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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분석] 신뢰도 바닥, 사법부의 추락 

권력에 가까울수록 정의는 멀어진다!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양승태 대법원’ 재판거래 의혹 충격에 국민 불신 역대 최고…권력지향 속성과 현실 동떨어진 인식에 ‘외부 통제’ 여론 확산

▎법원의 날인 9월 13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중앙홀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행사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사법농단’을 언급하며 사법개혁을 강조했다. / 사진:연합뉴스
#장면 1. 10월 12일 오전에 열린 청와대 정례 브리핑.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사법부가 빠르게 절차를 진행해 주면 (재판이) 종료되는 때에 맞춰서 사면복권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벌였던 시위자들의 사면 계획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오면 대통령의 사면권을 행사하겠다는 취지다.

하루 전날(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사면 방침을 처음 밝혔다. 문 대통령은 제주에서 열린 대한민국 해군 국제 관함식에 참석한 뒤 곧바로 강정마을을 찾아가 주민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불법 시위 혐의로 기소된 해군기지 반대 시위자들에 대해 “관련된 사건의 재판이 모두 확정되는 대로 (사면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권한이다. 검토란 단서를 달긴 했지만 대통령의 이 한마디로 사면을 기정사실화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시기다. 동일한 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사면하려면 공범 관계에 있는 이들에 대한 재판이 모두 끝나야 사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2007년 이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벌이다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611명에 달한다. 이들 중 463명이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아직도 100여 명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법원 찾아간 대통령의 쓴소리, “의혹 반드시 규명”


▎검찰 관계자가 9월 11일 대법원 기밀문건을 무단 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유해용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 사무실에서 압수한 서류를 들고 나오고 있다. 유 전 연구관은 법원이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한 사이 자료를 대부분 파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 사진:연합뉴스
#장면 2.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월 13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중앙홀에서 열린 대한민국 사법부 제70주년(법원의 날) 기념식. 문 대통령이 좌우에 늘어선 법원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중앙 통로로 들어왔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한두 걸음 뒤에서 문 대통령을 따랐다. 대등한 관계인 행정부·사법부 수장의 모습은 뭔가 어색했다. 기념식이 시작된 뒤 문 대통령이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내려다보는 대법정 앞 단상에 올랐다. 축사였지만 내용은 훈계에 가까웠다.

“지금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하는 매우 엄중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난 정부 시절의 ‘사법농단’과 ‘재판거래’ 의혹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의혹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며, 만약 잘못이 있었다면 사법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문 대통령이 ‘사법농단’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에서 일부 법원 고위 관계자들은 눈을 감았다. 참담한 표정이 역력했다. 연단 아래 앉은 김 대법원장도 굳은 표정으로 연설을 들었다. 행사에 참석했던 한 법조계 인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고 했다.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한편으론 화도 나는 거예요. 선생님한테 불려가서 혼날 때처럼 말예요. 법원의 날은 말하자면 잔칫날인데 초대받은 손님한테 주인이 훈계를 들은 셈이지.”

법원의 날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에 대법원 규칙으로 정해진 내부 기념일이다. 1948년 9월 13일 미군정이 끝난 뒤 대한민국 사법권을 되찾은 것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법조 삼륜(법원·법무부·대한변호사협회)’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가기념일인 법의 날(4월 25일)과 다르다. 이를테면 국회 개원기념일(5월 31일)이나 행정부의 정부수립기념일(8월 15일)과 비슷한 사법부의 기념일이다.

법원의 날 기념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법의 날 기념행사의 경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9년과 2013년에 각각 임기 중 한 차례씩 참석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당시 축사를 통해 ‘법치 확립’을 강조했다.

청와대는 사법부 70돌을 기념하는 의미 있는 해여서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법원 내부 구성원들과 법조계가 받아들이는 인식은 청와대의 순수한 의도와 거리가 멀다. 취재에 응한 참석자들이 가장 불편하게 여긴 장면은 문 대통령의 ‘사법농단’이란 표현이었다.

과거 정부에서 법무부 고위 간부를 지냈던 검찰 출신의 법조계 원로 A 변호사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이 정도로 사법부를 망신 준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A 변호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법원장과 고위 법관들을 한데 모아놓고 아직 실체가 확정되지 않은 ‘사법농단’이란 표현을 썼다. 사법부의 굴욕이다. 게다가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고도 했다. 검찰에 했어도 수사개입이란 비판을 받을 소지가 큰 발언이다. 엄연히 사법부에 대한 모독이자 삼권분립을 침해하는 일이다.”

