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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화제] 움베르토 에코, 마지막 소설 '제0호'의 메시지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다 

이세욱 번역가
미궁처럼 복잡한 작품 세계 속에 담긴 아름답고 정밀한 규칙성이 매력…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언론장악 풍자한 유작, ‘테세우스의 배’ 출판사로 권력에 맞선 지식인 표상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자이자 미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지식인의 사회참여 의무에 충실했던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들은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화살이었다.
에코의 책들은 번역자에게 엄청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학술 서적이나 문학 평론, 시평은 그래도 낫다. 주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서, 그 주제를 좀 알고 있다면 그런 대로 견딜 만하다. 하지만 소설은 압도적이다. 그가 정교하게 구축한 소설 세계에 처음 들어서면, 복잡한 미궁 속에 들어온 듯도 하고 위태위태한 벼랑에 서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시공간이 크게 확장되고 여러 언어가 뒤섞이고 플롯이 정묘하게 펼쳐지면서 갖가지 주제와 논설이 넘쳐난다. 그래도 번역가는 좌절하지 않는다. 믿음과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에코의 소설 세계는 미궁처럼 복잡하지만, 이 미궁 속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규칙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규칙을 알고 있으면 소설 세계가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리라는 기대 말이다.

8년 전 늦여름의 어느 날, 에코의 초기 소설들을 번역하신 이윤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슬픈 날이 생각난다. [장미의 이름]에 그치지 않고 [푸코의 진자]와 [전날의 섬]까지 잇달아 번역하신 선생의 노고는 감명 깊다. [장미의 이름]을 개역한 뒤에 ‘최고의 번역’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 소설과 [푸코의 진자]의 번역 때문에 엄청난 고뇌를 겪은 게 분명하다. 두 소설의 개역판을 내고 재개역판을 낼 때마다 썼던 역자 후기가 그 점을 잘 말해 준다. ‘오역과 가공할 만한 넘겨짚기 해석과 졸속과 졸문 때문에 몹시 괴로웠노라’ 고백하기도 했고, [푸코의 진자]의 초판을 ‘무너진 성수대교’에 비유하면서 그 다리를 허물어내고 튼튼한 다리를 짓겠노라 약속하기도 했다.

이윤기 선생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인 2010년 3월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이탈리아 문학 번역가 후지무라 마사아키가 떠올랐다. 두 분의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가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두 분 모두 [푸코의 진자]와 [전날의 섬]을 번역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는 기묘한 인연이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푸코의 진자]가 두 번역자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윤기 선생이 이 소설을 두고 ‘에코, 푸코, 사이코’라는 농담을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독자로서 [푸코의 진자]를 열심히 읽었고, 주인공 카소봉의 행로를 따라 한밤중에 파리 시내를 걷기도 했다. 나중에 에코의 번역자가 되어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옮기던 시절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의 니차 몬페라토라는 소읍에 머물며 작업을 하다가 [푸코의 진자]에 감춰진 비밀을 발견하고 환호했던 기억도 난다. 내가 번역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읽고 여행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푸코의 진자]와 관련된 참고 자료를 읽거나 여행 중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새롭게 배운 것이 너무나 많았다. 에코의 텍스트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온몸으로 깨달았다. 나중에 이윤기 선생을 만나 [푸코의 진자]를 다시 번역하는 방안을 놓고 의논해 보리라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저널리스트 에코의 ‘가장 쉬운’ 소설


▎에코의 유작 소설인 [제0호]. 언론계의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나쁜 케이스를 묘사했다. / 사진:열린책들
나는 에코의 소설들을 좋아했기에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도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 등의 번역으로 다시 읽었다. 이탈리아어 원작과 여러 언어의 번역을 비교해 가며 읽은 적도 있었다. 그런 독서는 에코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에 대한 이해를 넓혀줬다. 번역자의 작은 오류에 신경 쓰기보다는 원작의 문체를 온전히 재현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느 번역이나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번역이나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에코의 텍스트가 바로 그런 깨달음과 너그러움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에코의 소설을 어렵게 생각하는 독자를 많이 만났다. 아마도 에코가 고금의 명저들을 두루 읽은 데서 나오는 그 박람강기의 위력에 주눅이 드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넘쳐나는 정보에 지레 겁을 먹으면 안 된다. 그 정보들은 에코가 설계한 미궁의 작은 요소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미궁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규칙을 찾아내어 소설 세계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닐까? 에코 소설을 읽는 것은 정보의 홍수에 맥없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에코가 제안한 게임에 발랄하게 동참하는 것이다. 라틴어 문장이 길게 나오더라도 그 의미보다는 효과를 음미하며 수수께끼를 즐기고, 열거법이 가공할 방식으로 터져 나올 때는 그 리듬을 살랑살랑 타면서 정신의 지평을 확장하면 좋으리라.

