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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마지막회)] ‘경주의 홍길동’ 최제우 새 세상을 꿈꾸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의 자녀로 평등하다” 

양반신분제에 한 맺힌 농민·노비·여성들에게 큰 호응…자정능력 상실한 조선, 점차 종말의 그림자가 드리우다

▎만인평등을 외치며 교세를 확장한 최제우는 관 입장에서 보면 위험인물이었다. 전북 정읍시 황사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전시된 그림.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36세가 되던 철종 10년(1859) 10월, 고향인 경주 용담(龍潭)으로 돌아왔다. 20세 때 고향을 떠난 후 16년 만이었다. 고향을 떠나 10년간 방황하던 최제우는 31세 때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가서 5년을 머물렀다.

하지만 울산에서도 하는 일마다 실패해 빚만 잔뜩 쌓였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던 최제우는 처자식을 거느리고 용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용담은 아버지 최옥이 노년에 혼자 머물며 늦둥이 아들 최제우를 가르치던 곳이다. 최제우는 14세 때 혼인하면서 유산으로 용담을 물려받았다.

용담에 돌아온 최제우는 문설주에 ‘도의 기운을 오래 보존하니,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네(道氣長存邪不入)/세상사람들과 더불어 돌아가지 않으리(世間衆人不同歸)’라는 글귀를 써 붙였다. 이제 더는 세상을 방황하지 않고 집 안에만 머물겠다는, 또 새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런 다짐이 진정임을 알리기 위해 최제우는 기왕의 이름인 ‘최제선(崔濟宣)’을 ‘최제우(崔濟愚)’로 개명하기까지 했다. 세상을 원망하며 떠돌던 젊은 시절을 어리석음의 소치로 치부하고, 이제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겠다는 다짐에서 ‘제우(濟愚)’라고 고쳤던 것이다.

최제우의 어릴 적 이름은 ‘복술(福述)’이었다. 별명은 ‘역적의 눈’이었다. ‘역적의 눈’이라는 별명은 살기와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봤기에 생겼다. 어린 최제우가 그렇게 한 이유는 신분 때문이었다. 최제우는 첩의 자식 즉 서자였다. 최제우는 자신을 서자라고 놀리며 무시하는 사람들을 살기 띤 눈으로 노려봤을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역적의 눈’이라는 별명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제우는 ‘경주의 홍길동’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용담에 돌아온 최제우에게는 아들 둘, 딸 셋 등 다섯 자녀가 있었는데 아직 어렸다. 거기에 더해 부인 박씨와 여자 종둘이 있었다. 이들을 모두 합친 아홉 명의 생계를 위해 최제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살길이 암담할 때마다 부인 박 씨는 “저 부잣집 사람들은 신선인가? 사람인가? 같은 하늘 아래 태어난 몸이 어떻게 저리 다르단 말인가?” 하면서 신세타령을 해댔다. 그럴 때 최제우는 “하늘이 사람을 내셨으니, 분명 할 일을 줄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이 하늘에 달렸으니, 죽을 염려야 있겠는가?”라는 말로 위로했다.