문 대통령의 두 발언은 법조계에 작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광화문에서 만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어쩌다 사법부가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는 탄식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법관들의 충격이 크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돼 압수수색 대상이 되자 양 전 대법원장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판사들도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수도권 법원에 있는 10여 년 경력의 한 판사는 “과거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차례의 사법파동도 법원에 이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내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파동은 1971년부터 2009년까지 5차례 있었다. 1차 사법파동은 검찰과 정치권력의 사법권 침해에 대한 저항이었다. 전국의 판사 455명 중 150여 명이 사표를 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서야 진정됐다. 2~5차 파동은 사법부의 민주화와 대법관 인선 관행, 법원 내부의 재판 독립을 위한 자발적 사법개혁의 성격이 강했다.

일부에선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법관들의 저항을 6차 사법파동으로 보기도 한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고위 관계자들이 판사들의 학술단체(국제인권법연구회) 행사를 방해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도 여기서 불거졌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은 지금의 ‘사법농단’ 의혹의 단초가 됐다. 조사에 참여했던 법관들조차 “행정처 컴퓨터 파일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기 직전까지도 파문이 이 정도로 커질 줄 아무도 예단하지 못했다”고 했다.

사법부가 자초한 추락, 신뢰도 역대 최저


▎9월 13일 법원의 날 기념행사가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사법농단 시국회의’ 회원이 양 전 대법원장 구속을 촉구하며 든 피켓 뒤로 법원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사법부의 정점인 대법원과 판사들의 최고 명예직인 대법원장, 대법관들이 정권과 재판거래를 시도했다는 의혹만으로도 법관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판사의 유일한 자존심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의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법원행정처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드러날수록 사무실에 걸려 있는 법복을 입는 것조차 부끄러웠다”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평판사의 얼굴에 자괴감이 가득했다.

사법부를 ‘정의의 최후 보루’로 믿어 온 국민의 배신감도 극에 달했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이 제기된 뒤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사법부 판결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27.6%에 불과했다. ‘불신’을 택한 응답자는 63.9%로 두 배를 넘었다. 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7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했던 5개 형사사법기관(경찰·검찰·법원·교정·보호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45.6%로 가장 높았다.

반면 지난 9월 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선 사법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한 응답자는 83.9%에 달했다.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사법부 자체 조사에 대한 신뢰도는 13.3%에 불과했다.

국민이 등을 돌리게 된 건 사법부가 스스로 자초한 면이 크다.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은 전 정권과 결탁한 적폐이기에 진상을 밝혀 바로잡으면 되는 일이다. 국민의 분노는 그다음 지점에서 폭발했다. 검찰의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법원이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태도로 일관했던 이른바 ‘영장 전쟁’이 벌어진 뒤부터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이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시작한 건 지난 6월 18일 고발 사건을 배당받으면서다. 사흘 전(6월 15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자체 조사 결과 발표 이후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법원이 검찰 수사에 적극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성실한’ 협조는 해주리란 기대가 컸다.

기대는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법원은 ‘방탄벽’을 쳤다.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은 번번이 기각됐다. 기상천외한 기각 사유가 쏟아졌다.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총지휘하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까지 나서서 비판했지만 법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원으로부터 받은 영장 발부 현황을 분석한 결과는 놀라웠다. 박 의원에 따르면 지난 7월 20일부터 10월 4일까지 검찰이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위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의 기각율은 무려 72.7%에 달했다. 10건 중 7건이 기각된 셈이다. 나머지 3건도 검찰이 요청한 수색 범위를 모두 인정한 경우는 0건이었다.

일반 형사 사건의 영장 발부율과 비교하면 차이는 극명해진다. 대법원이 매년 발간하는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일반사건의 압수수색 영장 발부율은 90% 안팎이다. 10건 중 9건이 발부된다. 2014년 91.7%를 정점으로 약간의 감소세를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지난해 발부율은 88.6%로 거의 대부분 영장이 발부되고 있다.

‘사법농단’보다 ‘방탄판사단’에 더 큰 실망


▎기로에 선 사법부는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사무기구를 명동으로 옮겨 대법원 재판 기능과 분리하는 자체 개혁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법원의 자체 개혁보다 외부 통제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다. / 사진:연합뉴스
영장 기각 사유도 황당하다. 10월 8일 서울중앙지법은 양 전 대법원장의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다. 네 번째 기각이었다. 검찰 특별수사팀은 양 전 대법원장이 실제 거주하고 있는 경기도 성남시 지인의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이언학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내놓은 기각 사유는 “주거·사생활의 비밀 등에 대한 기본권 보장 취지에 따라 압수수색은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 9월 검찰이 수사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사법농단 피의자 1호’로 지목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 연구관에 대한 영장도 법원은 “죄가 되지 않거나 범죄 성립 여부에 의문이 있다”며 기각했다. 유 전 연구관은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으로 일하면서 수집한 사건 검토 보고서와 판결문 초고 등 대법원 기밀문건 수만 건을 퇴임하면서 무단 반출한 혐의를 받았다.

