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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인문학으로 풀어낸 베토벤 교향곡 

오선 악보에 신세계를 담아내다 

김택수 미국 시러큐스 대 조교수
다종(多種) 악기 간 조율로 근대사회 향한 믿음 표현…작품 간 공통분모에서 유럽사 발굴하는 구성 흥미로워

서양음악 작곡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필자에게 베토벤은 더 이상 새롭게 보기 힘들 정도로 익숙하다. 그러나 막상 알려고 하면 끝이 없는 신성한 존재이기도 하다. 수업시간 또는 일상에서 베토벤을 소개할 일이 생기면 의외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런 만큼 베토벤의 작품들, 그중에서도 서양음악에서 경전처럼 받아들여지는 그의 교향곡 전체를 깔끔하게 정리하며 그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책이 나와 무척 반갑다. 특히 본인이 이전까지 접했던 베토벤에 관한 글들이 대부분 개별 작품에 대한 학술적인 분석, 아니면 이미 클래식 애호가가 된 이를 위한 ‘지식 더하기’에 가까웠다면, 나성인의 글은 ‘교향곡’이라는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클알못’(클래식 음악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섬세하게 배려하고 있다. 단적으로 책에는 악보가 하나도 없다.

책은 각 교향곡이 완성된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돼 있다. 통속적인 위인전처럼 작곡가의 성장 드라마를 늘어놓지 않았을까 의심이 들 수 있다. 더구나 예술, 그중에서도 음악은 인문학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음악이 좋다, 아름답다’ 식의 선호나 기술적으로 얼마나 치밀한지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음악적 경험이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그렇다. 그러나 책에서는 역사·문학·심리학·음악·로맨스를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인간군상에 관한 복합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저자는 당대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사고방식과 그 뿌리를 조곤조곤 풀어 나간다. 베토벤이 ‘교향곡’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러 악기가 무대에서 함께 소리를 내는 교향곡은 주선율과 보조선율 사이에 위계를 두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의 협력과 경쟁 가운데서 ‘조화로운 전체’로서 곡이 성립된다. 그리고 그 ‘조화로운 전체’는 합리적인 작곡법에 의해 보다 고양된 감정에 이르게 된다. ‘합리적인 사회는 진보한다’는 신념이 그의 작품세계로 표현된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개성이 강하다. 한 작곡가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다. 그만큼 팬들의 지지에 구애받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했다는 방증이다. 작곡가로서 필자가 베토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들을 하나로 엮을지가 큰 고민이었으리라. 나성인은 아홉 곡을 관통하는 마법의 키워드가 있는 양 견강부회하지 않는다. 대신 인접한 두세 곡 내에 잠재하는 공통분모를 찾아낸다. 예를 들어 교향곡 1·2번은 ‘고전주의의 이상’으로, 2·3·5번은 ‘저항하는 프로메테우스’로, 그리고 7·8번은 ‘민중의 축제’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저자가 발굴한 공통분모는 유럽의 역사와 대응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러한 유기적인 구성은 책을 또 하나의 교향곡으로 승화시킨다.

베토벤은 왜 ‘악성(樂聖)’으로 불리는가. 단순히 ‘귀가 안 들리는 역경을 극복하고 작곡을 계속한 훌륭한 작곡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와 환희를 노래’했다는 책의 부제처럼, 베토벤의 교향곡에는 서구문명에 대한 애정과 진보에 대한 낙관이 담겨 있다. 사료와 예화의 종류와 수량만 봐도 저자가 얼마나 공들여서 이 만찬을 준비했는지 알 수 있다. 옛날이야기처럼 가벼운 필체로 쓰여 있어서 부담 없이 술술 읽힌다. 책을 읽은 뒤엔 카페에서 이따금 흘러나오는 건조한 선율조차 새롭게 들릴 것이다.

※ 김택수 - 미국 시러큐스 대 조교수, 2014~2018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상주 작곡가. 서울대 작곡과 및 동 대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미국 인디애나 대에서 작곡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810호 (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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