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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리포트] 김정은 체제의 깜짝 여성 파워 

‘만사 여(與)통’ 모든 일은 여정 동지를 통하라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여정·이설주·현송월·최선희·김성혜 등 전방위 맹활약…엘리트의 체제 이반, 민심 외면 겹칠 경우 위기 맞을 수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부인 이설주 여사, 김여정 당중앙위 제1부부장 등이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고향의 봄’을 들은 뒤 박수를 치고 있다. /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북한 노동당 창건 73주년을 맞은 10월 10일 평양 대성구역에 자리한 금수산태양궁전. 대리석으로 지어진 이 건물 앞으로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최고급 대형 세단인 롤스로이스 ‘팬텀’ 모델을 방탄차량으로 개조한 ‘롤스로이스 디아머드’에서 내린 사람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김 위원장은 김일성(전 국가주석)과 김정일(전 국방위원장)의 시신이 미라 형태로 영구 보관된 이곳에 잠시 머물며 참배 행사를 치렀다. 북한을 이끄는 조선노동당의 창건 기념일이나 김일성·김정일 생일과 기일에 관행적으로 열려온 일정이다.

하지만 이날 행사에선 이전과 다른 점이 드러났다. 노동당과 내각·군부의 간부들이 줄지어 서서 김정은의 뒤를 따르던 과거와 달리 수행원 규모가 단출하게 짜인 것이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수행 인사의 면면과 관련해 “최용해 동지, 박광호 동지, 이만건 동지, 김여정 동지, 이재일 동지를 비롯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일꾼들이 동행하였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노동당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간부들만 대동한 게 눈길을 끌었다. 당 창건 기념일에 이들만을 이끌고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묘소에 해당하는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한 김정은 위원장의 생각이 무엇일지에 관심이 쏠렸다.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향후 권력 운용의 양대 축으로 삼으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날 수행 인물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건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다.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으로 오빠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김여정은 평양 권력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북한 노동당과 군부의 핵심 세력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도 “여정 동지를 통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한다.

실제로 김여정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신임은 두터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김여정 부부장 부서에서 ‘만리마 속도전’이란 말을 만들었다”며 자랑하듯 말하기도 했다. 북한의 대표적 노력동원 운동인 ‘천리마 운동’에서 따온 선전·선동 구호인 ‘만리마’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경제를 상징하는 구호다.

김여정의 활동 반경은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차관급)에 머물지 않는다. 지난 2월 특사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해 김정은 친서를 전달하고, 정상회담 제안을 문 대통령에게 밝히는 등 북한의 최상급 권력 실세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다. 4월과 5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9월 평양 정상회담에서도 오빠 김정은의 바로 곁을 지키거나 회담에 배석하는 등 비서실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도 마찬가지다.

10월 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환담하는 등 5시간30분의 일정을 소화할 때 김여정은 김정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앞서 5월 방북한 폼페이오 장관이 김정은에게 건넨 서한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넘겨받자 이를 김여정이 냉큼 채가듯 챙기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오빠와 관련한 중대 내용은 빠짐없이 파악하겠다는 김여정의 뜻이 드러난 행동이다.

안팎에서 김정은 밀착 조력하는 두 여인

김여정의 이런 행보는 김정은 체제 들어 달라진 평양 로열패밀리 여인들의 위상과 발걸음을 보여준다. 절대 권력의 안방을 차지해온 여인들이 권력의 실세나 핵심 지원 세력으로 본격 부상한 것이다. 이들은 베일에 싸인 채 은둔을 강요받던 과거 권력층의 여인들과 달리 통치행위의 전면까지 나서 공개적으로 활발히 활동한다.

그중 김여정과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29세 동갑내기인 이들은 시누이-올케 관계를 넘어 김정은을 안팎에서 조력하는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는 평가다. 2011년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김정은이 권력 전면에 등장한 때부터 드러난 이런 모습은 올해 들어 더 활기를 띤다. 김정은이 여동생과 부인을 내세워 통치행위는 물론 대남·대외 무대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김여정은 등장하는 타이밍과 장소마다 극적인 효과를 보여주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남북관계에서뿐 아니라 미국·중국과의 외교 무대에서 김여정은 가장 영향력 있는 북한 여성이란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은 7년 전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던 때와 크게 달랐다. 세습 권력의 후계자로 등극한 오빠를 불안한 표정으로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모습도 찾기 어렵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중앙당 제1부부장으로 우뚝 선 김여정은 남한 방문을 통해 자신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자 김정은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자리했음을 과시하려 들었다. ‘믿을 건 핏줄 뿐’이란 남매의 의기투합 결과물이다. 김여정의 남한 행보는 핵과 미사일 도발로 호전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김정은과 북한 체제를 유화적으로 비춰지게 하는 효과도 거뒀다.