혹시라도 앞선 소설들에 겁먹은 독자가 있다면, 마지막으로 나온 가장 얇은 소설 [제0호]로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것은 ‘저널리스트’ 에코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에코는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중세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뒤인 20대 중반부터 30대에 걸쳐, 텔레비전 문화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네오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는가 하면, 출판 기획을 하거나 문화운동 단체를 이끄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텔레비전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일찌감치 매스컴과 새로운 표현 형식에 익숙해졌고, 연속극이나 연예 프로그램에서 키치와 스타들을 접하며 대중문화의 양상을 관찰했다. 이 경험은 [매스컴 미학]이란 매스미디어 비평서의 토대가 되어 이탈리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매스미디어의 본질과 효과를 분석하고 유해한 측면을 비판하며 문화적 내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고자 한 저서였다. 그 뒤로 기호학이라는 종합 학문의 틀을 잡아가면서, 40년 넘게 저널리즘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해 성찰하고 여러 언론인과 토론을 벌였다. [라 레푸블리카] 같은 주요 일간지나 [레스프레소] 같은 유력 주간지에 꾸준하게 칼럼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레스프레소]에서 1985년부터 타계 직전까지 30년 동안 연재한 ‘미네르바의 종이성냥’이라는 칼럼은 해학이 넘치는 시평으로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고,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등의 저서에 묶여서 출간되기도 했다.

에코가 스스로 선언한 대로, 저널리즘은 그의 정치적 의무였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메시지들에 둘러싸이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학자와 시민으로서 그가 할 일이었다. 소설 [제0호]엔 저널리즘에 관한 그의 연구와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지만 에코는 용감한 저널리스트나 일반적인 기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다. 그보다는 언론계의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나쁜 경우를 묘사했다.

에코, 자본권력가 베를루스코니를 견제하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이탈리아 최대 재벌 총수이자 우파 정치인, 언론 사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에코는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 사회를 획일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로운 출판사를 설립했다.
에코는 단순한 기호학자가 아니라, 기호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게 하려고 노력한 기호학적 전사(戰士)였다. 그의 소설은 주로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다룬다. [장미의 이름]은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도달하는가’ 하는 문제다. [전날의 섬]은 자아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고,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안개로 상징되는 파시즘 체제의 몽매주의를 뚫고 진실에 도달해 가는 소년의 이야기다. [푸코의 진자]로 시작하여 [바우돌리노]를 거쳐 [프라하의 묘지]에 이르는 작품들은 거짓의 문제를 가장 독하고 풍자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나온 [제0호]는 학식을 가장 적게 드러내는 저널리스트의 문체로 그런 전통을 계승한다. 에코가 말한 대로, 이전 소설들이 말러의 교향곡이라면, 이 소설은 재즈에 더 가깝다. 찰리 파커나 베니 굿맨의 연주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1992년 정경유착의 비리가 만천하에 폭로되고 수많은 정치인이 수감됐을 때, 이탈리아는 제1공화국이 끝나고 제2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로 큰돈을 번 기업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권력의 공터를 장악하면서 저널리즘은 쇠락의 길을 걷고 정경유착의 악습은 온존됐다. [제0호]는 그런 사회의 우스꽝스럽고 슬픈 초상이다.

