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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0)] 이성계·이색의 연립정권 성립 이후의 권력투쟁 

정몽주, ‘경계인’의 고뇌 

김영수 영남대 교수
明의 ‘불신의 역모’ 칼날 피하기 위한 정치적 생존책이 빚은 대연정…문장력보다 경세의 역량 중시한 개혁파의 이숭인 탄핵으로 정면충돌

▎1216년 세워진 개성 선죽교. 정몽주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타협에 의한 연립정권을 꿈꿨다. 그러나 개혁파 내 급진파였던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뜻을 무시하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했다. 선죽교는 정몽주의 지향이 좌절된 공간으로서 영속성을 갖는다.
1389년 9월, 이성계파가 반대파와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그해 2월 강회백이 가져온 외교문서에서, 중국은 위화도회군 이후의 고려정치를 ‘불신(不臣)의 역모’로 규정한 바 있다. 신하가 아버지를 내쫓고 아들을 세우는 것은 신하로서 해선 안 되는 역모란 뜻이다. 이 때문에 이성계파는 우왕과 화해를 시도하고, 반대파와도 공존을 모색해야 했다.

연립정권을 제안한 이는 공식적으로 정몽주였다. 제안은 타이밍상 완벽했다. 이성계파로서도 제휴가 절박한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립정권의 필요성은 정몽주로서도 절실했다. 그는 어느 한 쪽에 확고하게 서지 못하고, 방황했다. 정몽주는 당시 고려 정계에서 이성계파로 인식됐다. 김종연은 이성계를 암살하고 우왕을 복립하려던 계획에 연루돼 1390년 12월 처형됐는데, 그의 첫 번째 살해 대상이 바로 이성계와 정몽주였다. 정몽주를 이성계파의 둘째 유력자로 본 것이다. 국문 과정에서 그는 “이시중은 인품이 본래 인자한데 정몽주·설장수·조준·정도전 등에게 꾀여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시중과 함께 정몽주만 해친다면 나도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진술했다.([고려사절요] 34, 공양왕 2년 12월)

정몽주는 창왕을 폐위시킨 1388년 11월 흥국사 9인 회의에도 참석했다. 창왕의 폐위 명분은 그가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는 비왕설(非王說)이었다. 이것은 이성계파의 핵심적 집권 명분이자, 고려 수호파가 강력히 부정한 논리였다. 정몽주는 이 명분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1388년 7월 이후의 사전(私田)개혁에 대한 입장은 달랐다. 사전개혁에 대해 “이림·우현보·변안열 및 권근·유백유는 이색에게 동조했고, 정도전·윤소종은 조준의 주장에 동조했으며, 정몽주는 양자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조준전])

이색, 성리학계의 ‘오피니언 리더’


▎포은 정몽주의 영정. 정몽주는 고려말, 이성계파와 이색파 사이에서 끝 모를 방황을 했다.
정몽주는 처음부터 혼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색, 이림, 이성계에게 공동의 특전을 하사함으로써 연립정권을 구체화시킨 뒤, 창왕은 그 명분을 천명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이 교서는 제안자인 정몽주의 의사가 반영됐을 것이다. 교서를 보면, 고려의 정신적 지도자는 이색이었다. 이색은 “학문은 하늘과 사람으로 통하고 지식은 고금을 꿰뚫어··· 염락(濂洛)의 학을 알게 하고 풍속을 추로(鄒魯)의 풍으로 변하도록 한 것은 실로 경의 힘”이라고 찬양되고 있다. 염락의 학은 성리학이며, 추로의 풍은 공맹(孔孟)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당대 성리학자들의 세계관이자 정치이념이었다.