생모 후광 입고 ‘백두혈통’ 후계자 된 남매


▎197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의 성혜림. 성혜림은 이때부터 심장병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를 드나들었다.
김여정이 북한 매체를 통해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한 건 2014년 3월이다. 그는 김정은을 수행해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에 해당) 대의원 투표장에 나왔고, 투표함에 표결하는 장면이 관영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됐다. 당시 ‘노동당 책임일꾼’으로만 불렸던 김여정은 같은 해 11월 노동당 부부장으로 호칭됐다. 25세 나이였다. 아버지 김정일은 28세인 1970년에 선동부 부부장이 됐고, 고모 김경희는 30세에 국제부 부부장에 올랐다는 점만 봐도 공직 진출이 서둘러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등장을 암시하는 예고편은 몇 차례 있었다. 김정일 사망 이듬해인 2012년 11월 조선중앙TV엔 말을 탄 김정은의 모습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고모 김경희와 함께 김여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무 설명이 없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김정일 시대에 여동생 김경희가 국제부와 경공업부 등을 거치며 오빠의 당 사업을 보좌했듯이, 김정은 시대엔 김여정 차례라는 시사였다.

그녀가 탄 백마(白馬)는 이른바 ‘백두혈통’이라 선전되는 김씨 일가 세습통치의 직계를 상징했다. 이즈음부터 김정은이 여정과 친형 정철(건강 문제로 후계에서 밀려남)이 참석하는 정기적 모임을 통해 통치 노선과 노동당·군부 핵심 인선 등을 숙의한다는 휴민트(인적 채널을 통해 수집한 정보)도 우리 당국에 입수됐다고 한다.

김여정은 지난해 10월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핵심 권력집단인 정치국의 후보위원에 발탁됐다. 28세에 60~70대가 주축인 정치국에 진입했다는 건 파격이다. 고모 김경희가 64세가 되던 2010년에야 정치국에 포진할 수 있었던 점에 비춰봐도 그렇다. 이를 두고 김여정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수준을 넘어 유사시 김정은의 대안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미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0월 보도에서 김정은·이설주 부부의 자녀가 모두 6세 이하로 추정된다는 점을 거론하며 “예견치 못한 통치 권력의 부재 상태에서 북한 왕조를 이어나갈 장치를 마련한 것”이라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백두혈통인 김여정이 ‘다음 후계자’로 부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이 북한 권력을 거머쥐고 김여정이 실세로 등극하게 된 건 생모인 고용희의 존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고용희는 1970년대 초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살며 2남1녀를 두었다. 김정은이 차남이고, 형은 건강문제로 후계에서 밀린 정철이고 여동생이 김여정이다. 고용희는 이들 3남매를 10대 시절부터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 유학시키면서 떨어져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을 비롯한 자녀들에게 더 애틋한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용희는 김정일의 첫 여자로 알려진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을 밀쳐내고 평양 권력의 안방을 차지했다. 성혜림은 김정일과의 사이에 아들 김정남(2017년 2월 북한 공작원에 의해 암살)을 뒀다. 한때 장자계승이란 유교적 원리에 따라 김정남이 김정일의 후계자 1순위란 분석이 나왔지만 결국 김정은이 왕관을 썼다.

여기에는 김정일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고용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고용희는 유선암에 걸려 프랑스 파리까지 가서 치료를 받다 2004년 현지에서 숨졌다. 김정은이 스무 살 때다. 이런 생모에 대한 각별한 마음 때문에 김정은은 집권 이후 평양에 유선암 센터를 건립했다. 또 ‘어머니날’(11월 16일)을 제정하기도 했다.

1952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용희는 10세 때 만경봉호를 탄 북송 재일교포다. 아버지 고경택은 조총련 간부 출신이다. 평양에서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 눈에 들었다. 당시 북송 재일동포에 대한 주민들의 편견은 강했다. 고용희의 아버지가 일제 육군성이 관할하는 군복공장 간부로 일한 경력도 껄끄러운 대목이다. 북한이 조총련 등을 통해 고용희 관련 일본 행적 지우기에 나섰지만 비밀로 부쳐온 자료가 공개되면서 드러났다. 생모 우상화를 둘러싼 김정은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북한 권력층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은 백두혈통이 아닌 일본 후지산 줄기”란 비아냥도 나온다고 한다.

