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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일본의 가희(歌姬)’ 아무로 나미에의 아쉬운 ‘퇴장’ 

기미가요 부르기를 거부한 오키나와의 아이콘 

김화영 수원과학대 교수
1년 전 은퇴 예고, 지난달 고별 콘서트까지도 일본에선 ‘사회현상화’…1990년대 ‘아무라’ 패션 붐 주도, 이혼 후 ‘싱글맘’ 편견 깨기도

▎2018년 9월 15일 저녁, 아무로 나미에의 마지막 콘서트가 열렸고 팬들은 그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모였다. 그녀의 은퇴는 일본 ‘헤이세이 시대’의 종언을 상징한다. / 사진:연합뉴스
2018년 9월 16일, 일본 최고의 가희(歌姬)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가 고향 오키나와에서 은퇴했다. 그녀의 나이 40세. 100세 시대를 이야기하는 요즘, 40세란 나이는 한창 활동해야 할 시기에 해당한다. 그것도 정상의 자리에 있는 가수가 은퇴를 선언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재능을 묻어버리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톱의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온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는 팬들로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아무로 나미에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글로벌 스타였다. 1990년대는 J팝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녀가 내놓은 음반들은 밀리언셀러로 팔려 나갔다. 일본 대중음악과 대중문화를 파급시키는 막강한 소프트 파워를 가졌다.

이런 아무로 나미에가 작년 9월, 1년 후 자신의 생일(9월 16일)에 맞춰 은퇴를 선언했다. 이를 알리는 그녀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은퇴를 선언한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팬과의 결별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일본 전역을 돌며 고별 콘서트가 이어졌고, 마지막은 9월 오키나와에서 예정됐다.

이제까지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한 가수 가운데 은퇴를 미리 선언한 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에선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를 국가적 행사를 맞이하듯이 보도했다. 매스컴은 연일 그녀의 인생과 음악, 은퇴에 대해 재조명했다. 이벤트를 좋아하는 국민성의 일본 국민은 아무로 나미에의 동선과 발언을 주시하는 흥분한 상태에서 1년을 지내왔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오키나와 출신으로 아시아에서도 대활약하고 독특한 패션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는 매우 아쉽고 유감스럽다”고 촌평할 정도로 정치인들에게도 그녀의 은퇴는 큰 관심사였다.

일본 공영방송 NHK를 비롯한 매스컴에선 아무로 나미에 은퇴의 파급효과로 만들어진 사회현상을 ‘아무로스(아무로 나미에+Loss)’라 칭했다.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팬들이 그녀의 은퇴에 직면하며 감정적으로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현상을 일컫는다. 지난해 일본의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가 데뷔 26년 만에 해체하자 팬들은 일시적인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를 ‘스마프로스’라 했는데, 이와 같은 종류의 집단 상실감이 또 발생한 것이다. 특히 ‘아무로스’의 경우엔 상실감이 더 크게 느껴지고 있다. 아무로 나미에는 단지 연예계 스타 이상의 사회 현장이자 문화 아이콘으로서 일본인에게 와 닿는 존재감이기 때문이다.

오키나와發 ‘아무라 현상’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 당일인 9월 16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조간에 팬들의 모금으로 전면 광고가 실렸다. 그녀를 향한 그동안의 고마움을 담은 문구가 담긴 이 광고 지면은 15면부터 18면까지 무려 네 면에 걸쳐 실렸다. / 사진:연합뉴스
아무로 나미에는 1977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다이라 에미코(平良恵美子)는 백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녀의 인생이 바뀌는 계기가 발생했다. 연예인 양성소인 오키나와 액터스 스쿨 원장인 마키노 마사유키가 아무로 나미에의 이국적인 마스크에 매력을 느껴 데뷔를 권유한 것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어려운 경제 사정에 처해 있었던 아무로를 위해 수업료를 감면해 주면서까지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을 줬다.

아무로는 오키나와 지역 방송에 출연하면서 도쿄에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연예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9월, 오키나와 액터스 스쿨 동기들인 오키나와 출신 소녀들과 ‘슈퍼 몽키즈’를 결성해 데뷔했다. ‘슈퍼 몽키즈’는 몇 번의 팀원 교체를 거쳤고 ‘아무로와 슈퍼 몽키즈’로 재정비됐다. 그녀의 타고난 실력과 스타성은 점점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15세 되던 해에 데뷔 싱글 ‘恋のキュート·ビート/ミスターU.S.A’(사랑의 큐트·비트/미스터 U.S.A)를 발매했고, 95년 1월에는 ‘TRY ME~私を信じて~’(나를 믿어줘)를 내놨는데 약 74만 장이 팔리는 빅히트를 쳤다. 솔로가수로 전향한 후 싱글 ‘太陽のSEASON’(태양의 계절)을 발표했다.