실제 한국에서 성리학을 하나의 확고한 시대사조로 만든 것은 이색이었다. 그는 1367년(공민왕 16년), 전쟁으로 무너진 성균관 중건을 주도하고 성리학 붐을 일으켰다. 성리학이 비로소 고려 학계와 사상계에서 주류로 부상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이색 학파가 탄생했다. 정도전의 설명을 보자. “오늘날 목은 이색 선생은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고 북으로 중원에 유학하여 바른 사우(師友)의 연원을 얻고서 성명(性命)과 도덕의 설을 궁구하였으며, 동방으로 돌아와서는 제생을 교육하였다. 이 선생의 가르침을 접하고서 흥기한 자로는 정몽주, 이숭인, 하륜, 박상충, 김구용, 박의중, 권근, 윤소종 등이 있고, 또 나처럼 불초한 자도 몇 분 군자의 대열에 끼이는 영광을 얻었다.”([도은집] 서)

1374년 공민왕 사후 이인임은 친명(親明)에서 친원(親元)으로 대외정책을 바꾸고자 했다. 이색 학파는 일제히 이에 반대함으로써,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권력투쟁에서 패한 결과 뿔뿔이 흩어졌으며, 14년간 역사의 수면 아래에서 잠류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 후 사전개혁은 이색 학파에 닥친 제2의 정치적 분수령이었다. 이색이 입장을 정하자 권근과 유백유는 이색을 따랐고, 윤소종과 정도전은 이색을 떠났다. 이로써 이색 학파는 갈라졌다. 정몽주의 주저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개혁과 이념의 분열을 뜻했다. 정몽주 입장에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최선책은 이색이 개혁파로 전향하는 것이었다. 차선책은 양자가 타협하며 공존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명나라의 압박으로 그런 정치적 상황이 조성됐다. 이 연립정권은 아마 현실정치가 정몽주에게 허용한 가장 행복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몽주가 이성계 그룹의 급진파인 조준, 정도전을 제치고 이성계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동시에 그것은 철저한 개혁이 좌절됐음을 뜻했다. 이성계에게는 정치적 생존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립정권을 허용한 급진파는 탄핵기관과 왕명을 출납하는 직위에 개혁파 인사들을 배치했다. 지방정치의 개혁을 위해 1388년 8월 지방에 파견된 인사들이 귀경해 요직에 임명됐다. 장하와 성석린은 문하평리, 조운흘·김사형·최유경은 동지밀직사사, 권주는 밀직제학, 민제는 개성윤, 이행은 지신사, 이근은 좌부대언, 오사충·남재는 좌우사의, 조박은 문하사인, 권담은 사헌장령, 김이음·최사위는 지평에 임명됐다. 물론 이들이 모두 급진파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권력투쟁에서 가장 급진적인 논객으로 나선 것은 오사충과 남재, 조박이다.

개혁파내의 급진파들은 연립정권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만은 이색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적 정치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급진파는 행동에 나서 서서히 이색을 향해 공격의 칼날을 겨눴다. 이는 정몽주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이색이 제거되면 연립정권도 유지될 수 없었다. 이색에 대한 공격은 사실상 연립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정몽주의 고민은 깊어졌다.

1389년 9월, 정몽주의 연립정권안이 현실화되기 직전 이숭인에 대한 탄핵이 시작됐다. 이색을 제거하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이숭인은 이색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총애했던 인물이었다. 1388년 10월의 중국 사행 때도 이색은 이숭인을 부행(副行)으로 데리고 갔다.

이숭인은 천재적인 문장가였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명문장가인 최립(崔岦, 1539~1612)은 “이색의 글과 이숭인의 시는 우리 동방에서 첫째”(牧隱之文 陶隱之詩 吾東第一 家數也)라고 평가했다.([簡齋集] ‘新印陶隱詩集跋’) 이숭인의 글은 [시경]과 [서경]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우아하고 고전적이었다.(典雅) 정도전의 평을 보자. “그가 저술한 시와 문 약간 편을 보더라도 [시경]의 비흥(比興)과 [서경]의 전모(典謨)에 뿌리를 두었으며, 화순함이 안에 쌓여서 영화로 밖에 발한 그것 역시 모두가 예악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니, 도의 경지에 깊이 들어간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도은집] 서)

