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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새로운 빛 ‘은둔환자 의료지원사업’ 시행 1년 

“이젠 내 몸으로 용기 전하고 싶어요”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지난해 12월부터 중증화상·고도비만 등 13명 치료받아 사회 진출… 전문가들 “사례 발굴부터 관리까지 일원화한 모델” 호평

외형적인 신체질환으로 사회생활을 기피하게 된 은둔환자에게 의료·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은둔환자 의료지원사업’이 시행 1년을 맞았다. 사례 발굴부터 치료, 관리까지 총체적으로 제공하는 ‘전인적 모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업에 참여한 은둔환자들은 “세상에 돌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입을 모은다.


▎인파로 북적이는 서울 강남역 인근 대로에서 이영식씨가 당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씨는 10세 나이에 중화상을 입은 뒤 수십 년간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경부고속도로 타고 조치원까지 왔어요!”

이영식(62)씨의 들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오후 9시까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던 이유가 다름아닌 운전 연습 때문이었다. 이씨는 올 7월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뒤 지인의 차를 빌려 3개월 만에 고속도로 주행에 나선 터였다. 열 살 때 사고로 큰 화상을 입은 이씨는 오른손이 굳어버려 지금껏 운전면허에 도전할 수조차 없었다.

공부하려고 방바닥에 내려놓은 호롱불이 화근이었다. 깜빡 조는 새 석유가 담긴 호롱이 넘어졌고, 이씨가 입고 있던 두꺼운 솜옷에 불이 옮겨 붙었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이라 경북 김천 집에서 꼬박 하루 걸려 대구의 한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멎은 상태였다. 시체실에 이틀 동안 안치됐던 이씨는 야간 회진을 돌던 당직 의사 덕분에 되살아났다. 의사가 이씨의 희미한 숨소리를 들은 것이다. 하지만 의식을 찾기까지는 3년이 더 걸렸다.

거동을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다. 왼손과 두 다리는 멀쩡했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세월은 길었다. 이씨는 “삼촌과 이모, 그리고 어머니까지 ‘뭘 그렇게 살아났냐. 그대로 가지’라고 한탄했었다”고 회상했다. 일그러진 얼굴 탓에 식당에서도 쫓겨나기 일쑤였으니 취직은 꿈꿀 수도 없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과정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기도원을 전전하던 이씨는 스물세 살 땐 중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4년간 복역하고 나온 뒤에는 노점 장을 하면서 근근이 연명했다. 이씨는 “그나마도 ‘사람들이 나를 흘겨본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했다”고 털어놨다.

운전대를 한 번 잡아보는 게 이씨의 소망 중 하나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서울 대치동에 있는 베스티안 서울병원이 화상수술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듯했다. 상담차 병원을 찾아갔을 때 직원이 무료로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귀띔했다. 한국자원봉사협의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은둔환자 의료지원사업’(이하 의료지원사업) 덕분이었다.

9개 전문치료병원, ‘엔젤병원’으로 참여


▎은둔환자 의료지원사업의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한옥선씨는 2004년 가스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고 오랜 세월 고통에 시달렸다. 한씨가 이수민 사무총장으로부터 심사위원 위촉장을 받고 있다. / 사진:한국자원봉사협의회
의료지원사업은 중증화상이나 고도비만, 기형 등 외형적인 신체질환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은둔환자에게 의료비와 사회 복귀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2017년 11월 사업을 시행한 후 2018년 11월까지 1년 동안 13명이 혜택을 받았다.

KMI 한국의학연구소(이사장 김순이, 이하 KMI)가 2017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연 2억원씩 사업비를 지원한다. KMI는 1985년 설립 이래 종합건강검진 대중화에 힘쓰며 국민건강증진사업을 펼치고 있다. KMI는 ‘3:3:3:1’이라는 독특한 경영이념을 채택하고 있다. 수익의 30%는 직원 급여·복리후생 등 사기 진작을 위해, 30%는 시설 및 의료장비 투자, 30%는 재무건전성 확보, 10%는 취약계층 지원·연구사업 투입 등 사회환원에 사용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KMI 관계자는 “국민건강증진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의료지원사업에 참여, 사업비로 쓸 기금을 출연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분야별 전문치료병원도 이번 의료지원사업에 핵심 축을 이뤘다. 드림성형외과·바노바기성형외과(이상 성형외과치료), 베스티안 서울병원·한강수병원(이상 화상치료), 365mc 네트웍스(고도비만치료), 서울탑치과병원(치과치료), 서울청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치료), 나누리병원(척추·관절치료), 좋은문화병원(의료지원) 등 9개 전문치료병원이 ‘엔젤병원’으로 나서 은둔환자들을 돕고 있다.