이탈리아는 아름다운 땅이고 고대와 중세의 문화유산이 풍부한 나라지만, 정치는 투명하지 않고 음모이론이 넘쳐나고 진실 게임으로 아옹다옹하며 세월을 허송한다. 기호학자 에코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런 이탈리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마지막 헌신은 출판 분야에서 나타났다. 그는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능력을 지닌 출판인이기도 했다. 일찍이 30대에 밀라노 봄피아니 출판사를 위해 철학 에세이 선집을 기획했고, 그 뒤로도 중요한 출판사의 편집인들과 갖가지 방식으로 협력하고 관계를 이어왔다. 그러던 그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여러 작가를 모아 새 출판사를 창립했다. 그 출판사의 이름은 ‘라 나베 디테세오’, 즉 ‘테세우스의 배’다. 그리스의 한 전설에 따르면,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에 가서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죽이고 돌아온 뒤에 아테네 사람들은 이 영웅을 기리는 뜻에서 그가 타고 갔다 온 배를 보존했다. 널빤지가 썩으면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렇게 수 세기가 지나가자 원래의 널빤지들은 다 사라지고 테세우스의 배는 새로운 목재로 이뤄진 배가 됐다. 그렇다면 이것은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철학에서 사용하는 사고 실험 가운데 하나다.

에코는 왜 자신의 거의 모든 책을 출간한 봄피아니를 떠나 그런 이름을 가진 새 출판사를 창립했을까? 이름에 철학적 함의가 있는 것도 흥미롭지만, 출판사를 만든 이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사건의 발단은 언론에 이어 출판 분야를 장악하려 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욕심이었다. 이탈리아의 최대 출판사는 몬다도리 그룹인데, 이 그룹의 50%가 넘는 주식을 베를루스코니의 회사인 피닌베스트가 보유하고 있으며, 그의 딸 마리나 베를루스코니가 그룹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런데 이 몬다도리가 봄피아니를 자회사로 둔 리촐리-코리에레 델라 세라(RCS) 미디어 그룹을 인수했다. 그에 따라 몬다도리 그룹이 이탈리아 출판의 40%를 관장하게 됐다. 방송을 장악해 중우정치를 획책하고 국정과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사람의 자본이 출판계까지 좌지우지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에코는 이 거대 자본에 맞서는 출판 문화계의 협동조합을 구상하며 200만 유로의 자본을 투자하고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을 모았다. 봄피아니에서 책을 내던 많은 작가가 동참하고, 타르 벤 젤룬이나 파울로 코엘료 같은 세계적인 작가도 이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로 했다. 그들은 2016년 5월에 첫 책을 내고, 매년 50권의 문예 작품과 에세이를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노년의 에코가 초거대 자본의 전횡에 맞서 나간다는 사실에 지식인들 사이에 희망이 번져 나갔다. 그런데 세 달 뒤인 2016년 2월에 암을 앓던 에코가 세상을 떠났다. 철학자 에코의 마지막 도전은 거기에서 끝났다. 유력한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세계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한 명을 잃었다. 우리는 세계에 관한 그의 시선을 그리워하리라.”

“세계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을 잃었다”


▎에코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을 번역해 한국에 알린 고(故) 이윤기 작가. 번역가의 어려움을 에코를 통해 절감했다.
새 출판사 ‘테세우스의 배’는 원래 2016년 5월에 내기로 했던 에코의 시평집 [파페 사탄 알레페―유동하는 사회에 관한 연대기]의 출간을 앞당겼다. 이미 준비가 돼 있던 책이라 에코의 장례식 바로 다음 주에 출간한 것이다. 에코의 마지막 글은 [제0호]라는 소설이지만, [파테 사탄 알레페]는 에코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책이다. 2000년부터 2015년에 걸쳐서 주간지 [레스프레소]에 격주로 실었던 칼럼 가운데 200여 편을 엄선해 엮은 책이다. ‘파페 사탄 알레페’라는 말은 단테의 [신곡] ‘지옥’ 편 제7곡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구다. 수많은 학자와 번역가가 해석을 시도했지만 그 뜻이 분명치 않다는 게 정설이다. 에코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개념을 받아들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유동하는 사회’로 보고 이 사회의 다양한 현상에 관한 칼럼을 썼다. 말하자면 ‘파페 사탄 알레페’처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에 관한 예리하고도 해학적인 시평들을 써낸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내년 상반기에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 독자들도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이 책을 만나게 될 것이다. 21세기 초, 철학자 에코의 관찰과 사유가 우리의 눈을 밝히고 기쁨을 줬으면 좋겠다.

- 이세욱 번역가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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