이색도 붓을 들면 바로 글이 나오는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그는 이숭인의 시에서 그 진수를 맛봤다. “정사년(1377, 우왕 3년) 동짓달 그믐 3일전,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서 도은(陶隱)의 시 서너 편을 읽어 보았더니, 마치 옥구슬이 소반 위를 구르는 것과 같고, 골짜기에서 나온 얼음덩어리가 옥병 속에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읽어 오면서도 시의 참다운 맛을 느껴보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독 공자께서 일러주신 ‘사무사(思無邪)’라는 한마디 말씀과 거의 비슷하게 되어야 하리라고 혼자 상상하면서 노년에 이르도록 그 말씀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은의 시어(詩語)를 보니, 한 점 티끌도 없이 쇠락한 느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방향도 오직 거기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성정(性情)의 바름을 느끼게 하여 삿됨이 없는 경지로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도은집] 발)

이색은 또한 “우리 동방의 문장은 선배들도 자안(子安, 이숭인)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 이 사람의 문장과 같은 것을 중국에서 찾아보아도 구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명태조 주원장도 이숭인이 지은 “표문의 글이 참으로 간절하구나!(表辭誠切)”라고 탄복했다.

당대의 문장가 이숭인


▎이숭인의 초상화. 당대의 문장가였던 이숭인은 일급 외교문서 작성자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론 이성계파와 대척점에 섰다.
이숭인은 과거 합격 이후 줄곧 왕의 교서 등 국가의 주요문서를 작성하는 직위(製敎)를 겸했다. 이색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외교문서는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 서구는 말의 힘이, 동아시아는 문장의 힘이 강하다. 중국문화권에서 문장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철학적 깊이와 정치적 역량을 가늠하는 잣대였다.

국가 간 외교에서 주고받는 문장은 특히 어렵다. 오늘날의 외교문서는 다분히 실무적이다. 그러나 전근대의 외교문서는 예술적이지 않으면 안 됐다. 외교문서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품이 돼야 하는 것이다. 문장의 품격이 국격이 되고, 국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외교문서 작성엔 또한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균형 있게 다룰 줄 아는 정무감각이 필수적이다. 예술적인 문장 속에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함축돼야 한다. 너무 드러나면 격이 낮고, 너무 은미하면 뜻이 안 통한다. 이숭인의 외교문서에 대한 권근의 평을 보자.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긴 이래로 표전(表箋)과 사명(詞命)가운데 이숭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습니다. 공민왕이 명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은 것과 상왕(우왕)께서 작위를 이어받은 것은 모두 이숭인이 지은 문장의 힘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금은·말·베의 공납을 면제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숭인의 힘입니다. 황제가 문장이 아름답다고 자주 칭찬하시면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있다고 말한 것도 다 이숭인의 공입니다. 이숭인의 문장은 간결하고 고아한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중국에도 그런 인재는 드무니 국가의 외교문서는 이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숭인전])

이숭인은 또한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했다. 권근의 평은 이렇다. “천품이 영특하고 고매한 위에 학문이 또 정밀하고 박식하였으며, 염락의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서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백가의 글에도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조예가 깊을뿐더러 식견이 더욱 높아 정대한 영역에 우뚝 섰으며, 불교와 노장의 학설에 대해서까지도 옳고 그름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도은집] 서)

그는 14세인 1360년(공민왕 9년) 국자시에 합격했다. 2년 뒤 16세 때 과거에 급제했다. 1367년 이색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성리학운동을 시작했을 때, 이숭인은 성균관 학관으로서 크게 활약했다. 한국 성리학의 공동 창시자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자안(子安, 이숭인)은 정심(精深)하고 명쾌한 면에서 제자(諸子)를 능가하였다. 그는 선생의 설을 들으면 조용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통하여 다시 귀찮게 질문하는 법이 없었고, 혼자서 해득하는 것 역시 사람의 의표를 멀리 뛰어넘는 점이 있었으며, 각종 서적을 널리 독파하면서도 한번 보기만 하면 곧장 암기하였다.”([도은집] 서)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숭인은 이인임의 인척이었다. 그의 증조부 이백년(李百年)은 이인임의 조부 이조년(李兆年)의 맏형이었다. 이인임은 이숭인의 재종숙부이다. 그래서 이숭인의 정치적 부침도 가계와 직결됐다. 이인임이 축출된 1388년 무진정변 때 이숭인도 장형을 받고 통주에 유배됐다. 최영의 문객 정승가(鄭承可)가 그를 참소했다. 위화도회군 뒤 최영이 축출되고 창왕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조민수가 가장 먼저 요청한 것이 이인임과 이숭인의 복권이었다.([고려사절요] 신우4) 그때 이인임은 이미 죽은 뒤였다.