1995년 그해 가을, 아무로 나미에는 대형 음반 레이블사인 에이벡스(avex)로 이적했다. 이곳에서 일본 최고의 프로듀서인 고무라 데쓰야(小室哲哉)와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고무라의 곡을 받아 10월 25일 기존의 유로비트를 벗어난 ‘Body Feels Exit’를 발표했다. 이후 3년간 ‘Chase the Chance’ ‘Don’t wanna cry’ ‘You’re my sunshine’ 등 5개의 싱글이 차례차례 밀리언 싱글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96년 7월 첫 정규 앨범 ‘SWEET 19 BLUES’가 발표돼 당시 약 300만장을 판매했다. 아무로 나미에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녀의 음악뿐 아니라 패션마저도 무한한 인기를 누렸다. 아무로 나미에의 패션과 메이크업을 따라 하는 여학생을 ‘아무라’라 불렀는데, 1996년 대표 유행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무라 현상’은 90년대 후반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현상으로 경제용어로도 사용될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10대 소녀 ‘아무라족’은 이른바 ‘고걀(고등학교 걸의 줄임말, コギャル)’이라고 불렸다. 인형과 같은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피부는 검게 칠하며,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높은 통굽의 롱부츠를 신고 거리를 활보했다. 당시의 신문·잡지는 아무로 나미에를 따라 하는 ‘고걀’로 지면을 뒤덮었다. 한국에서도 아무로 나미에의 스타일을 동경하던 가수가 많았다. 일본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K팝을 대표하는 아시아의 스타 보아(BoA)는 그녀의 은퇴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SNS에 아무로 나미에 사진과 함께 “앞에선 한마디도 못했지만… 내 어릴 적 우상이었고 앞으로도 내 기억 속엔 선배님의 멋진 무대가 계속 맴돌 것 같아요. 그동안 배울 점이 많은 무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 아무로 나미에 선배님의 인생을 응원해요! 선배님 진짜 사랑합니다!”란 글을 올려 그녀에 대한 애정을 보였고, 앞으로의 인생을 응원했다. 아무로 나미에의 인기 비결은 아마도 당시 여성 가수들에게 없던 오키나와 액터스 스쿨에서 쌓아온 탄탄한 댄스와 라이브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日 ‘싱글맘’의 금기를 깨다


▎일본 최고 가수만 등장할 수 있는 NHK 홍백가합전. 그러나 시류에 따르지 않고 출연을 고사하던 아무로 나미에는 2017년 12월 31일 무대에 섰고, 눈물을 흘렸다.
일본 가요계 정상을 질주하고 있던 97년, 20세였던 아무로 나미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결혼을 발표했다. 97년에는 드라마 [버진로드]의 주제가였던 싱글 ‘CAN YOU CELEBRATE?’를 발매, 약 200만 장이 팔리면서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이 곡은 지금까지도 결혼식 테마송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노래다. 같은 해 7~8월에는 일본 여성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돔구장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렇게 역대급 인기를 누리고 있던 아무로 나미에의 결혼 발표는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상대는 고무라 데쓰야 사단의 그룹 TRF의 멤버이자 당대 최고의 댄서였던 SAM(본명 마루야마 마사히루)로 아무로 나미에와 15세나 나이가 많은 남성이었다. 이제 20세,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갖게 돼 결혼하게 됐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기자회견에서 ‘누가 프러포즈를 먼저 했느냐’란 질문에 아무로 나미에는 자기가 먼저 결혼을 꺼냈다는 대답으로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당당하게 남편이 될 SAM에 대해 “기댈 수 있고 너무 다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아무로 나미에는 기자회견 당시, 길었던 머리를 자르고 버버리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왔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결혼에 대한 강한 의지와 당당함이 느껴졌다. 그녀가 입은 버버리 미니스커트는 완판됐고, 단발의 헤어스타일이 유행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결혼과 동시에 1년간 휴식을 갖게 되면서 아무로의 전성시대는 끝난 듯이 보였다. 그리고 98년 5월에 아들 하루토를 출산했다. 출산 직후 12월 ‘I HAVE NEVER SEEN’을 발표하고 다시 가요계에 복귀해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오카나와에서 처음으로 콘서트를 열었다. 마냥 평화롭고 행복한 날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들이 두 살도 채 되기 전인 99년 오키나와에서 어머니가 재혼 상대의 남동생에게 무참하게 살해돼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소식은 일본은 물론 해외까지 알려질 정도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당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은퇴까지 고민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녀에게 어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이자 의지할 수 있는 이였다.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왼팔에 어머니의 기일을 새겨놓을 정도로 애틋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오키나와에서 진행된 15주년 콘서트 팸플릿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적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던 일은
그것은 당신과 데뷔 15주년을 함께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념일 무대에서 기쁨을 함께 맛보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나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노래하겠습니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담아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뒤로하고, 아무로 나미에는 앞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99년 9월엔 미국인 프로듀서 달라스 오스틴과 함께 만든 싱글 ‘SOMETHING ABOUT THE KISS’를, 2001년 1월엔 고무로 데쓰야와 ‘think of me/no more tears’를 발표했다.

