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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19)] 쥐들의 낙원, 카르니 마타 사원 

영겁을 돌고 돈 세속의 인연, 사막의 성소에서 다시 만나네 

김미루 사진작가
성(聖)과 속(俗)이 뒤엉켜 공존하는 인도 문명의 결정체… 유목민의 ‘낙타 전통’ 현대 과학으로 재해석 작업도 활발

▎우유그릇 가장자리에 빼곡히 올라 앉은 쥐들이 인기척에 아랑곳없이 우유를 먹고 있다. 쥐를 신성하게 받드는 카르니 마타 사원의 흔한 풍경이다.
비카네르 기차역에서부터 게스트하우스까지 어떻게, 어떻게 가라는 비제이의 사전지시에 따라, 나는 역전에서 오토바이를 개조한 인력거에 올라타 운전수에게 소리쳤다. “비카네르 사가르길, 소피아 여학교 맞은편에 있는 비제이 게스트하우스!” 운전수는 아주 짙은 어조로 “소피아 스쿨”을 반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 출발했다. 길은 포장돼 있었지만, 모래와 노견의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소가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인도사람들이 소를 성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에 관해 내가 몇 번이고 들었던 나의 관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가 길을 차지하자 운전수는 소가 비킬 때까지 계속 클랙슨을 울려댔다. 그런 운전수의 행동은 소를 신성시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신경질적이고 난폭했다. 하여튼 종교적 관념에서 파생되는 사회적 행동양식은 합리적으로 파악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낙타가 끄는 짐수레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거대한 바퀴 두 개만 달린 수레에는 나무마루판이 있고 그 위로 다양한 화물이 밧줄로 묶여져 있다. 매우 효율적인 운반수단처럼 보이는데 수레를 끄는 것은 낙타 한 마리였다. 낙타가 옆을 가까이 지나갈 때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이전에 보았던 낙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낙타들은 엄청 거대하고, 우직하고, 강건해 보였다. 몸집 크기로는 쌍봉의 박트리안 낙타처럼 보였지만 여기 낙타는 어디까지나 단봉이었다. 내가 이집트나 요르단에서 본 드로메다리의 단봉낙타와 비교하면 훨씬 키가 컸고 또 몸집이 거대했다. 말 그대로 자이언트 낙타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자이언트 낙타가 평상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타르사막 오아시스 도시의 첫인상


▎거대한 단봉낙타들. 손을 뻗으면 머리가 쉽게 닿았던 중동의 낙타와 달리 인도의 낙타는 몸집이 거대하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인간적이고 온후한 모습을 한 중년부인과 그녀의 호리호리한 젊은 아들이 나를 마중했고, 나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아들은 틴에이저임이 분명했다. 큰 눈과 매우 섬세한 어린 얼굴을 지니고 있었는데, 나이 들어 보이려고 코 밑에 짙은 수염을 길렀다. 인도에서는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유리한 것이다.

게스트하우스 건물은 한 가족이 운영하는 시설치고는 꽤 큰 시설이었다. 두 개 층의 객실들이 거대한 안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은 매우 널찍했다. 단단하고 얇은 매트리스가 놓인 큰 더블베드와 벤치, 그리고 지역풍경을 그린 화가 작품들을 복사한 액자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욕실의 깨끗함에 기분 좋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은 이렇게 깨끗한 방과 너무도 맛있는 엄마요리와도 같은 훌륭한 식사를 포함하여 하루에 10달러만 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인도문명의 성실한 측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처음 마중해준 여인은 비제이의 부인이었는데, 데이지(Daisy)라고 불렀다.

