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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31)] 천주학 받아들인 선비 농은(隴隱) 홍유한 

유학과 서학 실천으로 조화시킨 선각자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유학을 통해 천주학 신봉하고 천주학 통해 유학을 보강… 학문과 신앙에서 모범적인 삶 실천해

▎영주 휴천동성당 김영모(오른쪽)씨 등 신자들이 농은고택에 세워진 유적 기념비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의 뿌리도 소백산 순흥 땅에 닿아 있습니다. 유학자가 천주학(天主學)을 처음 받아들였어요.”

경북 영주 소수서원에서 박석홍 전 소수박물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답사자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소수서원은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회헌 안향을 배향한 곳이다. 1550년 풍기 군수 퇴계 이황은 상소를 올려 명종 임금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편액과 교육에 필요한 노비·전답·서적 등을 처음으로 받아낸다. 박석홍은 그래서 “소수서원을 미국 하버드 대학보다 93년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표현한다.

퇴계는 이후 한강 정구에게 성리학을 전한다. 한강은 다시 미수 허목에게, 미수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에게 또 학문을 전한다. 성호가 활동하던 시기 조선은 새로운 세상을 맞닥뜨린다. 17세기 후반 서양의 학문과 문물이 조선으로 밀려든 것이다. 이른바 서학(西學)이다. 그때까지 조선 사회는 유학에 의지했다. 성리학이 비틀거리면서 선비들 일부는 천주학을 비판, 공격했고 또 일부는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300여 년이 지났다. 서학은 숱한 순교자의 피를 딛고 이 땅에 천주교로 뿌리내렸다. 한국 천주교는 그 사이 최고위 성직자 추기경 3인을 배출했다.

전래 당시가 궁금해진다. 인성(人性)과 천리(天理)를 궁구하던 조선의 선비들은 서양 천주학을 처음 접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 성리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을까? 그런 물음을 맨 먼저 던졌던 유학자가 성호의 제자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 선생이다. 박 전 관장이 농은 선생을 천주학을 받아들인 유학자로 소개하는 이유다.

창조주 존재를 자연적 이치로 깨닫다


▎1. 봉화 문수산에 있는 농은의 묘소. / 2. 농은고택에는 시멘트 집이 들어섰다. / 3. 수덕서 [칠극]을 가슴에 안은 홍유한의 동상.
8월 20일 농은의 흔적이 남은 영주 소백산 순흥 일대를 답사했다. 영주시청의 문화재관리팀 담당자와 천주교 영주 휴천동성당 신로사 신자 등이 동행했다. 폭염은 절정을 지났지만 여전히 섭씨 35도를 웃돌았다. 먼저 영주시 단산면 구구2리 농은 고택을 찾아갔다. 논밭의 작물도 더위에 지친 듯 푸름이 옅어졌다. 마을 깊숙한 곳에 솟을대문이 우람하게 보였다. 소백산 자락 농은이 만년을 보낸 고택이다. 대문 앞에 안내문이 보였다. 그냥 대문이 아니었다. 붉게 칠한 대문 위에 ‘효자증통선랑사헌부지평홍중명지문’이란 흰 글자가 새겨져 있다. 효자 정려문이다. 농은의 조부가 효자임을 조정이 인정한 것이다. 최근 정비를 마친 정려문만 보면 이곳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신식 기와에다 시멘트로 벽을 바른 집 한 채에 마당 가운데 농은의 유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전부다.

현장을 안내한 천주교 농은회 김영모(69)씨는 “영주에는 부석사를 세워 불교 화엄종을 연 의상 대사와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또 천주학을 처음 받아들인 홍유한 등 세 분의 큰 선생이 있다”며 “영주시가 농은 선생의 유적지를 이렇게 방치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섭섭해 했다.

홍유한은 1726년(영조 2)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영특해 8∼9세에 벌써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농은은 나이 16세에 아버지의 지인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채 제공·안정복 등과 함께 수학했다.

당시 성호는 경기도 안산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1678년 아버지(이하진)가 진위겸진향사(陳尉兼進香使)로 중국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청나라에서 들여온 수많은 서책을 탐독했다. 또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등과 [심경] [서경] [시경] 등을 읽은 뒤 성리학과 퇴계 학문을 탐구하는 정통 유학자였다. 그러면서도 정주학의 공리공론적 폐단에서 벗어나려는 실학 운동의 선구자였다. 계파로는 이른바 기호 지역 근기남인(近畿南人)이다.

