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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6자회담 초대 수석대표’ 이수혁 민주당 의원의 한반도 정세 진단 

“北 스스로 제안한 것부터 제대로 실행하라 요구하는 게 순리” 

글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 “비핵화 목표 한·미 이견 없어… 타이밍의 문제일 뿐”
■ “해결책? 비핵화 속도 내게 하고 조치 범위 넓혀야”
■ “종전선언 놓고 미국 내부에서도 긍정적 변화 중”
■ “향후 핵시설→ 핵물질→ 핵무기 폐기 순일 듯”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북핵 전문가로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남북 간, 북·미 간의 신뢰 구축이다”라고 말했다.
"팽팽하게 긴장된 로프를 늘려 탄력적이고 융통성 있게 대응해야 한다. 북한의 움직임이 우리에게 조절돼 여유 있게 전달되어야 한다. 너무 가깝게 백병전을 하다가 뒤범벅 난투를 하며 함께 미끄러져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2011년 한 저명한 외교관 출신 인사가 자신의 저서 [북한은 현실이다]에 쓴 글이다. 맥락은 이렇다. 2011년 당시 북한은 핵을 앞세워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당시 이 인사는 남북한은 ‘로프’로 묶여 있는 상태이기에 행여나 북한이 로프를 끊고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우리와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 남북한 로프의 긴장감은 지난 1년 새에 눈에 띄게 완화됐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의 로프는 여전히 팽팽하다. 하루하루 한반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이런 가운데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9월 30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미국에 특사단을 파견해 의원외교를 펼쳤다. 특사단은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보좌관 등 백악관과 행정부의 한반도 및 북한 담당 관계자를 만나 미국의 비핵화 협상 전략을 청취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특사단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로프’ 관리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이수혁(70)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이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북핵 전문가다. 그는 1997년 주미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며 남북한 간 비공식 외교 경로인 ‘뉴욕 채널’을 개설했고, 2003년에는 6자회담 초대 수석대표로 북핵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2005년 주독일 대사, 2006년 국가정보원 제1차장도 역임하며 외교·안보를 두루 섭렵했다.

월간중앙은 10월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미국에서 막 귀국한 이 의원을 만나 방미 성과와 미국 정가의 분위기, 북핵 전문가로서의 분석 등 한반도 정세에 대한 진단을 들었다. 이후 논란이 된 5·24 제재 조치 해제 논란 등의 내용은 추가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이 의원은 “한국과 미국의 비핵화 목표에는 이견이 없다”면서도 “미국 측 입장은 남북 관계 개선과 비핵화 속도를 맞춰 달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남북 관계 속도조절론에 대해 “북한으로 하여금 비핵화의 속도(speed)를 내게 하고 북한이 조치하겠다고 얘기하는 콘텐트의 범위(scope)를 넓히게 하는 방법이 해결책”이라고 제시했다.

이 의원은 화두가 되고 있는 종전선언과 핵 신고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그는 “종전선언은 비핵화로 가는 필요조건”이라며 “미국 내에서도 긍정적인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핵 신고 문제와 관련해서는 “북한이 먼저 제안한 것부터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순리다. 현 단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01. 현 정세 평가 | “남·북·미 지도자 결단과 용기가 현 상황 이끌어”


▎10월 7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면담하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 양 옆에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앤드루 김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이 배석했다. / 사진:연합뉴스
6자회담 수석대표 등을 맡아 북핵 문제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평창올림픽 이후에 한국·미국·북한의 정상이 쏟아낸 일련의 발언과 합의, 양해들은 지난해까지 있어 왔던 것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상황이다. 나는 이를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고 얘기한다. 패러다임이 전환된 상황에서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시각으로 작금의 흐름을 바라봐선 안 된다. 과거 핵문제를 담당했던 어떤 사람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다. 과거에는 주로 6자회담 수석대표가 접촉해 각국 지도자에게 보고하는 식이었다. 남·북·미 지도자가 직접 나서서 삼각 관계를 통해 서로 만나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전환된 이유는 핵 협상의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협상에서 취급해야 하는 어젠다, 즉 핵무기 프로그램의 콘텐트와 속도가 2017년에 비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는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생산하면서 우라늄핵폭탄을 보유하게 됐고,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확보했다는 측면이 있다. 플루토늄과 중거리미사일을 놓고 협상하던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전반적으로 평가하면 과거와 같았다면 지도자들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패할 경우 데미지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북한이 거절할 수도 있음에도 어려운 제안을 시도하는 용기와 결단을 보여줬다. 때마침 김정은 위원장도 용기를 내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트럼프 대통령도 남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이번 방미에서 트럼프의 직관(intuition)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컸다. 결정적 순간에 회담을 취소하고 다시 개최하는 등 이른바 밀고 당기기다. 김 위원장도 대단한 결단력을 발휘했다. 20~30년 동안 온갖 제재 속에 완성한 핵을 폐기하겠다고 한 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결단이다. 세 사람의 용기와 결단력이 현재의 상황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속도가 더딘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이 단기적으로 얘기한 것은 더 이상 핵실험과 ICBM 발사 실험을 하지 않겠다면서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하고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도 부분적으로 해체했다. 조건을 달긴 했지만 평양선언에서 영변 핵시설 영구 폐쇄도 얘기했다. 북한이 보기에는 성의 있는 초기 단계 조치를 취했다. 물론 이것들이 과연 결정적인 시설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만 놓고 한국과 미국이 전격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놓을 수는 없다. 북한은 미래 핵과 현재 핵 가운데 미래 핵에 대한 조치를 취한 것일 뿐이다. 문제는 현재 핵이다. 북한은 현재 갖고 있는 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순서의 문제다. 이를 놓고 한국과 미국이 바라보는 시각과 북한이 바라보는 시각 사이에 충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미래의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태도는 고무적이다.”