그녀는 숙박하는 모든 손님을 위해 저녁에는 다양한 커리를 준비했고, 또 아침에는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달걀 베이스, 그리고 채식주의자들의 음식을 장만해 놓았다.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들어 있는 음식들이었다. 나는 닷새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데이지가 만들어 주는 맛있는 음식 이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여행객들이 인도에서 겪는 공포스러운 설사 체험담을 너무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데이지의 음식 말고는 외식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행복하게도, 나는 여행 내내 위장의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첫날 나는 시내를 탐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지역민들이 입는 옷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데이지에게 시장 가는 것에 관해 문의했더니 콧수염 달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히테슈바르(Hiteshwar)였는데 보통 히투(Hitu)라고 불렀다. 히투는 그 집의 맏이였고 나이는 20세였다. 히투는 영어를 잘했다. 나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를 만난 후로는, 비카네르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을 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인도 여성옷은 사리(sari)였다. 사리는 5m에서 8m에 이르는 긴 천으로 된 인도의 전통 의상이다. 내가 히투에게, “사리 하나 사러 갈까?”라고 했을 때, 히투는 깔깔 웃었다. 사리는 오직 결혼한 여성들을 위한 의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인 중에서도 나이 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른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실제로 완벽한 사리를 휘감은 여자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의 젊은 여성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셔츠와 바지, 그러니까 투피스에다가 스카프를 걸친다. 나이 든 여인들은 짧은 소매의 셔츠와 긴 치마, 그리고 반투명의 커다란 베일을 뒤집어쓴다. 하여튼 라자스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 특징은 이러했다. 내가 우선 산 것은 단순한 흰 셔츠와 그것에 매치되는 흰 바지였다. 모두가 아주 헐렁헐렁했고 100% 면이었다. 인도는 면의 나라이니만큼 중동에서 만나는 화학섬유제품과는 질감이 달랐다. 몸뻬 스타일의 풍성한 바지와 긴 웃옷의 콤비네이션을 보통 샬와르 카미즈(shalwar kameez)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자의 경우는 이 투피스 위에 반드시 긴 스카프를 걸쳐야만 한다.

비카네르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기


▎사원 바닥에 쌓인 음식 찌꺼기를 먹는 쥐들.
처음에 나는 대체 왜 긴 스카프를 걸쳐야만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긴 스카프의 중간을 가슴부위로 오게 해 어깨 너머로 넘긴 스카프의 양단은 등에서 양쪽으로 늘어지게 된다. 그 모양이 제대로 유지될 리 없기 때문에 항상 다시 만져야 한다. 그것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더운 날씨에 기능도 없어 보였다. 나중에야 그 까닭을 알아냈는데, 그것은 여자의 가슴과 유방의 모양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가리기 위한 예의 때문이라고 했다. 관념적으로 볼 때, 인도여인의 의상습관은 중동의 습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동에서도 베일과 까만 부르카(얼굴까지 전체를 가리는 것)의 존재는 결국 여성의 몸을 외간 남자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는 금기사항 때문이다. 인도의 의상은 단조로운 중동과는 달리 색상이 찬란했다. 종교적 관념은 동일하지만 표현양식은 보다 인간적이다.

날짜가 흘러감에 따라, 히투가 말한 대로 좀 더 컬러풀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의상들을 수집했다. 어느덧 지역 의상에 자연스럽게 동화돼 사람들은 나를 북동지역에서 온 이민노동자로 간주했다. 의상 외에 나의 검은 피부색도 이런 인식을 심어주는 데 한몫했다. 인도 북동지역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길거리에서나 시장 노점에서나 인력거정거장에서나 지역민과 섞여 있으면 외부인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인력거에 올라탔을 때도 일부러 인도사람 억양을 써서 “소피아 스쿨”이라고 외치면 드라이버는 그의 검지 하나를 들어올린다. 그것은 가격이 10루피라는 뜻이다. 미화로는 18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과 합승을 해야만 했다. 운전사는 나만 태우고 가기가 뭣하니까 곡식이나 과일의 큰 자루를 든 지역민을 같이 태우기도 했다. 그 큰 짐들을 모두 작은 인력거 공간에 구겨 넣는다. 내가 만약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인상을 던져주었다면 이런 일은 전혀 발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은 올라타면 무조건 100루피나 200루피를 내야 한다. 그러니 합승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적당한 계기에 적당히 머리를 흔드는 방법을 터득했다. 머리를 꼿꼿이 세운 상태에서 좌우로 회전시키면 그것은 거부의 표시이고, 또 아래위로 끄덕이면 그것은 오케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머리를 꼿꼿이 세운 상태에서 좌우로 기울이기만 하면 그것은 매우 오묘한 의사표시가 된다. 그것은 노우도 아니며 예스도 아니지만 또 전부를 의미할 수도 있다: “글쎄” “아마도” “응” 등 애매한 긍정·부정이 된다. 그것은 상황적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나는 며칠 만에 무의식적으로 지역민들과 소통하는 지혜를 이 ‘좌우 기울임(bobbling)’을 통해 습득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을 이해했다고 느낀다. 하여튼 이렇게 애매한 제스처로는, 타이밍만 잘 맞추면, 무엇이든 크게 잘못될 일은 없는 것이다.