서울시 찾동추진위원단과 용산구 동주민센터, 은평구청, 마포구청, 그리고 한국사회복지관협회는 지원 대상자 발굴에 힘을 보태고 있다.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외형적인 신체질환 때문에 은둔하게 된 환자들이 ‘의료적 사각지대’와 더불어 ‘사회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외형 문제일 뿐 기능에는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편견에 상처 받기도 해 스스로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의료지원사업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한옥선(41) 장애여성네트워크 운영위원도 2004년 9월 불의의 사고로 얼굴·허리·등·배 등 전신의 약 56%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왼팔이 굽은 상태로 굳어 버린 탓에 한 번에 300만~400만원이나 드는 수술을 수차례나 받아야 했다. 결국 많은 수술비 때문에 온전히 치료받지 못한 상태로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 한 위원은 “화상인(火傷人)은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에서 규정한 15개 장애 유형에도 들지 못해 ‘장애인이면서 장애인이 아닌’ 상황에서 살아간다”면서 화상환자들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처음 병원을 나섰을 때 쏟아진 시선도 감내하기 힘든 것이었다. 한 위원은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저러고 어떻게 살아’라며 중얼거렸다. 혹자는 손이 뒤틀려 있어서 ‘닭발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구직 과정에서도 수난을 겪었다. 면접관들이 ‘여자가 수술도 좀 하고 그러지’ ‘돈 없으면 후원이라도 받고 나오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고 한다. 한 위원은 “어머니와 두 아들이 끝까지 나를 지지해준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면서 “함께 병원생활을 했던 사람 가운데는 편견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런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은둔환자를 찾아내는 일이 의료지원사업의 가장 큰 난관으로 꼽힌다. 이수민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사무총장은 “은둔환자가 치료 받겠다고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면서 “그나마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린 사회복지관을 중심으로 수소문해 지원 대상자를 발굴하고 있다”고 말했다.

편견이 만든 ‘사각지대 중 사각지대’


▎가난할수록 고도비만에 쉽게 노출되고, 고도비만 환자는 정상적인 사회·경제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두 차례 심사 끝에 대상자로 선정된 이영식씨는 지난여름 두 차례 수술을 받은 뒤 오른손 손가락까지 쥐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됐다. 수십만 원이 드는 운전면허시험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의료지원사업 덕분이었다. 이씨는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하며 차량 운전을 하고 싶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오랜 세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 말을 잘 안 믿게 됐다. 이제는 말이 아닌 몸으로, 행동으로 내가 변해서 성실하게 산다는 걸 주변에 알리고 싶다. 그래서 은둔해 있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화상환자는 외상(外傷)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화상의 책임을 환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도비만 환자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네가 게을러서 살이 찐 것’이라는 시선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러나 의료지원사업에 참여한 대상자들의 이야기는 자신의 인격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영양을 제대로 섭취할 수 없었던 경제적 환경,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데서 오는 스트레스장애 등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올해 4월부터 6개월여 간 부산 365mc병원에서 세 차례 지방흡입수술을 받게 된 김효선(40·여·가명)씨가 그랬다.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외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얼마 후 어머니는 재혼해 그의 곁을 떠났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봐도 어머니의 얼굴마저 희미해진 상태다. 스무 살 성인이 되던 1998년에는 외할머니까지 그의 곁을 떠났다. 미처 알지 못했던 빚이 잔뜩 쌓여있었던 탓에 살던 집은 압류를 당하는 처지였다. 또래들이 대학에 진학해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낭만을 즐길 때, 김씨는 외딴 세상에 던져진 듯한 고립감을 느껴야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는 무작정 상경을 결심했다. 한 곳에서 머물지 못하고 서울 시내 곳곳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러다 2011년 불쑥 임신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도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의 곁을 떠났다. 다행히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었지만, 병원비가 없어 출산한 지 하루 만에 쫓겨나듯 퇴원을 해야 했다. 남들은 산후조리원에서 관리를 받는 동안 김씨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게 화근이었다. 1년여 만에 몸무게가 30㎏ 넘게 불어난 것이다.

