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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노재헌 한중문화센터 원장이 말하는 한·중 상생의 길 

“지정학적으로 한-중 뗄 수 없어, 과거 집착하기보다 미래 지향해야”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수교 20주년 된 2012년부터 문화 교류에 앞장… 한·중·일 3국 융합문화 모델 만드는 사업 추진할 터

▎노재헌 한중문화센터 원장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한·중 양국 문화 교류의 필요성과 양국 관계 개선 방안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인 노재헌(53) 변호사가 한중문화센터를 설립하고 원장에 취임한 것은 2012년. 노 변호사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고 문화 교류를 통해 양국 간의 우의를 다지기 위해 한중문화센터를 설립해 활동해 왔다. 한·중 양국이 수교를 맺은 것은 1992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이다. 한·중 수교는 동북아에서 한·중 양국을 운명공동체로 묶은 획기적인 사건으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의 대표적인 성과물로 평가받는다.

노 원장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중국은 불가분의 관계”라며 “중국에서 한반도를 떼내서 미국에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 이후 일각에서 제기되는 탈(脫)중국 주장은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했다.

언론과의 정식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인 걸로 알고 있다.

“인터뷰거리가 있어야 인터뷰를 했을 텐데…(웃음), 최근에는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언론을 통해) 말을 하거나 전달할 내용이 많지 않았다.”

연중 한국과 중국, 양국에서 체류하는 기간은 어떻게 되는가?

“한국 반, 중국 반 말 그대로 반반 정도다. 중국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5~6년 전부터다. 그때는 나도 중국을 잘 모르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쓰촨성(四川省)에 정착을 했다. 청두(成都)라는 곳에서 작년 5월 거류 허가증을 받았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청두 주민이 됐다. 거기서 생활도 하고 있고, 세금도 내고 있다.”

2012년 한중문화센터 설립 후 동분서주

청두는 어떤 도시인가?

“청두시는 중국 서남부의 중심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문화적으로 유서가 깊은 도시다. 사회·경제적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로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 전략에서 각광을 받는 도시다. (한국에서) 멀어서 그런지 한국인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 나라도 가서 도시를 배우고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거류 허가증도 받고 외국인 고문으로 위촉돼 청두시와 한국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는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일대)와 동남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일로)를 뜻하는 말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9~10월 중앙아시아·동남아시아 순방에서 처음 제시한 전략이다.

직접 설립한 한중문화센터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한-중 양국의 문화 교류에 방점을 둔 단체다. 정식으로는 2012년,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설립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전에는 중국에 대해 막연한 관심 정도만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일(변호사 등)을 했고 이후에는 홍콩으로 갔다. 물론 홍콩도 중국의 영향을 받지만 그들 고유의 특색이 있다. 그런데 수교 20주년 행사에 관여하면서 양국 간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 세대는 물론 미래 세대에게 서로 이해할 교두보나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주체가 한·중 협력을 위해 노력하지만 문화적 접근은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양국이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껍질을 까보니까 서로를 너무 모르더라.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아는 것도 한류(韓流)를 통한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우리도 중국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만 갖고 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껴서 한중문화센터를 발족했다. 교류 프로그램을 위주로 하면서 협력을 증진하고자 한다. 그 바탕에는 공통되는 문화 요소를 두자는 것이다. 세계 문화의 축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오고 있다. 한류의 성장도 그런 흐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동양이 중심이 되면 중국이 앞장설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중국만 동양문화를 대표할 수 없기에 한·중·일이 융합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문화 모델을 만들고 양국이 함께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나?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까 정말 많았다(웃음)! 한국인으로서 한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전파하기도 했고, 한류 콘텐트를 알리는 데도 노력했다. 융합 콘텐트, 융합 문화상품들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지정학적 측면 고려… 탈중국은 위험한 발상”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게 3년 전 중국 CCTV와 함께 예능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중국에서는 요즘 경극(京劇)을 비롯해 고전극을 잘 보지 않는데, 그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CCTV에서 예능프로그램을 만드는 프로모션을 기획했다. 여기에 한국 예능 제작사를 연결했다. 중국의 고전극을 세 파트(경극·월극·천극)로 나눈 뒤 한국 연예인 6명, 중국 연예인 4명으로 팀을 구성했다. 이들이 경극을 같이 배우고 공연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게 신선하고 미래 지향적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융합문화라는 방향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한류는 100% 우리 것보다는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시도의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아쉽지만 그 이후 사드 파문이 커지면서 (중국이) 한한령(限韓令)을 내렸고 지금은 교류가 거의 중단됐다.