꿈에 그리던 ‘쥐’의 낙원, 카르니 마타 사원


▎참배객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곳이 카르니 마타를 모신 지성소다.

▎카르니 마타 사원 입구. 유명 관광지답게 신자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과 점포들이 즐비하다. 사원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카르니 마타 사원의 안뜰과 참배객들.
2013년 1월 25일, 비카네르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맛있는 아침을 끝내자마자, 매우 특별한 사원을 하나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라자스탄의 비카네르 지역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마음속에 간직했던 특별한 장소였다. 그것은 비카네르 외곽으로 30㎞ 떨어진 곳, 데슈노크(Deshnoke)라고 불리는 작은 읍내에 있는 카르니 마타 사원(Karni Mata Temple)이었다.

이 특별한 사원에 대해, 나는 맨해튼 아파트에서 한 쌍의 쥐를 애완동물로 키우기 시작한 2006년부터 매우 소상히 알고 있었다. 월트 디즈니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 자기 창고침실을 들락거리는 쥐들을 보면서 미키 마우스 캐릭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고 했는데, 나 역시 모든 도시에서 인간과 더불어 살고 있으면서 항상 혐오와 기피의 대상으로 내몰리고 있는 너무도 영민한 이 동물에 대한 탐구로부터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 지하세계와 폐허의 심층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하면서 나의 작가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쥐를 통해 도시라는 유기체의 무의식공간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인도의 카르니 마타 사원은 ‘쥐의 사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카르니 마타는 쥐의 여신의 이름이다.

쥐라는 동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고도의 지력을 가진 놀라운 생물체이며, 나의 가슴속에는 항상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카네르에 올 기회가 생기면 가장 우선적으로 방문해야 할 곳이었다. 그곳은 수천, 수만 마리의 쥐가 살고 있는 유일한 사원이었으며, 인간이 쥐를 공경스럽게 취급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고, 또 쥐가 성스러운 위상을 지니기까지 한 곳이었다.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큐를 보고 그 사원의 존재에 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됐다. 이 다큐를 본 뒤 내가 키우는 영민한 암컷 쥐를 사원의 이름을 줄인 ‘마타’라고 이름 붙였다. 그 암쥐는 검고 배 쪽으로 흰 털이 나있었는데, 나를 타인과 구별해 알아보았고, 또 잘 따랐다. 내가 산책을 나갈 때는 내 어깨 위에 올라탔으며 어깨 위에서 똥이나 오줌을 싸는 적이 없었다. 대·소변이 마려우면 어깨로부터 팔을 타고 내려와 누었고 내가 손을 뻗치면 팔을 타고 다시 올라왔다. 산책길에서도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곤 했다.