미국의 불만은 무엇인가?

“신뢰 구축을 위해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6월 12일 1차 북·미 정상회담 전인 5월 24일 풍계리 핵실험장은 멀리서 기자들만 바라보는 상태에서 폭파됐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아직 신뢰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보여주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10월 7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풍계리 핵실험장의 폐기 확인을 위한 사찰단 방문을 제의했다.) 앞으로 북·미 신뢰를 구축하는 데 검증(verification)이 중요하다. 다만 지금부터 검증하려고 달려들면 북한은 압박으로 느낄 수 있다. 이를 잘 알기에 미국은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봐라. 그렇지만 그것도 검증하는 것이 좋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조치하겠다고 한 것을 실행하되 속도를 내면서 검증을 하자는 뜻이다. 지금은 북한이나 미국 모두 카드를 한 장씩 꺼내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02. 한·미 불화설의 진상 | “비핵화와 남북 교류, 속도 맞추자는 것일 뿐”


▎더불어민주당 대미특사단이 10월 1일(현지시간)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오른쪽)를 면담했다. 비건 대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10월 7일 면담에 배석했다. / 사진:더불어민주당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한·미 간의 의견 불일치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은 비핵화 목표(goal)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미국이 이견을 제기하는 부분은 타이밍(timing)이다. 미국의 입장은 ‘아직은 활발하게 남북 교류를 할 시기가 아니다. 조금 기다려 봐라’라는 것이다. 북·미 간 핵협상 진전이 이뤄져 괜찮다고 판단할 시점에 남북 교류를 진행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이번 방미를 통해 만난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앨리슨 후커 백악관 NSC 한반도 보좌관을 비롯해 워싱턴의 분위기가 그렇다. 남북 관계 개선이 가져올 효과나 목표에 대한 이견은 전혀 없다.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 비핵화를 선도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한·미 간의 의견 차이는 없다. 단지 타이밍이다.”

그 이견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보나?

“중요한 문제다. 적극적 접근이냐 소극적 접근이냐의 차이다. 한·미 간 이견을 없애려고 한국이 대북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하면 북한과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때문에 미국도 무턱대고 한국에 남북 교류 중단을 요구할 수 없다.

해결책은 있다. 비핵화의 속도(speed)를 내게 하고 북한이 조치하겠다고 얘기하는 콘텐트의 범위(scope)를 넓히게 하는 방법이다. 그간 핵 문제에 가장 장애물이 된 것이 속도와 범위였다. 다만 이를 미국 혼자서 할 수는 없다. 북한이 동의해 주고 한국도 지원 사격을 해줘야 한다. 지금은 중대한 타이밍이니까 한국 정부가 너무 앞서가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배려를 해달라는 것이 미국의 주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미국은 한국의 입장과 조치를 지지할 수 있는 환경, 가령 남북 경협을 지지할 만한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이를 위해 북한을 더 설득해 속도와 범위를 넓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에 압박이 될 수 있지만 그 노력이 유명무실하지 않도록 관리를 해보자는 의견이다. 아울러 한국에는 북한에 어떤 제의를 하더라도 유엔 안보리 제재 조치 범위 안에서 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대미특사단이 10월 1일(현지시간) 앨리슨 후커 백악관 NSC 한반도 보좌관과 면담하고 있다. / 사진:더불어민주당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아직도 강경한가?