조선의 지식인은 당시 서학 책을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 반면 성리학은 조선 사회를 지탱시키기엔 역부족이었고 수명을 다해 갔다.

홍유한은 성호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성호는 “홍군은 입지(立志)가 확고하고 공부가 독실해 옛 사람 가운데도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고 칭찬했다. 그는 20년 가까이 성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익은 언제쯤 제자들에게 서학을 소개했을까. 성호가 서학에 깊은 관심을 나타낸 것은 1751년 무렵이다. 홍유한이 성호 문하를 드나든 지 10년 가까울 즈음이다. 성호는 제자들과 같이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極)]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을 읽었다.

[천주실의]는 1603년 예수회 중국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Matteo Ricci)가 저술한 한문 번역서로 중국 학자와 서양 학자가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이다. 중국인은 유학과 불교, 도교를 논하고 서양인은 중국 유학의 고전을 들어 스콜라 철학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한다. 또 [칠극]은 1614년 스페인 출신 판토하(Pantoja) 신부가 일곱 가지 죄악의 근원과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밝힌 수덕서(修德書)다. 성호는 ‘천주실의 발문’에서 천주교의 ‘천주’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서른 이후 여색을 지나칠 정도로 절제


제자 홍유한은 서학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천주교 쪽에는 1845년 김대건 신부가 부제 시절 남긴 첫 기록이 전한다. 농은 사후 60년 만이다. “홍유한이라는 철학자는 이미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연적 이치로 깨닫고 가톨릭교회의 서적을 연구함으로써 진리를 이해했다.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처럼 하느님을 공경하기 시작했다….”

1862년 프랑스인 다블뤼(Daveluy) 주교는 파리외방전 교회 본부에 홍유한 관련 비망록을 보낸다. 구체적이다. “… 1770년경 천주교 서적 몇 권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것을 기쁘게 읽었다. 그러나 즉시 책 공부를 그만두고 천주교 실천에 열중했다. 하지만 기도서도 없고 교회 법규도 몰랐다. 아는 것이라고는 축일(주일)이 7일마다 이어진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속세 일에 가담하지 않고 기도에 정성을 기울였다….”

비망록에는 농은의 인격을 짐작케 하는 일화도 전한다. “하루는 말을 타고 어딘가를 가다가 무거운 짐과 진창길에 지친 한 노인을 보고 동정심에서 내려 그를 말에 태우고 짐을 실었다. 자신은 진창길을 걸었다. 버선과 옷이 온통 젖었다. 또 한 번은 밭을 팔았는데 두 달 뒤 산사태로 폐허가 되자 그는 다른 사람이 손해 입는 것은 옳지 않다며 돈을 모두 돌려주었다. 어느 추운 날 혼자 있을 때의 일화도 있다. 하루는 여종 하나가 추위로 몹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자기 방에 자도록 했다. 그렇지만 그의 아내도 여종의 남편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또 1874년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神父)는 자신이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그는 금육일(禁肉日)을 몰라 좋은 음식은 아예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백산(소백산)에 들어가 13년(실제로는 10년) 동안 지냈다고 한다”고 적었다.

농은은 부부 관계 등 금욕도 실천했다.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조카사위 권철신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지은 제문(祭文)에 이렇게 기록했다. “…젊어서 내실에 처하기를 매우 드물게 하고 서른 이후로는 자녀를 낳지 않았다. 소자는 공이 여색을 절제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일까. 홍유한은 서학에 관한 한 스승의 경지를 넘어섰다. 권철신은 성호의 여러 제자들 중 농은이 정직과 겸손에서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40년 가까이 홍유한을 연구한 마백락(80) 영남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은 “그분이 비록 물로 정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신앙의 수계(守誡) 생활을 실천했으며, 부부가 함께 살면서도 30년 이상 정덕(貞德)을 지킨 점 등 한국의 첫 수덕자(修德者)로 부르고도 남을 분”이라고 존경했다.

