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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결산] 야구 금메달 일등공신 | 이정후 

“아버지와 달리 난 홈런타자 되고 싶어” 

이재국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중심’ 전문패널
20세에 불과, 넥센은 물론 대표팀 10년 책임질 부동의 톱타자…父 이종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어 16년 만에 금빛 ‘입맞춤’

▎8월 3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야구 결승전. 6회 초 박병호의 안타 때 1루 주자 이정후가 2루를 거쳐 3루로 내달리고 있다. / 사진:김성룡
9월 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겔로라 붕 카르노(GBK) 야구장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결승전. 한국이 3대 0으로 앞선 가운데 9회 초 일본의 마지막 공격. 2사 후 일본 마지막 타자 지키비 유키의 타구가 자카르타 밤하늘을 비행하다 오른쪽 외야에서 낙하하기 시작했다. 우익수는 가볍게 한 발로 껑충 뛰어오르며 왼손에 낀 글러브로 공을 낚아챘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불끈 쥔 채 주먹을 내지르면서 기쁨을 만끽했다. 금메달 확정, 한국 야구가 아시안게임 3연패를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야구에서 최종 아웃카운트를 잡는 장면은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국가대표 경기나 한국시리즈 등 큰 경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정후(20·넥센 히어로즈)가 이번 아시안게임 야구 금메달의 ‘라스트 신’에 등장한 대목은 마치 한국 야구의 미래 주인공을 암시하는 듯했다.

나이로 따지면 가장 뒤쪽에 있는 막내였지만 활약도로 따지면 맨 앞쪽에 선 공격의 첨병. 이정후는 29타석에 들어서 24타수 10안타로 타율 0.417를 기록했다. 이번 대표팀 타자들 중 최다 타석과 최다 안타, 최고 타율(10타석 이상 기준)을 올렸다. 여기에 2홈런과 7타점 6득점을 곁들였다.

“이정후 안 뽑았으면 어쩔 뻔했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지난 6월 11일 발표된 아시안게임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가 대회 직전 부상선수 대체 요원으로 극적으로 발탁된 뒤 국가대표 리드오프(1번 타자)로 종횡무진 맹활약하면서 금메달 가는 길을 앞장 서서 닦았기 때문이다.

6월 대표팀 최종 엔트리 발표 시점에 이정후의 탈락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대표팀 선동열 감독은 감독은 당시 “외야진에 좌타자가 많다. 좌익수 김현수(LG), 우익수 손아섭(롯데)인데 중견수로는 우타자 박건우(두산)를 뽑자는 의견 속에 이정후가 빠졌다”며 “이정후가 탈락해 나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히려 주변엔 “대표팀 코칭스태프에 속한 아버지 이종범(48) 코치로 인해 이정후가 역차별을 받은 게 아니냐”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가 많았다. 이정후를 뽑으면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표팀에 승선했다”고 색안경을 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건우가 뜻밖의 허리 부상으로 낙마했고, 아시안게임 대표팀 소집 직전에 대표팀 외야수에 한 자리가 났다. 결국 8월 13일 교체 명단에 이정후의 이름이 포함됐다. 이정후는 7월에 4할대 타율(0.417)을 올리더니 8월엔 대표팀 교체 멤버 결정 직전까지 5할대 타율(0.510)로 펄펄 날았다. 남들은 폭염 속에 지쳐 갔지만 그는 한여름 햇볕보다 더 뜨겁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6월 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결정할 당시 타율이 0.321(16위)이었는데, 어느새 타격 1위(0.369)까지 치고 올라갔다.

“안 뽑았더라면 어쩔 뻔했어?”


▎이종범 국가대표팀 1루 주루코치가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볼넷으로 출루한 이정후의 엉덩이를 토닥거리고 있다. / 사진:김성룡
굳이 박건우 대체 요원을 두고 좌타자와 우타자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왼손 타자는 왼손 투수에 약하다’는 속설이 있지만 이정후는 당시 좌투수를 상대로 4할대(0.402) 타율을 기록했다. 우투수(0.349)와 잠수함투수(0.372)를 상대할 때보다 더 좋았다.

