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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영원한 오빠’ 남진의 반백 년 가수 인생 

“중요한 것은 인연과 만남, 하루하루 소중히 여겨야”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1965년 데뷔 후 50여 년 동안 정상 지키는 열정의 화신… 콘서트 한 달 전부터는 외출도 삼갈 정도로 준비 또 준비

월간중앙은 2018년 창간 50년을 기념해 대한노인회중앙회와 공동으로 ‘同行-고령사회로 가는 길’을 연재했다. 월간중앙과 대한노인회중앙회는 2017년 8월을 기점으로 고령사회(전체 인구의 14% 이상이 만 65세 이상)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노인문제를 12차례에 걸쳐 점검해 봤다. 월간중앙과 대한노인회중앙회는 2019년에는 ‘同行2-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를 통해 우리 사회 여러 분야의 ‘장인(匠人)’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남진이 12월 8일 의정부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남진의 2018 청춘콘서트- 의정부’에서 특유의 열정적인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남진은 “지금도 공연을 앞두면 고시생처럼 지낸다”고 했다.
'영원한 오빠’ 남진(73·본명 김남진)을 만난 건 12월 6일 오후. 남진은 연말 마지막 콘서트인 ‘남진의 2018 청춘콘서트-의정부’ 이틀 전 월간중앙 인터뷰에 응했다. 남진은 TV 출연보다 콘서트를 선호한다. 중·장년 팬들의 추억을 되새겨 주기 위해서다. 2018년에도 인천·천안·성남·광주·전주 그리고 의정부에서 팬들과 만났다.

남진과의 인터뷰는 ‘동네 칼국수집’에서 진행됐다.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한 주상복합아파트에 사는 남진은 당초 인터뷰 장소로 자신의 집 근처 커피숍을 택했다. 점심시간 직후라 그런지 커피숍이 붐비자 남진은 급히 장소를 분식집으로 변경했다.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남진은 “조용하면 됐지, 장소가 뭐 그리 중요하요”라며 팔을 잡아 끌었다. 소탈하고 대중적인 이미지 그대로였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칼국수집에 들어오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남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는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젊으시네요”라고 인사했고, 남진은 미소와 목례로 화답했다. 아주머니는 함께 온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선을 ‘영원한 오빠’에게 고정했다.

“50년 이상 인기가수로 살아왔는데 돌아보면 내 자신에 대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젊은 시절, 잘나갔던 시절, 때로 열심히 하지 않고 자만했던 게 후회된다”며 “그래서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려 한다. 하루에 10시간 정도 음악을 듣고 연습한다”고 말했다.

책만 보면 머리 아픈데, 노래 들으면 기분 좋아져

이름 석 자 앞에 늘 ‘영원한 오빠’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럴 때 기분이 어떠세요?

“제가 듣는 그 어떤 말보다 기분이 좋죠. (무대에서 사회자가) ‘가요계의 황제’ ‘가요계의 OO’ 같은 수식어를 붙이면 저는 ‘다음부터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런 자리에 올라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요. 대신 우리 가요계에서 처음으로 ‘오빠’라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 접니다. 저를 10~20대 때부터 봐 오신 아주머니들이 지금도 객석에서 ‘오빠’라고 부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특히 젊은 아가씨들이 그렇게 부르면 기분이 너무 좋고요(웃음).”

포털사이트 등에는 1946년생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실제 나이와 같습니까?

“(운전면허증을 내밀며) 1945년생 해방둥이에요. 왜 46년생으로 돼 있지? 데뷔할 때 46년생이라고 말했나?(웃음)”

반백 년 넘도록 한결같은 모습으로 무대에 서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남진 콘서트는 여전히 티켓 파워가 막강하고요.

“데뷔한 지 5~6년쯤 된 것 같은데 벌써 53년이라니…, 저도 믿기지가 않아요. 철 들자 막 내리는 게 아닌지 아쉬움도 있고요. 다행인 것은 요즘이 가수 데뷔 후 가장 만족스럽다는 겁니다.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흥분과 설렘이 있어요. 70세가 넘은 나이에 무대에 설 수 있고, 또 제가 무대에 선 모습을 보면서 환호해 주는 팬들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제5대 국회의원 출신인 부친이 지역의 거물이셨던 걸로 압니다. 반대가 무척 심했을 텐데 어떻게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나요?

