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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리포트] ‘납치의 아베’ 북·일 정상회담에 올인하는 속사정 

경협자금-납치문제 ‘빅딜’ “베트남에서 은밀한 만남 추진했다” 

콘도 다이스케
자민당 총재 3연임 성공한 아베 총리, 북·일 관계 개선에 전향적 입장으로 선회…외교적 고립 벗기 위한 국익적 관점과 납치문제 해결 여론 사이에서 줄타기

▎아베 일본 총리는 9월 25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일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매년 10월 5일과 11월 15일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를 1억2000만 일본 국민이 가슴에 새기는 날이다. 1964년 10월 5일에 태어난 요코타 메구미는 니가타시 중학교 1학년이던 1977년 11월 15일 저녁, 배드민턴부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해안가의 도로에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납치됐다.

이후 41년 동안 요코타 메구미는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매년 10월과 11월이 다가오면 일본 언론은 대대적으로 이 납북 일본인 문제의 상징적 사건을 거론하는 것이다.

올해 10월 5일은 13살 때 북한에 납치된 요코타 메구미가 54세가 된 날이다. 올해의 보도에 따르면 부친인 요코타 시게루(85세)는 4월부터 입원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모친인 사키에는 82세가 됐다. 요코타 부부가 납치 문제 해결을 촉구한 강연회는 총 1400회를 넘었다.

필자도 지금까지 두 번,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에 있는 요코타 부부의 집을 찾았다. 도쿄에 인접한 인구 150만의 이 대도시에서 요코타 부부는 아마도 가장 유명인인 일 것이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요코다 메구미 부모의 집”이라고 말하면 운전수가 알아서 데려다 준다.

요코타 부부는 수많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딸과 자신들의 신상 이야기를 말해 왔겠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가슴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미 TV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당사자들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북한에 대한 분노가 다시 한번 치밀어 오른 것이다.

납치 문제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북한 공작원들이 일본에 상륙해서 일본인을 납치한 사건이다. 납치 문제를 다루는 시민 단체는 “약 1000명의 일본인이 북한에 납치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가 공식 인정한 납치 피해자는 메구미를 필두로 총 17명. 그중에 북한 정부가 인정한 것은 13명이며, 5명이 2002년 10월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나머지 12명의 전원 귀국을 북한에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 정부는 “나머지 8명은 이미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양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며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일본인은 이들 납북 피해자들을 마치 자기 가족처럼 여겨 함께 가슴 아파하며 동정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게는 북한 문제 하면 첫째, 핵 개발 문제 둘째, 미사일 개발 문제가 급선무이지만, 일본인에게는 또 하나, 납치 문제가 더해져서 ‘3종 세트’가 된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납치 문제가 가장 앞에 와서 ‘납치-핵-미사일’의 순서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은 이 순서를 지켜서 발언하지 않으면, 말 한마디 때문에 국민적 비판을 받아 실각할 수도 있는 리스크를 지게 된다. 그만큼 일본인에게 북한의 납치는 무거운 문제다.

원래 아베 신조라는 정치인은 납치 문제에 힘쓰지 않았더라면 총리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정체 불명의 문제에 매달리던 아베 의원


▎1977년 북한에 납치된 요코타 메구미의 아버지 시게루와 어머니 사키에가 2005년 집회에 참석했다.
지금부터 꼭 30년 전인 1988년 9월, 한국에선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였다. 후에 납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밝혀진 아리모토 게이코의 부모가 “5년 전에 런던에서 잃어 버린 딸을 구출해 달라”며 자민당 본부를 찾아왔다. 아리모토 게이코의 남편이라는 인물이 북한에서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와 딸이 런던에서 납북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때 아리모토 부모를 응대한 것이 당시 자민당 간사장인 아베 신타로 의원의 아들이자 비서였던 아베 신조였다. 아베는 아리모토 부모의 말을 듣고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1993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4년 후인 1997년에 ‘납북피해자 가족회’를 발족했다. 그는 또 젊은 나이에 납치 문제에 관한 국회의원연맹 사무국 차장을 지냈다. 아직 대부분의 일본인이 납치 문제에 관심이 없던 시절로, 아베는 납북자 문제에 매달리는 것으로 인해 자민당 내에서 동료 의원들로부터 이런 비웃음을 받았다.