일방적인 우리나라 소개보다는 양방향 소개를 추구했다. 왜냐면 우리는 중국 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반성하게 됐기 때문이다. 쉬운 것부터 알리자는 차원에서 중국 영화 상설관을 만들었다. 2016년 8월에 개관했는데 그때만 해도 한·중 관계가 좋았다. 국내에서는 1년이면 1000만 관객 영화가 여러 편 쏟아지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우리를 무척 부러워했다. 참고로 중국 영화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0.1% 정도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 영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전용 상설관을 만들 테니 중국 영화 수입을 도와 달라’고 했다. 이후 롯데시네마와 협약을 맺고 잠실월드몰에 100석 정도 전용관을 운영했고, 영화 수입과 배급은 이곳(한중문화센터)에서 맡았다. 그렇게 기세 좋게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드가 터진 것이다. 공교롭게 그 소용돌이 중심에 롯데가 있어서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중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사드 논란 이후) 중국 문화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도 많아졌다. ‘문화의 힘으로 이 난관을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롯데도 중국 사업을 모두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만은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더라. 특히 영화가 가진 파급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우리도 중국 영화를 통해 중국에 대한 선입견을 고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 이외에 크고 작은 교류 프로그램은 계속 진행하고 있다. 서로 방문하거나 홍보하기도 한다.”

한·중 양국은 1992년 8월 베이징에서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양국의 수교는 동북아 질서를 바꾼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한 노 원장의 평가를 듣고 싶다.

“간접적으로 지켜보고 또 주변에서 듣긴 했지만, 수교 과정에 (내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평가를 하긴 어렵다. 당시 ‘세계 (외교)지도’가 급변하고 있었고 우리가 능동적인 외교를 하던 때였다. 원래 우리 정부는 소련(1990년)보다 중국과 먼저 수교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북한의 저항이 엄청났다. 특히 중국 정부가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북한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다 보니 중국과 가장 늦게 수교하게 된 것이다. 동구권·소련·중국 순이었다.

한·중 수교는 일대일 측면보다는 대북관계의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다는 역할이 했다. 그런 차원에서 북방정책이라는 큰 맥락에서 수교를 보는 것 같다. 중국과 일대일 관계만 보더라도 수교 이후 25년간, 우리 5000년 역사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졌고 그 과실을 양국이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중국 덕분에 많은 혜택을 받았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개혁·개방의 촉매제가 됐기 때문이다. 25년을 돌이켜봤을 때 역사의 흐름 안에서 양국이 서로에게 역동성 측면에서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앞으로는 그 전과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안보나 경제를 넘어 국가와 민족의 삶을 위해 전략적인 고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라는 문제가 남는다. 세밀하고 특성화시켜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사드 이후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탈중국 현상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한반도를 떼내서 다른 데로 가서 살 수 없다. 미국 옆에 붙일 수도 없지 않나. 지정학적으로 중국 옆에 있고 중국의 힘은 계속 커질 것이기에 협력이든 갈등이든 더 새롭고 복잡한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보다 전향적 태도가 필요하다.”

“한·중·일 문화 공통분모인 한자 살려야”

한·중 수교 협상이 이뤄진 계기는 1991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태우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3차 장관급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첸치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교부장을 접견하고 한·중 수교의 희망 의사를 비쳤다.

수교 시기를 저울질하던 중국은 이듬해 4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 제48차 회의에 이상옥 외무부 장관을 초청했다. 첸 외교부장은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이 장관을 만나 관계 개선에 합의했고 5월부터 본격 협상이 시작됐다. 중국 언론은 한국 측 협상단 대표였던 권병현 초대 주중 한국대사가 “수교 협상을 위해 ‘부친이 병이 났다’며 사직서를 냈고, 출장 때는 아내에게도 (목적지를) 비밀로 해 아내가 여름옷과 겨울옷을 모두 챙겨 줬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중 협상을 간파한 대만은 한·중 수교 이틀 전인 1992년 8월 22일 한국과의 단교를 먼저 선언했다.