그러면서 최제우는 “어린 자식들을 잘 키우며 가정을 지켜내면 그 또한 낙이 아니겠는가”라고 희망적으로 말했지만, 그 역시 생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고향 사람들을 볼 면목도 없고, 돈도 없는 최제우는 다짐 그대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해가 바뀌어 철종 11년(1860)이 됐다. 그해 4월 5일은 최제우의 장조카 최맹륜의 생일이었다. 그날 장조카가 최제우에게 의관을 보내며 생일잔치에 초대했다. 아마도 장조카는 반년 넘도록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삼촌이 딱해 그렇게 했을 듯하다. 최제우는 어쩔 수 없이 장조카의 생일잔치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최제우에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을 듯하다. 잔치에 모인 친인척이나 동네 사람들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최제우를 보고 수군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최제우는 말없이 술이나 마시지 않았을까 싶다. 오후에 시작된 잔치가 어느 정도 지났을 때, 최제우는 문득 몸에 이상 증세를 느꼈다. 섬뜩한 한기가 흐르면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었다. 최제우는 몸이 편찮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상 증세는 더 심해졌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최제우가 간신히 용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겨우겨우 대청마루에 올라선 최제우는 자신도 모르는 기운에 떠밀려 겅중겅중 뛰기 시작했다. 정신은 몽롱한 게 꿈꾸는 듯 잠자는 듯했다. 이 모습에 놀란 부인 박씨는 “애고애고 내 팔자야! 무슨 일로 이런단 말인가? 애고애고 사람들아! 약도 쓸 수 없단 말인가? 캄캄한 이 밤중에 누구한테 이 말을 할꼬?”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늘의 음성 “너는 상제를 모르는가”


▎그리스도교와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해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아이들 역시 공포에 휩싸인 채 울고불고 난리였다. 그때 공중에서 최제우에게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제우는 공중을 향해 “공중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상제(上帝-한울님)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하늘에 있는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 초야에 묻힌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뒤이어 한울님은 천지개벽에 관한 일, 개벽 이래의 역사 등등에 관한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다 들은 후에야 최제우는 어느 정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최제우는 사랑방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한울님이 “너는 곧 백지(白紙)를 펴고 나의 부도(符圖)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최제우가 백지를 펴고 붓을 드니, 흰 종이 위에 태극(太極)을 감싼 궁을(弓乙) 모양의 부적이 분명하게 보였다. 최제우는 부인과 아이들을 불러 “이게 무슨 일인가? 이게 무슨 일인가? 저런 부적을 본 적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저는 그 모양이 보이지 않습니다”라며 “아버님, 이것이 무슨 일인가요? 정신 차리세요. 백지 펴고 붓을 드니 부적이 있다는 말씀, 그 또한 미친 말입니다”고 했다.

아버지 최제우가 미쳤다 생각한 아들은 어머니를 향해 “애고애고 어머님아! 우리 신명, 이 웬일이고? 아버님 거동 보소. 저런 말씀 어디 있노?”라며 울부짖었다. 부인 박씨 또한 울부짖었다. 아들과 부인이 마주앉아 손을 맞잡고 울부짖는 와중에 또다시 한울님의 음성이 최제우에게 들렸다. 그 음성은 “지각 없는 인생들아! 삼신산(三神山) 불사약(不死藥)을 사람마다 볼까 보냐? 미련한 이 인생아! 네가 다시 그려내서 그릇 안에 살라두고 냉수 한 그릇 떠다가 물에 타서 마셔보라”고 명령했다.

최제우는 한울님의 명령대로 부적 한 장을 그려 태워 마셨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최제우가 다 마시자 한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령했다. 최제우는 명령대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러자 한울님은 “너의 정성이 가히 아름답구나. 부적은 곧 삼신산 불사약이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했다. 그러자 최제우는 ‘왜 한울님이 나에게 강림해 불사약을 내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한울님이 자신에게 강림해 불사약을 내렸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래서 최제우는 “우리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려는 징조인가? 아니면 좋은 운수가 회복되려는 징조인가?” 하고 자문했다. 아울러 최제우는 “살아 있는 사람이 많고 많은데,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유교와 불교의 수천 년 운수가 다해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라고 자문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은 서자이고, 지금껏 하는 일마다 실패했는데 갑자기 운수대통 할 까닭도 없었고, 갑자기 천명이 내릴 까닭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울님이 자신에게 강림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최제우는 의아해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최제우는 한울님께 까닭을 물었다.