“국회의원은 모름지기 도쿄 대학, 와세다 대학, 게이오 대학을 나온 수재가 해낼 수 있는 직업이다. 세이케이 대학 같은 삼류 대학 출신은 아무리 국회가 넓다 해도 아베 신조밖에 없다. 아베는 경제 문제나 사회 보장 문제같이 어려운 분야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납치문제라는 정체 불명의 문제에만 열심히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국회의원 중 오직 아베만이 납북자 문제에 열성을 보인 덕에 납북자 가족들은 아베에게 달려갔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발족하며 관방 부장관에 발탁된 아베는 다음 해인 2002년 ‘납치의혹 프로젝트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성사되자, 아베 관방부 장관은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해 평양에서 김정일과 대면했다.

당시 필자도 고이즈미 총리의 동행 취재로 평양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베 부장관은 아침부터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고이즈미 방북의 최대 공로자는 중국에서 북한과의 극비 협상을 30회 가까이 반복하면서 북·일 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다나카 히토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었다. 대북 ‘유화파’인 다나카 국장과 ‘강경파’인 아베 부장관은 앙숙으로, 다나카 국장은 자신이 북한 측과 함께 작성한 ‘북·일 평양선언’의 초안을 당일까지 아베 부장관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다나카 국장의 배후에는 아베 부장관의 라이벌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있었다. 방북 당일 아침에야 겨우 북·일 평양선언문을 보게 된 아베 부장관은 ‘납치’라는 글씨가 들어가지 않은 것에 아연실색한 것이다.

이후 평양에서 오전의 북·일 정상회담 직전에 “일본인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는 종이를 북한 측으로부터 건네받았다. 그리고 오전에 열린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는 일본인 납치에 대한 어떤 언급도 사과도 없었다. 이에 아베 부장관은 점심 휴식 중에 “평양선언에 서명하지 말고 귀국하자“며 고이즈미 총리를 다그쳤다. 크게 당황한 다나카 국장과는 싸움 직전까지 갈 정도로 충돌했다.

결국 점심 휴식 후 오후에 열린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김 위원장의 생애 단 한 번의 사과였다.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는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했지만 이번에는 북측이 “생존하고 있는 일본인 5명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으니, 1~2주 정도의 일시 귀국만 허가하겠다”고 했다. 이 주장을 놓고도 다시 “영구 귀국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아베 부장관과 “일시 귀국이라도 받아들이자”고 하는 후쿠다 장관, 다나카 국장과의 사이에서 마찰이 일어났다.

이때 아베 부장관을 응원한 것이 그때까지 아베를 지지해 온 납북자 가족들이었다. 그래서 ‘북한은 악의 나라’라는 일본 여론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베 부장관은 ‘납치의 아베’로 추앙을 받으며 고이즈미 총리의 퇴진 후 총리에 올랐다. 한편 후쿠다 장관은 사퇴했으며, 다나카 국장은 국민의 규탄 속에 국회에서 ‘눈물의 변명’을 하게 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통역자도, 김정은 위원장도 떨리던 모두발언


▎2002년 9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이러한 경위는 많은 일본인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2018년 현재에도 일본 국민은 “아베 총리라면 납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혹은 “아베 총리가 해서 안 된다면 다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알다시피 2018년 북한 정세가 급변했다. 그 전년도인 2017년은 북·미 간의 대립이 극한까지 다다랐다. 북한은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실험에 수소폭탄 실험까지 감행했으며, 트럼프 새 정부는 북한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며 공습 준비를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자 사이에서 영리하게 움직인 것이 한국의 문재인 정부다. 문재인 정부는 올해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을 초청하는 데 성공했으며, 김정은 위원장 여동생인 김여정 당부부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세 명의 간부가 한국을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어 4월 2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갖고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그 사이에 김정은 위원장은 3월 26일과 27일 첫 외유로 베이징을 방문,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굳은 악수를 나눴다. 김정은 위원장은 5월 7일과 8일 다롄을 방문했으며, 6월 19일과 20일 다시 한 번 베이징을 방문하는 등, 시진핑 주석과 3개월 사이에 세 번이나 대면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또 5월 31일에는 9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러시아의 라브로프 외상과 회담했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세기의 회담’을 한 것은 아직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나도 이때 약 일주일 동안 싱가포르에서 취재했지만 세계에서 3000명 가까운 저널리스트가 싱가포르에 입국하는 등 회담장인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이후 최대의 열기를 뿜어 댔다.