사드 파문으로 인해 한중문화센터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을 것 같은데.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겪는 문제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정책은 바꾸면 되고 묶여 있는 건 풀면 되는데 한 번 바뀐 마음은 되돌리기가 어렵다. 처음에는 사드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보적 측면에서 무기 배치의 문제니까. 그런데 이를 둘러싼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지고 있다. 양국 모두가 그렇다. 미디어를 통해 언급되지만 나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 문제를 해당 분야에 한정시키지 못하다 보니 감정의 골을 깊게 하는 원인이 됐다. 사실 중국도 과거에는 한국에 대해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부정적으로 많이 돌아섰다. 물론 감정이 항상 좋을 수는 없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친척 집 같은 한국’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싸움은 생길 수 있다. 앞으로 제2, 제3의 사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감정적 측면으로만 보면 해결이 어렵다. 정부와 언론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제2의 사드 문제가 다시 발생할 것으로 보는가?

“행사가 취소되든지, 교류 프로그램이 막히든지, 영화 배급 지원이 중단되든지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화(교류)’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자. 역사와 문화를 제고(提高)하면서 어떤 것을 공유했고 어떤 것에서 갈등했는지 함께 고민할 장(場)이 필요하다. 어려움을 풀려면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공통된 문화 경험이다. 가장 좋은 것이 한자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통의 문화를 찾아보면 미래 융합문화도 좋지만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융합문화를 만든다고 해서 갑자기 아프리카로 날아가긴 어렵다. 한·중·일은 공유하는 것들이 있어서 융합문화를 만들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자다. 뼈아픈 사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3대(代) 위의 조상이 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자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다. 우리 역사가 대한민국과 중국에 남아 있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자를 통한 중국의 이해는 사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이해 측면이 더 크다. 한자를 통해 과거를 알아보자. 한자를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서예를 통해 한자 공부를 해보자 생각했다. 그래서 한·중·일 서예대전을 기획하고 있다. 마침 우리나라도 최근 서예진흥법이 통과됐기 때문에 분위기는 형성됐다. 한·중이 서예를 함께함으로써 공유했던 과거를 되새기고 미래를 고민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어] 연구에 평생을 바친 성백효 해동경사연구소장(한국고전연구원 명예교수)은 수년 전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노 원장과 같은 지적을 했다. “문자 단절로 인해 우리는 불과 100년 전 선조들이 남긴 문헌을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됐다. 그러니 광화문 현판(懸板)에 적힌 門化光(광화문)을 문화광이라고 읽는 사람도 나오지 않나? 그래서 최소한 1500자 정도의 한자는 중·고교 때 가르쳐야 한다.”

