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김해완의 쿠바탐험 | 부에나 비스타, 아바나(11)] 생태도시 아바나의 이면 

빈곤이 만들어낸 재활용 천국 

김해완 작가
경제 봉쇄 이후 일상화한 자원 부족을 재활용으로 극복…실용성과 창의력 발휘해 ‘지속가능한 환경’은 세계 최고 수준

▎말레꼰에서 과일 주스를 파는 남자가 수레를 끌고 간다.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저 주스병들은 모두 재활용 된 페트병이다.
중학교 시절, 하루는 학교에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틀어 주었다. 그 당시 우리 학년에서는 진로 탐색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구의 생태계가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다면 내가 작가가 되든 청소부가 되든 이게 다 무슨 상관인가! 당장 모든 인류가 물을 아껴 쓰고, 에어컨 대신 부채를 쓰고, 퐁퐁과 세제 사용을 금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구에 대한 이러한 거시적인 염려를 나는 진로 탐색 보고서에 적었다. ‘내게 진로를 묻지 마라, 내가 어른이 됐을 때 이 지구가 건사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그리고 엉터리 보고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이 문제를 까맣게 잊어 버렸다.

경제봉쇄가 빚어낸 ‘지구 사랑’


▎1. 작은 의자 두 개와 평평한 돌로 만들어진 벤치. 아침이면 이 벤치를 만든 집주인과 그 이웃들이 여기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 2. 아바나의 길거리와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탱크. 물이 귀한 쿠바에서는 물이 들어오면 일단 탱크부터 채워야 한다. 물 절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다. 녹아 내리는 빙하를 피해 달아나는 북극곰과 콜라캔에 주둥이가 끼여 괴로워하는 돌고래 사진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다가도, 열대야의 밤에는 에어컨을 최고로 틀어 놓아도 소용없다고 불평한다. 지구를 염려하는 마음은 대개 5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지구 온난화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즐기고, 일회용품을 쓰더라도 내 한 몸 편하고 싶은 게 인간의 못난 마음이다.

따라서, 지구를 사랑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자기반성을 하는 게 아니다. 에어컨이든 일화용품이든, 이런 종류의 물건이 ‘원천 봉쇄’ 되어서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사는 거다. 물론 지금 내가 어느 장소를 말하고 있는지 독자들은 다 눈치 채셨으리라. 아바나다. 에콜로지(ecology·생태학)에 대해 숙고하기는커녕 친환경 제품을 사러 갈 시간도 없이 숨가쁜 도시 생활을 해오던 어느 날, 나는 이 이상한 도시에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지구 공동체에 커다란 기여를 하며 살고 있다. 순전히 강제로 말이다. No 에어컨, No 세탁기, No 자동차.

하지만 나라고 처음부터 이런 ‘개념 있는’ 생활을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여느 외국인들처럼 호화스러운 카사(casa: 집을 뜻하는 스페인어. 쿠바에서는 민박집도 의미한다)에서 쿠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쿠바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입장에서 가격이 부담스러웠고, 결국 나는 쿠바인들이 살았던 허름한 아파트를 구했다. 그러자 생활조건이 확 달라졌다. 에어컨이 없다. 세탁기도 없다. 전기를 많이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조건이다. 또, 물은 마을 전체에 이틀에 한 번씩, 그것도 12시간만 들어온다. 이때 물탱크를 채워서 나머지 36시간을 버텨야 한다. 물탱크의 위치가 샤워기 위치보다 더 낮아서 수압이 약하기 때문에, 샤워기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 물 절약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생활에 꼭 필요한 사소한 것들이 없다. 변기 커버, 휴지 걸이, 냉장고 안의 계란 보관함, 식기 건조대….