그러자 조민수는 창왕에게 이인임을 예장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청했다.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가 죽은 뒤 그 공덕을 기려 추증하는 호이다. 보통은 좋은 뜻을 담은 선시를 내린다. 그런데 시호 제정을 담당한 전의시(典儀寺) 관리들이 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전의부령 공부가 “내가 광평군(廣平君, 이인임)의 시호를 의논하지 않으면 누가 감히 하겠는가” 하고는 ‘황무(荒繆)’라는 시호를 지었다. 황무란 “극히 착오가 심하여 조리에 매우 어긋남”(absurd)을 뜻한다. 나쁜 뜻이다. 이숭인, 강회백, 하륜 등이 공부를 욕했다. 하륜은 이인임의 동생 이인미의 사위니, 이인임의 조카사위다. 무진정변 때 그 역시 유배됐다. 조선 선조대의 명신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이런 이숭인의 정치적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이인임으로 말하면 자신의 임금을 죽였으니 악의 큼이 염흥방, 임견미와 비교할 바가 아닌데, 그 당시에 이인복, 이숭인이 한 집안의 사람으로 이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 것은 또 무슨 일이었는가?”([寄齋雜記]1, ‘歷朝舊聞’1, 國初)

고려왕족 영흥군 진위(眞僞) 스캔들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 정문에서 바라본 태화전.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를 상대로 사대외교를 펼칠 때, 이 길을 거쳐 갔을 것이다. 이성계 때부터 중국의 지지는 곧 정권의 정당성을 의미했다.
이숭인의 정치이념은 이인임의 그것과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숭인은 이인임에 우호적이었다. 씨족사회에서 인척의 연을 벗어나기란 매우 어렵다. 게다가 그는 이색과 정치적 거취를 같이했다. 이성계파와는 완전히 반대다. 공양왕 때 간관은 “이숭인과 하륜이 과거 이인임의 심복노릇을 하다가, 뒤에는 이색의 간계에 호응해 창왕을 재우쳐 명나라에 알현시키려 했고, 또 우왕을 복위시켜 왕씨의 적통을 단절하려 했다”고 비판했다.([이숭인전]) 이처럼 이성계파는 이숭인을 확고한 반대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1389년 9월, 이성계파가 이숭인을 공격한 빌미는 사소한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으로부터 생환한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둘러싼 문제였다. 왕환은 신종의 6대손이고, 공양왕의 종숙(從叔)이다. 처남은 신순(辛珣)이다. 신순의 형은 신예로서 매부 고용보와 함께 충혜왕, 충목왕대의 권신이었다. 신순의 동생은 신귀로서, 이성계와 동서간이다. 신순, 신귀는 신돈과 같은 영산 신씨였는데, 그의 우익이 됐다가 1371년 신돈과 함께 처형됐다. 이때 왕환도 신순의 죄에 연루돼 무릉도(울릉도)에 귀양갔다. 거기서 실종돼 19년간이나 생사를 알지 못했다.([고려사] 종실) 그의 아내 신씨는 왕환이 일본으로 표류했다는 풍문을 듣고, 금은을 마련해 일본에 가는 사신에 가노를 두세 차례 딸려 보냈다. 1389년 가노는 드디어 왕환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런데 자칭 왕환이란 사람은 “위인이 매우 어리석고 얼굴도 닮지 않았으며, 말도 많이 잊어버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과 성이며 마을도 알지 못하였다.” 이숭인의 아우 이숭문(李崇文)은 왕환의 사위였다. 이숭인이 자칭 왕환을 보니 나이에 비해 너무 젊었다. 그래서 진위를 알아보려고 “생년(生年)을 감안하면 지금 늙었을 텐데 모습이 쇠하지 않았으니, 어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강남의 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늙음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였다.([도은집] 권3) 그러나 왕환의 친인척과 하륜 등도 “우리들이 왕환을 매우 잘 아는데, 이 사람은 실제 왕환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왕환의 아내 신씨는 “남들이 아는 것이 어찌 아내가 아는 것과 같겠는가?”라며 왕환임을 주장했다. 왕환의 형인 승려 참수(旵髓), 두 아들도 “진짜 영흥군”이라고 했다. 이숭문도 처음에는 부인했다가 뒤에 장인이 맞다고 번복했다.