이설주는 올해 들어 안팎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 평양에만 머물던 그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베이징 북·중 정상회담에 등장하는 등 퍼스트레이디로서 위상을 굳혔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 기간에도 이설주는 한층 여유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9월 20일 남북 정상의 백두산 방문 때 손가락 하트 포즈로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김정은이 “(손가락 하트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나는 모양이 안 나옵니다”고 하자 옆에 있던 이설주가 자신의 오른손 손바닥으로 김정은의 손을 떠받치는 듯한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덕담으로 정상회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역할도 했다. 이설주는 “백두산에 전설이 많다. 용이 살다가 올라갔다는 말도 있고, 하늘의 선녀가, 아흔아홉 명의 선녀가 물이 너무 맑아서 목욕하고 올라갔다는 전설도 있는데, 오늘은 또 두 분께서 오셔서 또 다른 전설이 생겼다”고 말해 웃음이 터져 나오게 했다.

동지에서 여사로 격상된 ‘퍼스트레이디’

이설주는 올해 들어 위상이 부쩍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지난 2월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북한군 창건 70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김정은과 함께 나온 이설주를 북한 관영 매체들은 ‘여사’로 호칭했다. 조선중앙TV는 열병식 행사를 녹화 방영하면서 “김정은 동지와 이설주 여사가 열병식장에 나오셨다”고 전했다. 북한은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이설주를 처음 등장시키면서 ‘부인 이설주 동지’로 불렀고, 이후 이 호칭을 줄곧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이를 바꿔 처음으로 이설주를 ‘여사’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에서 ‘여사’라는 호칭은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1949년 사망)에게만 부여됐었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도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방북 당시 관영매체에 ‘부인’으로만 소개됐다.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2004년 사망)의 경우 사실상 북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지만 공개석상에 나선 적이 없었다.

북한은 여사 호칭을 붙인 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여사라고 불린 지 두 달여 만인 4월 15일 조선중앙TV는 평양에서 열린 중국 예술단의 공연 소식을 전하면서 이설주에게 ‘존경하는’이란 수식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런 움직임은 남북 및 북·중 정상회담에 부부 동반으로 나서기 위한 사전 포석의 성격도 있었다.

김여정과 이설주를 둘러싼 최근의 움직임은 과거엔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70여 년 북한 정권사에서 최고지도자의 여인들은 대부분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았다. 폐쇄적인 체제의 특성상 은둔을 강요받은 것이다.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함께 갔지만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혼자 나왔다. 정혼한 부인으로 알려진 김영숙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정일의 사실상 첫 여자로 알려진 성혜림도 시아버지 김일성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존재감이 없었다.

20대 미혼이던 김정일은 5년 연상인 유부녀 성혜림을 강제 이혼시켜 1969년께부터 동거했다. 2년 뒤 장남 김정남을 낳았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김정일의 사랑은 식었다. 결국 성혜림은 우울증과 심장병에 시달리다 모스크바에서 쓸쓸히 숨졌다. 28년간 김정일과 함께 살았던 10년 연하의 고용희도 사망 때까지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다. 김정일은 유선암에 걸린 고용희를 프랑스 파리로 보내 치료받게 했다. 고용희가 현지에서 숨지자 특별기와 고급 관을 보냈지만 부고는 내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의 후처인 김성애는 여성동맹위원장 등을 맡아 활동했고 1975년 5월 김일성의 루마니아 등 순방에 동행했다. ‘평양 치맛바람’이라고 지탄받을 정도로 권세를 부렸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후계자가 된 김정일이 계모와 그 소생을 ‘곁가지’라고 배척하자 전면에서 사라졌다. 김일성은 사망 한 달 전인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부부의 방북 때 김성애를 동반했다.

잊혀진 인물이지만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도 평양 로열패밀리의 여성 권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김일성의 딸로, 오빠 김정일의 측근 실세로 자리했던 그는 2013년 12월 남편 장성택이 반역 혐의로 처형되면서 몰락했다. 이후 공개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구체적 근황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대북 정보당국은 “공개적인 활동을 않고 있지만 사망설 등은 근거 없다”는 입장이다.