히투는 그의 패밀리 자가용차로 나를 데슈노크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원의 주차장에 차를 댔을 때 나는 그토록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곳에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골의 정경에서 갑자기 포장된 거대한 주차장과 함께 관광촌 분위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념품과 간단한 음료와 스낵을 파는 점포들이 즐비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는 얘기다. 늘 그러하듯이 주차장 한복판에는 소들이 어슬렁거렸고 그 뒤로는 한 점포가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는데 그 광고판에는 “100% 아이스크림, 100% 채식음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여튼 아이스크림도 100%가 아닌 그 무엇이 또 있는 모양이다.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


▎사람이 다가가도 사원의 쥐들은 마치 제 세상인 것을 아는 듯 도망가지 않는다.
그리고 부근에는 개방된 신발장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당신의 신발을 여기에 벗어놓고 들어가시오. 무료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사원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고무로 된 샌들을 신고 있었고, 내 발은 이미 더러웠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문명국의 관광객들에게는 이것은 진실로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쥐만 보아도 몸서리가 쳐지는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아무리 청소부들이 하루 종일 깨끗하게 바닥을 닦는다 한들, 항상 쥐똥과 음식찌꺼기, 그리고 먼지들이 쌓여있기 마련이다. 사원은 매우 넓고 거대한 곳인데 사원 마당에만 대략 2만 마리 이상의 쥐가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사원의 주전(主殿)을 걸어 들어갈 때에, 히투는 나에게 쥐가 발등 위로 후루룩 지나가면 그것은 아주 좋은 행운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전당의 아주 정교한 대리석조각품으로 장식된 아치형 게이트와 은조각으로 장식된 대문을 지나면서 나의 흥분은 증폭되기 시작했다. 벽이나 문의 조각들은 쥐의 모양을 담고 있었는데 매우 정교한 걸작이었다. 쥐들이 내 주변에서 어른거리는 가운데 카르니 마타 사원을 바라보는 나의 느낌은 그토록 읽고 배우고 동경했던 미켈란젤로의 그림으로 장식된 장엄한 시스틴 성당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 받은 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이 사원에 대한 나의 향심이 컸던 것이다. 인도문명은 인간존재의 모든 극한상황, 그리고 그 감춰진 가능성을 노출시키는 매우 잡다한 문명이다. 성과 속, 정토(淨土)와 예토(穢土), 해탈과 번뇌가 하나로 뒤엉켜진 문명이다. 그래서 그 가능성의 심도는 어느 문명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다.

카르니 마타를 위한 지성소가 자리 잡고 있는 대리석 성전 안에는 내가 사진이나 비디오를 통하여 익숙하게 보아왔던 흑색·백색 대리석 타일이 엇배치되어 있는 마룻바닥이 깔려 있다. 그리고 홀의 여러 코너에는 우유가 가득 담긴 큰 둥근 금속쟁반이 놓여있는데 그 주변으로 쟁반 테두리에 올라앉아 몸의 밸런스를 취하며 우유를 먹고 있는 쥐들이 새까맣게 무리를 짓고 있다.

이러한 충격적인 광경에 사람들이 놀라서 정작 이 사원의 건축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마는데, 이 사원이야말로 후기 무굴 예술양식의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걸작에 속한다. 이곳에 오는 방문객의 대부분은 외국에서 오는 관광객이 아니라 거의 인도사람이다. 그만큼 이곳은 토착민 순례자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인도의 순례자들은 곡식과 단것들로 만들어진 다양한 음식을 준비하여 쥐들을 공양한다. 특히 순례자들은 ‘하얀 쥐’를 찾기를 매우 갈망한다. 하얀 쥐는 여신 카르니 마타 본인의 화신이거나, 또 그녀의 아들 중의 하나의 화신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매우 놀랄 만한 사실은 쥐들이 갉아먹은 음식을 사람이 같이 먹는 것을 지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쥐들이 먹고 남은 우유를 섞어서 만든 짜이를 마시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쥐가 먹고 남긴 음식을 먹고 마신다. 나는 도대체 그러한 행위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카르니 마타가 속한 계급은 라자스탄 지역의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에 해당되는 차란(Charan)이라는 카스트이다. 이 차란 카스트의 지역공동체 사람들은 쥐들이야말로 이 카스트에 속한 모든 사람이나 그들의 조상들의 화신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자기들 가족이나 친척 모두가 죽으면 반드시 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쥐 사원에 깃든 카르니 마타의 전설