사헌부는 이숭인 등을 왕족에 대한 무고죄로 고발했다. 이숭인이 도망치자, 사헌부는 이숭인의 아들 이차약을 체포했다. “이숭인이 도망쳤으므로 옥졸은 이숭인의 아들 이차약의 두 손을 뒤로 결박하고 이숭인을 찾아내라고 채찍으로 등을 때리니, 피가 흘렀다.” 악의 없는 오류에 대해, 더욱이 당사자도 아닌 대신의 아들을 이처럼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비서감(秘書監) 박돈지(朴敦之)도 이숭인과 함께 유배됐다. 죄목은 과거 장모와 간음했고, 이색의 명나라 사행시 함께 따라가 상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이숭인과 평소 사이가 좋은 게 탈이었다.

이차약이 잡혀가다가 도중에 이성계를 만났다. 이차약이 큰 소리로 “영공께서는 나를 살려 주시오”라고 부르짖었다. 깜짝 놀란 이성계는 자초지종을 묻고, 옥졸에게 “어찌 아들을 욕보여 아비를 찾으려 하느냐?”고 꾸짖고는 석방토록 했다. 그리고 종자 한 명을 붙여서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다시 체포될까 우려한 것이다. 궁궐에 들어간 이성계는 시중 이림(李琳)과 함께 창왕에게, “즉위 초기에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야 하니 박천상 등을 용서하소서. 또한 이숭인은 서연(書筵)에서 시강을 맡아 오랫동안 임금을 계발했으니 그 직무를 맡도록 명하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이를 보면, 이숭인을 탄핵하고 처벌하려는 사헌부의 행동이 이성계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숭인을 방면시키고 이림과 함께 그의 사면을 요청한 것으로 봐서 이성계는 연립정권을 유지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정몽주의 연정, 급진파의 반발