“미국은 이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다.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안보리 제재 해제는 없다는 것이다. 안보리 결의는 핵무기 프로그램 해체에 목적이 있다. 프로그램 자체를 폐기하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부분적으로 실험을 중단하고 시설을 폐쇄했다고 해서 안보리 결의 목적이 실현됐다고 보지 않는다. 근본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미국이 주장하는 완전한(complete) 비핵화에 대해 순환논쟁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어느 수준의 조치까지 ‘완전한’ 비핵화로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북한은 플루토늄뿐만 아니라 농축우라늄을 갖고 있다. 이는 완전한 비핵화로 가는 과정에 큰 난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 폭발력의 문제가 아니다. 농축우라늄에 대한 검증은 플루토늄과 성격을 달리 하고 있다. 플루토늄은 사찰을 통해 생산량과 생산시기가 나온다. 플루토늄을 생산할 때 발생하는 동위원소의 반감기로 언제 생산되고 양이 얼마나 나왔는지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농축우라늄은 불가능하다. 우라늄 광석을 농축하면서 순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다른 동위원소가 출연하지 않는다. 반감기를 계산할 수가 없다. 사찰을 해도 언제 얼마나 생산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농축우라늄 검증이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비핵화를 놓고 논쟁이 생길 여지는 있다.”

속도조절론이 한·미 양국 사이에 계속 불거지고 있다.

“1994년 제네바합의 때도 속도조절론이 나왔다. 당시 제네바합의서에는 평양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 설치가 명시됐고 외교적 왕래를 통해 사무소 설치를 위한 가시적인 노력을 했다. 당시 남북한 관계는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주미대사관에 ‘속도가 너무 빠르다. 남북 관계가 발전되지 않는 한 미·북 간 관계가 먼저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훈령을 보냈다. 한국에서 나온 속도조절론이었다. 다른 환경적 요인들도 있겠지만 결국 연락사무소는 설치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속도조절론은 항상 이슈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현 상황을 미·북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비핵화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남북한 관계를 비핵화와 속도를 맞춰 달라는 것이다. 단지 우리 정부는 남북한 신뢰 구축이 비핵화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고, 미국은 한국이 너무 앞서나갈 경우 제재에 구멍이 뚫릴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10월 10일 국감장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 조치 해제 검토 발언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5·24 조치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된 제재다. 핵문제와 관련은 없다. 이후 북핵 문제로 안보리 제재 조치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5·24 조치로 인한 제재의 중요한 부분은 안보리 제재에 포함된다. 논쟁의 핵심은 안보리 제재가 이뤄지고 있으니 5·24 조치는 해제해도 되지 않느냐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전히 북한은 천안함 사건 책임 소재를 놓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 문제가 해결돼야 5·24 조치를 해제할 명분을 갖게 된다.

다만 실리적인 측면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 남북 경협 문제는 핵 협상을 추동시키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5·24 조치 해제가 한국의 상응조치로써 비핵화의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면 당국이 검토하는 것은 당연하다. ‘해제’가 아닌 조치 유지 여부를 항상 검토하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강 장관 발언 이튿날 5·24 조치 해제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지금 논란은 강 장관이 마치 해제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는 발언을 해서 오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상응조치로 꺼낼 수 있는 카드에서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외교고 협상이다.”

“美, 내부적으로 핵폐기 로드맵 준비하는 듯”


▎2004년 2월 25일 제2차 6자회담에 참석한 각국 수석대표가 중국 베이징 조어대에서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켈리 미국대표, 이수혁 한국대표, 김계관 북한대표, 왕이 중국대표, 야부나카 미토지 일본대표, 로슈코프 러시아대표. / 사진:연합뉴스
큰 틀에서 비핵화에 대한 미 정부의 시각은 어떤가?

“핵폐기 프로세스를 작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프로세스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특히 프로세스가 초기에 장애물을 만나 중단되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이럴 경우 지난해 말과 같은 극단의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최근 상황을 보면 미국의 관료들은 낙관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북한의 태도에 달렸지만 적어도 미국이 북핵 폐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며 비관적이지 않았다. 이전과 다르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분위기 조성에는 한·미 간 솔직한 대화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외교적 수사(rhetoric)가 아니다. 한·미 공조의 무게감은 상당하다. 때문에 한·미 간 균열이 있을 만한 조치들은 서로 자제하고 이해하고 관리해 가는 분위기다.

