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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22)] 수포로 돌아간 ‘以日制淸(일본으로 청을 제압)’ 프로젝트 갑신정변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한 조선반도 

신명호 교수
淸 내정간섭에 염증 느낀 고종, 日에 은밀히 도움 요청…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준비 없이 정변 일으켰다 참패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의 우정국 건물 전경(서울 안국동 부근).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유명하다.
임오군란 진압 후 고종은 청나라에 감사를 표시하는 동시에 군란이 왜 일어났는지, 앞으로 국정을 어떻게 혁신할지 등등을 알리기 위해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했다. 정사는 조영하, 부사는 김홍집, 종사관은 이조연이었다.

7월 22일, 진주사 3명은 마건충과 함께 청나라 군함을 타고 남양을 출발해 천진으로 갔다. 고종이 진주사 편에 국정 혁신안을 보낸 이유는 차관 50만 냥 때문이었다. 지난 4월, 고종은 한양에 온 마건충에게 김홍집을 보내 차관 문제를 논의하게 했는데 그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당시 마건충은 상환 문제만 확실하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홍장에게 주선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근대화를 추진하던 고종은 자금 문제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예컨대 미국과 맺은 수호조약에서 수입품 관세를 10~30%까지 부과하기로 했는데, 그것을 실행하려면 개항장에 해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징수해야 했다. 그런데 해관 설치, 관세 징수 등은 미국인을 비롯한 백인들을 상대해야 하므로 조선 사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관세 업무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징수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전문가를 초빙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게다가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수도방위체제가 완전히 망가졌기에 무기와 군 편제 등 모든 것을 새로 정비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금이 뒷받침돼야 가능했다. 고종은 해관 설치, 관세 징수, 군 정비 등에 필요한 자금을 청나라 차관 50만 냥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고종이 청나라 차관 50만 냥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홍장을 설득해야 했다. 그래서 고종은 청나라에서 차관 50만 냥을 제공한다면 그 차관을 이용해 국정을 어떻게 개혁할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선후육조(善後六條)’라는 제목 그대로 고종의 국정 개혁안은 6조로 구성됐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은 셋째의 ‘정군제(整軍制)’와 여섯째의 ‘확상무(擴商務)’였다. ‘정군제(整軍制)’는 말 그대로 구식 군제를 근대 군제로 개편하겠다는 것이었으며, ‘확상무’는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가재정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종은 ‘확상무’를 위해서는 적당한 인물이 있어야 가능하다며 이홍장이 적당한 인물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선후육조’를 검토한 이홍장은 차관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홍장은 조선 정부에서 차관 50만 냥을 임오군란 배상금으로 사용할까 우려했다. 그래서 이홍장은 차관 50만 냥은 ‘확상무’를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다짐을 받았다. 아울러 차관 50만 냥은 새로 설치하는 해관 관세를 이용해 상환하는 것으로 했으며, 만약 관세가 부족하면 홍삼세를 이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렇게 상환 방법을 결정한 이홍장은 조선의 ‘확상무’를 자문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인 렌도르프를 파견했다. 또한 ‘정군제’를 자문한다는 명목에서 마건충의 형 마건상을 파견했다. 고종 19년(1882) 9월, 진주사와 함께 조선에 온 렌도르프와 마건상은 그해 연말 고종을 면담했는데, 렌도르프는 통리아문 참의, 마건상은 의정부 찬의에 임명됐다.

박영효·서광범의 ‘깨달음’