“모든 것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6월 12일 오전 9시3분, 싱가포르 센토사의 고급 휴양지인 카펠라 호텔 3층의 주랑(柱廊) 앞. 오른편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왼편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걸어와 중앙에서 굳센 악수를 나눴다. 두 사람은 12초 동안 서로 하나가 된 채 잡은 손을 떼지 않았다.

착석한 김정은 위원장이 그 특유의 쉰 목소리로 무겁게 뱉은 말이 모두의 발언이었다. 김 위원장의 말을 영어로 통역하던 북한의 여성 통역자는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김 위원장도 긴장한 듯 왼손을 가늘게 떨며 그것을 덮기 위해 오른손을 왼손 위에 얹었다.

그때 나도 기자로서 북·미 정상회담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커다란 감동이 몰려왔다. 이렇게 김정은 위원장은 불과 3개월 사이에 중국·한국·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연달아 성공시켰다.

생각해 보면 지금부터 15년 전인 2003년 8월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6자 회담이 베이징에서 시작됐다. 회담 당사국 중 2018년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홀로 남겨지게 된 것이 일본의 아베 정권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4개국이 북한과 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핵문제와 미사일 문제다. 그런데 일본만큼은 거기에다 납치 문제가 하나 더 해진 것이다. 즉 다른 주변국보다 문턱이 높다. 게다가 북측은 일관되게 “납치 문제는 2002년에 이미 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여론은 두 동강이 났다.

하나는 이른바 ‘버스를 놓치지 마라’는 것이다. 북한이 모는 버스는 이제 달리려 하고 있다. 우선 한국이 타고 이어 중국과 러시아도 탔다. 게다가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까지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일본만 놓치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버스에 올라타지 않으면 일본은 따돌림을 당하고 만다….

즉, 아베 정권은 조속히 김정은 정권과의 협상을 재개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특히 동맹국인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한 충격은 컸다.

아베, “북·일 정상회담을 빨리 만들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일본 정부의 북·일 정상회담 조바심을 부추겼다. / 사진:연합뉴스
반면 다수파는 아니었지만 “버스는 돌아온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아무리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과 우호 분위기를 연출하더라도 거액의 돈을 북한에 출연할 수 있는 것은 일본밖에 없다. 그래서 북한은 한국과 미국 관계가 진전된 이후에는 반드시 일본의 원조를 원하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 접근할 것이다. 혹은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는 경우에도 일본에게 추파를 보내게 된다. 그래서 일본은 서두를 필요 없이 태연자약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2002년 ‘북·일 평양선언’ 당시 일본에서는 대북 지원 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의 논의가 있었다. 그때 북·일 양국이 타결된 결론은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965년 일본과 한국이 수교할 당시 식민지 지배 배상에 대신하는 것으로 일본에서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로 총 5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 원조를 제공했다. 이를 21세기의 물가로 환산하면 1조 엔을 넘는 규모다. 이를 일본이 북한 측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일 평양선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양측은, 일본 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국교정상화 후 양측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기간 동안, 무상자금 협력, 저금리의 장기차관 공여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협의 실시, 또 민간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국제협력은행 등에 따른 대출, 신용공여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기본 인식 아래,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했다.”

이처럼 북한에 무상자금 협력을 공언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은 조바심을 내서 버스를 탈 필요는 없다며 의견도 있는 것이다. 특히 아베 총리의 지지기반인 우파에서 이 의견이 강했다.

하지만 정작 총리 관저에서는 “바로 버스를 타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든 하루 빨리 내가 평양에 가서 김정은 위원장과 북·일 정상 회담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며 관련 부처에 압력을 건 것이다. 한 일본 외교 관계자는 증언한다.