▎쥐와 카르니 마타 전설을 부조로 형상화한 신전의 문
우리가 보통 윤회(輪廻), 즉 삼사라(sa sāra)라고 부르는 것은 불교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인도문명 전반에 깔려 있는 공통 기저라 말할 수 있다. 삼사라는 ‘흐른다’는 뜻이다. 그 흐름은 생과 사를 연결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생사유전(生死流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업(業·karma)의 유전을 믿는 사람들에겐 쥐와 사람의 동일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쥐 사원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깨는, 이 성소야말로 성과 속의 극한점이 만나는 곳이라 말할 수 있다.

왜 이곳 사람들이 그토록 쥐를 숭상하는지 윤회적 사유를 전제로 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쥐들은 그들의 돌아가신 할머니·할아버지일 수도 있고, 또 이 쥐들이 미래의 자기 자녀로 환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념은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 쥐 사원의 주신인 카르니 마타는 역사적 실제인물이었으며 살아 있는 여신이었다. 그녀는 1387년에 태어나 1538년에 죽었으니 151세를 산 것이다. 영국에서 152세로 장수한 농부 올드 톰 파(Old Tom Parr, 1483~1635)의 경우를 보아도 불가능한 이야기 같지는 않다. 카르니 마타는 종교적·군사적으로 탁월한 민중지도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예수나 여타 종교적 창시자처럼 많은 이적을 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보통사람처럼 감정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날 카르니 마타의 막내아들 락스만(Laxman)이 연못에서 물을 마시려다가 그 연못에 빠져 죽었는데, 그녀는 저승사자인 야마(Yama)에게 락스만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런데 야마는 그 청을 거절한다. 카르니 마타는 화가 나서 맹세한다. 그녀의 자녀나 후손들은 그 어느 누구도 저승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대신 쥐로 환생할 것이라고!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에는 여러 버전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어떤 버전에는 야마가 락스만으로 하여금 쥐로 환생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하는데, 역시 이런 이야기는 매가리가 없다. 그리고 카르니 마타의 전기적 스토리에 의하면 카르니마타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그에게 결혼을 간구하는 남성에게 자기 여동생을 주고 자기는 평생 순결을 지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자식이란 이종조카가 된다. 이야기가 어떻든지 카르니 마타라는 전설적 인물은 그녀가 산 시대에 매우 존경을 받은 경이로운 인물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녀와 관련된 성채나 유적도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왕조 초엽에 해당되는데 이렇게 신화적으로 숭배되는 것을 보면 인도문명이 얼마나 짙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국립낙타연구소 입구에 있는 간판과 입구. 이곳은 유목민과 떼어놓을 수 없는 낙타를 과학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낙타 과학’의 본산, 국립낙타연구소


▎낙타 축제의 개막 이벤트인 낙타 경주. 현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오락거리다. 낙타 경주는 중동의 사막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갓 태어난 새끼 낙타.
사원 내에서 기념사진 몇 개를 찍고 쥐들의 행태를 관찰한 후에, 히투는 나를 다음 관광지인 ‘국립낙타연구소’로 데려갔다. 나는 다음에 기회가 되는대로 카르니 마타 사원에 반드시 다시 오리라고 마음먹었다. 쥐 사원에서의 새로운 행위예술과 사진작업을 기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마침 자가용이 있을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곳을 둘러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 낙타연구소는 비카네르 외곽에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농장이었다. 거대한 우리, 외양간, 곡식 창고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4개의 다른 종의 낙타 400마리가 사육되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 낙타, 그리고 이전에 본 적 없는 엄청 거대한 낙타들을 얼이 빠지도록 흥미롭게 쳐다본 후에, 라자스탄의 다른 종자들의 성격에 관하여 팻말에 쓰여진 것을 읽고 또 그들의 차이를 비교해 보려고 눈앞의 낙타들을 관찰해 보았으나, 결국 나의 소견에는 모두가 다 비슷하게 보였다.

