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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32)] ‘파리장서 사건(1919년 파리 만국평화회의 조선 독립 호소)’의 대표 유천(柳川) 이만규 

동방의 백이숙제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3대 문과 급제 가문의 기득권 던지고 순절한 형(향산 이만도) 따라 독립운동…나라가 망할 때 선비의 처신을 온몸으로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1. 유천의 주손인 이동후 옹이 퇴계 산소 아래에 있는 수졸당을 찾았다. 수졸당은 퇴계의 손자 이영도와 증손자 이기의 종택이다. / 2. 청량산 자락에 자리한 유천의 묘소. / 3. 향산이 자정 순국한 자리에 세워진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
1910년 9월. 승정원 동부승지를 사임하고 고향 안동에 은거하던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은 일주일이 지나서야 경술국치 비보를 듣는다. 69세 때다. 지기 유필영 등이 찾아와 나라가 망했다는 변고를 전한 것이다. 향산은 퇴계 이황의 11대손으로 2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공조참의 등을 거친 관료였다. 낙향해선 후학을 가르치고 명성황후 피살 뒤엔 예안 의진(義陣)의 의병장이 됐다.

향산은 국권 피탈에 자진(自盡)을 결심한다. 단식을 통한 죽음이다. 나라가 망해도 일제의 백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나라 잃은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며 속죄를 마음먹은 것이다.

향산은 날마다 조상 묘소를 찾아 통곡했다. 열흘 뒤 단식을 시작한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켜본 향산은 죽음도 자택에서 편안히 맞을 수 없었다. 객사(客死)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산을 향해 집을 나섰다.

도중에 청구 언덕 이강호의 집을 들른다. 향산의 비장함을 알아챈 종손자 이강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궁벽하지만 여기 머무시라”라고 권한다. 이강호는 때가 돼 밥상을 올렸다. 마음을 정한다. 그곳에서 식음을 전폐했다. 이때부터 이강호는 향산이 순국할 때까지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다. [청구일기(靑邱日記)]다.

기별을 듣고 가족이 달려왔다. 아우 유천(柳川) 이만규(李晩煃, 1845∼1920)와 아들 이중업이다. 세 살 아래 아우는 형의 손을 부여잡고 목이 멘다. “형님께서 평소 동생 사랑하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셨고 저 또한 아버지처럼 형님을 섬겼습니다…. 나라 위한 대의에는 형제가 일반이니 저도 마땅히 형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향산이 그 말을 듣고 간곡히 만류한다. “자네는 아직 후사를 세우지 못해 조상 제사를 부탁할 사람이 없네. 임금과 부모 섬기는 도리가 비록 한 가지라지만 어찌 하고 싶다고 곧바로 행하는 것이 옳겠는가. 참으로 한 몸 바치기로 하면 어찌 뒤에는 날이 없겠는가. 내 죽은 뒤 집안을 일으키는 게 자네 할 일일세.”

청구 언덕에서 형의 순절을 지켜보다


유천이 눈물을 머금는다.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찌 제 생각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겠습니까.” 그러면서 향산은 후일 쓰일 때가 있을 것이라며 유천에게 작은 칼 하나를 건넨다.

소문이 나면서 선비, 친척의 발길이 이어졌다. 향산은 유천에게 속마음을 편지로 털어놓는다. “…날마다 산에 올라 통곡할 뿐이지만 아직도 자진을 용기 있게 결단할 수 없으니 이러한 때 골육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단식 23일째. 향산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아우의 손을 잡고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시 24일째. 향산은 유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운명한다. 형제는 이렇게 각별했다.

향산이 순국하자 맞은편 물산마을 부녀자는 “어른이 나라 위해 굶었는데 우리는 하루 불을 피우지 말자”며 애도했고 선비들의 만사·제문은 900여 편이 답지했다. 향산의 순국은 그만큼 반향이 컸다.

이제 향산의 마지막 당부를 들은 아우 유천이 간 길을 돌아본다. 후세의 한 평가는 향산과 유천을 ‘동방의 백이숙제(伯夷叔齊)’로 표현했지만, 정작 유천의 행적은 그리 알려지지 않아서다.