한울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순간 온갖 원망 사라져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 자락에 위치한 천도교 발상지 용담정(龍潭亭).
그때 한울님은 “너도 역시 사람이지만 무엇을 알았으며, 억조창생 많은 사람 동귀일체(同歸一體) 하는 줄을 사십 평생 알았더냐?”라고 책망했다. 최제우는 비록 서자이지만 한울님의 귀하고 귀한 아들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책망이었다. 최제우는 40세가 다 되도록 그런 뜻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돌아가지 않으리(世間衆人不同歸)’라는 글귀를 문설주에 써 붙일 정도로 스스로를 무시했으니, 크게 반성하고 대오각성하라는 뜻이었다.

아울러 한울님은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도록 한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이 같은 한울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최제우는 마음이 기쁘면서 자부심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은 한울님의 귀하고 귀한 아들이라는 자각이 확실하게 생겼던 것이다. 만약 최제우가 한울님의 귀하고 귀한 아들이 분명하다면 한울님의 천명을 받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자신감에서 최제우는 “그렇다면 서교(西敎)로써 사람들을 가르칠까요?”라고 물었고, 한울님은 “그렇지 않다. 나에게 영험한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요, 그 모습은 태극(太極)이다. 또 그 형태는 궁궁(弓弓)이니 나의 이 부적을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져내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 너 또한 장생(長生)하며 천하에 덕을 펼 것”이라고 했다.

그날 최제우가 경험한 것을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접신(接神) 또는 신비체험이라 할 수 있다. 최제우의 신비체험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최제우의 인생에 비춰본다면 그의 신비체험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우선 최제우가 한울님을 ‘아버지’로 분명하게 자각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동안 최제우는 서자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세상에 적대적이었고, 심지어 세상과 단절하려고까지 했다. 최제우는 서자인 자신을 무시하는 세상이 싫었고, 세상의 무시를 받는 자기 자신도 싫었던 것이다. 최제우의 무의식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첩으로 살아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 양반들에 대한 원망, 서자인 스스로에 대한 원망 등등이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울님을 ‘아버지’로 자각하는 그 순간, 최제우의 무의식에 쌓여 있던 온갖 원망은 모두 사라졌다고 이해된다. 최제우는 한울님을 ‘아버지’로 자각하는 그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을 세상에 낳아준 육신의 아버지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사실은 자신을 세상에 보낸 궁극의 존재는 저 한울님이고 그래서 한울님이 진정한 아버지라는 사실을! 나아가 한울님은 최제우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최제우의 마음속에 있던 병들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들이 앓고 있는 병들도 분명하게 보였고, 그 병을 고쳐야 한다는 소명감까지도 깨달았다. 즉 자신을 무시하며 상처 주던 사람들도 궁극적으로 한울님의 자녀들이고, 저 무지렁이 농민과 노비들도 궁극적으로 한울님의 자녀들이므로, 미워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사랑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소명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깨달음과 소명감이 신비체험과 더불어 한울님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제우는 깨달으면서도 의심스러웠고 두려웠다. 자신은 서자이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들을 가르쳐 깨우친단 말인가? 게다가 사십 가까운 인생을 늘 실패만 하고 살아왔는데, 누가 자기 말을 믿어줄 것인가? 그렇게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최제우에게 한울님은 두 가지 도구를 주며 격려했던 것이다.

첫 번째 도구는 삼신산 불사약으로 묘사된 선약(仙藥) 즉 부적이었다. 그 부적은 태극(太極)을 감싼 궁을(弓乙) 모양이어서 궁을부(弓乙符)라고 했다. 두 번째 도구는 주문(呪文)이었다. 최제우가 처음 받은 주문은 ‘지기금지(至氣今至) 사월래(四月來) 시천주(侍天主) 영아장생(令我長生) 무궁만사지(無窮萬事知)’의 19글자였다.