“당시는 집안형편을 떠나 연예인이 되는 걸 집안의 망신으로 생각했던 시절입니다. 특히 딸 가진 부모들은 더했고요. 어머니가 교육자 출신이라 유독 공부를 많이 시키셨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 선생님들이 제 가정교사였다면 알 만하죠? 그럼에도 (제 인생은) 정반대였어요. 그게 운명인가 봐요. 책만 보면 너무 머리가 아픈데, 음악만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 어린 나이에 음악 듣고, 쇼나 영화 보고 그랬다니까요. 보기만 했나요? 보고 나면 집에 와서 따라 했죠.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많이 불렀던 남석훈씨를 특히 좋아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우리 가요보다는 팝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1945년 9월 27일 남진은 [목포일보] 발행인이었던 김문옥과 어머니 장기순 사이의 3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문옥은 전남 지역 세금 납부 1위의 거부(巨富)이자 야당계의 거물이었다. 신익희·조병옥 등이 호남 지역에 방문할 때면 김문옥의 집에 머물곤 했다. 남진은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미제 포드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당시에는 전남 지역을 통틀어 승용차가 한두 대뿐이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친구들과 간 클럽… “학생 노래 한 번 해봐?”


▎남진이 2014년 4월 8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신곡 ‘파트너’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거수경례로 인사하고 있다.
월남전에도 참전하셨죠?

“68년에 해병대에 지원(志願) 입대했고, 69년 월남에 갔다 71년에 귀국했어요. 데뷔 후 인기가 절정일 때 입대한 거죠. 극에서 극으로 간 겁니다. 전쟁터에 가보니까 처음에는 촬영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더라고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머문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죽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밑거름이 됐던 시간이 아닌가 싶어요.”

만 20세 때 데뷔하셨잖아요? 어떤 계기로, 어떤 분의 도움으로 데뷔하셨나요?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서울 우이동에 놀라갈 일이 있었어요. 술 한잔하고 걸어가는데 번쩍거리는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들어가 보니 클럽 같은 곳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목포방송 전속가수였던 친구가 지배인에게 부탁해서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는데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취한 김에 저도 한 번 해보겠다며 무대에 올라가서 팝송 두 곡을 불렀는데 난리가 난 겁니다. 잠시 후 밴드마스터가 제가 다가오더니 ‘목소리가 참 특이해. 학생, 노래 한 번 해볼 생각 없어?’라고 물으며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곧바로 가수가 되신 건가요?

“전화번호를 건네주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죠. 그런데 몇 달 뒤 진짜 전화가 오더라고요. 을지로 명보극장 아래 파출소 건물 2층 다방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한참 망설이다 나갔는데 한동훈 선생님이라는 유명한 작곡가가 나오신 겁니다. 결국 그분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나가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등록만 하고 안 나가려 했는데 학원에 다니는 여학생 한 명이 진짜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 여학생을 만나려면 학원에 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학원에 다녔고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남진은 65학번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서 진학했지만 작곡가 한동훈을 만난 뒤 삶의 이정표가 바뀌었다. 데뷔곡 ‘서울의 플레이보이’에 이어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가 잇달아 히트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남진은 66년 [형수]를 시작으로 [가슴 아프게] [기러기 남매] 등 영화도 50여 편 찍었다.

지금까지 발표하신 음반과 곡은 얼마나 될까요?

“1000곡쯤 돼요. 음반은 100장 정도?”

어떤 스타일의 음악으로 시작하셨나요?

“저는 트로트를 좋아하다 가수가 된 게 아니잖아요. 폴 앵카, 닐 세다카,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팝 가수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냇 킹 콜의 노래를 많이 불렀던 최희준 형님의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맨발의 청춘’ 같은 팝 스타일의 곡들을 모창(模唱)하기 시작했고요. 전부 팝 스타일의 가요들이었거든요. 그런데 당시에는 최희준 형님의 전성시대라 저는 인기가 없더라고요. 사람들에게 모창 가수로만 인식됐던 겁니다.”