김경희는 젊은 시절 장성택과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핵심 권력층 사이에서는 그 스토리가 아직도 전해진다고 한다. 1946년생 동갑내기인 장성택과 김경희는 북한 최고 명문 김일성종합대를 나와 60년대 말 모스크바 유학을 했다. 김경희는 호남형의 엘리트 노동당 관료였던 장성택에게 호감을 갖고 빠져들었다. 훤칠한 키에 머리 회전이 빠른 장성택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인 데다 아코디언까지 켰다고 한다.

“아버지 저러다 경희 죽겠어요” 김일성 설득한 김정일


▎1.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6월 11일 김성혜 북한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이 성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2.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10월 11일 중·러 순방 일정을 마무리한 뒤 귀국길에 중간 경유지인 베이징에 도착했다. / 사진:연합뉴스
프러포즈는 김경희가 먼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경희의 아버지 김일성은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했다. 그리고는 딸과 떼어놓을 요량으로 장성택을 강원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출 시키도록 했다. 그렇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불 같은 성격의 김경희는 틈만 나면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몰아 원산으로 향했다. 장성택과의 원정밀애는 끝날 줄 몰랐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김정일은 “아버지, 저러다가 경희 죽겠어요”라고 보고했고, 김일성은 장성택이 어떤 인물인지 은밀히 조사해 볼 것을 지시했다. 김정일이 아버지에게 장성택의 사람 됨됨이가 괜찮다는 보고를 한 게 김일성의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후 장성택에게 요직을 맡기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했다. 잦은 불화로 위기를 맞았던 이들 부부를 김정일이 중재해 파경을 막도록 했다는 후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마지막 여인으로 알려진 김옥도 세간에 거의 잊혀진 인물이다. 기술서기(비서) 출신인 김옥은 1990년대 초반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 그의 여자가 된 이후 그녀의 모습은 북한 화보 등에서 지워졌다. 김정일은 마지막 중국행이 된 2011년 5월 베이징 방문 때 김옥과 동행했다. 전용 메르세데스-벤츠의 퍼스트레이디가 앉는 자리에 김옥을 자리하도록 했다. 해외 언론의 관심은 그녀에게 집중됐다. 이를 두고 몇 달 뒤 숨지게 될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김정일이 김옥에게 이런 기회를 줌으로써 평생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던 미안함을 전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김정일과 함께한 김옥을 목격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일화도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8월 묘향산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 김옥이 동석했다는 것이다. 와인을 곁들인 오찬을 함께한 김정일은 “밴드 들어오라 그러라우”라고 지시한 뒤 김옥과 모두 11곡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 가운데 3곡은 남한 가요였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도 그중 하나다. 김정일 옆을 지킨 여인이 누군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현 회장은 사실상 김정일 부인 역할을 하는 김옥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여정·이설주와 함께 올해 들어 남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북한 여성은 현송월이다. 현송월은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지난 1월 하순 북한 예술단을 인솔해 남한을 방문했다.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직함으로 온 그는 서울과 강릉을 찾아 공연 일정을 소화했다. 1박2일의 방남 일정 동안 TV는 실시간 중계하다시피 하며 그의 동선을 전하는 바람에 “북한 악단장급 일행의 방문에 너무 호들갑 떠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관심은 그녀가 김정은 위원장과 한때 염문설까지 나돌았던 인물이란 점에서 증폭된 측면이 있다. 물론 현송월이 악단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 등에 비춰볼 때 염문설 등은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최고지도자 김정은과 인연이 있는 여성이라면 지금처럼 전면에 나서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다. 현송월은 지난 10월 10일 김정은 지시로 건설 중인 삼지연관현악단 전용 극장 방문 행사에서 김정은을 맞이하는 등 측근 인사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로열패밀리는 아니지만 김정은 시대 들어 각광받는 여성 엘리트도 있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북한의 대미 외교 전면에 나선 협상가로 국제 무대에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난 6월 첫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성 김 주필리핀 미국 대사와 판문점에서 수차례 실무 협상을 벌여 김정은의 대미 접근 과정에서 실세로 부상했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정상회담을 열기 직전에는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 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나는 조·미(북·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하는 문제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는 강경 메시지를 냈다가 이에 불쾌감을 느낀 트럼프 대통령이 한때 회담 취소를 선언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의 두터운 신임을 토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북한의 내각 총리를 지낸 최영림의 수양딸로 알려진 최선희는 중국·오스트리아 등에서 유학했다. 외무성에서 통역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한때 김정은의 영어 통역까지 담당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성혜 당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은 대남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김정은·김여정 남매 모두에게 인정받는 여성 관료로 평가되고 있다. 김일성대학 출신인 그는 당 통일전선부에서 일하며 남북 당국회담이나 교류의 현장을 지키며 안내와 상황 관리를 담당했다.