지난 9월 20일 형제가 마지막 만남을 한 청구 언덕을 찾았다. 행정구역으로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다. 향산의 본가가 있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에서 선영이 있는 봉화군 재산면으로 가는 중간이다. 왕복 2차선 도로 옆에 작은 비각이 보였다. 비석 앞면에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라 쓰여 있고 그 옆에 ‘안동 김구 근서’라 새겨져 있다. 반듯한 해서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이 썼다. 뒷면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현장을 안내한 유천의 현손인 이동후(84) 옹은 “유허비 뒤쪽에 당시 향산이 순절하신 집이 있었다”며 숲이 무성한 왼쪽 언덕을 가리켰다. 일대가 청구다. 유허비 하나가 겨우 들어선 공간에는 ‘향산공원’이란 바윗돌이 서 있다. 향산이 식음을 전폐하는 동안 유천은 노심초사하며 이곳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우국지사의 기개가 서린 공간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그 형에 그 아우였다. 유천은 1905년 일본의 협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형이 산으로 들어간 것처럼 향리에서 문을 닫고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의 변고가 나자 유천은 울분에 쌓여 시 한 수를 지어 맹세한다.

“붉은 해가 애산에 지자/ 송나라 신하(육수부)는 머물 곳이 없었네/ 하늘에 무슨 까닭이냐고 묻지만/ 아득히 끝내 말이 없어라/ 저문 가을하늘 날아가는 기러기 따라/ 높이 은하수로 날아가리.”

유천 관련 기록은 권상익이 쓴 행장(行狀)과 독립지사 송상도의 [기려수필(騎驢隨筆)] 등에 전한다. [기려수필]은 명나라가 망한 뒤 이름을 숨긴 채 나귀를 타고 순절지사의 행적을 기록한 기려도사(騎驢道士)의 뜻을 본받았다. 송상도 지사는 1910년부터 30여 년간 안중근·윤봉길·김좌진 등 애국지사 220여 명의 행적을 채록했다. 향산과 유천의 이야기 두 편도 [기려수필]에 실려 있다.

은사금 수령 강압에 칼로 목을 자해한 의기


▎1. 향산 묘소의 옛 비석. 아우 유천이 비문을 지었다고 새겨져 있다. / 2.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紀蹟)비’. 조동걸 박사가 글을 짓고 2004년 세워졌다.
1911년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벼슬한 관료를 우대한다는 명목으로 일왕의 은사금(恩賜金)을 전하려 했다. 학자 관료 출신 유천은 “나는 대한제국의 신하이므로 이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글을 써서 보여 주었다. 일본은 유천 가문의 절의(節義)를 아는 까닭에 돈을 두 배로 늘려 병력을 대동해 협박했다. 유천은 일본인을 몹시 꾸짖었으나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분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침내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피가 땅에 흥건했다. 일본인들이 깜짝 놀라 겁을 집어먹고 그냥 가버렸다. 동행한 이동후 옹은 [기려수필]에 나오지 않는 당시 상황을 덧붙였다. 그가 어렸을 적 현장을 목격한 조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일본 주재소 순사는 유천에게 은사금을 줄 테니 주재소로 가자고 했다. 그는 거절한다. 그러자 순사들이 몰려와 억지로 들쳐 업으려 하자 유천은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칼은 향산이 단식할 때 “언젠가 쓰일 때가 있을 것”이라며 아우에게 건넨 바로 그 칼이었다. 유천은 조카를 시켜 그 칼을 갈아 두었다가 자신의 목을 찌르는데 쓴 것이다.

1918년 고종이 승하한다. 유천은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곡기를 끊는다. 그때 어떤 사람이 폐위된 임금의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유천은 “우리 임금이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어찌 의심한단 말이냐”며 상복을 입고 병든 몸으로 장례에 참여했다. 당시 그는 70대 고령에 목을 다친 것이 회복되지 않아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다.

그 무렵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탄한 뒤 열강이 이의를 제기할까 염려해 우리 스스로 합방을 원했다고 선포했다. 동시에 우리가 외국과 교섭하는 것을 금지시켜 세계에 실상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예정됐다. 기회였다. 김창숙·이중업 등 유림은 장문을 써서 사정을 폭로하기로 했다. 이른바 ‘파리장서 사건’이다. 일이 엄중해 유림의 어른이 나서지 않으면 추진이 어려웠다. 김창숙은 의정참찬을 지낸 거창의 곽종석을 찾아 먼저 뜻을 전했다. 이어 안동 도산으로 달려가 유천을 만난다.

