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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사랑학 개론(13)]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사람은 겉만 봐선 몰라, 첫인상이 틀리기도 한다 

김환영 중앙일보 지식전문기자
중산층 여성이 귀족 남성과 ‘밀당’ 끝에 결혼한 스토리…오늘날 영국·한국 결혼 풍속도에도 많은 생각거리 던져

▎제인 오스틴 원작을 영화로 한 로맨스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불행한 결혼이냐 아니면 행복한 독신이냐.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흑백논리(false dilemma)다. 사랑이 있는 행복한 결혼이나 불행한 독신도 있다. [오만과 편견]은 독신자가 쓴 사랑과 결혼 이야기다.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
어떤 글의 ‘리드(lead)’, 즉 도입부는 독자가 그 글을 계속 읽어나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하는 데 결정적이다(물론 글쟁이는 독자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글 전체의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락 한 단락을 마치 리드처럼 공들여 쓴다). 신문기사건 소설이건 에세이건 서평이건 마찬가지다. 리드가 결정적이다. [뉴욕타임스(NYT)] [이코노미스트] 등 세계의 유명 매체들의 제작 매뉴얼은 하나같이 리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어떤 글의 리드·도입부는 독자가 글을 계속 읽어 나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하는 데 결정적”이라는 이 글의 리드를 읽고 뭔가 마음에 안 들거나 불편하거나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읽기를 멈추는 독자도 있으리라.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힘찬 리드 중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의 “모든 행복한 가정은 대동소이하다. 모든 불행한 가정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만큼 유명한 리드는, 아니 어쩌면 더 유명한 리드는,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다음 첫 문장이다.

“상당한 재력가인 미혼 남자는, 반드시 아내가 필요하다는 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진리다(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왜 세계의 독자들은 첫 문장, 혹은 소설 전체에 매료된 것일까. 짧고 쉬운 대답은 ‘사랑과 결혼에 미치는 계급·신분 차이라는 핵심 문제를 재미있게 건드렸기 때문이다’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19세기 초반 버전의 신데렐라 이야기다. 21세기 초반 독자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진리’ 구현의 기회 잡게 되는 베넷 부인


▎[오만과 편견]을 중학생 눈높이에 맞게 축약·번역한 한글판.
첫 문장에 담긴 주장은 적어도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의 엄마인 베넷(Bennett) 부인에겐 보편적인 진리다. 베넷 부인에게 진리를 구현할 기회가 왔다. 작품의 무대는 런던으로부터 약 80㎞ 떨어진 곳. 찰스 빙리(Charles Bingley)라는 돈 많은 미혼 남자가 인근에 이사 왔다. 게다가 빙리보다 두 배 정도 재산이 많은 피츠윌리엄 다시(Fitzwilliam Darcy)가 빙리의 친구다. 빙리는 상업으로 돈을 번 신흥부자 가문 출신.

다시 집안은 정복왕 윌리엄(1028~1087)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는 창문이 1000개나 되는 집에 산다. 다시의 연간 수입은 오늘날 가치로 1850만 달러에 해당한다는 추산도 있다. 잘하면 최소한 딸 두 명의 배필을 마련할 인생일대의 기회가 베넷 부인에게 온 것이다.

상당히 섹시한 중년 부인인 베넷은 딸 다섯의 엄마다. 제인·엘리자베스·메리·캐서린·리디아다. 아들은 없다. 그래서 당시 영국법과 관습에 따라 재산은 남자 친척에게 상속된다. 남편이 죽으면, 잘못하면 자신과 딸들은 알거지 신세.

우리 속담에 “내 딸이 고와야 사위를 고른다”고 했다. 엄마의 딸 다섯은 모두 개성 있고 매력 있다. 그런데 인품은 훌륭하지만 좀 냉소적인 기질이 있는 남편은 아내의 애타는 노력에 ‘나 몰라’ 한다. 딸들의 결혼을 위해 아내가 워낙 열심이라 남편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태평한 남편은 아내를 놀린다. 어쩌면 그게 그의 최고의 낙. 엄마가 좀 무식하고 경박한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또 베넷 부인의 열성은 종종 역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딸들의 행복을 바라는 이 엄마의 바람에 누가 돌을 던지리. 어쩌면 이 엄마는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저평가된 인물이다.

엄마는 이 소설 속에서 딸 다섯 중 3명을 좋은 데로 시집보낸다. 나머지 두 명도 좋은 신랑을 얻는다는 후문. 가상의 인물이지만 이 엄마는 자신의 꿈을 이뤘다. 유식하건 무식하건 일단 꿈이 있는 게 장땡이다.