객관성을 위해 덧붙이자면, 내가 특별히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게 아니다. 이런 풍경은 아바나에서 정말로 흔하다. 쿠바에서 가장 대도시인데도 그렇다. 정부의 공공기관 화장실에 가도 변기 커버는 없다. 아바나의 다운타운을 제외하면 어느 동네나 물이 이틀에 한 번씩 들어온다. 자동차가 없는 것이야 불평할 축에도 못 낀다. 아바나에서 떼돈을 버는 택시기사들이 여전히 1950년대 미국산 자동차를 고쳐 쓰는 처지다. 이런 기준에서 생각한다면 내 생활 조건은 그리 나쁘지 않다. 최소한 내 물탱크는 부엌 및 화장실 파이프와 연결돼 있어서, 나의 이웃들처럼 물을 양동이로 일일이 퍼나르지 않아도 된다. 지구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나의 이웃이 훨씬 더 큰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재활용의 신, 아바네로


▎오른쪽에는 계단 대신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가 있고, 그 위에는 일층에 있는 이웃과 물건을 주고받을 때 활용하는 도르레가 있다. 왼쪽에는 집주인이 드럼통에 키우는 나무들이 있다. 대부분 폐품을 가져다 재활용한 것들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의 지인들은 혀를 찬다. “도대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야?”그러나 나이 든 세대의 반응은 좀 다르다. 과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의 옛 풍경을 떠올린다. 세탁기의 보급 덕분에 손빨래가 드물어진 것, 학교 강의실마다 에어컨과 히터가 설치된 것, 물과 전기와 가스가 끊기지 않는 것이 당연해진 것, 이 모든 것이 한국 땅에서 가능해진 것은 사실 한 세대밖에 되지 않았다. 새까맣게 잊어버리긴 했지만, 한국인들도 쿠바 못지않은 상황에서 이를 삶의 당연한 조건으로 여기며 살았었다.

쿠바인들도 없으면 없는 대로 생활을 꾸려 나간다. 경제 봉쇄라는 닫힌 생태계에서 현명하게 살아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재활용이다. 이때 재활용이란 분리수거를 의미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철은 철대로 모아놓는 것은 재활용 축에도 끼지 못한다. 쿠바의 재활용은 재-활용, 즉 ‘물건의 용도를 바꿔서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스틱 물통이 숟가락도 되고 계란보관함도 되는 것, 철사가 휴지걸이도 되고 벽걸이도 되는 것. 이 정도는 돼야 ‘재활용’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바네로들은 재활용의 신이다. 아바네로들은 지방에 사는 쿠바인들보다 재활용 사업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아바나는 쿠바 인구의 30%가 몰린 대도시이자 외국에서 당도하는 물자가 집중된 장소다. 그만큼 버려지는 물건도, 유입되는 물건도 많다. 또, 인구 밀도가 높기 때문에 그만큼 사람들의 욕구도 강하다. 적당한 물자로 쾌적한 주거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지방과는 달리, 아바나는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외부인들과 관광객들을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아바나의 영원한 숙제다. 한마디로 아바나는 재활용 공급과 재활용 수요가 모두 높은 풍요로운(?) 환경인 셈이다.

아바네로들의 창의력을 가늠할 수 있는 예시를 몇 가지 살펴보자. 첫 번째는 일회용 식기다. 쿠바에서는 일회용 식기를 구매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데, 학교 식당이나 구내식당처럼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 식당에서는 식기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바네로들은 수중에 식기가 없을 때 밥을 먹는 노하우를 다들 가지고 있다. 플라스틱 학생증이나 비스킷을 숟가락 대신 활용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음은 내가 직접 목격한 상황이다. 아바나 대학 학생들이 도심에서 50㎞ 떨어진 캠핑 장소로 MT를 떠난다. 그런데 아뿔싸, 그곳에 도착해서야 캠핑 식당에서 숟가락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쿠바 청년들은 1.5리터짜리 빈 플라스틱 물병을 몇 개 주워온다. 그리고 맥가이버 칼을 꺼내어 물병의 옆면을 다양한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자르기 시작한다. 원통 모양의 플라스틱이 이제는 약간 구부러진 판으로 변한다. 그리고 큰 판에는 음식을 담고, 작은 판으로 음식을 떠먹기 시작한다. 내친김에 물통의 위와 아랫부분은 컵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일회용 식기 세트가 생긴 것이다.