“유천 선생,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을 해야겠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유천은 바로 승낙했다. 그러자 김창숙은 청원서 초안을 꺼내 수정을 부탁한다. “그만하면 됐소. 그러나 자력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애걸하는 것이 되겠소.” 유천은 자력을 강조했다.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옛날 춘추 때와 같이 열국이 모여 약한 자를 돕는다니 관계없을 줄로 압니다.” “그렇다면 제출해도 좋소. 우리가 자력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웃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부끄럽긴 하나 상황이 절박하니 죽음인들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이어 유천은 곽종석과 함께 그 첫 머리에 이름을 적었다. 유천이 파리장서의 대표가 된 것이다.

장서가 파리에 도착하자 일본에 비상이 걸렸다. 유천은 장서에 서명한 사람들과 함께 일본에 체포됐다. 그는 성산감옥에 갇혔지만 심문 과정에서 대답하는 말과 태도가 당당했다.

형 이어 과거시험 문과에 2등으로 급제


▎1. 아버지 복재가 아들 유천을 위해 직접 써서 편집한 맹자, 논어, 중용 등 서적. / 2. 향산과 아들 이중업 부부, 손자 이동흠 등 3대 독립지사가 함께 있는 가족 묘역.
향산의 청구 유허비를 지나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 유천의 묘소를 찾았다. 25㎞ 험준한 산길이다. 묘소 아래 마을에 이르러 4륜구동으로 갈아탄 뒤 조심스레 비탈길을 오르자 산마루에 유택(幽宅)이 있었다. 청량산 자락이다. 이동후 주손이 준비한 술과 포, 과일로 먼저 예를 표했다. 비석에는 ‘독립지사 통훈대부홍문관부교리진성이공지묘’라 새겨져 있다.

이 옹이 소회를 밝혔다. 역설적이다. “저는 어른들이 원망스러워요. 하필이면 독립운동을 하셔서 자손들이 이리 어렵게 살도록 만드셨는지… 그저 편하게 친일하셨으면 지금쯤 떼부자가 됐을 텐데… 형편이 어려우니 후손 대부분이 학비 덜 드는 사범학교 나와 교단으로 나간 것 아닙니까.”

유천의 묘소에서 30m쯤에 향산의 유택이 있었다. 유천은 생전에 “내가 죽으면 형님 발밑에 묻어 달라”고 했다. 아우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형과 함께 국권 회복을 꿈꾼 것이다.

묘소를 둘러본 뒤 일행은 유천의 고향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을 찾았다. 입구 산 중턱에 퇴계 선생의 묘소가 있어 ‘퇴계가 굽어본다’는 동네다. 퇴계 후손이 모여 살던 하계마을은 1970년대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이 돼 지금은 지대가 높은 곳에 집 몇 채가 겨우 남아 있다. 며칠 내린 가을비에 댐 상류는 만수위로 동네 아래까지 물이 들어 저지대를 하얗게 덮었다.

이동후 옹이 고조를 기억하기 위해 보존한 정자 유천헌(柳川軒)에서 교지(敎旨)와 생전에 공부하던 서책을 보여주었다. 유천이 과거시험 문과에 2등으로 급제했음을 알리는 홍패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아버지가 아들 유천을 위해 손수 집필한 경서(經書) 등이다.

유천은 퇴계의 11대손이다. 어려서부터 글 이해가 빨랐다고 한다. 일화 하나. 아버지에게 글을 배운 10세 무렵이다. 소년 이만규는 한번은 이틀 동안 배운 걸 전혀 외우지 못했다. 까닭을 물었지만 꾸중이 두려워 그냥 앉아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나섰다. “요즘 통 잠도 자지 않고 무슨 책을 골똘히 읽더라”고 했다. 알고 보니 종가에서 [삼국지(三國志)]를 빌려온 것이다. 아버지가 며칠이면 다 읽겠느냐고 묻자 이틀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글 읽기를 중단시키고 [삼국지]를 읽게 했다. 소년은 [삼국지] 한문 원본을 4일 만에 모두 읽었다.

유천은 효성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일찍이 어머니 일손을 더느라 부엌 심부름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양자가 된 뒤엔 양모의 성품이 별났지만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부인을 잃고 두어 달 뒤 다시 외아들을 잃는 창자를 도려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고도 유천은 양모 앞에 조금도 슬픈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유천(柳川)이란 호는 형 향산이 지었다. 유천은 38세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쳐 11년 뒤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됐다. 그해 일본 군대가 대궐을 침범한다. 그는 경연에서 강론하는 신하로서 한탄했다. 이듬해(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유천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문을 닫아건 채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2년 뒤 예안군수로 다시 발령이 났다. 전국에서 일본에 복수를 다짐하며 의병이 일어나던 시기다. 일본은 잔꾀로 민심을 진정시키려고 신망을 얻는 유천을 임명한 것이다. 그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향산집(響山集)]에는 ‘아우 교리 만규를 대신하여 지은 예안군수를 사직하는 소’가 실려 있다. 70세 노모의 봉양이 이유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산으로 들어간 형에 이어 칩거했다.