극적으로 태극호에 승선한 이정후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선봉장이 됐다. 예선 조별리그 첫 경기 대만전에서 비록 패했지만 3타수·1안타·1볼넷을 기록했고, 인도네시아전에서 2타수·2안타·1볼넷·2타점을 올렸다. 홍콩전에서는 6회 2점 홈런, 9회 1점 홈런을 포함해 7타수·4안타·4타점을 기록했다. 예선을 통과한 뒤 수퍼라운드에서는 일본전에서 5타수 2안타, 중국전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결승에서는 안타를 치지 못했지만 1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볼넷을 골라내 출루한 뒤 안치홍의 적시타에 홈을 밟아 결승득점을 올렸다. “향후 10년간 국가대표 리드오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맹활약이었다.

아시안게임 역사를 살펴보면 막내가 아시안게임에서 이렇게 맹활약한 것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박한이(39·삼성) 이후 처음이다. 1979년생으로 동국대 2학년이던 박한이(당시 19세)는 타율 0.435(23타수 10안타), 1홈런·3타점·7득점을 올리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방콕 아시안게임은 프로선수가 처음 참가한 대회로 메이저리거 박찬호(당시 LA 다저스)를 비롯한 프로선수 12명, 김병현(당시 성균관대)을 비롯한 아마추어 선수 10명으로 초대 드림팀을 구성했다. 그리고는 한국 야구 사상 최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흥미로운 점은 1998년은 이정후가 태어난 해라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후인 올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이정후가 막내로 참가해 한국 야구의 다섯 번째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이끌었다는 점이 눈길을 모은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무엇보다 이정후와 이종범은 한국 야구 사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부자(父子) 금메달리스트’라는 역사를 썼다. 이종범 대표팀 코치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들은 이번에 대표팀 막내로 금메달리스트가 됐지만, 아버지는 16년 전 대표팀 주장으로 5경기에서 타율 0.353(17타수 6안타), 3타점·4득점·2도루로 활약하면서 대회 2연패를 이끌었다.

다시 해설위원으로 돌아와 마이크를 잡은 이종범 위원은 “최초로 부자가 아시안게임 야구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니 더없이 큰 영광”이라면서 “무엇보다 아들이 스스로 잘해서 대표팀에 뽑혔고, 또 이번에 좋은 활약으로 검증을 해줬기 때문에 더 기쁘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넥센으로 돌아가 생애 첫 가을야구를 꿈꾸며 방망이를 고쳐 잡았다. 그는 금메달도 금메달이지만 성인 국가 대표가 됐다는 사실 자체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모든 연령대에서 다 대표팀에 뽑혔거든요. 프로에 들어와서도 지난해 아시아 프로야구챔피언십(APBC) 대회 대표에도 뽑혔는데, 성인 국가대표로도 꼭 나가고 싶었어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6월에 최종 엔트리에서 빠질 때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하면서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기회가 빨리 찾아왔어요. 운이 좋았죠. 앞으로도 국가대표로 모든 대회를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저는 국가대표가 된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그러기 위해 제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죠.”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2012년 5월 26일 광주 무등구장에서 열린 이종범 은퇴식. 부인 정정민씨, 아들 이정후, 이종범이 나란히 서 있다. 당시 이정후는 휘문중 2학년이었다.
야구계에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는 말이 있다. 불세출의 스타 세 명을 모두 이끌었던 김응용(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 감독의 평가에서 비롯됐다. 그만큼 이종범은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야구선수였다.

이종범은 1993년 해태에 입단한 뒤 프로야구의 패러다임을 뒤흔들면서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타면 안타, 홈런이면 홈런, 도루면 도루, 수비면 수비, 야구에서 못하는 게 없었다. 강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총알 같은 송구까지 전 분야에서 톱클래스였다. 바람처럼 빨랐고, 불빛처럼 빛났다. 용암처럼 분출하는 그의 플레이는 팬들의 가슴과 눈을 뜨겁게 만들었고,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야구의 새로운 참맛을 일깨워줬다.