김영모씨가 농은고택의 홍유한 유적비를 찬찬히 짚어 내렸다. 천주교 안동교구가 세웠다. 농은은 당대의 명문가로 선조 임금 이후 세 차례나 국혼(國婚)하고 사도세자가 출입한 정조 임금의 외가 집안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과는 12촌이다. 농은이 서울과 예산을 거쳐 1775년 소백산에 정착한 과정도 새겨져 있다. 순흥은 산이 높고 깊어 주위의 눈을 피할 수 있고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이 가까워 학문을 하기에도 적합했다. 홍유한은 이곳으로 옮긴 뒤 처음에는 인근 학자들과 교류하고 소수서원, 도산서원 등지를 방문했다. 또 제자들도 가르쳤으나 만년에는 독질(毒疾)이 심해 수계만 한 것으로 보인다. 농은은 1785년 세상을 떠난다. 유택은 순흥부 동쪽 문수산 우곡 동산에 마련됐다.

4대에 걸쳐 후손 9명이 순교자 길로


▎봉화 우곡성지 칠극성당 앞 벽면에 장식된 농은과 후손 순교자들의 모습.
일행은 고택을 나와 묘소가 있는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로 향했다. 36㎞, 자동차로 40분이 넘게 걸렸다. 묘소로 들어서는 길목에 ‘천주교 우곡성지’라는 큰 바윗돌이 보였다. 일대는 고요하고 차분했다. 농은의 동상은 입구에서 수덕서 [칠극]을 가슴에 안은 채 방문객을 맞이한다. 동행한 신로사 안내자가 “묘소를 답사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지금부터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하며 이동하겠다는 것이다. 동참을 요청했다. 묘소로 향하는 길모퉁이 15곳에 예수 최후의 날을 묵상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가파른 산을 오르며 기도가 끝이 났다. 문수산 자락 중턱에 농은의 묘소가 보였다. 골고다 언덕처럼 묘소 뒤로 큰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유학자가 짊어진 천주다.

묘소 아래 순례가 시작되는 곳에 가묘 13기가 나란히 조성돼 있다. 농은이 이 땅에 천주학을 처음 받아들여 실천한 뒤 감화를 받아 박해 시대 기꺼이 순교를 선택한 집안 후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제자이자 7촌 조카인 홍낙민(1751∼1801)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해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홍낙민은 1784년 세례를 받은 뒤 정조와 주위의 강권으로 배교도 했지만 1801년 신유박해 시기 이승훈, 최창현 등과 함께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당한다. 그의 아들 홍재영은 기해박해 순교자며, 이어 손자 홍병주·홍영주 등 4대에 걸쳐 9명이 순교한다. 이들 중 홍병주·홍영주 형제는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 성인에 올랐다.

농은은 1남1녀를 두었다. 고택이 있는 구구리에는 지금 후손이 한 집(홍기동)만 남아 있다. 8대를 내려왔다. 주손 홍기홍(54)씨는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다. 직계에선 순교자가 나오지는 않았다. 주손은 “고택 복원 계획이 마련되면 집터와 주변 땅을 내놓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묘소를 둘러본 일행은 우곡성지 작은 성당으로 들어갔다. ‘칠극성당’이다. 성당 앞면에 순교한 농은 후손 초상화가 보였다.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 건너편 큰 바위에는 차례로 글귀를 새겼다. 농은이 서학에서 발견해 스스로를 다스린 계명이다.

第一克(제1극): “복오(伏傲)”-교만을 억누르다.

교만은 분수에 넘치는 영화를 바라는 것이다. 교만은 첫째, 선행이 자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하느님께로 돌리지 않는 것. 둘째, 선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고도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것. 셋째,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것. 넷째, 남을 멸시하며 자신을 뭇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곧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겸손한 태도”가 요구된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행위 혹은 태도로서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는 교만은 우리를 또 다른 죄(자만, 야심, 허영)로 기울게 한다.


이렇게 칠극은 1극 ‘복오’로 시작해 ▷평투(平妬, 질투를 가라앉히다) ▷해탐(解貪, 탐욕을 풀다) ▷식분(熄忿, 분노를 없애다) ▷색도(塞饕, 탐을 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아내다) ▷방음(防淫, 음란함을 막아내다) ▷책태(策怠, 게으름을 채찍질하다)로 끝이 난다. 조선의 유학자를 끌어들인 지혜가 담겨 있다.

“품팔이를 하더라도 학문을 폐하지 말라”


▎1. 농은의 묘소로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 / 2. 우곡성지에 세워진 칠극의 기도 바윗돌. / 3. 우곡성지에 조성된 십자가와 농은 동상.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신대원 신부를 만났다. 국내 천주교 역사와 홍유한을 오랫동안 천착한 성직자다. 그가 평가한 홍유한은 이렇다.