거듭해서 힘든 시간이 아무로 나미에에게 찾아왔다. 2002년 약 5년간의 결혼생활을 접고 이혼했다.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싱글맘이면서도 육아와 함께 음악 활동을 접지 않고 꾸준하게 노력해 가면서 음악적인 전환도 함께 도모했다.

[문예춘추] 2018년 10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아무로 나미에가 2007년 발표한 ‘Baby don’t cry’는 바쁜 육아 시기를 보내면서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Baby 悲しまないで(아가야 슬퍼하지 마라)
考えても分かんない時もあるって(생각지도 못 한 때도 있단다)
散々でも前に続く道のどこかに(계속 앞으로 뻗은 길 어딘가에)
望みはあるから(희망은 있단다)”


일본 음악계는 점점 다양하게 변화해 갔다. 가수는 단순히 노래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남들과 다른 개성을 가지고 토크에도 강해야 했다. 다재다능한 능력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아무로 나미에는 이러한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을 찾고 더욱 짙게 색칠해 나갔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발언권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여성 아티스트에게 결혼, 이혼, 싱글맘이란 상황들은 남성들에 비해 상당히 힘든 장애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아무로 나미에는 이러한 장애들을 당당하게 헤쳐 나가는 힘을 가진 아티스트였다.

아무로 나미에가 도쿄로 진출한 1990년대 무렵은 오키나와 출신 아티스트들이 매우 드물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아무로 나미에의 연예계 진출을 두고 ‘얼마나 잘 되겠어’라는 질투 서린 의구심에 답하기 위해, 그녀는 “반드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성공에 이어서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각트와 여배우 나카마 유키에 등 능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본토로 진출하게 됐다.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다


▎오키나와 거주민들이 헤노코 미군 기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주일미군의 성범죄 등이 발생하는 현실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감내하고 있다.
호주국립대 교수 개번 매코맥의 지적처럼 예로부터 오키나와는 ‘과거의 압박과 착취가 깊게 각인된 역사가 숨어 있는’ 곳이다. 19세기 메이지 정부가 류큐 왕국을 없애고 일본에 병합시키면서 ‘뒤늦게 일본의 일부가 된 오키나와 주민은 일본인이 되기 위해 오키나와를 부정하고 오키나와 류큐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버리도록 강요’ 받아온 한이 서린 지역이었다.

아무로 나미에에게 고향 ‘오키나와’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지난 9월 10일 NHK방송 [おはよう 日本(안녕 일본)]에서 아무로 나미에는 자신의 고향 오키나와에서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웃으며 노래를 마치고 싶은 장소가 오키나와였다. 웃으면서 시작한 곳이기도 하니까. 14세의 어린 소녀들이 웃으며 도쿄로 건너갔다. 마지막에도 그때처럼 웃는 얼굴로 노래를 마치고 싶다.”