▎일본에 망명한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 서재필·김옥균.
이후 렌도르프는 참의 자격으로 해관을 비롯해 조선의 외교·통상을 주도했으며, 마건상은 찬의 자격으로 군 문제를 주도했다. 이로써 조선의 외교·통상·군사 부문은 사실상 청나라에 장악되다시피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양에는 청나라 병력 3000명이 주둔해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청나라는 사사건건 조선내정에 간섭했다. 이런 청나라의 태도에 특히 분개한 사람들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이른바 급진 개화파였다. 고종 역시 청나라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조선정부는 제물포조약에 따라 임오군란에서 피해를 입은 일본에 사과하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그때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 자원했다. 고종은 박영효를 정사, 서광범을 종사관에 임명하고 김옥균과 민영익을 수행원으로 임명했다. 고종은 김옥균과 민영익에게 몇 가지 밀명을 줬다. 첫째는 일본이 청나라를 견제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선에 재정 지원을 해줄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일본이 조선을 도울 의지가 있다면 배상금 50만원을 탕감해 줄 것이고, 나아가 거액의 차관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희망에서 고종은 배상금 지불 연장과 함께 300만 엔 차관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라면 그 무엇보다도 청나라의 3000병력을 철수시키는 동시에 차관 50만 냥을 상환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종이 요청한 300만 엔 차관은 조선정부의 2년 수입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고종 18년(1881) 12월에서 고종 19년(1882) 6월까지 7개월간 일본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옥균의 눈앞에 펼쳐진 일본의 발전과 성취는 충격 그 자체였다. 김옥균은 조선이 근대화하고 나아가 청나라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유신 주역들을 만난 김옥균은 그들이 조선을 도울 의지도 있고 실력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충격 속에서 일본을 시찰하던 김옥균은 임오군란 소식에 급거 귀국했다. 그의 눈에 군란 이후의 조선은 참혹하게만 보였다. 3000병력을 한양에 주둔시킨 청나라는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했다. 그런 청나라를 몰아내고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력과 자금력이 유력한 대안이라는 김옥균의 주장에 고종 역시 희망을 품고 급진 개화파 인사들로 수신사를 조직해 파견했던 것이다.

고종 19년(1882) 8월 31일 한양을 출발한 박영효·서광범·김옥균·민영익 등은 양력으로 10월 10일 고베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합류했다. 김옥균은 이노우에에게 고종이 “은밀히 일본에 의뢰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했다. 아울러 배상금 50만 엔의 지불 연장도 요청했다. 그때 김옥균은 “조선에서 진실로 독립을 원하는 자는 단지 국왕, 박영효 및 김옥균 3명뿐이고 정부의 주요 아문을 장악한 어윤중·조영하·김홍집·김병시는 청나라에 의뢰할 뿐 독립정신이 없는 자들”이라 말했다 한다.

김옥균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일본이 도와준다면 고종과 급진 개화파는 친청파 사대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였을 듯하다. 만약 일본의 도움으로 친청파 사대주의자들이 사라지면 고종과 개화파는 당연히 일본에 우호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적극적으로 고종과 급진 개화파를 도와와 한다는 것이 김옥균의 속뜻이었을 듯하다.

도쿄에 도착한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10월 19일 메이지 천황을 예방하고 고종의 국서와 선물을 전달했다. 국서를 받은 메이지 천황은 “귀국의 대왕이 안녕하시니 기쁨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지금 경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우리나라에 파견해 친서를 전달하게 했으니 영원히 우의를 보장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였다.

300만 엔 차관 요구… 실제 손에 쥔 돈은 전무


▎김옥균이 김봉균과 이석이에게 터뜨리도록 폭약을 묻어둔 창덕궁 인정전.
메이지 천황은 박영효·김만식·서광범과의 공식적인 접견이 끝난 후 김옥균과 민영익을 별도로 접견했다. 이 접견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중요했다. 이들이 고종의 밀명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때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0월 19일, 조선국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박영효 등이 참내(參內)해 국서를 봉정한 후 또다시 국왕 이희(李熙-고종)의 명령을 은밀하게 아뢰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 현 상황을 진술하면서 일본이 그 독립을 도와줄 것과 재정을 원조해 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었다”는 [명치천황기]의 내용으로 볼 때 청나라의 내정간섭 상황, 고종의 불만, 일본의 도움과 차관 요청 등이 주요 내용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메이지 천황은 김옥균과 민영익에게 칙어(勅語)를 줬다고 하는데 아마도 담당자들에게 물은 후 대답해 주겠다는 내용이었을 듯하다.