“문화는 누구랑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


▎중국 쓰촨성은 청두시를 전 세계에 알리고 교류·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2017년 전 세계 주요 리더 19명을 초청해 ‘청두시정부 국제자문단’을 구성했다. 올해 11월 15일 열린 제2회 콘퍼런스에 참가한 노재헌 한중문화센터 원장(앞줄 맨 왼쪽)이 각국 대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한중문화센터
국가 간에 큰 갈등이 빚어지면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갈등을 봉합하고 건설적인 발전을 하려면 같이 일을 해야 한다. 과거사만 들여다봤자 각자에게 유리한, 아전인수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봉합하고 협력하려면 미래를 봐야 한다. 미래 프로젝트를 만들어내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서예·한류다. 사실 한류라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자랑스러운 콘텐트이지만 한계가 있다. 한류가 영어로 ‘Korean wave’이지 않은가. 한국으로 범위가 국한돼 있기에 배타성을 전제로 한다. 한류를 우리 것에서 조금 더 증폭시키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한한령이 아니더라도 한류 콘텐트에 대한 반발이나 대항적 문화가 발생할 거라고 예상한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한때 일본 문화를 동경(憧憬)했지만 어느 순간 배척하고 우리 것을 추구하는 과정을 겪었다. 중국도 분명히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과거 왕치산(王岐山) 정치국 상무위원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SBS)가 한창 인기를 끌 즈음 당 대회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왜 중국에서는 한국의 [별에서 온 그대]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느냐’. 우리 입장에서는 ‘[별에서 온 그대]가 유명하구나’ 정도로 인식했는데, 그때 나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곧 견제가 들어오겠구나’. 왕치산의 발언은 ‘이제 우리 것을 만들자!’ 이런 뉘앙스니까. 사드가 아니더라도 한류 콘텐트를 수입하는 부분에서 중국은 다른 생각을 해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한류의 본질이 뭔가? 재미있는 거냐, 환상적인 거냐, 그 자체가 좋은 것이냐? 나는 융합적 프로듀싱(producing)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서양의 것에 동양 가치를 부여하고 다시 세계화는 혼합 프로듀싱이 뛰어나다. 한류라는 제품보다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수만 SM 회장이 늘 강조하는 말이 ‘중국에 우리가 만든 것들을 주고 함께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혼자 만들면 10개밖에 못 만들지만 중국과 함께 100개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서 30개를 갖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닌가? 다음 한류는 한·중·일의 협력으로 이뤄질 것이다. 할리우드 문화권에 미국만 있는 게 아니라 영·미권이 모두 포함되듯이 우리가 한류를 프로듀싱(제작·진행)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협업하다 보면 과거는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된다. 관심 있게 봐야 할 것이 중국의 일대일로다. 다소 급조된 철학 같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중국이 말하는 인류문명 공동체를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이니셔티브(initiative) 아닐까 싶다. 그들은 아마도 실크로드를 모델로 삼는 것 같다. 실크로드의 교역 대상은 물건과 사람이지만 세계사를 바꾼 것은 이를 통한 문화였고 양방향 소통이었다. 일대일로에서 부족한 것은 문화적 이념과 가치가 결여됐다는 점이다. 중국은 자국 문화만 외국에 강요한다. 이는 중국의 선전에 그칠 뿐이다. 일대일로와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면, 일대일로의 문화상품을 같이 만들고 전파시키는 것이다. 훨씬 쉽다. 한한령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최소한 아시아 다른 지역으로 퍼뜨리는 것이고 한·중이 협력해서 동양 문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문화상품을 만드는 거다. 지금 우리가 먼저 제안했으면 한다.”

일각에서 발생하는 혐한류 현상의 원인과 해결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사드 때문에 작위적으로 부추겨지는 부분은 있지만, 중국이 특별히 혐한(嫌韓) 감정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혐한은 아니겠지만 거부감은 언젠가 발생할 것이다. 이는 한류 콘텐트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국 인민들의 자각이 일어나는 현상으로 봐야 할 듯하다. 한류를 잘 만드는 것은 (저들도) 인정한다. 이를 통해서 비친 한국과 한국사람, 한국 스타일이 좋은 것이다. ‘서양은 너무 먼데 한국은 나랑 가까운데 세련됐어’ 이런 느낌? 이런 동경이 한류의 핵심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자기들이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것이 더 세련되게 보이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다. 우리가 일본 문화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문화가) 누구 것이냐보다는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노 전 대통령, 병세 깊지만 중국 소식엔 반색