낙타연구소의 목표는 낙타축산학, 유전학, 질병 예방, 밀크 생산, 짐 끄는 능력 등을 향상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 낙타의 일하는 능력에 관한 현대적 응용으로서 재미있는 측면의 하나는 낙타로 하여금 특수 방아를 돌리게 하여 전기를 생산케 하는 것이다. 연구소의 시설들을 둘러보고 느끼는 것은, 도시에서는 제아무리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을지라도 타르사막 지역에서는 낙타가 지역민의 삶의 주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근대화·산업화라는 명목 아래 모든 삶의 방식이 무차별하게 서구식으로 획일화돼 가는 시대의 추세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연구소에 있는 한 점포에 들렀는데 이름이 ‘카멜 밀크 팔러(Camel Milk Parlor)’였다. 그곳에서는 낙타 밀크와 그것으로 만든 차나 아이스크림 같은 다양한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나는 따끈한 차를 선택했다. 화덕에 끓여지지 않은 음식으로부터 위장이 탈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나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 안마당에는 성대한 디너파티가 열렸다. 비제이는 그가 잘 아는 다른 호스텔에 묵고 있는 여행객들까지도 초대했다. 비제이는 내가 아주 다채롭게 수놓은 인도 여자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보자, 아주 유쾌하게 나와 인사를 나누고, 그 옆에 있는 두 명의 블론드 머리를 한 호주 여성과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다. 이 사진은 낙타축제에 참여하는 외국인들을 소개하는 기사에 쓰일 것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관해 별 생각도 없이 즉석에서 응낙하고 말았다. 나는 비제이가 하라는 대로, 호주 여성들의 팔뚝에 헤나 문신을 그리는 작업을 하는 척했다. 그때에 신문사 소속의 사진사가 몇 방의 사진을 찍었다. 많은 여성관광객이 낙타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1월 28일에 있게 될 미녀선발대회에 재미 삼아 참가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이국 여성들과 함께 한 낙타 축제


▎지역신문에 소개된 필자와 호주에서 온 여행자들.
디너파티가 진행됨에 따라 나는 호주에서 온 젊은 여성들과 다른 관광객들과 섞여 잡담을 나누면서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라자스탄 지역행사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고 말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나와 두 여성의 사진과 전면기사가 실린 신문을 펼쳐보게 됐다. 페스티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고,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모험은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셋째 날, 나는 나 홀로 비카네르 읍내를 탐험했다. 고도의 작은 골목들을 미로처럼 헤매는 기쁨을 누리면서 시장에서 지역민들과 섞이고 스카프 가격을 흥정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 그러니까 2013년 1월 27일, 나는 비카네르 시내에 있는 거대한 16세기 주나가르 요새(Junagarth Fort)를 방문했다. 5만㎡에 달하는 거대한 요새 안에는 궁전과 신전 그리고 다양한 양식의 파빌리온이 들어차 있었다. 나는 이 인상적인 요새를 보고 난 후에 카멜 페스티벌 행사장으로 향했다.

페스티벌은 모래로 뒤덮인 사막지대에서 낙타경주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수백 명의 관람객,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그들은 레이스 코스로 지정된 평지를 따라 솟아있는 모래언덕에 모여 흥분되는 경주를 바라볼 태세를 차리고 앉아 있었다. 경주가 한창 시작될 때, 그리고 경주가 끝나고 나서는 구식 확성기가 장착된 오래된 픽업트럭 위에 열 명 정도가 타올라서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발표를 해댔다. 이 사막동네의 분위기는 내가 말리 팀북투에서 참관했던 사막축제를 연상시켰다. 단지 입은 의상이 달랐고 쓰는 언어가 달랐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나의 체험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의식의 스크린을 휙 스쳐 지나갔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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