특히 일본으로 진출하기 전 5년간의 활약상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캐릭터였다. 그중 1994년의 이종범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124경기에 출장해 196안타를 폭풍처럼 몰아치며 0.393의 놀라운 타율을 기록했다.

196안타는 2014년 넥센 서건창이 최초로 200안타(201개) 고지에 오르기 전까지 역대 한 시즌 최다 안타였고, 0.393의 타율은 1982년 원년 팀당 80경기를 하던 시절 백인천의 0.412에 이어 역대 2위였다. 100경기 이상으로 따지면 아직도 최고 타율로 남아 있다. 또한 시즌 84도루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꿈의 4할 타율과 200안타, 100도루를 동시에 넘보던 이종범이었다.

홈런은 또 어떤가. 1994년 19홈런으로 양준혁과 공동 4위에 올랐고, 1996년엔 25홈런으로 3위에 랭크됐다. 1997년엔 이승엽(32홈런)과 홈런왕 경쟁을 벌이다 30홈런으로 양준혁과 공동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 그해 64도루를 기록해 30-30클럽에도 가입했다.

이종범은 1998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한신전에서 상대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의 투구에 팔꿈치를 맞는 부상 여파로 수술과 슬럼프에 빠지며 기대했던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3시즌 반 만인 2001년 중반 KIA가 인수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그는 일본 진출 이전의 폭풍 같은 시즌을 재현해 내지는 못했지만 2011년까지 한국 프로야구 통산 1706경기에 출장해 0.297의 타율과 1797안타·194홈런·510도루를 기록한 뒤 유니폼을 벗었다.

이종범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국민들에게 많은 추억도 선사했다. 특히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 라운드 3차전 일본전은 잊지 못할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0대 0으로 맞선 8회 초 1사 2·3루서 일본의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결승 2루타를 날려 한국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두 주먹을 쥐고 환호한 뒤 3루까지 내달리다 아웃됐지만 박수를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덕아웃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 경기 후 “신께서 내 인생 마지막 테스트를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타석에 들어갔다”는 심경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정후는 아버지의 전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어릴 때부터 주변 분들에게 ‘아빠가 야구 잘하셨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렇지만 저에겐 그냥 다른 사람들의 아빠처럼 평범한 아빠였어요. 2002년 아시안게임 때(4세)나 2006년 WBC 때(8세)는 제가 어려서 아빠가 뛰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아요. 저도 야구를 시작하고 커 가면서 영상이나 기록으로 보고 아빠가 대단했다고 느끼기는 했죠.”

이정후가 아빠의 기록 중 가장 놀라워하는 건 1994년 기록한 84도루다.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체력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다른 건 몰라도 체력 소모가 심한 1번 타자와 유격수로 한 시즌 84도루를 기록한 건 말도 안 되는 기록 같다”고 인정했다.

이종범의 아내 정정민씨는 이정후가 어릴 때 외출을 하면 아들을 잡으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네 살 때쯤이었을까. 공항을 그라운드처럼 내달리는 아들을 붙잡으러 뛰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엄마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발이 빨랐다. 초등학생 때에는 아버지가 일하는 광주구장을 안방처럼 드나들면서 그라운드를 바람처럼 가로질러 달리기도 했다.

모두들 그런 이정후를 보면서 “아빠를 닮아 순발력이 대단하다”며 웃곤 했다. 야구인들은 이정후에 대해 “아빠만큼 발이 빠르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야구 잘하는 아버지의 좋은 야구 DNA를 모두 물려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데뷔 시즌부터 신기록 갈아치운 ‘바람의 손자’