덧붙여, 미국이 확신하는 것 중에 하나는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북한이 만족할 만한 카드가 있다는 것이다. 제재 아닌 방법으로도 북한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나올 만한 카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인사를 만나고 나서 분석한 결과다. 미국의 생각은 신속하고 공격적인 일정표(time table)를 만들어 협상을 진행하자는 것이다. 미국 내부적으로 핵폐기 로드맵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미국은 김정은 위원장을 어떻게 보는가?

“일련의 과정이 구체적 계획 하에 취해진 조치로는 보고 있지 않는다. 핵 폐기까지 이르는 충분한 협상 로드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을 수 있다. 물론 협상장에서 꺼낼 수 있겠지만 김 위원장이 조금 더 과단성 있게 하지 않고 있다. 김정은에게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는 이유다.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

03. 화두로 떠오른 핵 신고 vs. 종전선언 |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 핵 신고? 차근차근”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종전선언을 비핵화로 가는 필요조건이자 정치적 선언이라고 강조했다.
강경화 장관이 ‘핵 신고 요구 보류’ 중재안을 꺼냈다.

“강 장관의 발언에 다들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나온 얘기는 아니다. 과거 나도 오랫동안 주장해 온 얘기다.

신고는 비핵화에 있어서 핵심이다. 신고 없는 비핵화는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신고서를 받아내야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일단 프로세스를 시작해야 한다. 신고서 때문에 프로세스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면 안 된다. 이를 위해 협력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미·북이든 남북이든 협력적 사업을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이다. 협력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신뢰를 구축해 가야 한다. 그 후에 신고서를 받아야 한다. 신고서도 ‘all in one’(한번에), ‘all or nothing’(전부를 얻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의 방식은 위험하다. 신고서의 내용이 미국 입장에서 100% 마음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받아내야 한다.

비유를 들어 보자. 이혼하겠다는 두 사람을 놓고 어떻게 합칠지 긴 리스트를 만들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합칠 생각이 있는지 확인되면 최소한의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동안 서로에 대해 몰랐던 점을 알아가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 가야 하지 않겠나.

비핵화 과정은 상당히 어렵다. 1990년대 플루토늄 하나 갖고도 얘기가 쉽지 않았는데 농축우라늄,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에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판국에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해결책이 쉽게 나올 수가 있겠나.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인내하면서 비핵화를 진행하자는 것이 강 장관 발언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핵 신고리스트를 먼저 받아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한다.

“핵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100% 믿을 수 있는 신고서를 받는 것이다. 지금 미국 정치권은 핵폐기 프로세스 첫 단계에서 북한에 신고서 제출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생각해 봐라. 지금까지 북·미 간 신뢰 속도와 범위를 감안할 때 핵무기 보유량, 핵무기 보관 위치, 플루토늄·우라늄과 같은 재원 등이 담긴 핵 신고리스트를 순순히 제출할 것으로 보는가. 제출한다 한들 특정 내용과 항목이 빠져 있거나 부실하게 기재돼 있을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가만히 있겠는가. 폭탄 주고받기 하는 격이다. 더구나 국가가 사느냐 죽느냐가 달려 있는 안보 문제다. 압박을 가하다 보면 과거의 핵협상과 똑같은 결과가 되풀이된다.

북한은 현재 주요 핵시설 처리를 놓고 방법을 제안했다. 북한이 먼저 제안한 것부터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현 단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부터 시작이다.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김정은이 취해야 할 조치다. 김정은의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지속적으로 핵물질을 생산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도 이를 공식 확인해 줬다. 비핵화 의지가 없는 것 아닌가.

“돌이켜보면 북한이 더 이상 핵물질을 생산하지 않겠다고 언급한 적은 없다. 핵실험장과 미사일 발사장을 폐기하고 핵 실험,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지 않겠다고만 말했다. 본격적인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면 내놓겠다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협상할 때 내놓을 카드를 지금 꺼낼 이유가 없다. 단지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하려는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생산하는 핵물질이 결정적인(critical) 것도 아니다. 여기에 북한의 메시지가 있다. 스스로 약속한 것은 이행하겠지만 약속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약속을 하게 끔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제대로 분석하고 미국에 설명해야 한다. 물론 협상을 위해서 핵물질을 생산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당위론만 갖고 접근해서도 안 된다.

덧붙여 평양공동선언 5조 1항과 2항을 보면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우선 영구적 폐기’나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 나갈 용의’란 문구가 있다. 여기서 ‘우선’ ‘같은’ ‘추가적인’ ‘계속’ 등의 부사적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은 비핵화의 초보적 단계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현재 밝힌 조치 이상의 행동을 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이러한 진도에 맞춰 미국도 행동으로 보여 달라며 ‘상응조치’ 요구가 나온 것이다. 이를 외면한 채 ‘비핵화 의지가 없다’ ‘쓸모없는 시설을 폐기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종전선언에 대한 美 인식, 긍정적 분위기”


▎10월 2일,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을 방문한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와 이수혁 의원(오른쪽)이 간담회를 갖고 있다. / 사진:더불어민주당
미국이 내놓을 상응조치에는 종전선언이 들어가는가.