“아베 총리는 각국 정상이 줄줄이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을 입술을 깨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다른 정상들보다도 훨씬 일찍부터 대북 문제에 관련돼 온 자신만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안타까움이었던 것 같다.”

아베 총리를 더욱 코너로 몰아넣은 것은 평소 아베 총리가 눈치를 살피던 납치 피해자 가족들이다. 납치 피해자 가족들 사이에서도 “아베 정권은 이대로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베 총리에게 납치 피해자 가족들은 자신을 총리로 끌어올려 준 최대 지원군이다.

2018년 여름 현재 일본 정부와 북한 정부를 직접 연결하는 채널은 두 개가 있었다. 첫째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당시 다나카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사용한 채널로, 총리실 등에서는 ‘외무성 채널’로 불렸다. 당시 다나카 국장이 30번 가까이 만난 상대방은 북한의 국가 보위부 류경이었다. 류경은 2011년에 숙청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부하가 일본과의 파이프를 잇고 있었다.

또 하나는 비교적 새롭게 개척된 것으로 ‘경찰청 채널’로 불린다. 8월 28일 [워싱턴포스트]는 다음과 같은 특종을 보도했다.

“지난 달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내각정보관이 북한의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과 베트남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

이 보도에 대해 다음 날인 29일 정례브리핑에서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는 보도가 사실일 때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2001년 가을부터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가 방북할 때까지 북한과의 협상은 고이즈미 총리-후쿠다 장관-다나카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의 라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중도’였지만,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과 다나카 국장은 대북 ‘유화파’였다.

아베의 측근, 기타무라 내각 정보관의 행보

이에 ‘강경파’인 아베 부장관이 수하에 거느리던 인물이 사이키 아키다카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 심의관과 기타무라 시게루 경찰청장 관방총무과 기획관이었다. 나는 당시 국회의사당 주변인 나가타초와 아카사카의 레스토랑 등에서 세 명이 회식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한 적이 있다. 마치 ‘찬밥’ 취급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고이즈미 방문이 결정된 2002년 8월, 후쿠다파에게 ‘요주의 인물’이었던 기타무라는 도쿠시마현의 현경본부장으로 승진하는 형태로 완곡히 시코쿠 지방으로 쫓겨났다.

기타무라가 부활해 북한 외교를 담당하는 경비국 외사정보부 외사과장에 취임한 것은 북한 논쟁에서 아베가 승리하고 후쿠다가 사퇴한 직후인 2004년 8월. 기타무라는 그 뒤 2006년 9월 제 1차 아베 내각 출범 때 아베 총리 비서관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2012년 12월에 제2차 아베 내각이 출범한 이후는 ‘일본판 CIA장관’에 해당하는 내각정보관으로 거의 매일 아베에게 보고하고 있다.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 김정은 위원장에게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있듯이, 아베 총리에게는 기타무라 정보관이 있는 것이다.

김성혜 실장도 5월 30일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회담하기 위해서 뉴욕에 도착한 김영철 통일전선부장과 동행했던 것에서 보듯, 완전히 김정은 위원장의 핵심 측근이다. 그 김성혜 실장과 기타무라 정보관이 극비리에 회담했다고 하면 이 ‘경찰청 채널’은 본격적으로 출범한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채널의 마지막 임무는 기타무라 정보관이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 아베 총리의 방북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베트남에서의 비밀 접촉이 [워싱턴포스트]에 폭로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한 미국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위협에 노출돼 있는 베트남은 최근, 베트남 전쟁을 치렀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과 북한이 자국에서 비밀 접촉한 사실을 미국에 보고했다. 이 정보를 전달받은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금 진행 중인 북·미 협상에 쓸데없는 영향을 미친다’며 일본 정부에 제동을 걸었다. 동시에 앞으로 북한과의 모든 협상은 미국에 상담, 보고하도록 못 박았다. 그리고 미국을 무시하고 극비리에 북한과 협상을 진행한 벌로 미국 언론에 누설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트럼프 정권의 압박 외에도 아베 정권에 있어서 괴로운 것이 또 한 가지 있었다.

고이즈미 정권 이후 북·일 관계가 가장 진전된 것은 아베 정부의 2014년이다. 전년도 말 북한의 넘버 2였던 장성택 당 행정부장을 처형한 김정은 위원장은 혼란한 내정을 타개하려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활로를 감행했다.