▎지난해 연말 한 시상식장에서 나란히 무대에 선 이종범·이정후 부자(父子). / 사진:양광삼
운동선수로서 좋은 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는 해도 수퍼스타의 2세가 부모처럼 성공하는 사례는 보기 드물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운동신경은 좋아도 아버지만큼 빼어나지 않거나, 아버지의 이름에 눌려 부담감 속에 실패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이정후는 프로 2년차지만 벌써 ‘성공’이라는 평가가 나붙고 있다. 지난해 휘문고를 졸업한 뒤 넥센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뛰어들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44경기에 모두 나서 0.324(552타수 179안타)의 고타율을 올렸다. 1994년 LG 서용빈(현 SPOTV 해설위원)이 작성한 역대 신인 최다 안타 기록인 157안타를 24년 만에 깨뜨렸다. 그리고 111득점을 올려 1994년 LG 유지현(현 LG 코치)이 보유하고 있던 역대 신인 최다 득점(109득점) 신기록도 다시 작성했다.

과거와는 달리 프로야구가 나날이 발전하고 선수층이 두꺼워지는 현 상황에서는 신인 선수가, 그것도 고졸 선수가 1군 엔트리에 포함되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다. 최근 신인왕 리스트만 봐도 프로 입단 후 몇 년씩 지나면서 경험을 쌓은 ‘중고 신인’들이다. 투수라면 몰라도 야수라면 특히 그렇다.

이정후는 이런 편견을 깨버렸다. 지난해 데뷔 첫해부터 개막전 1군 엔트리에 포함되더니, 도무지 고졸 신인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맹활약을 펼쳤다. 신인왕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버지도 해내지 못한 신인왕(1993년 신인왕은 양준혁)을 거머쥐었다. 야수가 데뷔 첫해에 곧바로 신인왕에 오른 것은 2001년 한화 김태균 이후 15년 만이었다.

그리고 올해 모두가 걱정하는 ‘2년차 징크스’도 깨끗이 날리고 있다. 수많은 고비가 있었다. 지난 시즌 후 힘을 키우기 위해 웨이트트레닝을 하다 손가락 부상으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맞이했다. 그리고 5월엔 사구에 종아리 부상으로, 6월엔 3루에 슬라이딩을 하다 왼어깨 관절와순 파열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더 단단해져서 돌아왔다. 온갖 악재도 그의 성장을 막을 순 없었다.

‘바람의 손자’답게 진화 속도 또한 빠르다. 지난해 첫해엔 호성적 속에서도 약점이 있었다. 특히 프로에 들어와 사실상 처음 경험하는 체인지업(타율 0.255)에 약했지만 올해는 체인지업 상대 타율이 4할대(아시안게임 휴식기 직전 기준 0.405)로 끌어올려 강점으로 바꿔버렸다.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에도 지난해 타율 0.292로 약했지만 올해는 역시 4할대(0.425)로 만들었다.

단 한 시즌 만에 약점을 강점으로 변모시킨 데는 이유가 있다. 이정후는 곱살한 외모와는 달리 독기와 승부욕이 남다르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아버지 이종범과 동시대에 야구를 했고, 현재 수비총괄코치로 이정후와 함께하고 있는 홍원기 넥센 코치는 “정후는 승부욕이 강한데, 강해도 너무 강해 탈”이라며 “지난해 신인 때 안타를 못 치고 덕아웃에 들어오면 너무 분해했다. 오히려 주변 코치나 선배들이 그런 승부욕을 자제시키는 게 일이었다. 승부욕이 강한 건 장점이기도 하지만 약점이 되기도 한다. 나도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모하면 수비를 할 때나 다음 타석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하곤 했다. 올해는 많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승부욕은 강하다”고 웃었다.

관심은 이제 사상 최초 ‘부자(父子) 타격왕’ 여부다. 공교롭게도 아버지도 데뷔 2년째인 1994년 타격왕에 올랐는데, 아들도 데뷔 2년째에 타격왕에 도전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버지는 대졸이었지만 이정후는 고졸이다. 아들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 이종범이지만 “그런 점은 오히려 나보다 높이 살 만하다”며 “고등학교 졸업하고 프로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특히 우리가 뛰던 시절에는 없었던 외국인 투수들 볼을 대처하고 많은 안타를 치고 있다는 게 대견하다”고 평가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부자가 타격왕에 오른 적은 없었다. 2세와 3세까지 대를 이어 수퍼스타를 배출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부자 타격왕 사례는 없었다(셰실 필더-프린스 필더 부자 홈런왕은 있었다). 이정후가 타격왕에 오른다면 세계적으로 희귀한 역사를 쓰는 셈이다.