법원이 언론에 밝힌 기각 사유는 3600자에 달했다. 통상 기각 사유는 4~5줄로 간략하게 정리해 공개한다. 법원은 장문의 기각 사유에서 검찰이 두고 있는 혐의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검찰 내부에선 “이럴 거면 재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국민의 분노는 법원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졌다. 온라인에선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 3명(허경호·이언학·박범석)의 이름을 빗대 ‘허언석(虛言石) 판사님’으로 불렸다. 법원 내부 전산망(코트넷) 게시판에도 비판글이 올랐다. 자신을 법원 주사(6급 공무원)라고 밝힌 게시자는 “당신들은 형사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강제수사의 필요성을 심사할 뿐”이라며 “그동안 압수영장은 ‘피의사실’ 소명이 아니라 ‘의심자료’를 제출하면 발부해 왔다”고 지적했다.

국정감사장은 사법부 성토장이 됐다. 지난 10월 1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국감장에서 이춘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금 국민이 사법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느냐”며 “방탄소년단(BTS)이 들으면 기분 나쁠 텐데, ‘방탄 판사단’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진심으로 사법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선택과 집중을 해 개혁하고 용퇴해야 한다”고도 했다.

법원이 영장을 거듭 기각하는 사이 증거인멸도 이뤄졌다. 유 전 수석재판연구관은 무단 반출한 기록을 삭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검찰에 제출하고도 몰래 파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법농단 의혹의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차명 전화를 사용했다. 검찰은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되자 이 전화기를 보관하고 있던 임 전 차장의 변호사 사무실 직원을 설득해 간신히 넘겨받았다. 윤석열 서울중앙지 검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증거인멸 행위에 대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

사법부 몰락은 예견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본 원인은 판사들의 지향이 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검사는 권력을 좇고 판사는 명예를 좇는다’는 말이 있다. 판검사 조직의 일반적인 속성을 표현한 말이다. 정말 그런지 월간중앙이 따져봤다. 정치에 입문한 판검사 출신 국회의원들을 전수조사했다. 정치 입문자 변천사를 통해 판검사의 권력지향적 속성의 변화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 범위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13대 총선(1988년)부터 2016년 실시된 20대 총선까지 각각에 당선된 판검사 출신 국회의원으로 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소속 정당에 따라 범진보와 범보수로 나눴다. 이를 다시 총선이 치러진 해의 정권 성향과 비교했다.

명예 좇던 판사들, 권력을 탐하다


13대 총선 이후 판검사 출신의 국회 진출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의 장점은 전문성과 깨끗한 이미지다. 해박한 법 지식과 경험 덕분에 입법활동에서 성과를 내기에 유리하다. 기존 정치인이나 다른 직업군에 비해 청렴하다는 일반적 인식도 한몫한다. 그래서 이들이 정치에 입문하면 영향력 있는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진영에선 13대 총선으로 정치에 입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판사 출신)과 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5선·판사 출신)가 대표적이다. 보수 진영에선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3선·판사 출신)나 박희태 전 국회의장(6선·검사 출신) 등이 있다.

1988년 13대 총선 이후 8번의 총선에서 검사 출신 의원 수가 판사 출신보다 늘 많았다. 검사가 권력지향적이란 속설이 빈말은 아닌 셈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이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검사 출신 26명이 배지를 달았다. 판사 출신도 이때 많았다. 16명으로 역대 최대였다. 2004년 탄핵 후폭풍으로 참패했던 보수 정당이 2008년 총선에서 인적쇄신을 위해 법조인 출신 신인들을 대거 영입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된 초선 의원은 모두 15명(검사 10명, 판사 5명)이었다.

보수 성향의 판검사 출신 의원은 김영삼 정권 때 치러진 15대 총선과 이명박 정권 때인 18대 총선에서 러시를 이뤘다. 검사 출신은 15, 18대 총선에서 각각 19명, 20명이 배지를 달았다. 보수 성향 판사 출신도 꾸준히 늘어 18대 총선에 13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후 19, 20대 총선에서 보수 정당 소속으로 국회에 처음 입문한 판사 출신 초선 의원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신인을 발굴하지 못해 현직 의원의 수도 감소했다.