권력 뒤편에서 숨죽이며 살다간 수많은 여인도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를 우상화하기 위해 만든 기록영화 [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니]에는 생전 그녀의 영상이 담겨 있다. / 사진:위대한 선군조선의 어머니] 영상
2005년 9월 평양에서 열린 16차 장관급회담 때 기자와 만난 김성혜는 자신을 “아이 둘 키우는 주부”라고 소개하면서 남편은 노동신문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밝혔다. 어릴 적 ‘2월 16일(김정일 생일) 소년단’ 입단행사 때 대표선서를 했었다는 말도 했다. 분홍색 투피스에 최신 유행 핸드백을 들고 나오는 등 다른 보장성원(북한에서 안내원을 지칭하는 표현)과 차이 나는 파격을 보였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김성혜는 “그까짓 거 못할 게 뭐 있습니까”라며 선뜻 응하기도 해 남측 인사들을 놀라게 했다.

김성혜가 본격적으로 남북회담 전면에 나선 건 2013년 6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장관급회담 실무 접촉에서다. 김성혜는 지난 2월 김여정의 청와대 방문 때 수행했는데, 당시 김여정이 실수로 떨어뜨린 핸드백을 챙기는 등 측근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냈다. 이후 남북 정상회담에 ‘노동당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 직함으로 잇달아 등장해 대남 분야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당시엔 김정숙 여사와 이설주의 옥류아동병원 방문 일정에 밀착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10월 초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김정은 면담에도 배석한 모습이 드러나 남북관계뿐 아니라 미국 관련 사안도 챙기는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사실 70여 년 북한 정권의 역사는 온전히 남자들의 몫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업한 김일성은 모든 것을 지배자 1인에 복종시키는 수령독재를 구축했다. 그리고 장남 김정일에게 권력을 넘겼다. 절대권력은 다시 손자인 김정은에게 이어졌다.

평양 권력의 이면에는 수많은 여성이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권력의 뒤편에서 존재감 없이 숨죽이며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의 불꽃 같은 사랑이 타오를 때 잠시 반짝이다 소멸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버림받고 잊혀지고, 때론 몰락의 길을 걷다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했다.

절대권력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여인들의 처절한 몸부림도 있었다. 자신의 소생을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한 투쟁은 마치 조선이나 고려시대의 궁중암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싸움에서의 패배는 곧 몰락과 죽음을 의미했다. 고용희는 자신의 소생인 김정은을 왕좌에 올림으로써 나머지 정철·여정 남매의 안위를 담보할 수 있었다.

김정은·여정 남매는 해외 유학파란 점에서 한때 기대를 모았다. 스위스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체류한 이들이 김일성·김정일과 다른 전향적 통치를 할 것이란 측면에서다.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모란봉악단(당시 단장 현송월) 창단 공연에는 미 자본주의 상징인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 캐릭터가 선보였다. 청년 지도자 김정은이 뭔가 선대(先代) 지도자와 다른 개혁·개방의 길을 갈 것이란 관측이 쏟아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달랐다. 더 격렬해진 핵과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와 국제사회를 겁박했다. 유엔의 대북제재에 한미 등의 독자 제재까지 겹겹이 둘러쳐진 대북 압박망(網)이 숨통을 죄고 있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 차례 북·미 정상회담이 치러진 지금도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김정은 위원장이 공언한 ‘완전한 비핵화’를 행동으로 보여줄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행한 폭압적 공포정치의 몇몇 장면을 한국과 국제사회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고모부 장성택과 이복형 김정남마저 무참히 살해한 잔혹한 독재자의 얼굴을 지워내기 쉽지 않은 것도 문제다.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김정은의 공언과 달리 식량 부족과 만성적 경제난은 여전하다.

올 12월 집권 7년을 채우게 될 김정은 정권 앞에는 험난한 길이 예고돼 있다. 서울·워싱턴·베이징 등을 상대로 한 정상회담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여전히 북한 체제의 명운을 시험하고 있다. 정상회담과 남북대화를 통한 제재의 틈 벌리기가 성공할 수 있을지, 미국과의 대화 통로를 마련한 수준을 넘어서 본격적인 관계 정상화의 길을 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엘리트의 체제 이반과 민심 이반이 겹칠 경우 북한 체제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이런 국면에서 핵심 실세로 떠오른 김여정과 이설주를 비롯한 평양 권력층 여인들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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