나라 망해 가자 홍문관 벼슬 버리고 낙향


▎1. 유천이 대과인 문과에 2위로 급제했음을 적은 교지. 홍패로 불린다. / 2. 유천이 소과에 3등으로 급제했음을 알리는 교지. 백패로 불린다.
송상도는 [기려수필]에서 유천 이만규 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아아, 공(유천)이 타고난 운명은 대단히 불행했지만 부모에 대한 효성과 임금에 대한 의리를 모두 온전하게 실천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늠름하게 의리를 지켰고 집안을 화목하게 했다. 고금의 인물 가운데 찾아본들 선생과 같은 분이 또 있겠는가… 공의 형제는 백이·숙제와 나란히 전해진다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백이와 숙제는 신하인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는 것을 보고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수양산으로 들어간 충신이다. 형제는 고사리를 캐먹으며 지내다 굶어죽는다. 사마천이 [사기]에 이들을 소개하면서 백이숙제는 형제 충신의 대명사가 됐다. 송상도는 아우 유천의 나라 위한 충심도 형 향산에 못지않다고 기렸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유천은 3대에 걸친 문과 급제 가문 출신이다. 이런 기득권을 던지고 이 집안은 이후 독립운동이란 가시밭길을 꿋꿋이 걸어간다. 형 향산은 나라가 망하자 목숨을 던져 나라와 민족을 덜 부끄럽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다.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 박민영 박사는 “향산은 치욕의 역사 앞에서 무한책임을 자임했다”고 말했다. 아우 유천은 형을 따라 절개로 독립운동을 잇고 화목으로 가문을 이끌었다. 금 같은 형에 옥 같은 아우였다. 형제는 나라가 망할 때 선비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는 이렇게 엄중했다.

[박스기사] 3대 문과 급제에 3대 독립유공 가문 - 봉화군 재산면 바디실은 독립지사 5위의 안식처

퇴계 이황의 후손인 유천 이만규 가문은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했다. 할아버지 이가순은 1811년(순조 11)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이어 아버지 이휘준은 1856년(철종 7)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 명망 있는 선비였다. 아들 대에 이르러 둘째 향산 이만도가 다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어 셋째 유천 이만규가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이런 가문이 망국이란 비상한 시기를 맞아 독립운동 명가로 거듭난다. 향산이 을미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끝내 단식으로 순절했으며, 아우 유천은 파리장서 사건으로 성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형제가 문과 급제에 이어 독립지사로 함께 서훈을 받았다. 3대 문과 집안의 특권을 내려놓고 지도층으로 고난의 길을 자임한 것이다.

향산의 기개는 다시 그 자손들로 이어졌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 둘이 다시 독립유공자가 됐다. 가까운 집안에도 영향을 미쳐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 벼슬을 지낸 3종질 이중언도 순절을 선택했다.

향산의 아들 이중업은 안동 일대 의병을 모으는 ‘당교격문(唐橋檄文)’이란 명문을 남겼으며 김창숙과 함께 파리장서를 추진하는 중심에 섰다. 이중업의 부인 김락 여사 또한 일경의 모진 고문을 받고 실명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돼 그 이야기를 주제로 한 뮤지컬까지 만들어졌다. 이중업의 두 아들인 이동흠과 이종흠은 김창숙을 주축으로 한 독립자금 모금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에 연루돼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르고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렇게 한 집이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이다. 3대 문과에 3대 독립운동 가문이다.

유천이 잠든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 바디실에는 향산과 독립지사 자손들이 차례로 묻혀 있다. 맨 위는 향산의 양부(이휘철), 아래에 향산, 그 아래에 이중업과 김락 여사, 다시 아래에 이동흠 지사가 잠들어 있다.

독립지사 5인이 한 곳에 있는 묘역이다. 국립묘지를 제외하고 독립지사가 가장 많은 사설 공간일 것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현황을 파악한 뒤 앞으로 묘역 관리 등 국립묘지에 준한 예우 방법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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