고종의 요청은 메이지 천황에게도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우선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견제해 달라는 요청에 응하기 위해서는 전쟁까지 각오해야 했다. 아울러 300만 엔의 차관 요청도 부담스러운 규모였다. 당시 일본정부의 1년 세입은 6000만 엔 정도로 300만 엔은 1년 세입의 5%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 자체도 외채 상환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300만 엔의 차관이 가능한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메이지 천황은 각료들에게 의견을 제출하라 명령했다. 그 결과 외무경 이노우에를 비롯해 우대신 이와쿠라 그리고 참의 이토 히로부미 세 명이 의견을 제출했다. 10월 30일, 외무경 이노우에가 제일 먼저 의견을 제출했는데 그의 의견은 사실상 고종의 요청을 거절하자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당시 일본 국력으로는 아직 청나라와 정면대결을 벌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전면에 나서 청나라를 견제하기보다는 조선과 조약을 맺은 서양 각국으로 하여금 청나라를 견제하게 하는 것이 제1의 방책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청나라의 양해 하에 조선의 근대화를 돕자고 주장을 하는 등 이노우에의 의견은 최소한의 간섭 또는 최소한의 원조만 하자는 쪽이었다. 이 같은 주장에 우대신 이와쿠라 역시 적극 동조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좀 더 적극적인 간섭과 원조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쿠라와 이토 사이에 의견이 갈리자 각료들 의견도 갈렸다. 하지만 다수는 이와쿠라 의견에 동조했다. 이에 각의에서는 이와쿠라 의견을 합의안으로 결정해 보고했다. 메이지 천황이 결재함으로써 이와쿠라 의견이 정부 방침으로 채택됐다. 이처럼 최소한의 간섭 또는 최소한의 원조가 정부 방침으로 채택됨으로써 고종의 요청은 사실상 거부됐다.

그러나 김옥균을 비롯한 수신사 일행은 이런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그들은 300만 엔 차관 교섭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두 달에 걸친 노력 끝에 겨우 배상금 50만원 지급의 10년 연기와 17만 엔의 차관을 얻는 데 그쳤다. 그나마 17만 엔의 차관 중에서 5만 엔은 배상금 명목으로 공제하고, 12만 엔만 받았다. 그 12만 엔 중에서 이런저런 경비로 일본 현지에서 쓴 액수가 근 10만 엔에 달했다. 나머지 2만~3만 엔은 일본은행에 예치했다. 300만 엔을 목표로 왔는데 결과적으로 남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별 소득이 없자, 정사 박영효와 수행원 민영익은 11월 말에 먼저 도쿄를 출발해 귀국했다. 반면 김옥균과 서광범은 뒤에 남았다. 차관 문제를 더 논의하는 한편 일본의 사정 및 세계의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수신사와 떨어져 일본에 3개월 정도 더 머물던 김옥균은 고종 20년(1883) 1월에 귀국했다. 김옥균의 눈에 그 사이 조선 현실은 더욱더 참혹하게 변해 있었다.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더 심해지면서 조선은 청나라 속국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급진 개화파와 고종 사이의 ‘괴리’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일본인들은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하다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가져다 묘소를 만들었다.
임오군란 직후 고종은 개화파의 주장에 따라 일본 힘으로 청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종은 일본 대신 미국에 기대를 걸었다. 물론 이것은 고종 스스로의 판단만이 아니라 구미 열강을 내세워 청나라를 견제하려 한 일본 정부의 책략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종이 완전한 독립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고종은 청나라로부터 적극적인 간섭만 받지 않으면 만족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형식적인 사대관계, 조공책봉관계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문제시한 것은 단지 청나라가 과거의 형식적인 종주국에서 이제 실제적인 종주국으로 군림하려 든다는 사실뿐이었다. 이 점에서 고종은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와 달랐다. 급진 개화파는 명실상부한 독립을 원했다. 청나라가 형식적인 종주권을 행사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급진성이 고종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의 급진성이 어디까지 나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옥균 등은 일본의 힘으로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고종은 불안감에 더해 불신감까지 갖게 됐다. 김옥균 역시 고종의 불안감과 불신감을 눈치 채고 있었다. 김옥균이 고종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300만 엔의 차관을 성사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고종 20년(1883) 6월, 김옥균은 다시 일본으로 갔다. 300만 엔의 차관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비협조적이었다. 궁지에 몰린 김옥균은 민간에서라도 차관을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후쿠자와는 유력한 재야 정치인이자 자유 민권운동을 함께 추진하던 고토 소지로(後藤象一郞)를 소개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김옥균에게 고토는 “미리 백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뒤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습니다”라며 큰소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입으로 하는 큰소리일 뿐, 실제 차관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1년 가까이 동분서주하던 김옥균은 고종 21년(1884) 5월 빈손으로 귀국해야 했다. 다만 소득이라면 조선에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백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로 돕겠다는 고토 소지로의 호언장담이었다.