또 다른 예는 자동차다. 쿠바인들은 1950년대에 수입된 자동차 엔진을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쳐서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 차내 인테리어도 마찬가지다. 이 재활용 과정에는 운전사의 취향이 한껏 반영된다. 깔끔한 운전사는 버려진 소파에서 가죽을 떼어다가 구멍 난 차 시트에 덧댄다. 그것도 모자라서 비닐을 구해다가 씌워놓는다. 또, 음악 없이는 운전할 수 없는 흥 많은 기사는 어디선가 스피커를 구해서 차체에 연결한다. 누구는 대형 오디오 스피커로 고막이 터져라 음악을 틀고, 누구는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운전석 옆에 장착한 후 조신하게 음악을 듣는다. 이처럼 쿠바에서 가장 많은 택시가 모여 있는 아바나는 다종다양한 재활용 택시를 구경하기에 좋은 장소다.

세 번째는 집이다. 집은 아바네로들의 재활용 기술이 최종적으로 집중되는 곳이다. 이들은 일단 공간을 100% 재활용한다. 이전 연재글에서 언급한 바이지만, 높은 천장을 반으로 잘라서 한 층을 더 올리거나 베란다를 방으로 바꾸는 것은 흔한 기술이다. 이층집인데 계단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다리를 부착해 집을 드나들기도 한다. 이렇게 공간을 정돈하면 내부를 채운다.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여분의 가구를 얻어오고, 버려진 전자기기를 새로 고쳐서 사용한다. 또, 오래된 벽에는 강렬한 색깔의 페인트를 칠한다. 페인트를 구할 수 없을 때는 커튼 천을 붙여서 못생긴 부분을 가린다. 아바네로들은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한데, 이는 자기 손으로 몇 년에 걸쳐서 이 공간을 고쳐 왔기 때문일 것이다.

생태 도시인가, 쓰레기 도시인가


▎아바네로의 창의력을 본받아 필자가 직접 만든 달걀 보관함. 만드는 것은 쉽다. 단지 발상을 전환하는 것이 어려울 따름이다.
이런 소박한 풍경은 지구 공동체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아바나의 별칭 중 하나는 ‘생태 도시’다. 이 별칭은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이 연재에서도 여러 번 소개한 적 있는 일본 리포터 요시다 타로는 [생태 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녘, 안철환 옮김, 2004)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의 주장은 지구 생태계는 경제 봉쇄를 당한 쿠바보다도 더 닫힌 순환 구조이므로, 우리는 현재 쿠바 정부가 펼치고 있는 친환경 정책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책에서 소개되는 친환경 정책은 아바나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실행력이 떨어진다. 음식물 쓰레기를 건조시켜서 토끼를 사육하고 그 토끼를 식량으로 활용한다는 정책만 봐도, 토끼장을 만들 공간이 있는 사람만 이를 실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쿠바가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공동체라는 그의 주장은 분명 옳다. 수치와 통계가 이를 튼튼하게 뒷받침한다. 유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지속가능한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과 인간적으로 살기 좋은 환경을 뜻하는 높은 HDI(Human Development Index: 인적 발전 지수)를 모두 만족시키는 나라는 여덟 개밖에 되지 않는다. 쿠바는 이 여덟 나라에 속할 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HDI를 달성한 나라다.(참고로 HDI에 반영되는 항목은 기대 수명, 교육 수준, 국민 소득이다) 내가 보기에 이 수치를 달성한 주인공은 쿠바 정부가 아니다. 거리 곳곳마다, 또 집집마다 재활용 기술을 뽐내고 있는 쿠바인들이다.