치유의 ‘영험함’ 덕에 신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1. 최제우의 후계자인 최시형. 동학혁명 발발 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사형선고를 받았다. / 2. 갑오농민운동에 가담했다 체포된 농민군.
그 뜻은 ‘지기(至氣-한울님)께서 이제 나에게 강림하셔서 4월 이래로 천주(天主-한울님)님을 모시니 한울님이 나로 하여금 장생하게 하시며, 영원무궁토록 만사를 알게 하시네’였다. 최제우는 훗날 이 주문을 가다듬어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의 21자 주문으로 만들었다. 그 뜻은 ‘한울님이 이제 나에게 강림하셨으니 원컨대 세상 모든 사람에게 크게 강림하소서.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가 이뤄지며, 영원히 잊지 않으면 만사를 알게 됩니다’였다.

최제우는 자신에게 강림한 한울님이 서양의 기독교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최제우에게 강림한 한울님은 인격신의 모습이 아니라 지기(至氣)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최제우는 한울님의 강림현상을 그 지기의 조화작용으로 생각해 기화(氣化)라고 묘사했다. 지기 또는 기화는 결국 기론(氣論)이라 할 수 있으며, 기론은 동양 유교 세계관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최제우는 자신의 깨달음을 동학(東學) 또는 천도(天道)라고 불렀다.

동학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최제우의 깨달음은 서학과 서양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단적으로 최제우가 받은 궁을 부는 태극을 감싼 궁을(弓乙) 모양인데, 그 궁을은 다름 아니라 서양의 돈을 뜻하는 불(弗)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궁을부를 불태워 마시는 행위는 서양을 불태워 없애버리겠다는 상징행위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제우의 동학은 서학으로부터 동양 유교문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의 발산이기도 했다.

4월 5일의 신비체험 이후 최제우는 몇 달에 걸쳐 부적과 주문이 정말 영험한 효과가 있는지 실험했다. 최제우는 수백장의 부적을 태워 마셨으며, 수도 없이 주문을 외웠다. 철종 11년(1860) 연말쯤 되자 최제우의 몸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시커멓던 얼굴은 희어지고, 빼빼 말랐던 몸은 넉넉해졌다. 얼굴에 윤기까지 흐르면서 최제우의 몸에서는 마치 선풍도골(仙風道骨)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최제우는 가까운 친인척들에게도 부적과 주문을 시험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에게서는 효험이 있었지만 어떤 사람에게서는 없었다. 그 이유를 최제우는 정성(誠)·공경(敬)·믿음(信)의 유무에서 찾아냈다. 부적과 주문을 쓸 때 한울님에 대한 정성·공경·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효험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효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최제우는 정성·공경·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한울님의 주문과 부적이 분명 영험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그런 확신에서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다.

철종 12년(1861) 봄에 최제우는 ‘포덕문(布德文)’을 지었다. ‘저 옛적부터 봄가을이 번갈아들고, 춘하추동이 오고 가며 변치 않음은,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로다’로 시작되는 포덕문은 ‘간략히 적어내어 가르쳐 보이니, 공경히 이 글을 받아 교훈의 말씀으로 삼을지어 다’로 끝난다. 이 같은 포덕문은 그동안 세상과 단절됐던 최제우가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출사표(出師表)나 같았다. 최제우의 동학 전도는 가족들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동학 전도의 핵심은 간단했다. 본인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한울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수시로 부적을 태워 마시며 주문을 외우면 늘 한울님을 모시게 돼 무병장수할 뿐만 아니라 만사형통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 같은 최제우의 전도에 부인과 자녀들을 포함해 여자 종 두 명도 동학을 믿게 됐다. 그들 역시 최제우처럼 신분차별, 여성차별에 병들었었는데 최제우의 가르침을 듣고 그 병에서 치유됐던 것이다.