2014년 5월 일본과 북한은 스웨덴에서 2002년 ‘북·일 평양선언’에 이어 중요한 합의 문서인 ‘스톡홀름 합의’를 도출했다. 이는 ‘행동 대 행동’원칙에 의거해, 일본과 북한이 합의한 사항이다. 거기에는 일본이 대북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대가로 북측이 해야 하는 ‘행동’에 대해서 쓰여져 있다.

“1945년 전후 북한 지역 내에서 사망한 일본인 유골 및 묘지, 잔류 일본인, 이른바 일본인 배우자, 납치 피해자 및 실종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 관한 조사를 포괄적이고 전면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대상에 대한 조사를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추진하기 위해 특별한 권한(모든 기관을 대상으로 조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납치 피해자 및 실종자에 대한 조사 상황을 일본 측에 수시로 통보하고, 조사 과정에서 일본인의 생존자가 발견되는 경우에는 그 상황을 일본 측에 전달, 귀국시키는 방향으로 거취 문제에 관해서 협의하여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기로 했다.”

연말 잠재적 이벤트, 종전선언과 북·일 정상회담


▎지난 5월 방중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다롄의 휴양지 해안가를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본 측이 최우선으로 바라는 것은 당연히 납치 피해자의 동향이다. 그러나 북측은 “일본인 유골, 잔류 일본인, 일본인 배우자, 실종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을 고집했다. 물론 일본 측도 그것에서도 납치 피해자가 포함돼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승낙했다.

그 뒤 북·일 협상은 불가사의한 전개를 보인다. 다음해인 2015년에야 북한이 ‘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한 보고’를 진행하려 했지만, 일본 측이 거부한 것이다. 결국 2016년 2월에 북한은 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를 선언했으며, 북·일 관계는 다시 교착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때의 경위에 대해서 한 관계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북한의 조사 내용은 전해진 바에 따르면 ‘새로운 납치 피해 생존자가 없다’며, ‘다만 납치가 아니라 스스로 입국한 일본인이 두 명 생존한다’라는 것이다. 만약 일본 측이 이 보고서를 받는다면 북한은 ‘일본인 행방불명자(납북자) 문제가 이번에 완전히 해결됐다’며 조기 북·일 국교 정상화를 촉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 정부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새로운 납치 피해자의 생존자가 없을 때에는 응답이 될 수 없다’며 보고서를 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2년이 지난 2018년 9월 20일 아베 총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세 번째 당선된 뒤 새롭게 3년의 임기를 챙겼다. 그즈음 새로운 작전에 나섰다. 그것은 납치 문제 해결과 김정은 위원장과 조속한 북·일 정상회담을 요구하는 것을 공언한다는 전술이다. 아베 총리는 9월 25일 뉴욕 유엔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제 북한은 이 역사적인 호기를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손대지 않은 천연자원과 생산성을 크게 늘릴 수 있는 노동력이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납치, 핵·미사일 문제 해결을 통해 (북한과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한다는 일본의 방침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갖고 있는 잠재성을 실현하기 위해 조력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몇 번이라도 거듭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모든 납북자의 귀국을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결심하고 있습니다.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 역시 북한과의 상호 불신의 껍질을 깨고 새롭게 출발해 김정은 위원장과 직접 마주볼 용의가 있습니다. 지금 결정되고 있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지만, (북·일 정상회담을)실시하는 이상, 납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하는 회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유엔 총회에서 ‘납치 문제 해결에 이바지하는 북·일 정상회담’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접 호소한 것이다.

10월 6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아베 총리와 회담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다음 날인 7일에 방북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예정이었다.

이때 아베 총리는 폼페이오 장관에게 다시 조기에 북·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싶다는 뜻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하도록 의뢰했다. 폼페이오 장관도 “2차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실현되면 북·일 관계의 전진을 추진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올해 안에 종전 선언을 도모하고 있으며, 일본은 조기의 북·일 정상회담을 도모하고 있다. 연말이 다가 올수록 북한 정세는 더욱 더 눈을 뗄 수 없게 돌아간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특별편집위원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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