그러나 생태 도시 아바나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바로 ‘쓰레기 도시’다. 생태주의와 쓰레기가 어떻게 공존한단 말인가? 이 역설이 아바나의 현실이다. 이 도시를 걷다 보면 지저분한 쓰레기 수거함과 골목마다 마주친다. 지저분하다는 단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엉망진창이다. 일단 이곳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따로 분리하지 않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음식물 쓰레기는 금세 부패하고, 당연히 파리와 바퀴벌레를 끌어들인다. 음식물 쓰레기도 분리를 안 하는데 다른 것들을 분리수거할 리가 없다. 그래서 물건의 재활용이 생활화가 된 이 도시에서 정작 철, 플라스틱, 종이 같은 원료가 재활용되는 비율은 극히 낮다. 모든 쓰레기는 그 종류와 상관없이 똑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즉, 태워진다.(재활용을 의무화하는 법률은 1970년대에 재정됐지만 유명무실하다)

이런 문제보다 더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쓰레기 수거를 제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의 쓰레기 수거함은 병원 앞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매일 뛰노는 공원 옆에 있다. 그러나 이 수거함은 일주일에 한 번만 비워진다. 비가 올 때면 진동하는 악취 때문에 그 근처를 지나갈 수조차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바나의 쓰레기 문제는 모두의 불평거리다. 특히 의사들의 단골 불평거리다. 쿠바의 의사들은 환자의 병뿐만 아니라 생활까지 건강하게 관리하라고 교육받는다. 그러나 뎅기바이러스와 지카바이러스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 모기 퇴치법을 교육시킨다고 해도, 집 앞에 모기의 진원지가 진을 치고 있으니 별 소용이 없다.

한계는 명확하다. 현재 쿠바 정부에게는 아바네로 300만 명이 버리는 쓰레기를 매일 수거할 여력이 없다. 차도 부족하고, 청소부의 월급도 낮다. 무엇보다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돈을 투자할 의지가 없다. 그냥 방치하는 것이다. 이처럼 쓰레기와 발명품으로 채워진 아바나는 ‘지속가능한 생태발자국’의 테두리 안에서 여차저차 굴러가고 있다.

생활이라는 것은 미화될 수도 없고 폄하될 수도 없는, 우리의 존재가 통째로 담겨 있는 시공간이다. 아무리 소박해 보이는 풍경일지라도 그 안에는 몇 마디 말로 다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녹아 있다. 아바나도 마찬가지다. 재활용과 쓰레기의 역설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아바네로들의 마음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그들의 욕구불만이다. 그것은 ‘우리는 미국의 야박한 경제 봉쇄로부터 살아남았으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으며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라는 소리 없는 외침이다. 아시아의 신흥개발국들처럼 경제 발전을 구가할 수 있었던 쿠바의 잠재력이 시작부터 짓밟혔다는 분노이기도 하다.

발명과 방치, 그리고 욕구불만


▎말레꼰을 달리는 강렬한 원색의 올드카는 아바나의 상징이다. 그러나 올드카의 진정한 묘미는 내부에 있다. 운전사의 취향이 한껏 반영된 개성만점의 인테리어는 자원이 부족한 쿠바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 중 하나다.
이런 욕구불만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쿠바는 언제부터 경제 봉쇄에 시달렸을까? 지금까지 연재를 따라온 독자들이라면 금방 답을 할 수 있다. 바로 1990년대 특별 시기부터다. 미국의 경제 제재는 1960년대에 쿠바 혁명정부가 미국 회사들이 소유한 국토를 압수하면서 곧바로 시작됐으나, 그 시절 쿠바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 시장 개척이라는 방법으로 위기의 순간을 넘겼다. 전 세계가 성장궤도에 올랐던 1970~80년대에는 심지어 풍요가 찾아왔다. 상황이 이대로만 지속된다면 쿠바는 누구도 착취하지 않는 ‘도덕적인 방식’으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때도 있었다. 이 희망은 얼토당토않은 게 아니었다. 우리가 아바나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잠시 잊는 사실이 있는데, 쿠바는 한국보다도 훨씬 더 빨리 근대화된 나라다. 스페인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금싸라기 같은 식민지였고, 혁명 이전의 아바나는 ‘지중해의 파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번성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상적인 혁명을 국가 차원에서 시도한 지구상 유일한 나라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자 모든 게 일장춘몽이 됐다.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쿠바의 부실한 경제 구조가 여실히 드러났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미국은 경제 봉쇄를 풀지 않았고, 쿠바는 혁명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낀 쿠바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했다. 절도, 사기, 매춘, 고양이사냥과 개사냥까지 말이다. 그 중에서도 아바나의 상황은 더욱 살벌했다. 지방 사람들이 그나마 물자가 남아 있는 아바나로 계속해서 유입되면서 긴장 상태를 촉발했기 때문이다.