일본을 믿고 큰소리치던 김옥균이 두 번이나 차관 도입에 실패하자 고종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민영익 역시 김옥균을 불신했다. 민영익은 김옥균뿐만 아니라 일본도 불신했다. 그러면서 점점 친청파로 변해 갔다. 고종과 민영익의 불신을 받으면 받을수록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개화파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김옥균은 어제의 동지였던 민영익을 정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숙청 제1호로 꼽을 정도로 최악의 정적으로 여겼다. 개화파 역시 김옥균과 민영익을 중심으로 분열됐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뭉쳤다. 반면 온건 개화파는 민영익 쪽으로 기울었다. 김옥균은 민영익 쪽을 사대수구당이라 비난하며 자신들을 독립개화당이라고 했다. 민영익은 사대수구당의 수뇌였고 김옥균 자신은 독립개화당의 수뇌였다.

그런데 김옥균이 민영익을 사대수구당이라 하고 자신은 독립개화당이라 부른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다. 당시에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며 조선의 독립을 억압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청나라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바로 독립 추구는 아니었다. 김옥균은 청나라 대신에 일본에 의지하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김옥균은 친일이었고 민영익은 친청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추진하려 했고 민영익은 청나라를 모델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런 면에서 친정은 사대수구이고 친일은 독립개화라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명실상부한 독립개화가 되려면 그것이 청나라든 일본이든 상관없이 외세에 의존하지 말아야 했다. 김옥균은 청나라에 대한 증오가 깊은 만큼 일본을 깊이 신뢰했다. 일본은 청나라와는 달리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이 없다고 믿었다.

김옥균의 오판… 고토의 허풍을 철석같이 믿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발발 10년 후인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권총 3발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시체는 조선으로 옮겨졌고, 한강변 양화진에 효수됐다.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 청나라임은 분명했다. 김옥균은 우선 눈앞에 보이는 청나라부터 몰아내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청나라만 몰아낼 수 있다면 그는 일본과 어떤 거래든 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청나라는 3000 병력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일본은 공사관을 수비하는 병력 100여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김옥균은 은밀하게 동지들을 모으면서 때를 기다렸다. 때는 곧 찾아왔다.

1883년에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국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무력 점령하려고 했고 청나라는 종주권을 내세워 저지하려고 했다. 국지전으로 시작된 전쟁은 점차 확대됐다. 청나라는 전국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요동지역의 병력도 차출했는데 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홍장은 요동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한양에 주둔하던 3000병력 중에서 절반을 요동으로 이동 배치하게 했다. 그때가 고종 21년(1884) 5월이었다. 그 후에도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계속 확대됐다. 육지에서는 물론 바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1500병력도 언제 차출될지 알 수 없었다.