▎1992년 9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이 인민대회당 공식 환영식에 참석하고 있다.
한·중 문화 교류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문화 교류 규모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최근 들어 양국 방문자 수가 줄어들고 프로젝트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간헐적으로는 이어지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성균중국연구소가 한·중 수교 25주년이었던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중 간 교역 규모는 1992년 63억7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113억9000만 달러까지 급증했다. 인적 교류 역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92년 13만 명이던 인적 교류는 2002년 226만 명, 2007년 585만 명, 2010년 595만 명으로 늘더니 2016년에는 806만 명까지 치솟았다. 유학생의 규모도 커졌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6년 4월 기준 한국 내 중국 유학생은 6만136명, 중국 내 한국 유학생은 6만6672명이다. 장기체류자 수도 제법 많다. 법무부가 밝힌 2016년 12월 기준 한국에 체류 중인 중국인의 수는 약 101만 명, 북경 재중한국인회가 추정한 중국 체류 한국인은 약 80만 명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병을 진단받은 것은 2005년이었다. 크게 징후가 나타난 것은 2008년으로 10년이 넘었다. 거동을 못하신 지도 7~8년쯤 됐다. 많이 쇠약해지셨다. 의식은 있으시지만 말씀을 하시기엔 불편하다. 주로 집에 계시고, 가끔 병원에 가신다. ‘어떻게 하면 여생을 편하게 보내시게 할까’ 그런 점에서 자식으로서 고민이 많다. 어머니는 건강이 괜찮으셨는데 올봄에 넘어지면서 고관절을 다치시는 바람에 인공고관절 수술을 하셨다.

한·중 수교가 92년이었는데 아버지는 퇴임 이후 중국에 2000년과 2002년 두 차례 가셨다. 그때는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재임 중이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나서 중국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시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들이 더 발전적인 관계를 만들어 주길 바라실 거다. 내가 중국에 다녀온 뒤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아버지의 반응이 남다르시다. 흐뭇해 하신다.”

1932년생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을 받은 뒤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요양하고 있다. 2011년 4월에는 가슴 통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치료하던 중 기관지를 관통하는 약 7㎝짜리 한방용 침이 발견돼 제거수술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포털사이트인 ‘인민망’을 보다 흥미로운 장면이 눈에 띄었다. 노 원장이 직접 출연해서 ‘우리 조상들이 1100년 전쯤 중국 산둥성(山東省)에서 한국으로 이주해 뿌리를 내렸다’고 말하는 영상이 있던데.

“고증(考證)을 거쳤다. 1100년 전쯤 수(穗)라는 이름을 쓰는 할아버지가 아들 9형제를 데리고 한국으로 왔더라. 산둥성에는 지금도 노씨 집성촌이 있다. 중국 사회가 씨족이나 가문을 굉장히 통제하는데 그쪽에 있는 제남시라는 공원에 노씨 사당을 만드는 것을 허가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노씨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인정했고 한다. 노씨는 중국에서 온 성이다. 나는 교하(交河) 노씨이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산(光山) 노씨지만 같은 집안이다.”

중국 범양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낸 노수(盧穗)가 877년(신라 헌강왕 3년) 황소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평안도 정주 능리촌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용강쌍제촌으로 옮겨 뿌리를 내림으로써 우리나라 노씨의 연원(淵源)을 이뤘다.

“한·중 교류, 일은 나눠서 하되 뭉쳐서 가야”


▎1992년 9월 중국 국빈 방문 중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
중국 젊은이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나?

“중국의 젊은이들은 참 인상적이다. 그들이 진취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나이와 직급을 뛰어넘는 사고·발언을 거리낌없이 하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본인의 직위를 의식하지 않고 튀는 발언과 행동을 한다. 원하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을 자유롭게 키워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아랫사람들은 회의 때 말을 못하고 눌려 있는 경우가 많다. 중국이 공산주의 체제라 젊은이들이 기가 눌리고 창의력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달랐다. 지금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제한하며 사는 게 아닌가 싶다.”

노 원장의 중국어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말하기 민망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나이 들어서 하려니 잘 안 된다(웃음). 진작에 정부 차원에서 영어와 중국어를 상용화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중국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전문가들은 많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하는 사람일 뿐이다. 문화 교류와 관련해 개선됐으면 하는 점은 특화다. 한 사람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한다. 중국은 땅도 넓고 사람도 많고 분야도 많으니까 나눠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협력하는 것이다. 일은 나눠서 하되 뭉쳐서 가는 것이다. 각자가 잘하는 것들을 함께하는 것을 제안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노 원장에게 한마디 더 물었다. “여담(餘談)인데 정치 하실 생각이 있나?” 국회의장 비서관 출신인 노 원장은 1994~95년 민자당(민주자유당) 대구 동을 지구당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다.

노 원장의 답은 명료했다. “여담이라도 그런 생각 없습니다. 지금 하는 일 열심히 할 겁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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