아바네로의 창의력은 이 처절한 배반의 시간을 통해 길러졌다. 따라서 아바나의 재활용 생활은 이러한 어두운 시절의 그림자와, 주민들의 빛나는 생활력 양쪽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이 혼돈 속에서 아바네로들은 특유의 태도를 갖게 됐다. 자신의 물질적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라면 모든 자원과 방법을 동원해 해결책을 만들어내지만, 그게 아니라면 문제를 그냥 방치한다. 다 함께 원칙을 세워서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이곳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들은 기회만 된다면 현재의 생활 패턴을 버릴 준비가 돼 있다. 결핍이 가슴에 대못처럼 박혔기 때문이다. 만약 쿠바의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는 날이 온다면, 아바네로들은 뉴욕의 5번가에서 현금으로 명품을 쓸어 담는 중국의 부호들처럼 성급하게 소비 생활에 뛰어들지도 모를 일이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이것이 재활용의 도시 아바나가 보여주는 미래의 비전이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는 그날, 인류는 모두 쿠바의 특별 시기보다 더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바네로들보다 더 어마어마한 욕구불만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에 소박하게 기대면서 그게 곧 삶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시간에서 너무 멀리 왔다. 나의 쿠바 생활을 전해 들으신 할머니가 옛날 한국을 떠올리면서도 “이제는 그렇게 살라고 해도 못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혹은 우리의 후손들은) 과연 아바네로들보다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물과 전기와 일회용품을 ‘물 쓰듯이’쓰는 제1세계는 무능의 땅으로 전락할 것이다. 현재 제3세계라고 불리는 지역의 청년들은 인류에게 생활을 꾸리는 법을 다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자율, 통제, 상상-재활용의 최고 자원


▎‘구아구아’라고 불리는 마을버스는 중국에서 중고로 들어온 것을 재활용한 것이다.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여인의 앞에 있는 차창 유리에 한자로 된 상표가 보인다.
아바나의 생생한 사례는 귀한 교훈을 준다. 바로 재활용해야 할 최고의 자원은 자율성, 통제력,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아바네로들은 자율의 힘을 그들의 온갖 창의적인 발명품을 통해서 증명해내었다. 반면, 통제력은 아바나가 실패한 부분이다. 가령, 아바나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시간표를 지키지 않기로 악명 높다. 이는 버스의 대수가 부족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버스 기사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자원이 부족할수록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서 효과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자원은 상상력이다. 이때 상상력이란 스스로 절제해야만 하는 생활을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그래야 욕구불만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단언컨대, 생활의 상상력은 정신의 상상력보다 더 어렵다.

헌데 최근에 아바나의 상상력을 침식시키는 적이 나타났다. 바로 중국이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중국 자본은 쿠바에도 손길을 뻗었고, 덕분에 값싼 중국산 제품이 아바나의 거리를 채우고 있다. 이를 두고 아바네로들은 러시아도 이루지 못한 ‘사회주의의 승리’라고 기뻐한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다 있다니! 부디 체 게바라가 다 이루지 못하고 간 사회주의가 아바나가 품은 전지구적 비전을 없애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김해완 - 1993년 생. 십대에 중졸백수를 자처했으나 지금은 평범한 이십대 청년백수다.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둔 후 남산강학원에서 5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2017년 9월부터는 쿠바 아바나에 정착해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른 10대의 탄생],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 [뉴욕과 지성-뉴욕에서 그린 나와 타인과 세상 사이의 지도]가 있다.

201811호 (2018.10.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