▎이성계는 역전의 용사였지만 정몽주 암살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 어긴 아들 이방원을 이성계는 용서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이를 기억하는 살곶이벌 축제가 서울 성동구에서 열린다.
이숭인은 간신히 처벌을 면했다. 하지만 사헌부가 다시 탄핵했다. 간관은 구성우, 오사충, 남재 등이다. 당시 사헌부 장관은 조준이었다. 조준은 이숭인을 미워했다. 조선건국 뒤 이숭인이 장살당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에 따르면, “처음에 정도전과 친구로 삼아 종유(從遊)한 지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정도전이 후일에 조준에게 친밀히 하게 되어, 조준이 이숭인을 미워함을 알고서는 도리어 몰래 험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23일) 당시 이성계파 언론의 선봉장이던 윤소종도 “이숭인의 뛰어난 재주를 질투하고, 또 이색이 이숭인을 칭찬하면서 자기를 칭찬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갖은 방법으로 참소하고 헐뜯었다”고 한다. 이숭인은 윤소종의 국자시 동년이고, 모두 이색의 가르침을 받은 동문이었다. 그런데 윤소종은 소시부터 조준과 절친한 벗이었다. 어쨌든 이숭인은 이성계파의 주요 인물들에게 두루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조준은 이런 소문이 거짓이라고 부인했다. 조선건국 2년 뒤인 1393년, 당시 시중이었던 조준은 춘추관에서 고려의 사초를 보았다. 그런데 고려의 사관이었던 이행이 “윤소종이 이숭인의 재주를 꺼려서, 조준에게 알려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고 쓴 기사를 봤다. 조준은 해를 가리키면서 “윤소종의 말을 듣고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는 것은 하늘의 해가 증명하고 있다”고 맹세했다.([태조실록] 2년 1월 12일) 반이성계파의 인물들은 이처럼 이숭인의 불운 뒤에 조준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숭인에 대한 공격에는 확실히 개인적 호오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정몽주의 연정 구상에 대한 급진파의 반발로 볼 수 있다. 이성계는 급진파와 온건파를 오갔다. 때로는 정몽주의 손을 들어주고, 때로는 조준·정도전의 편을 들었다. 1392년 조선건국 직전에도 정몽주 쪽에 섰는데, 그때 조준과 정도전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정몽주가 이들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자는 이방원을 강하게 제지했다. 이때 이방원이 이성계의 뜻을 무시하고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면, 조준과 정도전은 조선건국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화살과 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였다. 하지만 500년이나 된 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결행하자는 급진파의 간청을 선뜻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회군 이후 조선건국에 이르는 5년간, 이성계는 오락가락했다. 급진파는 이런 이성계의 태도가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1389년 9월의 연립정권 구상은 이성계가 정몽주 쪽으로 쏠린 명백한 징후였다. 명나라가 ‘불신의 역모’라는 입장을 밝혔으니 이성계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급진파의 위기감도 급격히 고조됐을 것이다.

문풍(文風)에 대한 경세(經世)의 반감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였던 소수서원. 1542년 주세붕이 지었다. 500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파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장착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런 위기감이 이숭인의 탄핵 상소에 깊이 배어 있다. 탄핵 사유는 첫째, 이숭인의 불효다. “부모상을 당한 후 3년이 경과하지 않고는 과거를 주관할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제도”이다. 그런데 산기상시(散騎常侍) 재임 중 모친상을 당했는데도 감시(監試)의 시관이 됐다. 3년상도 치르지 않았는데 문관의 조복(朝服)을 입고는 과거를 주관할 수 없자, 일부러 관직을 낮춰 상호군이 되어 과거를 주관했다. 이숭인은 우왕 8년(1382) 4월, 국자감시를 주관한 바 있었다. 그는 또한 “모친이 사망한지 겨우 백일을 넘기고는 육식을 예사로 했다.” 이것은 인륜을 훼손한 것으로 탄핵감이다. 산기상시는 중서문하성의 정3품 문반직으로서 재상 아래로는 최고위직이다. 왕에 대한 간쟁과 봉박, 왕명과 문서 출납, 법제 제정과 관리임명에 대한 서경권(署經權, 서명권)을 가졌으며 과거의 시험관이 될 수 있었다. 대략 조선시대의 사간원과 승정원의 역할을 함께 한 것이다. 상호군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정3품 무반직이다. 품계가 같아도 무관은 문관보다 낮게 평가된다.

둘째, 이숭인은 사악한 자다. “성품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며, 언행이 사악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다. 또한 무능한 자다. “나라를 경영할 재주가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글재주로 출세해 명예를 도둑질하면서 오랫동안 요직을 차지했다.” 그는 이인임 집권기에 그 일당이 됐다. 또한 우왕 8년(1382) 8월 한양천도를 전후해 이인임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임견미가 집권하자 그의 심복이 돼 불법을 자행했다.

셋째, 이숭인은 외교적 임무를 망각하고 사익을 추구했다. 이색과 명나라 사행 시 “장사치처럼 몸소 물건을 사고팔아” 국격을 손상시켰다. 그가 “비록 일곱 걸음 만에 시 한수를 짓고 입으로는 요순의 말을 읊어댈지라도 행실은 개나 돼지만도 못했으니 참으로 이른바 소인배 유생”이다. 이런 자를 시독(侍讀)으로 삼아 왕의 사부가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 영흥군 문제로 종친을 모함해 부자·형제·부부의 윤리를 무너뜨렸다.