2018년 5월 23일 오키나와현으로부터 ‘오키나와현민 영예상’을 받았다. 그때 아무로 나미에는 눈물을 지었다.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고민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 마음을 강하게 먹고 ‘꼭 도쿄에 가자’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 데뷔한 것은 기적이었다. 오키나와에 돌아올 때마다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난다, ‘가능한 한 오키나와에 돌아오지 않고 노력해야지’라고 다짐했던 그때가 생각나 눈물이 났다. 처음으로 칭찬받은 기분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오키나와란 아무로 나미에에게 ‘자신의 출발점’이자 자신을 지탱해 준 어머니가 계시던 마음의 쉼터였을 것이다. 최정상에서 내려오는 인생 최고의 날을 오키나와에서 맞이한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아무로 나미에는 99년 아키히토 일왕 즉위 10주년 기념 축하 행사와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G8 정상회담에서 두 차례나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노래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오키나와에서는 기미가요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많다”고 답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 우익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한국에서 아무로 나미에를 개념 있는 일본인으로 비치게 해 호감도를 높였다.

벚꽃처럼 찬란하게 지다


▎공식 은퇴를 하루 앞두고 아무로 나미에의 마지막 콘서트가 열린 9월 15일 오키나와 기노완 콘서트장 전경. 표를 얻지 못한 팬들은 공연장 바깥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 사진:연합뉴스
그리고 지난 8월 10일, 오키나와현 지사인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의 죽음에 대해 아무로 나미에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오키나와를 걱정하고 오키나와를 위해서 일하신 오나가 지사님의 유지(遺志)가 앞으로도 이어져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오키나와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추모문을 올린 것이 대단한 화제를 일으켰다. 오나가 지사는 아베 정권에 맞서 헤노코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이어오던 인물이다. 이런 지사의 ‘유지’를 이어받자는 아무로 나미에의 발언은 일본 극우파와 다음 오키나와 지사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자민당에 매우 듣기 거북한 발언이었다. 이로 인해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다. NHK는 그녀의 이러한 발언을 삭제하기도 했다.

아무로 나미에의 한국 공연은 2004년 5월 13일부터 3일간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약 6000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첫 콘서트를 했다. 아무로 나미에의 내한공연은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의 후원으로 열렸다. 2003년 1월 1일 시행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가장 큰 관심이 받던 공연이었다. 이후 2008년엔 일산 킨텍스에서 두 번째 내한공연을 준비했으나 무산됐다. 2011년에는 앨범 ‘Checkmate!’를 발표하면서 한국 그룹 애프터스쿨과 콜라보를 함께 했다.

아무로 나미에는 9월 15일 1년 전, 자신이 선언했던 바대로 마지막 무대를 오키나와 기노완시에서 열었다. 관객 3만5000명과 표를 구하지 못해 콘서트장 밖에 모인 관객 약 1만 명을 합하면 거의 5만 명이 오키나와에 모여 아무로 나미에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콘서트장 밖 관객들은 콘서트장에서 작게 새어 나오는 아무로 나미에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청진기를 동원하는 진풍경이 그려지기도 했다.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 선언 이후 1년간의 모든 콘서트가 매진됐고, 그녀가 낸 기념 앨범 CD와 DVD는 단숨에 판매됐다. 도쿄 시부야에서 아무로 나미에 은퇴 전시회가 개최될 정도로 엄청난 경제 효과를 거뒀다. 은퇴 마케팅 경제 효과를 1000억 엔으로 추산하고 있다.

아무로 나미에를 ‘헤이세이(平成, 1989년 시작된 현재 아키히토 일왕의 연호)의 상징’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내년 4월 아키히토 일왕은 퇴위한다.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는 ‘헤이세이’의 종언이자 그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인물인 셈이다. 파란만장했던 아무로 나미에의 인생은 현재를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헤이세이’ 그 자체이자, 그녀와 함께 성장하고 아파하며 웃고 지냈던 일본 사회 그 자체인 것이었다.

근대 일본의 정치사상가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는 저서 [무사도]에서 ‘벚꽃’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알고 지는 꽃이며, “이 짧은 즐거움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새로운 힘과 새로운 결심으로 다시 일상의 업무로 돌아간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고 한 줄기 향기를 흩뿌리며 영원히 사라지는” 꽃으로써 무사도와 함께 ‘일본인의 정신’을 상징한다고 했다. 니토베의 말처럼 아무로 나미에의 40세, 한 인간이 맞는 최고 전성기의 은퇴는 ‘벚꽃’처럼 찬란히 피어 ‘아름다운 시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 김화영 수원과학대 교수·일본 오사카대 일문학 박사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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