가 조금씩 변하더라도 역사에 변함이 없는 사실은 강자는 약자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810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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