[오만과 편견]은 전 세계에서 최소 2000만 부가 팔린 책이다. [오만과 편견]은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일종의 ‘산업’이라는 주장도 있다. 저작권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영화·드라마 등으로 리메이크되기 때문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먼 조상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아니라 두 가문이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가족 소설’이기도 하다.

원제 [Pride and Prejudice]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제목과 제목의 번역 문제를 좀 따질 필요가 있다. 제목에 담긴 어떤 핵심을 이해해야 소설 전체를 술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와 엘리자베스의 우연한 첫만남


▎영화 [오만과 편견]의 배경인 채츠워스 하우스 앞에 선 데본셔 공작부인(오른쪽)과 영국 모델 스텔라 테넌트.
프라이드(pride)는 엄연히 우리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외래어다. 외래어도 일단 우리 사전에 등록되면 우리말이다.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은 프라이드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 소유물, 행위에 대한 만족에서 오는 자존심.”

우리말 프라이드는 자존심·자존감·긍지 등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영어 pride는 이에 더해 자만심·우월감·오만을 의미한다. 오만(傲慢)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 또는 그 태도나 행동”이다.

[Pride and Prejudice]의 Pride에는 이중 의미(double meaning)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자존심·자존감·긍지로서의 프라이드가 지나치면 자만심·우월감·오만이다. 과유불급인 것이다. 또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일 수도 있다. 내 프라이드를 남은 오만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제목이 [Pride and Prejudice]이니 남성 주인공을 ‘pride’, 여성 주인공을 편견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적어도 겉으로는 좀 오만한 한 남자를, 자신은 사람을 잘 파악한다고 자부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한 여자가 만나, 각기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고 결혼해 ‘그들은 그 뒤 쭉 행복하게 살았다(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의 시작으로 끝난다는 투의 해석이다.

좀 치우친 해석이다. 달리 볼 수도 있다. 반대로 여성 주인공이 pride, 남성 주인공이 편견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둘 다 각기 pride와 편견으로부터 모두 자유롭지 못했으나 사랑으로 pride와 편견을 극복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28세인 남성 주인공 다시(Darcy)는 어마어마한 부자다. 당시 영국 사회에 등장한 신흥 부자가 아니라 뼈대 있는 명문대가(名門大家), 귀족이다. 당시 귀족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직업이었다. 다시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평생 물질적인 고민을 없애는 ‘대박’이었다.

20세인 여성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Elizabeth Bennett)은 평범한 시골 지주(젠트리), 요즘으로 말하면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귀족도 중산층도 나름 프라이드가 있다. 또 서로에 대한 편견도 있다. 둘은 처음 춤추는 자리에서 만났다. 다시는 엘리자베스와 춤추기를 거부한다. 엘리자베스는 모욕감을 느낀다. 다시는 엘리자베스의 생김새가 별로라고 생각한 듯하다.

아니면 이마저도 다시의 고급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다시는 마치 초등학생처럼 관심 있는 여학생에게 일부러 못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판단은 독자의 몫. 어쩌면 속마음과는 다른 말과 행동으로 다시는 엘리자베스의 이목을 끄는 데 일단 성공했다.

보통은 남자가 사랑에 빨리 빠지고 여성은 천천히 빠진다고 한다. 그런데 [오만과 편견]의 두 주인공은 둘 다 천천히 사랑에 빠진다.

사람을 바꾸는 사랑의 힘… 겸손하게·이성적으로


▎배우 이민우와 김희선이 출연했던 드라마 [춘향전]. 이몽룡의 프러포즈를 성춘향이 받아들이면서 러브스토리가 시작된다.
다시의 이런 오만한 태도에 엘리자베스는 그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된다. ‘귀족놈들은 다 이래’라는 식으로 느꼈을 수도. 한마디로 남주인공에 대한 여주인공의 첫인상은 ‘밥맛’. 엘리자베스에 대한 다시의 첫인상은 ‘괜찮지만 아름답지는 않다’였다. 호감과는 거리가 먼 첫만남은 과연 어떻게 사랑과 결혼으로 골인할 것인가.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지만,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사랑은 서서히 타오르는 사랑이다. 두 주인공은 옥신각신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신데렐라의 리메이크라고도 할 수 있는 [오만과 편견]은 공주님과 왕자님의 러브스토리는 일사천리가 아니다(‘첫눈 사랑’과 ‘서서히 사랑’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지는 알 수 없다. 온갖 시시콜콜한 문제를 다루는 미국이나 유럽 학계에서 결정타를 날리는 학술 논문이 이미 나왔을 수도 있다).