“농은은 서학의 선봉자다. 그러면서도 천주학으로 유학을 경시하거나 유학의 방편으로 천주학을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학을 통해 천주학을 신봉하고 천주학을 통해 유학을 보강하려 했다.”

1765년 농은은 자식들 앞으로 ‘유훈(遺訓)’ 제1을 남긴다. 예산 시절이다. 첫 머리는 이렇다. “…집안 형편이 조금 움직일 수 있거나 기회가 있기를 기다려 영남에 가서 살되 혹 그곳의 좌우나 하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거기서 떠나지 말라….” 권력에서 멀어질 것을 권한 것이다. 이어 소신을 밝힌다. “… 의리는 학문에서 나오고 선행은 의리에서 이루어지니 사람이 학문이 없으면 어떻게 사람이 되며 어떻게 가문의 명성을 보존할 것인가. 무릇 나의 후손 가운데 가난하여 비록 품팔이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학문을 폐함이 없도록 하라….”


▎농은의 후손 순교자 13인의 가묘.
농은은 처음에는 성호를 이어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유학자였다. 서학이 밀려들 때는 그 사상을 붙들고 숨어들었다. 세상에는 서학을 인정하는 신서파(信西派)와 사학(邪學)을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가 생겨났다. 농은은 사상의 소용돌이와 갈림길에서 무게 중심을 잃지 않고 유학과 서학을 실천으로 조화시킨 선각자였다.

[박스기사] 퇴계 그리워한 마음 담긴 '농은유고' - 이어설(異魚說)에서는 물고기의 절의를 노래

홍유한이 남긴 [농은유고]에는 20여 편의 시가 전한다. 농은은 소백산 순흥에 정착한 이래 가까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부석사 등지를 답사한 뒤 소회를 시로 적었다.

[농은유고]의 첫 장은 농은이 동료들과 소수서원에 들러 하룻밤을 보낸 뒤의 감상으로 시작된다.

“자양(紫陽)의 백록동을/ 여기에 본 떠 이 사당을 창건하였네/ 산악은 높이 우러르겠고/ 강하(江河)는 측량하여 헤아리겠네/ 공부는 고요한 곳에서 진보하고/ 천도는 성(性) 가운데 드리우네/ 맑은 서재의 밤중에 부끄럽기는/ 단란하게 모여 다만 시나 읊조릴 뿐.”

‘김사집 이선길 권중옥 김경원과 함께 백운동 서원에 자면서 시를 주고받다’란 제목이 붙어 있다. 또 ‘도산서원에 자면서’란 시에는 농은이 퇴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이 지역으로 이사 온 까닭이기도 하다.

“밝고 아름다운 산수에 청정한 기운 넉넉한데/ 가만히 몸과 마음을 반성함에 이 생애가 부끄러워라/ 도덕은 오문(吾門)에 접하여 천성(千聖)의 계통을 잇고/ 교화는 동토(東土)에 드리워 만년의 명성이 있네.(…)”

편지글은 아들 낙질에게 쓴 8편 등 30여 편이 유고에 실려 있다. 또 4편의 서(序)와 3편의 설(說)에 유훈과 자신이 쓴 제문 2편이 전한다.

이 중 ‘이어설(異魚說)’이 다소 흥미롭다. 남주(南州) 사람들이 발견한 이상한 물고기에 관한 이야기다. 돼지 같은 형상에 털은 없고 목에는 구멍이 있다며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글이다. 그 물고기는 큰놈은 배만 하고 무리를 지어 강화 항구에 사흘 동안 버텨 배가 다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어 짤막하게 후설(後說)을 정리했다. 이름을 알고 싶었던 그 물고기가 남해의 고기 ‘내한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잡았는데 수컷을 잡으면 뒤에 암컷이 죽고 암컷을 잡으면 뒤에 수컷이 어김없이 죽더라고 했다. 그 물고기의 절의가 놀랍다고 덧붙였다.

또 4편의 유훈에는 자식들에 대한 당부가 절절하다. 언어와 행동을 삼가고 검약을 강조한다. 종족 간 화목도 언급한다. 종족 간에는 비록 분한(忿恨)이 있어도 따지지 말고 재리(財利)의 일이 있더라도 양보하라고 주문한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10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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