▎1960년대 후반 함께 화보를 찍은 남진과 최희준.
‘운명’을 만들어준 은인 김중순·박춘석

오늘날 ‘영원한 오빠’ 남진이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그러다 우연히 작사가 김중순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분이 저한테 트로트를 부르게 하시더라고요. 세 곡을 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트로트였거든요. 트로트가 싫었던 저는 연습을 하다 말았는데 (김중순 선생님은) 꼭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음반이 나왔는데 제가 밀었던, 좋아했던 ‘연애 영 번지’라는 곡은 금지곡이 돼버린 겁니다. 그 시절만 해도 툭하면 금지곡이었잖아요? 그래서 좌절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오셔서 용돈을 두둑하게 주시더니 ‘남진아, 난 그 노래가 좋더라. 한 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격려하셨어요. 그 노래가 ‘울려고 내가 왔나’였어요. ‘울려고 내가 왔나’가 대박 나서 가수가 된 겁니다.”

그 외에도 특별히 아끼시는 곡이 있으시겠죠?

“‘울려고 내가 왔나’로 대박을 터뜨렸는데 그 이듬해인 66년 더 큰 대박이 났어요. 우리나라 최고 작곡가이신 박춘석 선생님이 ‘가슴 아프게’를 주신 거죠. 그 노래로 인해 제가 가수로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이후로 박 선생님과 콤비가 됐고 행운이 많이 찾아왔죠. 사실 당시 가수들 중에서 저만큼 빠른 노래를 부른 사람은 없었어요. 왜냐면 저는 원래 트로트가 아닌 팝을 좋아해서 가수가 됐기 때문이죠. 빠른 곡들 중에는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님과 함께’, 슬로 곡들 중에는 ‘미워도 다시 한 번’ ‘빈잔’ 등이 특히 가슴에 남습니다.”

남진은 71년 전역 후 ‘마음이 고와야지’를 발표했고,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어 72년에 ‘님과 함께’로 톱가수 반열에 올랐다. 남진은 트로트로 팬들을 사로잡은 나훈아와 함께 70년대 가요계를 쥐락펴락했다.

히트곡 ‘나야 나’가 최근 방영 중인 KBS 드라마 [비켜라 운명아]에 OST(Original Soundtrack)로 불리며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진짜 깜짝 놀랐어요. 그 노래를 부른 지 10년쯤 됐거든요. 빠른 템포 노래는 생명이 짧아요. 그러니 더 놀랐죠. 양인자 선생님이 가사를 써주신 곡이라 작품성은 대단한 반면 대중성이 좀 약하지 않나 싶었는데, 결국 좋은 작품은 빛을 보네요. (…) 때로는 깃털처럼 휘날리며 때로는 먼지처럼 밟히며 아자 하루를 살아냈네 나야 나야 나. (…)”

가족 이야기를 궁금해 하시는 팬들도 많습니다.

“저는 목포, 집사람(강정연)은 부산 동래 출신이니 영호남 화합이죠(웃음). 집사람과 사이에 딸 셋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았어요. 큰놈하고 아들은 출가했는데 딸 둘은 아직…. 갑갑합니다.(웃음)”

‘남진’ 하면 ‘나훈아(본명 최홍기)’입니다. 두 분 사이에 에피소드도 적진 않을 텐데요.

“아마 영화에도 두 편 정도 같이 출연했을 걸요? 정확히 기억하는데 훈아씨를 처음 본 것은 68년입니다. 저와 함께 한동훈 선생님 학원에서 노래를 시작했던 친구(작곡가)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훈아씨를 데려왔더라고요. 자기 제자라면서 소개하는데 어린 친구가 깡마른 체구에 눈썹도 새카만게 이국적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저와는) 나이 차이가 좀 나더라고요. 아마 훈아씨는 1951년생일 거예요. (조)용필이도 (훈아씨를) 너무 잘 알더라고요. 언젠가 용필이가 ‘형님, 제가 부산 (야간업소)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데요’라며 훈아씨가 자신보다 한 살 아래라고 했습니다.”


▎영화 [기러기 남매](1971)에 함께 출연한 남진(오른쪽)과 나훈아. 반항아 느낌이 물씬 풍긴다.
“어려울 때마다 좋은 사람 만난 게 큰 힘”

나훈아는 TV 등에는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콘서트 무대에만 서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세요?

“자기 취향이죠. 훈아씨는 콘서트만 선택하는 것 같아요.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저도 자주 나가는 편은 아니지만, 전국적으로 팬들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TV니까 가끔은 출연합니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팬들 덕분이니 팬들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라디오를 좋아합니다. 라디오에 나가면 추억도 생각나고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데뷔 반백 년이 지났습니다. 가장 큰 보람 또 가장 큰 후회는 무엇인가요?