특히 다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엘리자베스의 매력과 지성에 빠져든다. 엘리자베스의 고단수·고품격 꼬리치기 작전에 다시가 걸려든 것일 수도 있다. 역시 판단은 독자의 몫. 엘리자베스는 독서를 통해 아는 게 많았다.

엘리자베스·다시와 달리 언니인 제인과 빙리는 첫눈에 서로 좋게 여긴다. 언니 제인은 인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다. 베넷 부인의 막내 딸 리디아가 조지 위컴이라는 장교와 ‘눈이 맞아 함께 달아나는(elope)’ 대형 사고를 친다. 15세에 불과한 리디아가 겉만 번지르르한 남자의 꼬임에 빠진 것. 당시 혼전 관계는 어마어마한 스캔들이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나머지 딸도 결혼하기 힘들어지는 곤란한 상황이다. 게다가 그 나쁜 남자는 막내 딸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

사랑에 눈 먼 다시는, 둘이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 나쁜 남자의 도박 빚을 갚아준다. 다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두 번 청혼했다. 첫 번째에는 ‘감히 네가 내 청혼을 거절하지 않겠지’라는 오만한 태도로 청혼했다가 퇴짜 맞는다. 두 번째는 성공. 남자는 겸손해졌고 여자는 편견을 풀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을 바꾼다. 겸손하게 만든다. 사랑은 일차적으로는 감정이지만, 사람을 보다 이성적으로 만들어 편견과 오해를 풀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에 성공하려면 의사 전달 법부터 익혀라


▎한 뮤지컬 공연에서 빨간 모자 소녀가 인형 그림자로부터 프러포즈를 받고 있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에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바뀌는 사람은 남녀 주인공 둘뿐이다. 저자 제인 오스틴은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현실주의자였다.

제인 오스틴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찰스 디킨스(1812~1870)와 더불어 영국이 낳은 3대 작가다. 성공회 사제의 딸로 6남2녀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저자는 1817년 41세를 일기로 에디슨병으로 사망했다. 런던에 있는 윈체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오만과 편견]은 21세인 1796년부터 쓰기 시작해 1797년에 초고를 완성한 소설이다. 출판사가 원고를 읽어보지도 않고 출간을 거절했다고 전한다.

1813년 38세 때 익명으로 [오만과 편견]을 출간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 소설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16~18세기 유럽을 휩쓴 계몽주의가 중시한 ‘인간’은 일차적으로 ‘남자’였다.

제인 오스틴은 결혼하지 않았다. 결혼할 뻔한 적도 있었다. 1802년 청혼을 받아들였다가 그 다음날 마음이 바뀌어 거절했다. 어쩌면 제인은 결혼의 행복보다는 불멸의 작품을 남기기로 무의식적으로나마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오만과 편견] 교훈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는 게 반드시 포함돼야 할 듯하다. [오만과 편견]의 원 제목은 ‘첫인상(First Impressions)’이었다. 첫인상은 맞는 경우도 있고 틀린 경우도 있다.

[오만과 편견]에서도 ‘의사소통의 실패(communication failure)’가 큰 문제다. 사랑에 성공하려면 자신의 의사를 잘 전달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엘리자베스의 언니인 제인은 성격이 내성적이라 사랑을 잘 표현을 못해 하마터면 빙리와 헤어질 뻔했다.

두 주인공은 대조적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생각이 있었다. ‘결혼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성격이나 신분이 대조적인 커플도 이 한 가지는 공유해야 하는 법이다.

[오만과 편견]은 당시 영국의 결혼 풍속도를 고스란히 담았다. 우리 전통문화와 마찬가지로 매파(媒婆)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정한 절차를 따랐다. 또 계급·신분이 중시됐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 중시되는 프러포즈 문화가 당시 영국에 있었다. [오만과 편견]은 조선이나 대한민국의 사랑·결혼 풍속도와 다르다. 오늘날 영국의 풍속과도 다르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공감을 선사한다.

제인 오스틴은 보수당인 토리당(Tory Party)의 지지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오만과 편견] 등 그의 작품은 당시 부조리를 은근히 비꼬았지만 신랄하지는 않다.

‘오만과 편견’은 사랑에만 장애물이 되는 게 아니다. 학벌이나 지연, 남녀 차이에 대한 오만과 편견은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를 빼앗는다. ‘오만과 편견’은 국제 관계나 다른 나라 문화를 바라볼 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남북통일 과정에서도 ‘오만과 편견’은 뛰어넘어야 할 장벽이 아닐까.

※ 김환영 - 중앙일보 지식전문기자.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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