“백악관과 행정부 관료들은 물론 마이클 그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빅터 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등 싱크탱크 관계자들을 만나 종전선언에 대해 심도 있게 얘기했다. 이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두 가지 사례를 얘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항복 선언을 했다. 그것이 종전선언이다. 싸울 뜻이 없다는 의지 표명이다. 평화협정은 그로부터 6년 후에 체결됐다. 미국 관할 하에 일본의 체제를 바꾸는 데 시간이 그만큼 걸렸다.

일본과 소련의 사례도 얘기했다. 두 국가는 전쟁이 끝난 후 11년 지난 1956년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공동선언을 했다. 그러나 영토문제로 평화협정은 아직도 체결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평화협정 체결은 어려운 문제다.

반면 종전선언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당사국들이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평화협정은 쉽지 않다고 본다. 평화협정 체결 요소 가운데 군사력이 포함돼 있고 핵문제가 이에 해당한다. 평화협정은 전쟁 상태(state of war)를 종식시키는 것(terminate)을 의미한다. 상태(state)에는 교전뿐 아니라 전쟁 원인부터 전후(戰後) 치유까지 모든 과정이 포함된다. 반면 종전선언은 교전 행위(act of war)를 중단하는 것이다. 총부리를 겨누면서 전쟁하는 일은 없다는 의미다. 전쟁 위협의 수위를 낮춰주는 것이다. 종전선언은 북한에게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다.

종전선언은 비핵화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 이후 문 대통령은 ‘속임수를 쓰거나 시간을 끌면 미국이 강력하게 보복할 텐데 그 보복을 북한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김 위원장의 발언을 공개했다. 미국이 언제 공격할지 모른다며 두려워하는 북한을 안심시키고 협상 테이블로 한 걸음 끌어내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종전선언이다.

미국 전문가들에게 이 같은 얘기를 들려줬더니 일본과 러시아 사례를 생각하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종전선언에 대해 미국도 긍정적인 생각들로 전환되고 있고 싱크탱크 관계자들에게도 이를 설명했더니 분위가 많이 바뀌었다. 이전보다 종전선언에 대해 한 걸음 다가간 것은 분명하다.”

종전선언이 북한의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요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목소리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종전선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문구만 있겠는가. 종전선언에 어떤 내용을 담느냐는 협상을 하면 된다.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종전선언 내용 속에 한반도에서의 군사력 문제(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는 평화협정에서 논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문구를 포함하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앞서 9월 초 대북특사단과 만난 김 위원장은 종전선언과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서로 무관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해당 내용이 담긴 조항을 넣는다면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과도기적 단계로 상황 관리 측면에서 종전선언이 필요하다.”

어떤 수순으로 비핵화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는가.

“현재 북한의 조치를 보면 미래 핵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미래 핵의 제조 가능성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향후 또 다른 핵무기 및 ICBM 제조 시설을 폐기하는 로드맵이 있을 것이다.

다음은 현재 핵, 즉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과 농축우라늄 등 핵물질을 폐기하는 수순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은 반출 혹은 폐기의 방법으로 핵무기를 폐기하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시간 순서상으로 미래 핵→ 현재 핵→ 과거 핵을, 범위(scope)로 보면 핵시설→핵물질→핵무기를 폐기하는 수순을 진행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북핵 전문가로서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남북 간, 북·미 간의 신뢰 구축이다. 한국은 북한에 협력적 자세로 접근해 북한이 덜 불안하게 만들어 ‘핵을 포기해도 괜찮다. 그래야만 살 길을 찾는 것이다’라며 자꾸 신뢰를 쌓게 해야 한다. 우리가 북한에 협력적 방법으로 남북 간 신뢰를 쌓는 것에 트럼프는 용단을 내렸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이 단적인 예다. 지금은 핵협상의 내용보다 신뢰 구축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25년간 실패했던 핵협상을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실패할 경우 진짜 위기가 온다. 트럼프가 못 믿겠다고 할 경우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른다. 지난해 임계점에 다다른 모습을 우리 모두 보지 않았는가.

지금은 신뢰 구축이 우선이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미지수다. 미국은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고 한국은 경협의 필요성과 효과에 대해 얘기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종전선언도 신뢰 구축의 한 방안이다.”

- 글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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