진보 성향의 경우 보수 성향보다 상대적으로 정치 입문자가 적었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약간의 등락을 반복해오다 20대 총선에서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진보 성향 판사 출신 의원 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16, 17대) 각각 2명으로 가장 적었다. 보수 성향인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시기(19, 20대)에 3명, 5명으로 늘었다. 진보 성향 검사 출신은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14, 16대) 각각 5명씩 초선 의원을 배출한 뒤 영입에 어려움을 겪어오다 20대 총선에서 당선된 9명 중 6명을 신인으로 채워 물갈이가 두드러졌다.

보수 성향의 판검사 출신 의원 수가 줄어들면 진보 성향이 약진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8대 총선에서 정점을 찍은 보수 성향 판·검사 출신 의원 수는 19, 20대 총선에서 동반 감소했다. 반면 진보 성향 판검사 출신의 경우 19대 5명(검사 2명, 판사 3명)에서 20대에는 14명(검사 9명, 판사 5명)으로 크게 늘었다.

눈에 띄는 변화는 권력지향적 속성이 더 이상 검사의 전유물은 아니란 점이다. 비록 총량은 검사 출신보다 적지만 판사 출신의 정치 입문자 수도 과거보다 점차 늘고 있다. 이들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친정인 검찰·사법부와 정치권 사이 가교 역할이다. 여기엔 장단점이 있다. 변호사 출신 한 야당 원외 정치인은 “순수한 의도를 가졌을 때에는 검찰·사법제도 개선 등 건전한 제도 발전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조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판검사 출신 정치인들의 역할이 긍정적이다”고 평가했다. 그는 “정치인 수사와 재판 동향을 파악하거나 법원·검찰을 상대로 로비하는 데 판검사 출신 정치인들이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 학벌과 사법연수원 기수에 따른 서열 문화에 익숙해있기 때문이다. 사법농단 파문은 세속정치에 참여하려는 내재적 욕구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다. 공통된 정치적 지향점을 가진 ‘이너서클’이 만들어 낸 폐해다”고 말했다.

“외부 통제와 사법권 침해 혼동해선 안 돼”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10월 10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답변하고 있다. 안 처장은 “사법농단은 없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현실을 부정하면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법원의 현실 인식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10월 10일 대법원 국감장에 증인으로 나온 안철상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재판거래는 없다고 믿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김 대법원장의 지시에 따라 사법농단 의혹 특별조사단을 이끌었다.

‘주거 평온’이 압수수색 영장 기각 사유가 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런 사례는 경험하지 못했다”면서도 “기본권 문제 중 하나로선 충분히 (기각) 사유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답변 과정에서 “30년 이상의 경험과 법조 상식”을 강조했다. 재판거래가 없었을 거라는 건 “믿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희망사항일 뿐이다. 반면 ‘주거 평온’이 압수수색 영장의 기각 사유가 된 적이 없었던 건 명백한 ‘사실’이다. 안행정처장의 답변은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사법부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법부는 법원행정처 폐지라는 자체 처방을 들고 나왔다. 행정업무를 담당할 최소한의 조직(법원사무처)도 현재 서초동 대법원 청사가 아닌 명동으로 이전해 법원과 완전히 분리하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사법정책 결정기구(가칭 ‘사법행정회의’)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일선 법관들이 요구했던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기구화를 통해 사법부 내부 의사결정권을 분산하고 절차의 민주화와 투명성을 보장하려는 계획도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여론과 정치권은 사법부의 자발적인 개혁 의지를 불신한다. 사법농단의 원인을 외부 통제가 없었던 사법부의 특수성에서 찾는다. 사법부가 내놓은 계획들도 국회 입법과 예산 심의를 거쳐야 가능하다. 국회와 법조계, 시민단체들은 사법부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각자의 지분을 확보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른바 ‘사법평의회’ 설치를 통한 국민적 통제 방안이 그것이다.

두 명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을 구했다. 이들의 진단은 사법부의 자정 기능 상실과 정치권력의 사법권 침해 가능성으로 압축됐다. 문 대통령의 사면 발언과 법원의 날 기념 축사에서 한 ‘사법농단’ 발언을 사법권 침해 가능성이 큰 사례로 지목했다. 서울의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시위자들에 대한 사면 방침의 경우 “‘답(사면)은 정해져 있으니 법원은 빨리 재판이나 끝내 달라’는 식이다. 재판을 무력화한 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다른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부의 외부 통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전제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고, 밀실에서 이뤄진 의사결정의 폐해가 드러난 이상 현재 구조를 그대로 두고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다만 그는 “사법부의 본질인 독립성을 침해하는 행위가 외부의 통제로 포장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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