“후회라면 아까도 얘기했듯이 인기에만 취해서 더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겁니다. 훈련도 하고 연습도 하고 공부도 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앞으로라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고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팬들이에요. 팬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나야 나’ 같은 좋은 곡으로 보답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 가장 큰 보람은 팬입니다.”

한 분야에서 반백 년 이상이라면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장수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인생은 파도라고 하잖아요? 왜 굴곡이나 곡절이 없었겠어요? 공백도 있었고 활동이 저조할 때도 있었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어요. 돌아보면 인연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우연히 클럽에 갔다 노래를 부르게 됐고, 그걸 계기로 김중순 선생님을 만났잖아요? 김중순 선생님을 만나 앨범을 냈고, 그 인연으로 박춘석 선생님을 만나서 그 시절 최고의 히트곡들을 쏟아냈어요. 결국 만남이고 인연이에요. 좋은 인연과 만남이 오늘날 저를 있게 해준 것 같아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도 계시겠죠?

“방송국 프로듀서, 신문사 기자들 이런 분들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TBC 황정태 PD를 만난 것도 결정적이었어요. 당시 그분이 대한민국 최고 쇼 PD였는데 저를 굉장히 예뻐해 주셨어요.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고 하는데 그분이 제 장점에 또 장점을 씌워서 스타로 만들어 주셨어요. 얼마 전 돌아가신 MBC 전우주 PD도 저를 정말 많이 아껴 주셨어요. 세상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젊어서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인연과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것 같아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돌파해 나오셨나요?

“혼자 힘으로는 안 되더라고요. 제 경우에는 좋은 사람을 만난 게 큰 힘이 됐어요. 그 만남은 누군가 주시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사람한테 속아도 보고 이용도 당해 봤죠. 그런데 어려울 때마다 꼭 누군가를 만나게 됐어요. 그 만남을 통해 돌파구를 찾게 됐고요. 그러나 그 이전에 사람은 집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이겨낼 수 있죠.”


▎발표하는 앨범·곡마다 히트를 쳤던 1970년대 초 남진의 모습.
“더 늦기 전에 사랑 주는 훈련 시작해야”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는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나이가 드니까 사랑을 더 받고 싶어지더라고요(웃음). 섭섭함도 많아지고, 어린애가 된다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랑을 받기보다 줘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손자가 있는데 더 많이 줘야죠. 더 늦기 전에 사랑을 주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아요. 천성보다 무서운 것이 습관이라고 하잖아요? 좋은 친구,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하나쯤 있으면 더 좋고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인기를 누렸던 남진. 그 역시 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을까. 이 대목에서 남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현재 용인의 새에덴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남진은 10년 전부터 신앙생활에 깊이가 더해졌다고 했다. “3년 전부터는 기도로 살고 있어요. 누구에게도 말할 데가 없으면 기도하곤 합니다. 부부라고 해서 다 말할 수 있나요? 오히려 더 어려운 면이 있어요. 그럴 때 기도합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안마를 좋아합니다.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안마를 받아요. 그리고 수영을 자주 합니다. 그래도 나이 앞에 장사는 없어요. 운동한다고 해서 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발 한 발 떠날 때로 가는 거죠. 그걸 느껴요.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옛날에는 시간이 안 가서 참 답답했는데….”

모레(12월 8일) 콘서트 여시잖아요? 반백 년 가수로 살아오셨는데 지금도 설레시나요?

“더합니다. 옛날에는 당연한 걸로 알았지만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아니까 더 설레죠. 젊었을 때는 놀다가도, 싸우다가도 무대에 올라가곤 했는데 지금은 컨디션도 목도 기분도 다 좋아야 하니까 콘서트 앞두고는 굉장히 조심합니다. 팬들은 저를 보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들여 오시는데 저 역시 최선을 다해서 맞이해야죠. 대충 있다가 올라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고시생(考試生)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콘서트 한 달 전부터는 외출도, 사람 만나는 것도 조심합니다. 옛날에 이랬어야 하는데 말이에요.(웃음)”

삶의 좌우명이나 신조가 궁금합니다.

“지금도 (인생을) 잘 모르겠습니다. 가수로 반평생 이상 살아왔는데도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팬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가수로 남고 싶어요. 사실 나이가 들수록 여러 면에서 힘들고 어렵거든요. 그럴 때마다 기도로 해결하려 합니다. ‘해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열심히 노래하고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주위의 친한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가는 날까지 잘하다 떠나게 해주십시오.’”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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