그때부터 은둔생활이 시작됐다. 김씨는 “이따금 밖에 나갈 때면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듯했다”고 토로했다. 기초생활수급비로는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올해 2월부터 미혼모와 그 자녀를 수용해 보호하는 시설인 모자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다른 부모들과 단체활동이 많은 모자원 생활이지만, 김씨는 “사진 찍는 게 싫어 어떻게든 빠지려고 안간힘을 썼었다”고 회상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자신 때문인지, 올해 초등학교에서 입학한 아이도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았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심해 세상 밖으로 몸을 내민 김씨에게 의료지원사업이 손을 내밀었다.

6개월간 세 차례 지방흡입수술을 받은 결과 체중은 98㎏에서 75㎏으로 크게 줄었다. 아이와 함께 내년 상반기까지 ‘엔젤병원’인 서울청정신건강의학과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은 뒤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김씨는 “엄마가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는 아이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 서고 싶다”면서 “더 이상 부끄러운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의지를 보였다.

“전인적 재활 돕는 의료복지 모델 의미 커”


▎2017년 12월 서울 충정로 국민연금공단 사옥에서 ‘은둔환자 의료지원단 발대식’이 열렸다. 김순이 KMI 한국의학연구소 이사장(앞줄 넷째), 유주영 한국자원봉사협의회 공동대표(앞줄 다섯째) 등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했다. / 사진:한국자원봉사협의회
은둔환자 의료지원사업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구혜영 한양사이버대 교수는 “이영식씨와 김효선씨 사례가 이번 사업의 중요한 포인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고도비만에 대한 치료는 다른 기관에서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살을 빼는 것으로 치료가 끝나는 사업이 대다수였다. 당장은 살을 빼도 근본 원인인 심리적 문제가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적지 않은 환자가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 의료지원사업은 발굴부터 치료, 그리고 사회 복귀까지 책임지는 ‘전인적 관점에서의 재활’이라는 점에서 전례가 없다.”

이수민 사무총장은 “민간영역이 선도해 통합형 모델을 내놓은 것도 의미가 크다”고 분석했다. 기존의 국내 복지 서비스는 관이 이끌어가고 민간에서 보조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번 사업은 기금 출연부터 엔젤병원 모집, 대상자 발굴까지 모든 과정에서 민간이 나섰다. 구 교수는 “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소금융대출도 원래는 민간에서 시작했다”며 “은둔환자 의료지원사업도 공적 영역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한옥선 심사위원은 의료지원사업의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며 “앞으로 4년이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서야 했던 그였기에 더욱 기대가 큰 것 같았다. 한 위원은 “그동안 의료·복지·취업 지원 등이 따로 진행돼 내 앞에 어떤 길이 놓여 있고,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면서 “이번 사업이 은둔환자들에게 내비게이션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다”고 평가했다.

지난 1년의 성과가 다소 아쉽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발굴과 심사·치료까지는 체계가 잡혔지만, 여전히 대상자의 사회 복귀까지 이어지는 사례관리 과정은 각 사회복지관의 선의에 맡기고 있는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신용규 한국사회복지관협회 사무총장은 “사례자를 선정한 뒤 ‘서비스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당신이 어떤 의료·사회 서비스를 받고, 6개월까지는 사회 복귀를 위한 활동을 하고, 1년 후에 결과를 보고 사회 복귀가 잘됐으면 서비스를 종료합니다’는 식의 계약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 사회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던 사례자가 다시 은둔생활로 돌아갈 거다. 내년 사업에서는 후속 조치를 체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은둔환자의 공식적인 실태조사조차 이뤄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은둔환자 문제가 장막을 뚫고 사회문제로 드러난 지 오래다. 수년간 은둔의 긴 터널을 지나왔던 한옥선 심사위원에게 ‘은둔환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은둔환자는 개인이 아니다. 그 사람이 속한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사회가 있다. 사회는 맞물려 돌아가는 건데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삐걱대기 시작한다. 벽돌이 한두 군데 빠질 때는 모르지만 별안간 벽돌집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 은둔환자가 존재감이 없다고 해서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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