“아버지의 196안타 꼭 깨고 싶어요”

“저는 성격이 좀 급해요. 그래서 거침없이 치는 스타일이었죠. 제구가 좋은 투수면 초구 2구부터 적극적으로 쳤고 제구가 좀 안 좋은 투수는 기다렸는데, 정후는 저보다 성격이 덜 급해요. 좀 진중하고 한결같아요. 타석에서 자기 루틴대로만 치더라고요.” 아버지 이종범의 평가에 이정후는 “아빠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성격이 좀 급하긴 급하다”며 슬며시 웃는다.

이종범은 아들에게 야구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기술적인 조언도 어쩌다 아들이 물어보면 대답하지만 먼저 나서서 조언하거나 지도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쩌면 수퍼스타 아버지를 둔 아들이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인지도 모른다.

“이제 2년차라 루틴 같은 게 형성되는 시기죠. 좀 더 체력적인 안배도 필요하고, 방망이가 안 맞을 때는 기습번트를 대거나 볼넷을 얻어 나간다든지 해야 합니다. 앞으로 2~3년 정도는 더 안주하지 않고 더 많은 노력과 자기 관리 같은 게 필요하죠. 아시다시피 세상이 너무 무섭잖아요. 그래서 저는 늘 예의나 인성 관리 쪽을 더 많이 얘기하죠. 운동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고, 코치나 선배들 하는 거 보면서 배우는 거죠.”

아버지에게 아들은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해도 가끔씩 아내와 함께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야구장 외야석에 앉아 아들의 경기를 지켜보기도 한다.

“정후가 지금 타율이 좋은 건 욕심 안 부리고 치기 때문입니다. 홈런과 장타 맛을 알고 크게 치려고 하면 타율은 떨어져요. 그러면 또 깨닫겠죠. ‘나는 홈런보다는 간결하게 히트를 쳐야 한다’고. 그런 게 자기에게 맞다는 걸 본인이 느껴야겠죠.”

그러나 아들은 “아빠는 홈런 대신 안타 위주로 치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며 아버지의 생각에 반하는 의견을 밝혔다. “아직은 힘이 약하지만 파워도 길러야 하고 홈런도 칠 수 있는 타자로 발전하고 싶어요. 저는 실패가 두렵지 않아요, 솔직히. 정말입니다. 저는 해보지도 않고 안주하는 게 실패라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변화를 주고 나를 다그치면서 발전해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는 원래 왼손잡이지만 어릴 때 왼손잡이용 글러브가 없어 후천적 오른손잡이로 변신했다(야구 외에는 모두 왼손을 사용한다). 아들은 원래 오른손잡이지만 좌자타가 됐다(야구 외에는 모두 오른손을 사용한다). 후천적으로 정반대의 손을 사용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생각이 달랐다.

‘아버지의 기록 중 도전하고 싶은 기록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정후는 “도루는 안 될 것 같고 196안타 기록은 넘어서고 싶다. 한 시즌 200안타를 목표로 잡고 있다”면서 “아직은 어려서 구체적인 기록을 목표로 한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거 열심히 하고, 그러면서 또 다른 목표도 세우겠다”고 당차게 말했다.

이정후의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들 그가 어디로 뻗어갈지 궁금해하고 있다. 허구연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은 “이정후는 공·수·주를 모두 갖춘 선수다. 한마디로 한국판 이치로가 나타났다”면서 “아빠의 피를 물려받아 타고난 재능도 있지만 발전 속도가 정말 빠르다. 향후 홈런은 몰라도 최다 안타나 타율 등에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더 놀라운 기록을 세울지도 모른다”며 이정후의 미래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재국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중심’ 전문패널 keystone71@naver.com

201810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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