탄핵 내용을 보면, 본말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탄핵 사유는 본래 영흥군 문제인데, 정작 맨 마지막에 단 한 줄뿐이다. 영흥군 문제는 단지 공격의 빌미가 됐을 뿐이다. 다음으로, 모친상 중 과거를 주관한 것 외에는 구체적인 범법행위가 없다. 탄핵이 공격을 위한 공격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숭인에 대한 이성계파의 반감을 알 수 있다. 위선자이자 과대평가된 인물로서, 글재주는 조금 있지만 경세의 역량은 빈약하다는 것이다. 조준, 정도전, 윤소종 등 이성계파 인물들은 경국제세의 기풍이 강했다. 회군 후 조준의 방대한 국정 개혁안, 그리고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펼쳐진 경륜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게 아니다. 평생 정진을 거듭해 왔을 것이다. 그런 인사들의 눈으로 보면, 이숭인 등 이색파는 경륜보다 문풍이 과도하다고 느꼈음직하다. 그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낸 것이다.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함의

사헌부의 탄핵에 대해 창왕은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게 했다. 사헌부는 그날 밤 즉시 대졸(臺卒)을 시켜 이숭인의 집을 지키게 하고 담장을 뚫고 달아나는 이숭인을 체포했다. 담장을 뚫고 달아나는 행위는 재상급 관인에 어울리는 처신이 아니다. 더욱이 명분과 체통을 중시하는 사대부의 금도를 벗어난 것이다. 이숭인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결국 경산부(星州)로 유배됐다. 남쪽으로 유배를 떠나며 정몽주에게 시 한 수를 보냈다,

연래에 한층 눈이 내린 귀밑머리
질병이 또 침노하니 못 견디겠군
누구 집이 강남의 약을 알아서 비축했을까
늙음을 물리치는 영흥(永興)을 배워야 하겠는데
([도은집] ‘南行呈圃隱’)


자칭 영흥군이란 자의 거짓을 풍자한 시다. 이숭인은 그가 가짜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자, 이성계파의 중심인물인 정몽주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를 보낸 것이다. 정몽주는 정도전, 윤소종과는 달리 이색 그룹과도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연립정권도 그런 상호 신뢰 위에서 성립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권근이 이숭인을 구원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다. 이성계파와 이색파의 싸움이 서서히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위화도회군 후 두 정파의 공공연한 권력투쟁은 없었다. 회군 직후 6월에 가장 먼저 우왕과 최영이 제거됐다. 다음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회군파 내부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조민수파가 창왕을 즉위시킴으로써 이성계파에 승리했다. 그는 이색의 지지를 받았다. 회군 직후 이성계도 군막에서 이색을 만났지만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색이 공개적으로 이성계파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1388년 7월, 조준이 과격한 전제개혁 상소를 올리면서 두 정파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먼저 조민수파가 이성계파에 맞서 이인임의 복권을 기도했다. 하지만 조민수는 곧 축출됐다. 공식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격렬한 싸움이 있었을 것이다.

전면적이고 철저한 사전개혁이 추진되면서 정치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됐다. 이색은 개혁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제한적이고 온건한 개혁을 지지했다. 사전(私田) 개혁을 둘러싸고 고려 정계는 양분됐다. 이색은 반이성계파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정파의 갈등은 조심스럽게 관리됐고, 정몽주에 의해 결정적 대립은 회피됐다. 이성계도 대중국관계의 불안 때문에 과감한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 중국이 회군 이후의 정치적 사태를 ‘불신의 역모’로 규정짓자, 연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이성계파 내 급진파는 이 상황을 용인할 수 없었다. 이숭인에 대한 탄핵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첫 공세였다. 이색파에서 권근이 맞대응에 나선 것을 보면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본 것이다. 권근은 당대 최고의 명문세족이자 걸출한 문인이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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