최제우에게 병을 치료하는 영험함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런저런 병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최제우는 그들에게 동학의 기화를 설명하고 부적과 주문을 가르쳤다. 많은 환자가 최제우의 가르침에 감동했고, 부적과 주문을 이용해 병에서 치료됐다. 그렇게 새사람이 된 그들은 최제우를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스승님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이에 따라 최제우의 동학을 신봉하는 신도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부적과 21자 주문만 있으면 만사형통”

철종 12년(1861년) 겨울 최제우는 전도를 위해 전라도 남원까지 가기도 했다. 전도 여행을 마친 최제우는 철종 13년(1862) 봄에 경주로 돌아왔다. 그 직후인 철종 13년(1862) 3월에 경주 검등골에 살던 최시형이 최제우를 찾아왔다. 최시형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더부살이하다 최제우를 찾아왔다. 최시형은 최제우보다 3세 아래였다.

지난 21일 동안 최시형에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종지의 기름이 삼칠일 동안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밤을 밝혔던 것이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최시형은 최제우를 찾아와 까닭을 물었다. 최제우는 “그것은 조화의 커다란 효험이다. 그대의 마음이 스스로 기뻐함이니라”고 대답했다. 최시형에게 강림한 한울님의 조화라는 대답이었다. 최시형은 “지금부터 포덕을 할까요”라고 물었고, 최제우는 “포덕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한울님이 이미 최시형에게 강림했으므로 포덕해도 좋다는 허락이었다. 이후 동학은 최시형의 열성적인 전도에 힘입어 경상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최시형이 열성적으로 동학을 전도하던 시점은 바로 진주민란이 폭발한 직후였다. 이른바 삼정문란에 분개한 진주농민들이 철종 13년(1862) 2월 14일에 봉기한 후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전국적으로 농민봉기가 확산됐다. 이런 와중에 최제우와 최시형은 열성적으로 동학을 전도해 나갔다. 그 결과 철종 13년(1862) 8월쯤에 경주에만 동학 신도가 1000명이 넘을 정도로 교세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동학 교세가 빠르게 성장한 이유는 교리가 간단명료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 상황이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동학 교리는 부적과 21자 주문이 거의 전부였고, 그 부적과 21자 주문만 있으면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동학 교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은 모두 한울님의 자녀로서 평등한 존재”라고 가르침으로써 양반신분제에 원한을 품은 농민·노비·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관의 입장에서 최제우는 위험인물이었다. 철종 13년(1862) 9월 29일, 최제우는 체포돼 경주부로 압송됐다. 심문관은 “너의 의술(醫術)은 의술이 아니요, 박수는 박수가 아니요, 무당은 무당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술수로 헤아리니 무슨 이유에서인가”라고 추궁했다. 최제우가 부적과 주문으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비난이었다. 그때 최제우는 “[중용]에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솔성(率性)을 도(道)라 하며, 수도(修道)를 교(敎)라 했습니다. 저는 바로 천명·솔성·수도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쳤는데 어찌해서 이치에 잘못됐다 하십니까”라고 주장했다. 동학의 가르침은 유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는 항변이었다.

여기에 더해 700여 명의 동학 신도가 경주부에 몰려들어 시위를 벌이자 심문관은 최제우를 무죄 방면했다. 이미 동학은 수백 명 단위로 집단시위를 벌일 만큼 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최제우는 더더욱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히게 됐다.

최제우는 석방되고 두 달쯤 후인 철종 13년(1862) 12월에 각 군현별 동학조직 책임자인 접주(接主)를 임명했다. 당시 접주는 경상도 지역은 물론 경기도 지역에까지 20군현 가까이에서 수십 명이 임명됐다. 동학 신도들이 경상도를 넘어 경기도까지 퍼졌던 것이다. 동학 교세가 확장될수록 최제우에 대한 관의 위기감도 커졌다. 이를 눈치 챈 최제우는 철종 14년(1863) 7월, 기왕의 접을 모두 취소하고 없앴지만, 관의 불신을 없앨 수는 없었다.