김옥균은 청나라를 몰아내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라 판단했다. 청나라의 관심이 온통 프랑스와의 전쟁에 쏠려 있을 때 거사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과 손잡고 정변을 일으킨다면 청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을 우려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리란 예상도 가능했다. 청나라의 형편상 베트남과 조선 양쪽에 전선을 형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불과 몇 달 전 김옥균이 일본에 건너갔을 때, 고토 소지로는 “미리 백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뒤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습니다”라며 호언장담했었다. 이 말은 사실 고토의 허풍에 불과했지만 김옥균은 철석같이 믿었다. 일본의 유력한 정치가인 고토가 그냥 허풍만 쳤으리라고 김옥균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자신이 정변을 일으키면 고토를 비롯한 일본의 재야 정치인들이 크게 도와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김옥균의 입장에서는 일본 공사관의 협력만 끌어내면 일본정부와 일본 민간 양쪽의 지지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종 21년(1884) 8월쯤, 김옥균은 정변을 결심했다. 김옥균은 정변의 성패는 고종을 얼마나 확실하게 장악하느냐에 달렸다고 봤다. 정변 후에 개혁과제를 수행하려면 오랜 기간이 필요한데, 적어도 그동안은 반드시 고종을 그들의 통제하에 둬야 했다. 그러려면 안전한 장소에서 고종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김옥균의 첫 구상은 거사와 동시에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播遷)시키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고종을 모시고 일본으로 가겠다는 구상도 있었다. 김옥균은 자신이 일본으로 가더라도 고종만 장악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정변에 필요한 국내 무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동원 가능한 병력은 다 모아 봐야 몇 십 명 수준이었다. 따라서 일본 공사관의 병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논의한 김옥균은 고종을 인천 대신 수비에 유리한 경우궁으로 파천시키기로 했다. 경우궁은 정식 궁궐이 아니라 순조의 생모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었다. 당연히 궁궐보다 규모가 작았고 작은 병력으로 수비하기에 유리했다.

김옥균은 거사의 성패가 신속하게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제거하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모시는 데 달렸다고 판단했다. 김옥균은 우정국 낙성식 날인 10월 17일(양력 12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날 밤 낙성식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고 민영익 등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다. 우정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척살하고 곧바로 궁궐로 들어가기로 했다.

‘3일 천하’일 수밖에 없었던 쿠데타


▎김옥균의 암살범 홍종우의 초상.
낙성식에는 미국 공사, 영국 영사, 청나라 상무위원, 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윤치호·민영익·한규직·이조연·민병석 등이 참석했다. 이들 중에서 표적은 물론 민영익이었다. 이윽고 바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그러나 제대로 목을 베지 못하고 귀만 잘랐다. 칼을 맞은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졌다.

순간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은 재빨리 자리를 빠져 나와 창덕궁으로 가 곧바로 편전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있던 고종과 왕비 민씨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런 고종과 왕비 민씨를 경우궁으로 옮긴 김옥균은 왕명을 위조해 민씨 척족과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다. 18일 새벽에 민태호·민영목·조영하·윤태준 등이 입궁했다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경우궁으로 옮겨올 때만 해도 고종과 왕비 민씨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태호 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정변임을 깨달았다. 왕비 민씨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기지를 발휘했다. 18일 아침에 심상훈이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하고 경우궁에 들어와 왕비 민씨를 알현했다. 그때 왕비 민씨는 속히 밖으로 나가 민영환에게 내부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수라상 밑에 몰래 서찰을 붙여 올리면 된다고 덧붙였다.

심상훈의 연락을 받은 민영환은 수라상 밑에 밀서를 붙여보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 일이 수월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고종과 왕비 민씨는 ‘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그 말을 듣고 창덕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이 듣고 항의했지만 다케조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미 김옥균은 믿었던 일본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고종과 왕비 민씨는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김옥균은 처음에 청나라 병력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궁궐을 공격할지 또 일본군과 교전을 벌일지를 놓고 본국에 보고해 협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청나라 병력은 전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원세개가 본국과의 논의도 없이 독단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해도 청나라 병력은 일본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몇 시간 정도 전투를 벌이던 일본공사는 철수를 명령했다. 김옥균은 또다시 일본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창덕궁에서 탈출한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 사람들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것이 이른바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었다.

김옥균은 ‘조선을 힘 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김옥균은 정변이 성공했을 때 추진할 혁신정강 14조를 마련했다. 그 정강 하나하나는 근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김옥균에게는 이런 정강을 추진할 만한 내부 역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의 힘으로 보충하려 했지만 오히려 청나라 군대 개입으로 실패했던 것이다. 갑신정변 결과 청나라의 영향력은 더 강화됐고 간섭 역시 더 거세졌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청나라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반청운동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다. 무력이 아니라 외교를 통한 반청운동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청나라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일본 역시 청나라를 조선에서 축출할 기회를 노리며 때를 기다렸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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