죽음을 예견한 최제우는 철종 14년(1863) 8월 15일 새벽 최시형을 불러 ‘수명(受命)’ 두 글자를 써줬다. 자신을 뒤이어 한울님의 명령을 받으라는 뜻이었다. 이어서 최제우는 ‘용담의 물은 흘러 사해(四海)의 근원이 되고(龍潭水流四海源)/ 검등골 사람(최시형)에게는 일편단심이 있네(劍岳人 在一片心)’라는 시를 써줬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흔들림 없이 동학을 발전시키라는 뜻이었다. 이로써 최시형은 최제우를 뒤이어 제2대 동학 교주가 됐다.

혹세무민 죄로 처형당하는 교주… 움트는 갑오농민운동

최제우는 최시형을 후계자로 결정한 지 4개월 후인 철종 14년(1863) 12월 11일 선전관 정운귀에게 체포됐고 다음해 3월 10일 대구 감영에서 사형당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의정부에서는 “이번에 동학(東學)이라고 일컫는 것은 서양의 사술(邪術)을 전부 답습하고 특별히 명목만 바꿔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조기에 천토(天討)를 행해 나라의 법으로 처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에 중국의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교(白蓮敎)라는 도적들처럼 되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주장하면서 최제우의 사형을 요구했다. 이 같은 주장으로 본다면 최제우는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사형당했음을 알 수 있다.

최제우가 사형당한 후 제2대 교주 최시형은 태백산으로 피신해 전도를 계속했다. 이에 따라 동학은 더더욱 확산됐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위시해 강원도·경기도·황해도 등 조선 8도 전역으로 동학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교세가 확산되자 동학교도 중에는 동학 교세를 이용해 정치 투쟁을 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의 평등한 자녀라는 최제우의 가르침을 명실상부하게 실천하려면 현실적인 양반체제를 타파해야 하며, 동학 본래의 뜻대로 서학을 물리치려면 일본을 비롯한 외세를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주장을 내세워 농민항쟁을 선동한 첫 번째 인물은 이필제였다. 그는 동학의 참뜻을 실천하고 최제우의 억울함을 신원하려면, 최제우가 순교한 3월 10일을 기해 경상도의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영해에서 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최시형이 동조함으로써 동학 조직을 이용한 첫 번째 농민항쟁이 고종 8년(1871) 3월 영해에서 발발했다. 하지만 이필제 반란은 곧바로 진압됐다.

이필제 반란 이후에도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태백산 깊은 곳으로 피신해 전도를 계속했다. 그렇게 1870년대가 지나고 1880년대와 1890년대가 되면서 동학 교세는 또다시 급속하게 확장됐다. 예컨대 백범 김구는 고종 30년(1893) 봄 18세 되던 해에 동학교도가 됐다.

당시 김구는 “동학의 종지(宗旨)로 말하면 말세의 사악한 인간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해 새 백성이 돼 장래 참 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 국가를 건설하는 것입니다”는 말에 감동해 동학교도가 됐다. 당시 김구는 양반국가 조선에 절망해 있었다. 그런 김구에게 ‘장래 참 주인을 모시고 계룡산에 신국가를 건설하려 한다’는 동학은 복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김구처럼 양반체제에서 희망을 잃고 방황하던 농민·노비 등이 대거 입도함으로써 동학 교세가 급속히 확산됐다. 이렇게 조선의 멸망과 계룡산의 신국가 건설을 염원하는 동학이 급속도로 확장된다는 것은 조선 양반체제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조선 양반체제가 자정능력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 몰렸음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고종 30년(1893) 겨울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듬해 봄부터 농민들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돈이 있다 싶은 사람에게는 불효(不孝)·불목(不睦)이라는 애매한 죄를 뒤집어씌워 돈을 뜯어냈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는 명목에도 없는 항목을 만들어 돈을 뜯어냈다.

조선 양반체제에 자정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조병갑은 곧바로 처벌돼야 마땅했다. 하지만 조선 양반체제에는 이미 그런 자정 능력이 없었다. 결국 농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조병갑을 몰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조병갑 축출 과정에서 1894년의 갑오농민운동이 시작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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